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五. 진시황제릉의 부장갱 3 : 순장묘
1. 순장된 왕족(宗室)과 대신(大臣)
제왕의 종실(왕족)과 대신은 죽은 후에 이 제왕의 능묘 부근에 묻혔는데 이를 순장이라고 하였다. 순장묘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반드시 제왕의 지친(至親)이나 큰공이 있는 대신이어야 했다. 이 때문에 죽은 후 순장되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일종의 영광이자 명예이기도 하였다. 이런 예법은 주 왕조 이후 점점 정착되어 갔다.《논형(論衡)․사휘(四諱)》라는 문장에 옛사람들은 “서쪽은 연장자나 항렬이 높은 자의 위치이다. 연장자나 항렬이 높은 자는 서쪽에 앉고, 젊은이나 어린 아이는 동쪽에 앉는다(西方, 長老之地, 尊者之位也. 尊者在西, 卑幼在東.)”고 여겼다. 진시황의 종실과 대신의 순장묘는 진릉의 동쪽에 있다. 1976년에 고고학자들이 진릉의 외성 동쪽 350m되는 곳, 즉 임동현(臨潼縣) 상초촌(上焦村) 이북에서 17좌의 고분을 발견하여 8좌의 고분을 발굴 조사하였다. 이 고분들 가운데 어떤 것은 사파도(斜坡道)의 방광묘(方壙墓)인데, 즉 비탈길로 내려가면 바로 방형에 가까운 흙으로 된 묘혈인 토광(土壙)이다. 토광 한쪽에는 벽감(壁龕; 벽에 신주를 모시도록 만든 장)이나 이실(耳室)이 있다. 토광에는 관곽(棺槨)이 놓여 있고 이실과 벽감 안에는 부장된 기물들이 놓여져 있었다. 어떤 것은 경사진 묘도(墓道)를 따라 내려가면 하나의 장방형의 묘실(墓室)인데, 묘실 뒤쪽에 장방형의 굴이 하나 있는데 굴속에 관곽이 놓여있고, 묘실 한 쪽에 벽감이 있고 안에 부장된 기물들이 놓여있다. 관곽이라는 것은 바로 목관(木棺) 외면의 덧관이다. 이런 관과 곽에 든 사람은 모두 일정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런 예우를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고분들에는 관곽이 있을 뿐 아니라 부장품들도 비교적 귀한 것들이다. 장식품으로는 황금 주렴(金箔)․옥황(玉璜)․옥벽(玉璧)․은 두꺼비(銀蟾蜍)․칠기(漆器)․비단(絲綢) 같은 것이 있고, 생활용품으로는 동검(銅劍)․동인장(銅印章)․동 혁대 잠금 쇠붙이(銅帶鉤)․동 방울(銅鈴)․동 주전자(銅匜) 및 창고(陶倉)․그릇(陶盆) 등이 있다. 이런 부장품에서 보면 이 묘들의 주인은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차고 있는 은으로 된 두꺼비에 “소부(少府)”라는 두 글자가 있다. 소부는 진대 삼공구경 중 구경의 하나로서 전국의 세수(稅收)를 전문적으로 관리했는데, 진 왕조 말년에 장한(章邯)이라는 사람이 진릉을 건설할 때 바로 소부의 신분으로 이 공사를 감독했던 것이다. 그러나 발굴 출토된 상황에서 보면 그들은 모두 비참하게 죽었다. 발굴된 8개의 묘 중에 7구의 뼈가 있었는데 그 중 한 개의 묘에는 뼈가 없었다. 이 7구의 뼈 중에 두 구는 여성이고 다섯 구는 남성이었는데 모두 2, 30세의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참수되어 머리․몸통․하체가 분리되어 있었다. 한 남성의 머리는 굴 밖의 막음 흙 속에 있고, 오른쪽 관자놀이 뼈 부분에 동 화살촉이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화살을 맞고 죽은 후에 시신이 토막 난 듯하다. 다른 한 여성의 뼈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이다. 그들은 처참하게 죽어 아무렇게나 매장되었지만 부장품은 오히려 풍부하였고 더군다나 진릉에 순장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은 진 왕조 말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진시황 37년(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시를 떠날 때 그의 작은 아들인 호해(胡亥)․승상(丞相)인 이사(李斯)․중거부령(中車府令)인 조고(趙高)가 수행하였다. 돌아올 때 하북(河北)의 사구(沙丘)에 갔다가 진시황은 병사하였다. 일찍부터 정권을 찬탈하려고 했던 조고와 호해는 거사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은 먼저 이사를 위협하여 이 거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진시황은 죽기 전에 조서를 쓴 적이 있는데, 큰아들 부소(扶蘇)에게 명하여 함양으로 와 장례에 참가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서를 작성하여 중거부령 조고에게 맡겨두었지만 조고는 이를 방치하였다. 이사는 진시황의 죽음을 철저하게 봉쇄한 다음 매일 하던 대로 황제에게 수라를 바치게 하고, 평소처럼 황제에게 정무를 보고하였다. 수행원 가운데 황제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조고․호해․이사 및 두 세 명의 측근뿐이었다. 그 당시에 날씨가 무더웠는데 수행했던 사람들은 시체 썩는 냄새를 맡게 될까봐서 진시황이 탔던 냉난방 수레의 뒤에 물고기를 한 수레나 실었다. 조고는 진시황의 유서를 꺼내어 공자 부소와 대장 몽념(蒙恬)은 자결하라는 명령으로 위조하였다. 함양에 도착한 후 진시황을 여산(驪山)에 매장하였다. 호해가 제위를 계승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이세황제(二世皇帝)이다.
