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2. 능묘를 건설한 사람들의 묘지
사람마다 역사에 마지막은 모두 자신의 종적을 남긴다. 소동파(蘇東坡)가〈아우 자유와 승지에서 옛일을 회고하며(和子由繩池懷舊)〉라는 시에서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人生到處知何似, 인생살이 그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인생도처지하사)
應似飛鴻踏雪泥. 기러기 눈밭에 남긴 발자국 같다할지.
(응사비홍답설니)
泥上偶然留指爪, 진흙에 우연히 발자국 남겨놓았을 뿐,
(이상우연류지조)
鴻飛那復計東西. 기러기 어디로 날 지 알 길 없음에랴.
(홍비나복계동서)
70여만 명의 능묘 건설 노동자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진릉이라는 건축물을 남겼고, 병마용이라는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군대의 모습을 남겼으며, 동거마라는 진귀하고 호화로운 보물을 남겼고, 동시에 자신들의 이름도 남겼다. 일부 원통형 기와 조각 위에도 뚜렷한 그들의 손도장이 남아 있다.
고대에 그들을 통치하고 구속했던 규정은 뜻밖에도 그들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게 했는데 이것은 정말로 하나의 우연한 행운이었다. 이 규정은 바로 기물을 제작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기물 위에 새기거나 인장을 찍게 한 것인데, 제작자의 책임감을 살피는 데에 이용하였다. 이 제도를 “기물에 제작자의 이름을 새기게 함으로써 그의 정성을 살피는 것(物勒工名, 以考其誠)”이라고 하였다. 진대에는 이 제도를 법률 조문으로 정하였다. 잠들어 있는 묘지에서 출토된 진나라의 죽간《장인들에 관한 규정(工律)》에 병기 및 기타 기물은 이름을 새겨야 하고 새길 수 없는 것에는 검은 칠로 이름을 써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때문에 진릉에서 출토한 전와(磚瓦) 및 도기는 물론 진용갱에서 출토한 도용 및 병기에도 제작자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조배호촌에서 발견된 능 건설자들의 일부 묘지(趙背戶修陵人墓地)(局部)
이 ‘능을 건설한 사람들(修陵人)’의 신분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들은 진 왕조의 법률에 저촉되어 죄수로 불리는 자들로 여산으로 압송되어 와 능의 건축에 복역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진 왕조의 요역(徭役)제도에 따라 매년 황실을 위해 일정 시간 노역에 동원된 평민들이며, 어떤 사람들은 관부(官府)의 공장(工匠)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징집되어 온 전국 각 직업 중에 어느 정도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도 처음에 사수정장(泗水亭長)이 되었을 때 지금의 강소(江蘇) 서주(徐州)에서 죄수를 여산의 능 건설 현장으로 압송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이미 진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이어서 천하가 불안정하였고 죄수들도 도중에 도망치는 경우가 끊이지 않았다. 유방도 속으로 이렇게 갈 것 같으면 여산에 도착한 사람들조차도 다 도망칠 것이고 자신도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남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각자의 길로 떠나라, 나도 이 관직을 버릴 것이다.” 이 사람들 중에 10여명이 유방을 따르며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진이세 원년(기원전 209년)에 진승(陳勝)․오광(吳廣)이 봉기한 후 유방도 따라서 봉기하였다. 유방의 장수 중 영포(英布)라는 자는 안휘(安徽) 육안(六安) 사람으로 죄를 지어 경형(黥刑; 얼굴에 글자를 새겨 넣는 형벌)을 받았고, 여산에서 죄수가 된 적도 있었다. 사람이 얼마가 되었든 요역에 복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진릉에서 출토된 벽돌과 기와 기물에서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고양공오(高陽工烏)”․“임진료(臨晉廖)”․“호치(好畤)”․“신성의거(新城義渠)”․“신성여보(新城如步)”․“의양창(宜陽昌)”․“의양공정(宜陽工程)”․“오씨공창(烏氏工昌)”․“운양구(鄖陽具)” 등이 있는데, 그들의 본적과 이름을 분명하게 적어두었다. “고양공오(高陽工烏)”는 바로 고양(高陽) 지방에서 온 공인으로 이름이 오(烏)이고, “오씨공창(烏氏工昌)”은 바로 오씨 지방에서 온 공인으로 이름이 창(昌)이다. 고양(高陽)․임진(臨晉)․호치(好畤)․신성(新城)․의양(宜陽)․오씨(烏氏)․운양(鄖陽)은 각각 지금의 하남 기현(杞縣)․섬서 대려(大荔)․섬서 건현(乾縣)․하남 양성(襄城)․하남 의양(宜陽)․감숙(甘肅) 평량(平凉)․호북(湖北) 안륙(安陸)이다. 서쪽에서 동쪽까지, 남쪽에서 북쪽까지 대체로 진 왕조의 세력 범위 안의 지역으로 모두 여산의 능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진릉 서쪽 조배호촌(趙背戶村) 능 건설자들의 묘지에 널린 백골 중 몇 조각의 기와가 이 사람들이 죽고 난 후의 부장품이었던 것이다. 동료들이 기와 조각 위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 친구나 동향에 대한 배려와 애도를 표하는 데에 사용했는데, 그 역할은 후대의 묘지(墓誌)와 같았다. 이 기와조각들 위에 다음과 같은 와문(瓦文)이 새겨져 있다.
