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商千/權容浩/姜秉哲,<中國古代의 雜技>,울산대 출판사,2010.
제2장 한위육조(漢魏六朝) 백희(百戱)의 형성과 발전
전한 고조 유방은 진과 초를 멸하고 나라를 세웠지만 국력이 여의치 않아 흉노(匈奴)와 같은 강적을 피하기 위해 “화친”을 맺었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기를 지나 전한 무제 유철(劉徹)에 이르면서 국력이 비로소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그가 군대를 두 차례 파견하여 국경을 침범하는 강력한 흉노족에게 큰 타격을 가하여 변방을 안정시키자 사회는 안정되어갔다. 한나라 초기에는 경제적 방면에서 수리사업을 일으키고, 새로운 농기구와 새로운 경작법을 비롯한 선진화된 농업기술을 보급하여 농업생산력을 회복시켰고, 상공업도 점차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사회경제의 발전과 문화생활의 필요로 말미암아 민간예술인의 춤이나 잡기도 이에 상응하는 발전을 이루었다. 정부의 정치나 외교상의 필요와 오락에 대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한 왕실은 잡기와 무도공연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 때문에 선진 시기의 각저희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고 동시에 외국의 가무․잡기․마술의 성과를 흡수하여 새롭게 변모시킴으로써 다양한 기예를 포함하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공연방법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백희(百戱)라고 하였다.
한 무제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 봄, 수도 장안(長安)에서 손님을 환영하는 대규모 백희 합동공연을 열어 국내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300리 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관람하였다(三百里內皆觀)”. 이와 관련된 기록은《사기․대원열전(大宛列傳)》과《한서․무제본기(武帝本紀)》에 보인다. 그중〈대원열전〉에는 서역과 이집트에서 온 잡기에 능한 마술사인 “선현인(善眩人)”도 중원에 초청되어 와서 대규모 공연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서로 배우고 기예를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대 때는 “관(觀)”이 무척 많았다. “관”은 누각이 있는 비교적 큰 건축물로, 장안에만 24개의 “관”이 있었고, 방술․관람․연회․오락에 사용되었다. 그 중에 “평악관(平樂觀)”은 각종 잡기와 무도를 전문적으로 공연하는데 사용되었다. 당시에 한나라는 국력이 강성하여 사방에서 조공하러 왔다. 이 때문에 잡기와 무도로 외국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행사들이 많아져 사회에 끼치는 영향도 커졌고, 아울러 문인들의 흥미도 끌어들이게 된다. 후한 사람 이우(李尤)의《평락관부(平樂觀賦)》에는 잡기공연장과 연출하는 상황을 비교적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어 우리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한대의 잡기공연은 황실과 내정(內廷)에만 국한되지 않고, 민간에서도 널리 성행하였다. 산동성 기남현 북채촌(北寨村)에서 출토된 후한 때의 무덤에서 돌에 새긴 벽화 60여 점이 발견되었다. 그 묘혈(墓穴) 가운데 방 편액상의 악무백희도(樂舞百戱圖)는 고대의 흥미로운 잡기 공연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규모가 상당한 민간의 한 잡기단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 대형 한대 조각(雕刻)은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구슬을 저글링 하는 “도환(跳丸)․칼을 저글링 하는 도검(跳劍)”과 장대를 받치는 “대간(戴竿)” 공연이다. 왼쪽 상단부에 긴 수염을 한 사람이 칼 네 자루와 구슬 다섯 개로 저글링을 하고, 약간 오른쪽에 한 사람이 이마 위에 십자형 장대를 하나 받치고 있는데, 장대 위에 가로로 놓인 나무의 양쪽 끝에 어린아이 두 명이 전신을 거꾸로 한 채 공중에서 회전하고 있다. 이것은 후한 사람 장형(張衡; 73~139)의《서경부(西京賦)》에서 “갑자기 몸을 거꾸로 하여 발을 장대에 걸치니, 떨어질 듯 하다가 다시 연결되는 하네(突倒投而跟掛, 譬隕絶而復聯)”라고 형용한 고난도의 아슬아슬한 동작이다. 장대 끝에 원반이 하나 놓여 있고, 어린아이가 복부를 원반에 붙이고 공중에서 빙빙 회전하고 있다. 아래에는 한 사람이 일곱 개의 쟁반 앞에서 춤을 추는 동작을 하고 있는데, 심금을 울리는 칠반무(七盤舞)를 공연하는 듯 하다.