진시황을 매장한 후 호해는 자신의 황위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 조고와 공모하여 진시황 때의 대신 및 종실을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진나라의 조야는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육국을 통일할 때 큰공을 세웠던 몽념 및 그의 아우 몽의(蒙毅)는 한을 품고 자결하였다. 풍거질(馮去疾)․풍겁(馮劫) 형제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후에 이사 자신도 진 이세에 의해 함양의 저자에서 허리가 잘리는 요참(腰斬)이라는 형벌을 받고 죽었다. 재능이 넘쳤던 이사는 중요한 시기에 권세와 이득에 미혹되어 결국 이런 지경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그 허물 또한 모두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그래서 당나라 때의 대시인 백거이(白居易)는〈詠史〉라고 하는 시에서 “진 이세는 칼을 예리하게 갈아 이사를 베었네,......이로써 알았네 화복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님을(秦磨利刀斬李斯,......乃知福禍非天爲.)”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공신들은 당연히 정권을 찬탈한 호해에게 있어 눈에 가시였고, 진의 종실은 더더욱 몸에 박힌 가시였던 것이다. 봉건제도 아래 황위의 계승은 정실의 큰아들에게 물려주는 제도인 적장제(嫡長制)였고, 장자(長子)에게 계승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해는 진시황의 열여덟 번째 아들이었다. 그래서 호해의 형들은 모두 호해와 같이 제위를 다툴 자격이 있었고, 또한 가장 호소력이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호해와 조고에 있어 마음의 병이 되었다. 그래서 조고와 호해의 도살용 칼은 재빠르게 그들의 목을 겨냥하였다. 그래서 진의 공자 12명은 함양의 저자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10명의 공주는 두(杜; 지금의 섬서 서안 동남쪽)에서 갈기갈기 찢겼다. 공자 고(高)는 도망치려고 했고 또 전 가족에 연루될까봐서 진이세에게 상서하여 아뢰었다. “시황제 때 저는 많은 복을 누려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말을 탔습니다. 황제께서 돌아가신 후 저는 따라 죽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불충불효하는 행위입니다. 지금 저는 시황제를 따라 여산에 묻히고자 합니다.” 진이세는 보자마자 매우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아울러 10만 전을 내려서 공자의 예로써 장례를 치러주었다.1) 공자 장려(將閭) 형제 세 사람도 진이세에 의해 죄명이 꾸며져 투옥되었다. 그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늘에 대고 부르짖다가 검을 빼어 자살하였다. 그래서 상초촌 순장묘의 뼈 중에 머리와 몸이 분리되고 사지가 흩어진 것이 대략 이런 역사의 증명인 것이다. 그들은 비록 살해되었지만 신분과 지위는 진시황 무덤 곁에 순장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고, 또한 귀중한 부장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진릉의 순장묘는 능의 구역 배치에서 보면 능의 외성 동쪽, 봉토의 동서 중심선 남쪽에 있다. 이후의 한․당 제왕 능묘 중 대신과 종실을 순장한 묘 역시 대부분 제왕 능묘의 동남쪽에 두었다.
무공이 있는 장수는 살해되었고 재능이 있는 문신은 죽임을 당하였으며 종실의 골육은 멸족을 당하였다. 이어서 조고는 이세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자영(子嬰)에게 살해되고 만다. 진이세는 3년 동안 황제였고 진 제국은 이미 위험이 코앞에 닥쳤다. 자영이 비록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는 하나 이미 진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겨우 46일 동안 황제로 있다가 유방(劉邦)에게 투항하였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살육은 진나라의 기운을 크게 손상시켰는데, 이것이 아마도 진 왕조가 단명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진릉 외성 동쪽의 이곳 순장묘 외에 진릉 내성의 북부에서도 대단히 밀집해 있는 순장묘를 발견하였고, 진릉 서부의 북쪽에서도 순장묘를 발견하였다. 이 무덤들은 어떤 사람들의 무덤일까?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그러나《사기(史記)》에 기록된 바로는 진시황이 죽자 능에 안치한 후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진시황제의 후궁 비빈 중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 여자들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옳지 않았기 때문에 호해는 당연히 그들을 죽은 시황제에게 순장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에 수많은 후궁들을 산 채로 묻어버렸다. 진릉 내성 중 봉토 북쪽의 수많은 고분들이 바로 이런 불행한 여자들의 순장묘일 것이다. 그녀들은 청춘의 꽃다운 나이에 영원한 황제의 지하 향락도구가 되어버린 것은 한 시대의 비극이기도 하다.
1) 진릉 봉토의 서쪽이자 동거마 이북에 순장묘가 한 곳 있는데, 공자(公子) 고(高)의 묘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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