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언홍 지음 / 이상천 옮김 ≪중국고대의 환관≫, 울산대학교출판사, 2009.
(1) 명대의 환관과 정치
앞에서 이미 소개했듯이 명대의 환관 소속은 24개의 관아로 나누었고, 으뜸가는 관아는 사례감(司禮監)이었다. 조정 안팎의 권력을 황제 한 사람의 손에 집중시키고 나자 수많은 상주문을 처리하는 것이 부담이었다. 이 때문에 주원장은 내각대학사를 설립하여 정무를 처리하였다. 주원장과 주체 부자가 친히 상주문에 결재할 수 있게 되면서 내각의 신하들은 단지 참모나 고문 역할이나 할 뿐이었다. 선종(宣宗)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내각에 먹으로 쓴 작은 표를 상주문에 붙이도록 했는데, 이를 메모지라는 의미의 “조지(條旨)”라고 하였다. 왕조마다 개국군주는 거의 예외 없이 성실하게 정사를 돌보았지만 1, 2대 이후로 군왕들은 깊은 궁전 안에서 성장한 탓에 열정과 지식 모두 창업 황제만 못해서 결국 정사를 돌보는 것도 대신들을 접견하는 것도 귀찮아하였다. 이런 불성실한 태도가 바로 표의(票擬)1)제도를 만연하게 한 원인이라고 하겠다.《엄산당별집》에 “인종 이후에 이르러 결재를 해야 할 시기는 모두 표의로 하였다.(至仁宗後, 裁決機宜, 悉由票擬.)”라는 기록이 보인다. 표의제도는 환관의 정치관여를 위하여 편리한 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유약우(劉若愚)의《음주 속에 품은 뜻》이라는 글에 사례감의 직권은 “대체로 매일같이 상주하는 문서에 대해서 황제가 친필로 몇 가지 문서에 결재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들은 태감들이 나누어 내각에서 표시한 글자 모양을 따라 결재하는 것으로, 붉은 물감을 묻힌 붓을 사용하여 해서체로 표시하였다. 간간이 편방이 뜻하지 않게 틀렸을 경우에 약간씩 수정하여도 무방하였다.(凡每日奏文書, 自御筆親批數本外, 皆衆太監分批遵炤閣中票來字樣, 用硃筆楷書批之. 間有偏旁偶訛者, 亦不妨略爲改正.)”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사례감은 실제로 내각을 압도하는 등 재상과 맞먹는 권력을 행사하였다. 사례감은 일반적으로 장인태감(掌印太監) 1명과 병필수당태감(秉筆隨堂太監) 8, 9명 혹은 4, 5명을 두었는데, 이들은 명대에 그 위세가 대단했던 무리들로서 모두 사례감을 관장하였다. 내각에서 보내 온 쪽지에 따라 붉은 물감으로 결재하려면 글자를 몰라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명 선종 때는 내서당(內書堂)을 설립하여 환관들에게 얼마간의 소양을 갖추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환관들은 “상주문을 관장하여 내각에서 표한 것에 따라 붉은 인주로 결재할 수 있게 되었고 바깥 조정의 대신들과 어울리고 왕래도 하게 되었다.(掌章奏, 照閣票批朱, 與外廷交結往來.)” 환관들은 글을 익힌 후 사례감을 관장하였고, 또 “편방이 틀릴 경우(偏旁偶訛)” “약간씩 수정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略爲改正)” 환관들은 어떤 경우에는 “내각의 의견을 조작할 수도 있었다.(改動閣議.)” 수정한 후에 내각을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발표했는데, 소위 “황제의 명령이 환관들로부터 내려졌고, 대신들에게서 듣는 것은 생략되었던 것이다.(旨從中下, 略不與聞.)” 이 속에 감추어진 폐단은 정말로 컸다.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경우 황제가 말하면 태감이 옆에서 기록하여 내각에 전해 필사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기록(筆錄)” 중에 태감들은 기회를 틈타 자신들의 의견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심한 경우는 태감이 구두로 황제의 명령을 전달할 때 명대의 환관들은 항상 황제의 명령이라고 했는데,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부 권력을 가진 환관들은 사례감을 관장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황권을 자신의 수중에 넣었다. 유근(劉瑾)이라는 자는 매번 명 무종(武宗)이 가무와 여색에 빠져 기분이 아주 좋아졌을 때 많은 일들을 주청하였다. 무종은 아주 성가셔하며 “내가 널 어디다 쓰겠느냐! 이렇게 와서 날 귀찮게 만드느냐!”라고 하였다. 그래서 유근은 바로 “황명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생각대로 조정을 좌지우지하여 대신들에 대해 질책과 배척은 물론 태형까지 마음대로 처분하였고 요직이란 요직은 자신의 심복들로 다 채웠다. 위충현(魏忠賢)도 명 희종(熹宗)에 대해 이와 같이 하였다. 희종은 집 짓는 것을 좋아하여 스스로 도끼로 찍고 칼로 깎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위충현 등은 옆에서 상주문을 전달하였다. 희종은 정신을 딴 데 두고서 “알았으니까 너희들 마음대로 하거라!”라고 하였다. 위충현 등은 이 말을 듣고 나서 천하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례감의 태감들이 이런 대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먼저 내외 백관들의 진퇴를 틀어쥐고서 대학사나 재상의 지위에 있다고 해도 언제나 태감에 빌붙어야 내각에 들 수 있었다. 명대의 유명한 간신 엄숭(嚴嵩)도 태감에게 붙어 내각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지위를 견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엄숭은 명 세종(世宗) 때의 내각대학사였고, 하언(夏言)도 내각에서 수상(首相)이었다. 엄숭 부자가 국사를 농단하면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가 하언에게 들통이 났고, 하언은 그들의 죄상을 폭로하려고 하였다. 