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秦始皇陵

六. 진릉(秦陵)의 기타 건축 1. 오령(五嶺)과 어지(魚池)

마장골서생 2010. 5. 2. 23:02

  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六. 진릉(秦陵)의 기타 건축


1. 오령(五嶺)과 어지(魚池)


진릉의 남면과 북면에 각자 유적지가 하나씩 있는데 바로 오령과 어지이다.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킨 것은 우연한 요인이었다.

오령은 실제로 진릉 남면의 물막이 둑인 방수제(防水堤)이다. 진릉 남면은 수려한 여산이다. 산에는 협곡이 종횡으로 뻗쳐있어 큰비를 만나면 물이 협곡에서 흘러나온다. 진릉 남면에 가까운 곳은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로 작은 강을 이루는데, 이를 모래 강이라는 의미의 사하(沙河)라 하기도 하고, 큰물이 흐르는 도랑이라는 의미의 대수구(大水溝)라고도 불렀다. 대수구 중의 물은 완만한 언덕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흘러가 진릉의 안전을 위협하였다. 큰물을 만나게 되면 진릉은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능을 건설할 설계자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였다. 강물이 새로 건설한 진릉에 부딪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진릉과 여산 사이에 둑을 건설하여 물길을 바꾸도록 했는데, 먼저 진릉을 돌아 동으로 흐르게 한 후 다시 북으로 흐르게 하였다. 이 물막이 둑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오령”으로, 아마 진시황이 북으로는 흉노를 막고 남으로는 오령을 지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 물막이 둑은 진릉 외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남으로부터 동북으로 비스듬히 쌓아 만들었다. 과거에는 길이가 얼마였는지 알 길이 없다. 탐사 결과 길이가 약 3500m로 현재는 약 1000m 정도가 남아 있고, 넓이가 약 40m, 높이가 약 2-8m이다. 한 층 한 층 흙을 달구질한 것을 뚜렷하게 분간할 수 있다.

대수구의 물은 오령에 막혀 동쪽으로 흘러가고 후에 또 돌아서 북쪽을 향해 흘러 위하(渭河)로 유입된다. 북으로 흘러가는 도중에 어지라는 곳을 거치게 된다. 어지는 진릉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진릉 이북에 있다. 진릉을 건설할 때 거대한 구릉, 즉 봉토를 만들기 위해서 이곳에서 흙을 파다 진릉으로 운반했던 것이다. 진릉의 높이가 100여m나 되었으니 흙 사용량도 엄청났을 것인데, 대략 1800여 만㎥ 정도로 추정된다. 그래서 어지라는 이곳에 사방 4리에 달하는 큰 구덩이를 만들어놓게 된 것이다. 대수구의 물은 이곳에다 하나의 큰못을 만들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물은 더욱 깊어졌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어지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이곳은 여전히 움푹 패인 지역으로 어떤 곳은 일년 내내 물이 고여 마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오령과 어지의 관계이다.

어지라는 이곳은 진대에는 무척 중요하게 여겨졌다. 어지 북쪽은 위하인데, 위하 이남이 바로 고대 때 동방에서 여산에 이르는 큰길이었다. 진대에는 시황릉을 건설하기 위해서 이곳에 능원 건설을 책임지는 관리기구를 두었다. 당시에 전국 각지에서 오는 왕릉 건설자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가장 많을 때는 70여만 명에 달하였다. 그들이 왕릉 지역에 들어가게 되면 처음 도착하는 곳이 바로 어지였다. 한조의 대장 영포(英布)는 일찍이 육안(六安)에서 여산으로 와서 왕릉을 건설했는데, 바로 이곳을 거쳐 여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은 어지의 유적에서 출토한 문물로부터 증거를 얻을 수 있다. 어지 일대는 현재의 어지촌(魚池村)․오동촌(吳東村)․오중촌(吳中村)․오서촌(吳西村) 등을 포괄하는데, 땅위에 진대의 달구질한 지면이 있으며, 진대의 가옥이 무너져 내리면서 남긴 건축재료와 기와조각들이 있다. 오동촌에서는 진대에 지하수도로 사용했던 원형의 수도관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질흙으로 만들어졌고 굽은 곳 역시 질흙 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곳에는 수챗구멍도 있었다. 여기에서도 많은 와당과 장방형의 꽃무늬가 있는 도로포장용 벽돌 및 사발(盂)․바리때(鉢)같은 생활용구, 가래(鏵)․대패(鏟)․도끼(斧)․호미(鋤)같은 생산도구, 가지가 있는 창(戈)․가지가 없는 창(矛)․활(弓)․화살(弓箭)같은 병기들이 발견되었고, 진대의 화폐인 반량전(半兩錢)도 적지 않게 출토되었다. 이 출토물들은 진대에 이곳에 규모가 비교적 큰 건축군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전국(戰國)시기에 진나라 보고궁(步高宮)의 옛 유적지라고 한다. 진시황 때에 이르러 이곳은 진릉 건설을 책임진 관리기구의 소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