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天有 著 / 李商千 譯, <중국고대관제>, 학고방, 2006.
3. 남조(南朝)의 관제
남조는 동진 이후로 양자강 하류의 동남 지역으로 지금의 江蘇省 지역인 강좌(江左)에 안주한 네 개의 왕조, 즉 송(宋)[420-479년]、제(齊)[479-502년]、양(梁)[502-557년]、진(陳)[557-589년]을 가리킨다. 형식상으로 보면 남조의 관제는 기본적으로 위진(魏晉)의 제도를 연용했기 때문에 《수서(隋書)․백관지(百官志)》에서 “위진이 뒤를 이었는데, 대체로 (동한 관제와) 같았다. 송나라와 제나라에 이르러서도 바꾸지 않았다. 양 무제는 죽을 때까지 대부분 제나라의 옛 것을 따랐다. 진나라는 양나라를 이었지만 옛 제도를 버리지 않았다[魏晋繼及,大抵略同(指與東漢官制). 爰及宋齊,亦無改作. 梁武受終,多循齊舊. 陳氏繼梁,不失舊物.]”고 하였다. 하지만 관원의 실제 권력의 행사에서 보면 분명한 변화가 있다. 변화가 가장 큰 것은 중서성(中書省)이다. 유송(劉宋) 이후로 중서감(中書監)、영(令)은 비록 문벌사족 출신의 관원들이 맡았으나 실권은 점차 중서사인(中書舍人)에게로 옮겨갔다. 이것은 남조 건국의 몇몇 황제는 한문(寒門) 출신의 무장(武將)이어서 사족(士族) 출신의 존관(尊官)에 대해 지휘할 방법이 없었고, 이 때문에 한문 출신에다 지위가 비교적 낮은 중서사인을 임용하여 심복의 임무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송、제、양、진 네 개 왕조의 중서사인을 “은행(恩幸)”이라 하고 매우 높은 권위를 지녔다. 중서사인은 종종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급사중(給事中)을 겸임했는데, 이렇게 중서(中書)、문하(門下) 두 성(省)은 모두 “은행”의 관리 속에 있었다. 그래서 청조(淸朝)의 학자 조익(趙翼)은 남조 관제의 특징은 “출신이 미천한 사람들이 기밀을 장악하였다(寒人掌機要)”고 개괄했던 것이다[《이십이사찰기(卄二史札記)》권8]. 이 특징은 당시 사회에서 사족(士族)들의 쇠락과 한족(寒族)들의 궐기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그 다음은 문하성(門下省)이다. 문하성의 장관은 여전히 시중(侍中)이었다. 송 문제(文帝) 원가(元嘉) 초년에 시중의 지위는 “한 시대의 으뜸(冠冕一時)”으로(《송서(宋書)․은경인전(殷景仁傳)》) 권세가 대단히 중하였다. 이후로 점차 쇠퇴하면서 대권에서 밀려났다. 남조는 또 문하성에서 집서성(集書省)을 분리하여 세우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장관으로 삼고, 그 아래에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원외산기상시、산기시랑、급사중、봉조청(奉朝請) 등을 두었다. 문하성의 주요 임무는 “천자의 직인과 문서를 봉하는 일(封璽書)”인데, 조칙을 하달할 때 문하성의 심의를 거쳐 동의를 표시한 후 상관되는 기구에 제출하여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집서성은 “성의 여러 상주문 문서 가운데 그 의미가 특별한 것은 사안에 따라 심사를 했는데(省諸奏聞文書,意異者,隨事爲駁)”(《수서(隋書)․백관지(百官志)》), 다시 말해서 천자에게 올라가는 문서는 집서성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문하성이건 집서성이건, 남조의 황제는 결코 급사중、산기상시에게 실권을 내주지는 않았다. 실권을 장악한 것은 원외산기시랑과 급사중이었다. 이 두 명의 직위는 종종 중서사인이 겸임했기 때문에 문하성의 대권도 “은행”의 손으로 돌아갔다. 곧바로 수조(隋朝)에 이르러서야 집서성이 비로소 문하성으로 들어가 합쳐졌다.
남조의 상서성(尙書省) 기구설치에 있어 아주 큰 변화는 없었다. 성(省) 안의 관리는 모조리 문벌 사람들로서 조정의 고관들이었다. 중서、문하 두 성은 정책의 결정、직능의 심의를 관장하는 상황 하에서 상서성의 권력은 약화되어 더 이상 면전에서 상주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정책 결정의 중추적인 의정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다만 구경(九卿)의 영수라는 신분으로 일상적인 행정 사무를 처리할 뿐이었다. 그러나 상서성은 결국 내외 행정 사무의 집중처여서 상서성령(尙書省令)、복야(僕射)는 지위가 더욱 존귀하였고, 제조(諸曹)의 상서(尙書)는 “각기 늘 하는 임무가 있었으며(各有恒任)”, 황권이 약화되거나 새 군주가 황위를 이었을 때는 황권 아래의 권력중심은 늘 상서성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남조의 관제는 위진과 다른 점도 있다. 아래에 구분해서 서술할 것이다.