東武羅 동무 땅 사람 라
(동무라)
贛楡歫 공유 땅 사람 거
(공유거)
東武居貲上造慶忌 동무 땅 거자 상조 관직을 지낸 사람 경기
(동무거자상조경기)
東武東間居貲不更瞗 동무 땅 동간 고을 거자 불경 관직을 지낸 사람 조
(동무동간거자불경조)
博昌去疾 박창 땅 사람 거질
(박창거질)
博昌居貲用里不更余 박창 땅 거자 용리 고을 불경 관직을 지낸 사람 여
(박창거자용리불경여)
楊民居貲武德公士契必 민 땅 거자 무덕 고을 공사 관직을 지낸 사람 계필
(양민거자무덕공사계필)
平陰居貲北游公士滕 평음 땅 거자 북유 고을 공사 관직을 지낸 사람 등
(평음거자북유공사등)
蘭陵居貲便里不更牙 난릉 땅 거자 편리 고을 불경 관직을 지낸 사람 아
(난릉거자편리불경아)
媰上造姜 추 땅 상조 고을 사람 강
(추상조강)
와문(瓦文)의 내용은 현명(顯名)․죄명(罪名)․리명(里名)․작위명(爵位名)․인명(人名)이다. 동무(東武)는 산동(山東) 무성현(武城縣) 서쪽에 있고, 평음(平陰)은 하남 맹진(孟津)에 있고, 박창(博昌)은 산동 박흥현(博興縣)에 있고, 난릉(蘭陵)은 산동 창산현(蒼山縣)에 있고, 공유(贛楡)는 강소(江蘇) 공유현(贛楡縣)에 있고, 양민(楊民) 즉 양씨(楊氏)는 하북(河北) 영진현(寧晉縣)에 있고, 추(媰)는 산동 추현(鄒縣)에 있다. 그리고 동간(東間)․용리(用里)․무덕(武德)․북유(北游)․편리(便里)는 모두 향리(鄕里)의 명칭이다. 상조(上造)․불편(不便)․공사(公士)는 진나라 20등급의 벼슬 중 낮은 등급의 작위 명칭이다. 라(羅)․거(歫)․경기(慶忌)․조(瞗)․거질(去疾)․여(余)․계필(契必)․등(滕)․아(牙)․강(姜)은 바로 죽은 자들의 이름이다. 발견된 이런 사람들로부터만 본다면 산동․하남․강소․하북 등의 지역에서 왔고, 출토된 뼈들을 조사한 것에서 본다면 젊은 남녀에다 아이까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묘지에는 귀중한 부장품들은 없고, 극히 적은 수량의 도분(陶盆)․도관(陶罐) 등 생활용품 및 간단한 생산도구뿐이다. 진릉 북쪽 정장(鄭莊)의 타석장(打石場)은 진릉을 수축할 석재를 가공하던 장소였다. 이곳에서 석재의 파편들을 출토한 것 외에도 노동공구 및 형벌도구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족쇄와 수갑을 차고 노동에 참가했음을 의미한다. 제왕의 호화로움인 동시에 인민의 피눈물이었다. 진릉은 인민의 피눈물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바로 한 수의 시에서 묘사한 것과 같다.
漢國河山在, 한나라의 산하는 그대로건만,
(한국하산재)
秦陵草木深. 진릉의 초목은 짙기만 하여라.