엄숭이 알아채고는 부자가 함께 하언에게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였고, 하언은 그제야 폭로하고자 했던 일을 그만두었다. 엄숭은 보복을 위해 하언과 원수 관계에 있던 금의위지휘사(錦衣衛指揮使) 육병(陸柄)과 결탁하여 함께 하언을 모함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또 한 번은 급사중(給事中) 여여진(厲汝進)이 엄숭의 아들 엄세번(嚴世藩)이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자 엄숭은 즉각 “상서하여 스스로 변호하고, 또 환관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황제의 노여움을 자극하였다.” 그 결과 여여진은 운남(雲南)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엄숭은 거금으로 여러 환관들과 결탁하여 그들로 하여금 “궁중의 동정(大內動靜)”을 보고하게 하였다. 그래서 엄숭은 황제의 일거일동을 사전에 다 알고 있었고, 이런 관계에 의지하여 엄숭은 21년 동안이나 재상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장거정(張居正)은 가정(嘉靖) 연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목종(穆宗) 때 내각에 들어갔다. 신종(神宗)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태감 풍보(馮保)가 성지를 왜곡하여 자신이 내각의 대신 장거정․고공(高拱)과 함께 선황제의 유조(遺詔)를 받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시에 풍보는 사례감과 동창(東廠)의 대권을 다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고공은 환관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해 걱정하며 장거정과 풍보의 축출을 논의하였다. 장거정은 풍보와 일찍부터 관계를 맺고 암암리에 많은 뇌물을 풍보에게 주기도 했다. 이번에도 재빨리 사람을 보내어 풍보에게 알렸고, 풍보는 직접 신종의 모친 이태후(李太后)를 만나 고공이 “태자께서 10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라고 배척만 하고 있으니 어떻게 임금이 될 수 있겠나이까?(排斥太子爲十歲孩子, 如何做人主?)”라고 꼬드겼다. 이태후는 이튿날 신하들을 소집하고는 고공을 고향으로 보내 편히 지내도록 한다는 특명을 전하였다. 장거정은 이부상서(吏部尙書)에서 상서 겸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승진하였고, 고공을 대신하여 재상자리에 앉아 전후 10년 동안 국정을 맡았다. 장거정은 명대 조정의 정치나 경제에 나타난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제기하고,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시행한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환관과 결탁하여 권세를 탐하고 황제의 총애를 유지하고자 기를 썼던 행위는 취할 것이 못된다.
환관과 절대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았던 내각의 신하나 재상들은 환관들에게 배척을 당하거나 타격을 받아야 했다. 영종(英宗) 때 내각의 신하였던 양사기(楊士奇)와 양영(楊榮)이라는 사람은 4대에 걸친 원로였는데, 대환관 왕진(王振)이 그들에게 “조정 일이 오랫동안 공들을 수고롭게 했고, 공들 또한 연세가 높으시니 피곤할 것이외다.(朝廷事久勞公等, 公等皆高年, 倦矣.)”라고 말하며 물러나라고 압박하였다. 또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헌종 때의 재상 상로(商輅)가 권력을 틀어쥔 환관 왕직(汪直)이 서창(西廠)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백성들을 학대하도록(擅作威福, 賊虐善良)” 조종하고 있다고 탄핵하고, 아울러 내각의 신하들과 상소하기로 약속하였다. 헌종은 중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서창의 활동을 중지시켰다. 왕직은 이 일에 한을 품고 있다 얼마 안 있어 상로가 뇌물을 받았다고 모함하여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도록 하였다. 내각의 신하나 재상에 대해서도 이 정도였으니 기타 대신들이야 순응하는 자는 살려주고 거스르는 자는 모조리 죽이는 식이었다. 경제(景帝) 천순(天順) 연간 초년에 태감 조길상(曹吉祥)이 권력을 장악하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부 대신들은 그들과 결탁하였다. 예를 들어 보겠다. 동흥(董興)이라는 사람은 조길상과 친척 관계를 맺고, “탈문의 공(奪門之功)2)”을 사칭하여 해녕백(海寧伯)에 봉해져 요동(遼東)에 진주하게 되었다. 영종 때의 어사 이탁(李鐸)이라는 사람은 왕진을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해서 쫓겨났고, 부마도위(駙馬都尉) 석경(石璟)이 한번은 집안의 환관에게 욕을 한 적이 있는데, 이를 전해들은 왕진은 자신의 무리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며 그를 모함하여 옥에 가두어버렸다……
명대의 환관들은 내각의 대신들을 조종하여 내각을 허수아비로 만들거나 조정 대신들의 임면을 통제하는 것 이외에도 또 창(廠)과 위(衛)를 조종하였다. 명대 초기에 주원장은 의란사(儀鸞司)를 금의위(錦衣衛)로 바꿨는데, 황제가 직접 관할했으니 황제의 개인적 호위대나 마찬가지였다. 금의위 아래에 17개소를 두었으며, 시위(侍衛)는 소금장부(鹵簿)와 의장(儀仗)을 관장하는 것 외에도 전문적인 정찰임무를 맡았다. 편제된 인원만도 수만 명이었다. 이밖에도 남북 두 개의 진무사(鎭撫使)가 있다. 남진무사(南鎭撫司)는 금의위의 법을 관장하였고, 북진무사(北鎭撫司)는 천자의 조서나 옥사를 관리했는데 권세가 대단했다.
