中文史哲/古代官制

3. 오대십국(五代十國)의 관제

마장골서생 2012. 6. 5. 12:26

3. 오대십국(五代十國)의 관제

 

    오대십국(五代十國)[907-979년]은 당과 송의 양대 왕조를 연결하는 다섯 개의 작은 조정과 열 개의 할거 정권이다. 오대(五代)는 후량(後粱)、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를 가리킨다. 후당이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한 것 외에 그 나머지는 도읍이 모두 개봉(開封)이었다. 십국(十國)은 오(吳)、남당(南唐)、오월(吳越)、민(閩)、남한(南漢)、초(楚)、남평(南平)、전촉(前蜀)、후촉(後蜀)、북한(北漢)을 가리킨다. 북한이 북방에 있었던 것 외에 그 나머지 아홉 나라는 모두 남방에 있었다.

 

    오대의 관직은 대체로 당제를 따랐다. 삼사(三師)와 삼공(三公)은 겸직이었고, 행정관(行政官)은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재상으로 삼았다. 당대에 특히 고종(高宗) 이후로 재상이 되는 자는 반드시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동중서문하평장사”를 겸하였는데, 직함이었을 뿐 정식 관직의 명칭은 아니었다. 오대 후진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정품이 되었고, 그래서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수뇌로 하는 재상 체재가 정식으로 확립되었다. 삼성육부(三省六部)、어사대(御史臺)、제경감(諸卿監)의 설치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당 왕조처럼 완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당 후기 환관의 권력은 매우 비대했었지만 오대의 환관 세력은 약화되었다. 후량에서는 환관이 추밀(樞密)을 관할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추밀원(樞密院)을 숭정원(崇政院)으로 고쳤다. 원사(院使)를 두고 사인(士人)을 임명하였으며, 황제의 고문을 맡았다. 후당에서는 추밀원으로 회복하고 원사와 부사(副使)를 두었다. 후당 장종(莊宗) 때 무신(武臣)을 추밀사(樞密使)로 임용한 때문에 문사(文事)는 중서(中書)에 맡기게 되었고, 무사(武事)는 추밀에 맡기게 되었다. 추밀사는 재상의 직권을 나누었기 때문에 “추상(樞相)”이라는 호칭이 있었다. 오대는 “사(使)”를 관명(官名)으로 하는 현상이 상당히 보편적이었는데, 《오대회요(五代會要)》의 기록에 의하면 30여종이 있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삼사사(三司使)였다. 당대에는 재정을 관리하는 사직(使職)이 무척 많았는데, 순종(順宗)과 헌종(憲宗) 때 한차례 호부(戶部)、탁지(度支)、염철전운(鹽鐵轉運)의 3사를 한 개 부문으로 합쳐 “삼사(三使)”라고 한 적도 있었다. 대체로 삼사사에 임명되는 자는 동시에 상(相)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계상(計相)”이라고 하였다. 후량은 건창원(建昌院)을 설치하여 재정을 관할했는데, 판건창원(判建昌院) 혹은 건창궁사(建昌宮使)를 두었다. 후에 조용사(租庸使)로 바뀌었다. 후당 때 삼사사로 회복하였고, 재정 대권 역시 삼사로 돌아갔다. 삼사사가 계상이 되어 중서、추밀과 함께 중시되었다. 지방에서 중요한 것은 절도사(節度使)이다. 절도사는 모두 “아병(牙兵)”이라고 부르는 근위병을 가지고 있었다. 아병은 도압아(都押衙)[혹은 아(牙)]、압아(押衙)가 이끌었다. 조대(朝代)의 교체 중에 절도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방은 여전히 주와 현의 두 등급으로 나누었다. 주에는 자사를, 현에는 현령을 두었다. 중요한 도시에는 부(府)를 설치하였다. 군사요지에는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었다. 이밖에도 일부 지방에는 군(軍)이 있었는데 일급 행정기구가 되었다.

 

    오대(五代)는 군대를 나누어 방진(方鎭)에 보냈고, 수도에는 금군(禁軍)만을 이용하였다. 후량을 건국한 주온(朱溫)은 아병을 시위마보군(侍衛馬步軍)으로 바꿔 조직하고 6군(軍)으로 정하였다. 6군의 명칭은 여러 차례 변하였다. 육군을 통솔하는 자를 시위친군도지휘사(侍衛親軍都指揮使)라고 하였다. 또 친군(親軍)의 하나인 청자도(廳子都)[도(都)는 군사 단위임]가 있어 막사 앞의 숙직을 책임졌는데, 도장(都將)과 도두(都頭)가 이끌었다. 후당 또한 중앙 금군의 일종인 시위친군(侍衛親軍)을 두고, 시위친군마보도지휘사(侍衛親軍馬步都指揮使)가 총괄하였으며, 그 아래에 시위마군도지휘사(侍衛馬軍都指揮使)、시위보군도지휘사(侍衛步軍都指揮使)를 각각 두고서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을 각각 이끌었다. 후진은 6군의 제위(諸衛) 제도를 없애고 금군이 완전히 시위친군(侍衛親軍) 계통을 접수하고 시위마보군도지휘사(侍衛馬步軍都指揮使)와 시위마보군도우후(侍衛馬步軍都虞候)가 통솔하였다. 후주 때 금군은 또 전전사(殿前司)와 시위사(侍衛司)의 두 계통으로 나누었다. 전전사는 전전제반(殿前諸班)[궁궐 앞의 호위를 책임지는 모든 반]을 관할하였다. 전전제반은 기존의 금군 가운데 선발한 정예로 조직하는 동시에 나라 안의 용사를 모집하여 충당하기도 하였다.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부도지휘사(副都指揮使)、도우후(都虞候) 등의 관원을 두었다. 시위사에는 시위친군마군(侍衛親軍馬軍)、시위친군보군(侍衛親軍步軍)이 있었고, 도지휘사(都指揮使)、부도지휘사(副都指揮使)、도우후(都虞候)를 두어 분담하여 관장하였다. 금군을 총괄하여 이끌고, 각 군을 출정시키는 최고 지휘관을 통솔하는 것은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이었다. 조광윤(趙匡胤)이 바로 이 직무로 병변(兵變)을 책동하고 황제로 추대되어 후주를 이어 송조(宋朝)를 세웠던 것이다.

 

    십국(十國)의 관제도 비교적 당조(唐朝)를 모방하였다. 각 국은 일반적으로 모두 성(省)、대(臺)、사(寺)、감(監) 등의 기구를 두었고, 관명(官名)에는 평장사(平章事)、상서(尙書)、시랑(侍郞)、추밀사(樞密使)、한림학사(翰林學士)、어사(御史)、낭관(郎官) 등이 있었다. 어떤 나라는 승상을 두기도 하였고, 어떤 나라는 승상이라 부르지 않고 참지정사(參知政事)、참상부사(參相府事)라고 불렀다. 지방의 주와 현에는 여전히 자사와 현령을 두었고, 위에는 절도사 등도 있었다.

 

    총괄해서 말하면 오대십국(五代十國)은 대부분 방진 출신들이 일으킨 것이다. 당시에 “천자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자가 마땅히 그것을 맡았다(天子, 兵强馬壯者當爲之)”[《구오대사(舊五代史)․안중영전(安重榮傳)》]라는 한마디로 이런 상황을 개괄 할 수 있다. 새로운 왕조의 황제 및 그 관료의 골간은 종종 옛날에 가장 큰 병권을 가졌던 절도사와 그들의 막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