(진릉초목심)
暮雲千里色, 해질녘 구름 속 천리의 광경은,
(모운천리색)
無處不傷心. 마음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라.
(무처불상심)
--송나라 홍매(洪邁)의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인용함.
난릉거자편리불경아(蘭陵居貲便里不更牙)
양민거자무덕공사계필(楊民居貲武德公士契必)
박창거자용리불경여(博昌居貲用里不更余)
평음거자북유공사등(平陰居貲北游公士滕)
병마용을 제작하는 공인의 이름은 대부분 도용의 도포 아래 다리 부위에 새겨져 있다. 어떤 경우는 가슴이나 팔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미 발굴 출토된 2천여 건의 도용에 470여 건의 각인된 글자가 있다. 어떤 것은 4․5․30․40․50등과 같은 숫자로서 대략 230건 정도인데, 아마도 토우를 만들 때 도공이 스스로 부여한 번호인 것 같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아마 인명일 것이다. 인명을 새긴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240여 건 정도 된다. 인명을 새긴 이 도문(陶文)들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한 종류는 진대 중앙관서 이름에 “궁강(宮彊)”․“궁득(宮得)”․“궁계(宮系)”․“궁광(宮炚)” 등과 같은 도공의 이름을 덧붙인 것이다. 궁(宮)은 진나라 중앙 소속으로 궁정에서 근무하는 관서의 약칭이고, 강(彊)․득(得)․계(系)․광(炚)은 인명이다. 다른 한 종류는 지명에 도공의 이름을 덧붙인 것으로 “함양오(咸陽午)”․“함양의(咸陽衣)”․“임진괴(臨晉?)”․“역양중(櫟陽重)” 등과 같은 것이 있다. 함양운 진나라의 도성인데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20리 되는 곳이고, 오(午)와 의(衣)는 모두 인명이다. 임진(臨晉)은 지금의 섬서성 대여현(大荔縣) 조읍(朝邑) 동쪽에 있었으며, 괴(?)는 인명이다. 역양(櫟陽)은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 역양진(櫟陽鎭)에 있었는데, 진나라의 선조가 이곳에 도읍을 세운 적도 있었고, 중(重)은 인명이다. 여기에서 토우를 만드는 단위에 중앙과 지방이 똑같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의 고찰에 의하면 중앙의 토우를 만드는 기구가 만든 도용은 형상이 좀더 정확하고 생동감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고위층에서 나온 것으로 예술기교가 특출한 공인이 더 많았던 우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밖에 지방과 관서를 새겨 넣지 않고 인명만 새긴 것도 있는데, “안(安)”․“득(得)”․“기(祁)” 등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도 당연히 이 두 부분에 속해야 할 것이다.
전국 각지에 능을 건설하러 온 이 사람들은 능 지역의 공사장으로 보내져 각자 다른 작업 현장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어떤 조건 아래 생활하고 노동했을까? 한대의 기록에 의하면 진나라 말기에 궁전 및 진시황릉을 건설하느라 백성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인력이 부족해지자 부녀자들까지 징집하여 운반에 동원하였고, 이 때문에 길 위에서 죽는 사람들까지 속출했다고 하였다. 노역에 처해진 사람 중 어떤 자들은 족쇄와 수갑을 차야했다. 이런 상황은 진릉의 조배호촌 왕릉 건설자들의 묘지․어지(魚池) 유적지․정장(鄭莊) 타석장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것들로 이 기록들이 사실이었음을 설명한다. 왕릉 건설자들의 일일 작업량은 정량제였고 공구를 훼손해서도 안되었는데, 만일 그렇지 못했을 때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먹는 것이라고는 현미밥․야채국과 소량의 소금이 전부였다. 진대의 법률에 상조(上造)라는 작위 이하의 사람들이 매일 공급받는 양식은 여미(糲米) 1두(斗)․야채국 및 소량의 식염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수레를 모는 사람은 쌀 3분의 1두를 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진나라는 작위 3급 이상이라야 패미(粺米) 1두․간장(醬) 0.5ℓ 및 야채국을 먹을 수 있었다. 여미는 거친 쌀(粗米)인 현미를 말하고 패미는 현미를 대껴 정미로 만든 백미(細米)를 말한다. 진나라 때의 1두는 현재의 2000㎖에 해당한다. 작위가 있는 사람이라야 이런 것들을 먹을 수 있었으니 평민 및 죄수들이 얻을 수 있는 양은 당연히 적었다. 이 왕릉 건설자들은 변변치 않은 거친 밥을 먹었고, 움막집에서 살았으며, 무거운 노역에 시달렸다. 