동창(東廠)은 영락(永樂) 18년(1420)에 설치되어 조사와 체포 그리고 형벌과 옥사를 책임졌다. 황제파의 심복환관이 동창을 관할했는데, 관함(官銜)이 “흠차총독동창관교판사태감(欽差總督東廠官校辦事太監)”이었다. 이를 줄여 “제독동창(提督東廠)”이라고 불렀다. 동창은 외부에서 정탐하고 체포하는 일을 책임지는 역장(役長)과 번역(番役)에 1000여 명을 두고 있었는데, 모두 금의위로부터 선발된 “가장 민첩하면서도 강직한(最輕黠狷巧)” 사람들이었다. 정탐과 체포의 범위에 있어 위로는 관부, 아래로는 민간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쳤다.
서창(西廠)은 헌종 때 권력을 휘둘렀던 환관 왕직이 성화(成化) 13년(1477)에 세운 것이다. 왕직이 서창의 일을 감독했는데 인원이 동창에 비해 두 배는 되었고 권세와 위엄도 동창보다 더했다. 정탐의 범위도 경성에만 국한하지 않고 각 지역의 왕부(王府)와 변진(邊鎭)․각 성부(省府)의 주(州)와 현(縣)까지 포함하였다. 내행창(內行廠)은 무종(武宗) 때의 태감 유근(劉瑾)이 설립한 환관의 행동을 정탐하고 체포하는 기관으로 동창과 서창도 사찰 대상이 되었다.
창과 위는 줄곧 병칭되었지만 한 계통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 황제(혹은 사례태감)의 지휘 아래에 있었다. 실제로 사례감․창․금의위는 삼위일체가 되어 서로 협력하며 하나의 거대한 악의 축을 형성하였다. 이로 인해 위로는 조정의 대신,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극도의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조회를 할 때마다 창과 위는 휘하의 교위 500명을 이끌고 봉천문(奉天門) 아래에서 백관들의 의례를 규찰하였다. 예를 들어 의례를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옷과 모자를 벗기고 죽도록 매질을 해대었다. 무종 때 유근은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둘러 적지 않은 조정의 신하들이 희생되었다. 하루는 길에서 유근의 죄악을 폭로한 익명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유근은 황제의 명령을 왜곡하여 백관들을 모두 봉천문 밖에 꿇어앉히고 시비곡직을 막론하고 300여 명을 하옥시켰다. 이러하니 일반 백성들에게 자행했던 횡포한 짓은 말할 것도 없다. 창(廠)과 위(衛)는 죄목을 서명한 연행장조차도 없이 사람을 체포하는 등 사람 목숨을 어린애 장난처럼 여겼다. 사람을 잡아오면 먼저 죽어라 매질을 해서 죄를 시인하도록 한 다음 사건을 마무리 지어 법을 다루는 관아인 법사(法司)로 보냈다. 법사는 설사 그 억울함을 안다 해도 원안을 바꾸려고 하지 않아 억울한 소송사건이 나라 안에 가득 찼다. 역사에서는 “지금 사찰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법령이 지나치게 옥죄며 형벌과 기강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밤낮으로 집안의 재산을 수색하여 찾아내고 영장의 유무도 따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워 떨며 서로 의심하고 무서워하였다.(近日伺察太密、法令太急、刑網太密……暮夜搜檢家財, 不見有無駕帖. 人心震懾, 各懷疑懼.)”(《명사․환관왕직(宦官汪直)》) “문관들 중에 무고하게 누명을 쓴 자들이 아주 많았으며(凡文官無辜受屈者甚多)”, “억울하게 죽는 자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冤死者相屬)”고 기록하였다.
1) 내각에서 상주문을 받은 후 비준의 문안을 쓴 표전을 붙여 황제의 붉은 먹을 묻힌 붓으로 결재를 받는 것--옮긴이.
2) 태상황 영종과 그의 동생인 경제 사이에 제위 다툼이 일어났을 때 태상황이 남궁의 문을 헐고 입성하여 재 즉위한 일--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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