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中國宦官

c. 광감세사(礦監稅使)의 천하 횡행

마장골서생 2010. 8. 3. 22:43

르언홍 지음 / 이상천 옮김 ≪중국고대의 환관, 울산대학교출판사, 2009.

 

c. 광감세사(礦監稅使)의 천하 횡행


명대에 환관이 광산개발을 감독하고 조사하는 것은 성조(成祖) 영락 연간부터 시작되었다.《식화지3》의 기록에 의하면 호광(湖廣)1)이나 귀주(貴州)로 관리들을 파견하여 금이나 은에 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였는데, “환관어사를 현지에 보내 조사하도록(中官御史往核之)” 했다고 한다. 영종 때는 환관 나영(羅永)을 절강(浙江)으로, 나규(羅圭)를 운남(雲南)으로, 풍양(馮讓)을 복건(福建)으로, 하능(何能)을 사천(四川)으로 파견하여 광산개발을 감독하도록 한 적이 있다. 신종(神宗) 주익균(朱翊鈞)은 가무나 여색을 탐하느라 지독한 낭비를 일삼고 정사에는 관심이 없었던 황제였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재정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많은 환관을 광감세사로 삼아 전국 각지로 파견하여 광산개발을 독려하고 세금을 징수하였다.《명사․신종본기(神宗本紀)》의 기록을 보면, 만력 24년(1596)에 “처음으로 환관에게 명하여 통주의 세금을 독점하게 하면서, 이후 각 성은 모두 세금징수관리자인 세사를 두게 되었다.(始命中官榷稅通州. 是後, 各省皆設稅使.)”고 하였다. “대도시에는 모두 세감을 두었고, 회남과 회북에는 염감을 두었으며, 광동에는 주감을 두어 파견을 독점하거나 대행을 겸하였다.(通都大邑皆有稅監․兩淮則有鹽監, 廣東則有珠監, 或專遣, 或兼攝.)”(《명사․진증전(陳增傳)》) 이런 광감세리들은 적임자를 황제에게 추천할 수도 있었고, 지방의 관리들을 지휘 통솔할 수도 있는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런 광감(礦監)들은 무뢰배들과 결탁하여 부자들을 광산의 우두머리로 삼고 가난한 사람들을 몰아다 채굴하게 하는 등 지방에 끼치는 해악은 실로 막심하였다. 만약에 민간인의 전답․주택․분묘 아래에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면 제 마음대로 파헤쳐 대어 주인은 어쩔 수 없이 은이나 뇌물을 주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섬서성의 광산개발 태감이었던 조흠(趙欽)이라는 자는 무지막지한 착취로 엄청난 재산을 긁어모아 떠날 때는 소나 말이 짊어진 것 외에도 96개의 상자가 더 있었는데 4명의 인부가 상자 하나를 들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환관들이 광산을 감독할 때 세금의 조목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절제했음을 알 수 있다.

광감과 세감(稅監)의 가렴주구는 수공업자와 중소상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명대 중후기를 민란으로 얼룩지게 만든다. 만력 연간에 진봉(陳奉)이라는 자가 호광의 감사(監使)가 되었을 때 백성들에게 “잔인하고 악독한(慘毒備至)” “학대를 자행하여(恣行威虐)” 10여 차례나 민란을 야기하였다. 이어서 소주(蘇州)에서는 세감이었던 손륭(孫隆)에게 저항하는 투쟁이 발생하였고, 강서(江西) 경덕진(景德鎭)에서는 요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세감 반상(潘相)에게 저항하는 투쟁이 폭발하였으며, 북경 서산(西山)에서는 광감이었던 왕조(王朝)의 무절제한 재물강탈에 저항하는 광부들이 북경 성내로 진입하여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조정이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1) 호북성과 호남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명대에는 광동과 광서로 분리시키고 명칭은 그대로 호광이라고 하였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