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中國宦官

3.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명대의 환관

마장골서생 2009. 12. 1. 17:30

르언홍 지음 / 이상천 옮김 ≪중국고대의 환관, 울산대학교출판사, 2009.

 

3.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명대의 환관


명대는 중국 역사상 환관의 폐해가 가장 극성 했던 시대였다. 이처럼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궁정 안이 부패한 것 외에 주로 황제의 개인적인 독재 때문이었다. 주원장(朱元璋)은 천하를 평정한 후에 전대의 멸망원인을 개괄하여 “총애하는 신하에게 권력을 통째로 맡긴 탓에 위와 아래가 서로 사실을 가리게 된 것(委任權臣, 上下蒙蔽)”이 원대(元代)통치 쇠퇴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여기고, 그는 관직제도에 중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주원장은 먼저 지방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국을 13개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지방의 백성과 재물, 사법과 형벌, 군사적 방어는 원래 지방장관이 독점했었는데, 이것을 군(軍)․정(政)․사법(司法)의 3권 분립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상급 기관이 하급 기관을 통괄하지 못하도록 하고 각자 중앙에 직속시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와 집권을 편리하게 하였다. 지방 대권을 조정의 중서성(中書省)으로 거두어들인 후에 중서성을 총괄하는 재상의 권한은 빠르게 커졌는데, 이것은 주원장의 개인적인 권력독점에는 불리하기도 하였다. 홍무(洪武) 13년(1380)에 주원장은 “역모죄(謀逆罪)”를 씌워 좌승상(左丞相) 호유용(胡惟庸)을 사형에 처한 후 곧장 중서성을 없애고 재상을 두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중서성과 재상의 권한을 6부(六部)로 분할하여 예속시키고,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 6부의 상서(尙書)가 직접 황제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이렇게 조정 내외의 권력이 모두 황제 한 사람의 손에 고도로 집중되었다. 별도로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두어 황제를 도와 문서 등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대학사는 황제의 곁을 시종하며 고문역할을 했는데, 상주문에 대한 비답 같은 것도 황제 앞에서 유시(諭示)를 받아 바로 작성하였다. 후에 내각대학사의 권력이 6부의 위에 군림할 정도로 커지고, 독재자인 황제마저 정사에 흥미를 잃게 되자 환관의 역할이 갈수록 두드러졌다. 조정의 명령이 환관에게 전해지면 환관은 문서를 관리하는 관원에게 전달하고, 문서를 관리하는 관원은 다시 내각에 전달한다. 내각이 할 말이 있으면 먼저 문서를 관리하는 관원에게 전달하고, 문서를 관리하는 관원이 환관에게 전달하면 환관은 이를 황제에게 아뢴다. 황제는 내각에 가지 않고도 정무를 친히 주관하면서 내각의 대신들에게 표의(票擬; 즉 내각이 어떤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의견에 대하여 내각의 표지를 작성하는 것)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내궁(內宮)에 있으면서도 정무를 처리하지 않았고, 심지어 황제의 지시조차도 태감(太監)이 대신하였다. 이 때문에 명대의 환관은 갈수록 거만해져 거리끼는 것이 없게 되었다. 대사상가 황종희(黃宗羲)는 “명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고조가 승상의 직위를 없애면서부터인데(有明之無善治, 自高祖罷丞相始也)”, “나는 이 때문에 재상의 실질적 권한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궁궐 안의 노비인 환관들이었다고 하는 것이다.(吾以謂有宰相之實者, 宮奴也.)”(《명이대방록․치상(明夷待訪錄․置相)》)라고 지적하였다.

