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능읍(陵邑) 건축
진시황제릉의 원명을 여산(麗山)이라고 하였다. 진릉에 설치했던 능읍을 바로 여읍(麗邑)이라고 하였다.《사기》에 의하면 진왕 정(政) 16년(기원전 231년)에 여읍을 두었다고 한다. 35년(기원전 212년)에 이르러 또 여읍으로 3만 가(家)를 이민시켰는데 도합 15만 명으로 이는 비교적 큰 현성(縣城)에 해당하였다.
여읍의 위치는 진릉 이북 약 3㎞ 지점인 유가채촌(劉家寨村)에 있었다(임동 지역 관할). 유가채촌에 있는 여읍의 유적은 남북으로 약 1000m, 동서로 약 500m, 면적은 약 0.5㎢나 되었다. 이곳은 30-40㎝ 두께의 기와조각과 먼지로 쌓여있었다. 기와조각에는 평기와․반원통형기와․열을 이룬 오각형 수도․벽돌․운문(雲紋)와당 등이 있는데, 이곳이 진릉읍(秦陵邑) 즉 여읍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진릉 부근에 능읍을 설치한 것은 진나라 이전에는 없었다. 한나라 사람들은 원읍(園邑)의 성행은 진나라가 강력해지고 나서부터라고 하였다. 능읍을 건설한 원인은 능원의 건설을 책임지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의 역할을 말한다. 진릉은 진왕 정이 즉위하면서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여읍은 그가 즉위한지 10여 년 후에 건설했으니 능원의 완공으로부터 보면 시기적으로 훨씬 이르고, 그래서 이런 관리기구를 두어 능원의 건설을 책임지게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진릉을 건축하는 지휘부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능원이 건설된 후에 능원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기 때문에 능읍은 곧 능원을 위해 근무하는 하나의 상설된 기구가 되었다. 능읍의 장관에게는 영(令)․승(丞)도 있었고, 자체의 수공업 제품도 있었다. 진시황제릉 부근에서 “여읍오승(麗邑五升)”․“여읍구승(麗邑九升)”․“여읍이승반(麗邑二升半)”․“여읍(麗邑)” 등의 글자 모양이 새겨진 도량기기가 출토되었는데 주방에 공급되었던 용구였다.
진나라가 여읍을 세운 이후로 한대에도 이를 모방하여 한대 제왕의 능에도 모조리 읍을 설치하게되었는데,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장릉(長陵)에는 장릉읍․혜제(惠帝)의 안릉(安陵)에는 안릉읍․문제(文帝)의 패릉(覇陵)에는 패릉읍․경제(景帝)의 양릉(陽陵)에는 양릉읍 등등이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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