유송(劉宋)의 관직 설치가 대략 진(晉)나라와 같았다고는 하나 설치한 장군의 명호는 동진보다 훨씬 번잡하였다. 장군 칭호를 가졌다고 해서 꼭 군대를 이끌지는 않았고, 중앙 요직 및 지방 군정 장관이 통상 각종의 장군 직함이 있었으며, 장군 칭호는 비교적 높은 직위를 나타내는 일종의 표지가 되었다. 중앙에서 각지로 파견하는 각 진의 장수인 진장(鎭將)은 사족(士族)을 임용하지 않고 제왕(諸王)들이 맡도록 바꾸었는데, 황제는 바로 자신의 측근을 파견하여 서명을 관장하는 관리인 전첨관(典簽官)으로 채우고, 진장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도록 하거나 분담하도록 하는 동시에 진장의 거동을 감시하였다. 이 때문에 장수의 일에 최종 서명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첨수(簽帥)”라고 불렀다. 지방의 설치 측면에 있어 유송 왕조는 많은 교군(僑郡)、교현(僑縣)을 없애버렸다. 소수민족 지역에 중랑장、교위 등의 관을 두었는데, 예를 들면 평월중랑장(平越中郞將)、서융교위(西戎校尉)、남만교위(南蠻校尉)、영만교위(寧蠻校尉) 등과 같은 것이다. 관원을 구분하는 등급에서는 관품(官品)[구품제(九品制)]와 녹질(祿秩)[석(石)]이 병용되었지만 고저가 종종 서로 호응하지 않아 비교적 혼란스러웠다.
제조(齊朝)의 관제는 변화가 더욱 적었다. 《南齊書․百官志》에 “제나라는 송나라의 선양을 받고 나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 기존의 기준을 존중하고, 기존의 관직도 그대로 유지하며, 변화시키거나 폐지하는 것이 없었다(齊受宋禪,事尊常典,旣有司存,無所偏廢)”고 하였다. 단지 관을 설치함에 있어 유송보다 더 많았을 뿐이다. 관직의 서열인 관질(官秩)은 구품제(九品制)를 사용하였으나 주(州)의 자사는 여전히 이천석(二千石)으로 불렀다.
양조(梁朝)의 관제는 유송(劉宋)、소제(蕭齊)에 비하여 변화가 많다. 양 무제는 관리를 선발하는 데에 종실(宗室)、사족(士族)、한족(寒族)을 병용하였고, 관원의 수량을 대대적으로 증가시켰다. 현저한 변화에는 네 가지 방면이 있다. 첫째, 양 무제는 송(宋)、제(齊)가 전첨관(典簽官)을 사용하여 제왕(諸王)들을 감시했는데, 권력이 비록 황제의 손에 집중되었지만 골육이 서로 해치며 정국이 안정되지 못한 것을 거울삼아 전첨관이 제 왕들을 감시하는 체제를 취소하고, 제 왕들로 하여금 실권을 장악한 진장(鎭將)이 되게 하였다. 두 번째, 제 경(卿)들은 춘하추동에 따라 구분하는데 모두 12경이 있었다. 춘경(春卿)은 태상경(太常卿)、종정경(宗正卿)、사농경(司農卿)이다. 하경(夏卿)은 태부경(太府卿)、소부경(少府卿)、태복경(太僕卿)이다. 추경(秋卿)은 위위경(衛尉卿)、정위경(廷尉卿)、대장경(大匠卿)이다. 동경(冬卿)은 광록경(光祿卿)、홍려경(鴻臚卿)、대주경(大舟卿)[원래 도수사자(都水使者)]이었다. 세 번째, 궁직(宮職) 가운데 대장추(大長秋)는 환관들을 관장하였다. 태자궁(太子宮)에는 동궁상시(東宮常侍)를 증설하고 관례대로 산기상시(散騎常侍)가 겸직하였다. 네 번째, 직무와 관직의 서열이 번잡하였다. 양조(梁朝)는 왕 이외에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다섯 등급의 작위제도를 시행하였다. 관원의 등급은 품급(品級)과 녹봉의 위계를 병행하였다. 천감(天監) 7년[508년]에 또 백관의 9품을 18반(班)으로 정했다. 예를 들면 승상、태위 등을 18반으로, 상서령은 16반으로, 중서감(中書監)은 15반으로, 어사중승은 11반으로, 군의 태수는 10반으로, 현령(縣令)、장(長)은 7반으로 정했던 것과 같다. 무직(武職)인 장군의 호칭은 125종이고, 10품、24반으로 나누었다. 10품에 들지 않는 장군은 별도의 8반으로 나누었고, 명호(名號)가 도합 14종이 있었다. 보통(普通) 3년[529년]에 수정을 거쳐 제정된 것을 반포했는데, 대체로 장군의 호칭은 242개, 34반이었다. 이런 반은 봉록(俸祿)、관직(官職)과 별로 관계가 없었고, 관원 승강(升降)의 순서가 될 뿐이었다.
진조(陳朝)의 관제는 양조(梁朝)를 따랐기에 변동이 대단히 적었으며, 품계를 9품으로 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상서령을 1품으로, 중서감을 2품으로, 시중、산기상시、어사중승은 3품, 군의 태수는 5품에서 7품까지로, 현령(縣令)、장(長)은 8에서 9품까지로 한 것과 같았다.
이밖에 남조의 직관에는 청탁(淸濁)의 구분이 있었다. 당시에 칭했던 청관(淸官)、탁관(濁官)은 후세의 청관(淸官)、탐관(貪官)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청관은 직무가 중요한 관위(官位)를 가리켰고, 탁관은 무직(武職)이나 직무가 번잡한 관위(官位)를 가리켰다. 탁관에서 청관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관원들이 소망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직을 청탁으로 구분하는 현상은 북조(北朝)에도 똑같이 존재했었다.
'中文史哲 > 古代官制' 카테고리의 다른 글
四、隋唐五代十國의 官制 - 1. 隋朝의 관제 (0) | 2011.03.10 |
---|---|
4. 북조(北朝)의 관제 (0) | 2010.08.03 |
三. 三國兩晉南北朝의 官制 2. 兩晉의 관제 (0) | 2009.10.13 |
三. 三國兩晉南北朝의 官制 1. 삼국의 관제 (0) | 2009.09.16 |
二. 秦漢의 官制 4. 東漢의 官制 (0) | 2009.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