그들은 이런 초라한 생활조건 속에서, 채찍 같은 형벌도구의 속박 속에서 강도 높은 과부하의 노동을 했던 것이다. 그들의 노동실적은 백성들의 강인한 정신과 총명한 재능을 웅변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왕릉 건설자들의 묘지는 조배호촌 이외에도 두 곳이 더 있다. 한 곳은 조배호촌 서남부의 요지두촌(姚池頭村)인데, 조배호에서 450m 떨어진 곳이다. 이 곳에도 왕릉 건설자들이 묻혀있다. 그 지역은 후에 경지정리로 인해 파괴되고 6㎡밖에 되지 않는 아주 약간의 땅만 남게 되었다. 추측에 의하면 조배호와 요지두 두 곳을 합하면 약 20만㎡ 정도 된다. 왕릉 건설자 한 명의 묘지는 2㎡가 채 되지 않는다. 한 개의 무덤 구덩이에 매장된 사람의 수는 한 명이었는데, 많게는 두 세 명이 포개져 있고, 더욱 심한 경우는 한 개의 구덩이에 14명이나 있었다. 이 때문에 진릉 서쪽 조배호․요지두라는 지역의 왕릉 건설자 묘지에 매장된 사람은 3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다른 한 곳은 조배촌에서 서쪽으로 2㎞ 지점에 있는데, 서안시 임동구에서 동쪽으로 동오(東五)라는 지역에 있다. 묘지의 현재 면적은 동서로 50m, 남북으로 80m, 도합 4000㎡이다. 그 안에 대략 220좌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들은 조배호․요지두에 있는 왕릉 건설자의 묘와는 비교적 큰 차이점이 있다. 이곳의 묘에 벽돌 관․기와 관․나무 관 같은 것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죽은 자들은 왕릉 건설자들 중에 신분이 비교적 높은 사람들이자 상당한 기예를 지닌 인물들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이들은 진대에 공사(工師)로 불렸는데 현대의 엔지니어 이상의 인물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2003년 3월에 진시황의 병마용 박물관 정문 동북쪽 약 500m 되는 곳에 왕릉 건설자들의 고분이 한 곳 있다. 깊이가 12m나 되는 큰 구덩이에 층을 나누어 왕릉 건설 중 사망한 사람을 매장하였다. 모두 4층으로 되어 있는데 층마다 묻힌 사람 수는 똑 같지 않다. 제1층 즉 최상층에 30여 구의 유골이 있고, 제4층 즉 최하층에 8구의 유골이 있다. 약 50여 구의 유골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원래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 곳의 왕릉 건설자는 조배호의 왕릉 건설자와 신분이 비슷한 일반 노동자였고, 어떤 사람은 죄수였다.
왕릉 건설자들의 비참한 생활은 진시황릉의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봉건 군주의 부귀와 사치는 바로 더욱 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사기․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시황제는 전국의 인민들을 동원하여 진릉을 건설하는데, 35년(기원전 212년) 동안 72만 명을 동원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1년 동안 전국에서 징집해 온 숫자일 뿐이다. 시황제릉의 건축은 시황제 초 즉위하던 그 해인 기원전 246년에 시작하여 기원전 208년, 즉 진이세 호해 2년에 대충 끝낼 때까지 전후 38년의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능의 건설에 참가했는지 그 숫자는 고증할 수는 없지만 종합해보면 100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왕릉 건축자들의 묘지에 매장된 사람들은 바로 왕릉을 건축하다 다치거나 병들고 혹은 규율을 어겨 처형된 그런 사람들이었다. 시황제의 거대한 능묘와 수많은 건축 및 순장갱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묘지는 결코 진시황제릉 순장묘의 구성부분이 아니었다. 진대의 설계자가 진릉의 구도를 설계할 때 결코 그들의 묘지를 고려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왕릉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사망률이 너무 높아서 어쩔 수 없이 진릉 외성에서 서쪽으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다 그들을 매장했고, 그래서 장례의식도 지극히 초라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우연 속에 그들은 왕릉 건축자들이자 무형 속에 순장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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