명 초기에 주원장은 환관들을 단속한 적이 있었는데, 대신들에게 “짐이 주례를 보니 환관의 수가 백 명을 넘지 않았소. 후세에 수천 명을 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관직의 품계가 어지럽게 되었소. 이런 무리들은 청소나 하고 심부름이나 하는 것뿐이니 별도로 다른 일을 맡겨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많아지게 해서도 안되오.(朕觀周禮, 閹寺不及百人. 後世至逾數千, 因用階亂. 此曹只可供灑掃、給使令, 非別有委任, 毋令過多.)”라고 하였다. 또 “이런 무리들 중에 착한 자는 수천 명 가운데 한 둘도 안되면서 악한 자는 항상 수천 명이나 되오. 만약에 이들을 귀와 눈으로 사용하면 바로 귀와 눈을 가리게 될 것이고, 만약에 마음과 배로 사용하면 마음과 배에 병이 나도록 할 것이오. 도리로써 그들을 부려서 법을 두려워하게 해야지 그들에게 공을 세우게 해서는 안되오. 법을 두려워하면 스스로를 단속하게 되지만 공이 있게 되면 교만하고 방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此曹善者千百中不一二, 惡者常千百. 若用爲耳目, 則耳目蔽; 若用爲心腹, 卽心腹病. 馭之以道, 在使之畏法, 不可使有功. 畏法則檢束, 有功則驕姿.)”(《명사․직관지(明史․職官志)》)라고 하였다. 주원장은 또 “환관들은 정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어기는 자는 목을 베리라!(內臣不得干預政事, 犯者斬!)”라는 글을 새긴 철패(鐵牌)를 주조하여 궁문에 걸어두도록 하였다. 한번은 오랫동안 황제를 시종했던 노환관이 우연히 정사를 언급했는데, 태조는 대노하여 그 즉시 그를 고향으로 내쳤다. 그러나 고도로 권력이 집중된 정치체제 속에서 일일이 황제가 직접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 그래서 일부 사안들은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환관에게 맡겨 처리하였다. 환관에 대한 주원장의 진짜 속내를 설명하는 일이 하나 있다. 주원장에게 이문충(李文忠)이라는 생질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어진 이들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여 적지 않은 문객(門客)들이 머물렀다. 하루는 그가 외삼촌에게 “환관들이 너무 많으니 조금 줄이시는 것이 옳습니다(內臣太多, 宜稍裁省)”라고 하였다. 주원장은 대노하며 “네가 나의 주변 사람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속셈이 무엇이냐? 이는 필시 너의 문객들이 너에게 가르쳤을 것이다.(若欲弱吾羽翼何意? 此必門客敎之.)”라고 하고는 문객들을 모조리 죽이고 이문충도 제 명대로 살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명 성조(成祖)가 출병하여 건문제(建文帝)를 토벌할 때 많은 환관들이 성조 주체(朱棣)에게 투항하여 왔다. 명 성조가 즉위한 후에 정난(靖難)주역들 가운데 공이 있는 내관에게 작위나 상을 하사하면서 한 편으로는 진심인 체 하며 “짐은 줄곧 태조께서 만드신 제도에 따라서 황제의 직인이 없는 문서로는 한 명의 군인 한 명의 백성이라도 환관들이 함부로 이동시키거나 발동시켜서는 안 된다.(朕一遵太祖制, 無御寶文書, 卽一軍一民, 中官不得擅調發.)”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명대 환관이 외교사절로 나가거나, 세금징수를 독단하거나, 군대를 감독하거나, 번진을 분할하거나, 신하와 백성을 염탐하거나 했던 그 권한은 모두 성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상 환관의 직무로 진(秦)나라 때에 중거부령(中車府令)이 있었는데, 이후 중알자(中謁者)․중상시(中常侍)․중위(中尉) 등으로 답습되었다. 명 태조 때에 감정(監正)․감부(監副)․감승(監丞) 같은 것이 있었고, 명 성조 때에 이르러 “감정”을 “태감(太監)”으로 바꾸면서 명칭이 한 단계 높아졌다. 명나라 사람들은 이 개명에 대하여 “대체로 천자의 친인척을 바로 ‘태’라는 글자로 지칭하였다. 지금은 중인들의 직무에도 ‘태’자를 사용하고 있으니, 이는 한․당․송까지 ‘중’이라는 글자로 명명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夫天子之親, 乃以太稱. 今中人之職亦曰太, 其視漢、唐、宋止以中名者却盛矣.)”(《남원만록(南園漫錄)》권4)라고 비평하였다.

명대의 환관은 처음에는 수백 명에 불과했는데 명 말에 이르러 10만 명까지 늘었고, 명 초에 “환관은 정사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不得干預政事)”는 처지에서 정치․경제․군사대권을 장악하는 위치로 발전하였다. 그들의 권세는 궁궐 안은 물론 지방의 작은 부문에까지 침투하여 황권의 비호 아래 나라와 백성들을 해치는 악의 축이 되었다. 명대의 환관들이 모든 영역에서 저지른 악행을 구분하여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