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징수와 공물 대권의 장악
“천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었기 때문에(普天之下, 莫非王土)” 황실이 필요로 하는 일체의 먹을 것․입을 것․쓸 것 등을 모두 전국 각지에서 들여왔는데, 이를 징수라는 의미의 “채판(采辦)”이라고 하였다. 명대 주체(朱棣)의 영락 연간부터 환관을 파견하여 징수하기 시작하면서 갈수록 심각한 지경에 다다른다. 환관들은 징수라는 이름을 빌어 재물을 마음대로 긁어모았다. 인종(仁宗) 홍희(洪熙) 연간에 환관 마기(馬麒)라는 자는 황명을 속여 가며 교지(交阯)라는 곳에서 금은이나 구슬과 향료를 징수하는 바람에 인종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인종은 “짐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朕安得有此言)”라고 하면서도 마기의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선종(宣宗) 선덕(宣德) 6년(1431)에 환관들이 외부에서 공무를 처리하면서 징수라는 말을 빌려 재물을 긁어모은 일로 완거대(阮巨隊)․원기(袁琦) 등 수십 명의 환관이 죽음을 당하였다.
명대 환관들에게는 징수하는 일 외에도 공물(貢物)을 호송하는 직무가 있었다. 호송하는 물품 중 하나는 ‘채판’이었고 둘째는 ‘세판(歲辦)’이었다. 세판이라는 것은 각지에서 매년 진상해야 할 물품으로, 대부분이 각지의 특산품이었고 게다가 진상할 물품의 수량도 매우 많았다. 예를 들어 남경의 공물선의 경우 매실․비파․양매를 각각 8척의 배에, 죽순을 4척의 배에, 말린 전어를 7척의 배에, 연근을 5척의 배에, 생강을 6척의 배에 실었다고 한다. 이런 공물들의 호송은 모두 환관들이 책임을 졌다. 환관들은 공물을 빙자하여 양을 늘렸고, 또 공개적으로 강탈하기도 하였다. 공물을 빙자하여 양을 늘렸다(假託虛增) 함은 바로 “거룻배로 물품을 운반하는 틈에 물품을 부풀리고 배를 많이 확보하는 데에 힘써 자신들의 사욕을 채웠다.(撥船之際, 虛張物品, 務求多船, 以濟己私.)”(《엄산당별집․중관고10》)는 뜻이다. 바로 여분의 배에 자신들의 개인 화물을 실었던 것이다. 환관들은 호송하는 배에 관가의 인부들을 강제로 동원하면서 돈까지 갈취하였다. 예를 들어 남경에서 어류를 운송하여 출하할 때 차와 과일 비용으로 은 120량을, 뱃사람들에게는 은 200량을 뜯어내었다고 한다.《만력야획편․남경공선(南京貢船)》에는 “옛날에 금릉 성 밖 강가에 옛날에 세운 전어 창고가 있었는데, 고기를 잡아올 때마다 환관들이 나타나 조사하고 온갖 명목으로 빼앗다시피 해서 어부들은 물론 그 지방에까지 큰 해가 되었다.(金陵城外臨江, 舊設鰣魚廠, 每打魚時, 內官出視, 科索百端, 大爲漁戶及地方之害.)”라는 기록이 있다.
조정에서는 수시로 별궁이나 이궁 그리고 능묘를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목재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치스러운 제왕의 생활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진주의 사용량도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진주를 채집하는 행위도 있게 되었다. 벌목과 진주채취의 경우 인종 때부터 환관을 파견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벌목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큰 목재를 벌목하려면 깊은 산의 원시림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 때문에 뱀이나 호랑이들과 싸워야하는 것은 물론 풍토병으로 죽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사천(四川)지방에서는 “천 명이 들어왔다가 산을 나가는 자는 오백 명에 불과 하다네.(入山一千, 出山五百.)”라는 민요가 불렸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초와 촉 지방의 사람들이 벌목하는 얘기를 꺼내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楚、蜀之人, 談及采木, 莫不哽咽.)”(《명사․여곤전(呂坤傳)》)
진주채취는 광동에서 시작되었는데 진주양식 저수지를 만들고 몇 년에 한 번씩 채취하였다. 영종 때부터 진주채취를 감시하고 진주양식 저수지를 지키는 환관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걸핏하면 백성들이 진주를 훔치도록 방치했다고 지방 관리들을 모함하여 사지로 몰아넣었다. 백성들이 진주를 채취하는 것 역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세종(世宗) 가정(嘉靖) 8년(1529)에 양광(兩廣)지역의 순무(巡撫)였던 임부(林富)가 상주한 문장에 의하면 “5년 동안 진주를 채취하다 죽은 자가 50여 명이나 되지만 채취한 진주는 겨우 80량뿐이어서 천하가 사람과 진주를 맞바꾼 것이라고들 합니다.(五年采珠之役, 死者五十餘人, 而得珠僅八十兩, 天下謂以人易珠.)”라고 하였다.(《명사․식화지3》) 벌목과 진주채취를 환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간에서 사복을 채우는 행위였고,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실로 크나큰 재난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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