둘째, 악대(樂隊)가 조각되어 있는데, 경(罄)이나 종을 치고, 흙으로 만든 피리인 훈(壎)을 불며, 거문고를 타고 있고, 우보(羽葆)1)가 달린 건고(建鼓)2)를 두드리며 음악소리로 연출에 맞추고, 음악의 박자로 공연을 지휘하는 사람도 있다.
셋째, 줄을 타는 주삭(走索) 공연이다. 여자아이 세 명이 줄 위에서 공연을 펼치고, 줄 아래에는 날카로운 칼 네 자루를 거꾸로 꽂아놓았다. 좌우의 여자아이 두 명이 줄 위에서 사뿐하게 뛰고 있고, 중간의 여자아이는 두 손으로 줄을 잡고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 이 모습은 잡기 기술의 정교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러한 공연이 상당한 위험성을 띠고 있음을 설명한다. 조각의 아래쪽과 오른쪽은 어룡만연도(魚龍曼衍圖)이다. 봉황으로 분장한 사람도 있고, 짐승 모습의 가면을 쓰고 뱀 모양의 도구를 든 사람도 있고, 공중제비를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사람과 동물로 분장한 용 한 마리가 큰 항아리를 지고 있는데, 한 여자가 병 입구에 서서 술이 달린 긴 대나무 장대를 휘두르며 공연을 하고 있다. 용의 앞뒤로 한 명씩 두고 왼손에는 짧은 막대를 오른손에는 요고(搖鼓)를 흔들고 있는데, 항아리 입구에 서 있는 여인과 어울려 공연을 하는 듯하다.
그림8 산동기남한묘벽화(山東沂南漢墓壁畵)―악무백희도(樂舞百戱圖)
[《중국잡기예술》화책(畵冊)]
넷째, 마희(馬戱) 공연이다. 좌우에 여자 두 명이 쏜살 같이 달리는 말 위에서 양손으로 말 등을 짚고서 물구나무를 서서 한 손으로는 창을 잡기도 하고, 술이 달린 기다란 줄을 휘두르기도 한다. 중간에는 세 마리의 말이 끄는 한 대의 희거(戱車)3)가 있는데, 수레 위의 수레몰이꾼이 왼손에 세 가닥의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은 말채찍을 잡고 있다. 수레 안에는 장대 두 개가 세워져 있다. 그중 한 장대 위에는 대고(大鼓)가 꿰어져 있고, 북 위에 세워진 수 척 높이의 장대에는 네모난 발판이 마련되어 있다. 발판 위에는 한 어린아이가 두 손을 발판에 대고 물구나무를 서는 자세로 회전을 하고 있다. 수레 안에는 네 사람이 퉁소와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고 있다. 다른 장대 위에는 네모난 발판이 있고, 아래에는 아주 긴 술이 달려 있는데, 백희 공연을 알리는 상징성 깃대로 보인다. 희거의 뒤쪽에는 세 사람이 앞에다 북 세 개를 놓고, 각자 왼손으로 긴 막대기를 쥐고 있는데, 아마도 북을 치거나 공연장을 지키는 용도의 도구인 것 같다.
이 거대한 한대 조각도화(雕刻圖畵)는 당시 잡기 공연의 형식과 규모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중국의 잡기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설명해준다.
잡기예술은 동한 말년과 삼국시대로 발전하면서 조조(曹操) 부자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정치 수단으로써 각지의 예인들과 방사(方士)들을 경사로 불러들여 정리 개편했는데, 첫째는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작당하여 모반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궁중오락으로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북위(北魏) 태조(太祖) 도무황제(道武皇帝) 척발규(拓跋珪) 천흥(天興) 6년(403) 겨울에 대규모의 잡기 공연을 거행하였다.
태악, 총장, 고취 등의 음악을 관장하는 부서에 조서를 내려, 잡기를 보완하도록 하여, 오병․각저․기린․봉황․선인․장사․백상․백호 및 온갖 맹수․어룡․벽사․녹마선거․고긍백척․장교․연동․도환․오안을 만들어 백희를 갖추었다. 대향이 전정에 마련된 것은 한․진 시기의 옛 제도이다. 태종 초에 또 이를 증수하고, 대형가무곡을 지어 만드니, 종고의 음악으로 바뀌었다.(詔太樂, 總章, 鼓吹, 增修雜技, 造五兵․角觝․麒麟․鳳凰․仙人․長蛇․白象․白虎及諸畏獸․魚龍․辟邪․鹿馬仙車․高緪百尺․長趫․緣橦․跳丸․五案以備百戱. 大饗設之於殿庭, 如漢晉之舊也. 太宗初, 又增修之, 撰合大曲, 更爲鐘鼓之節.)(《魏書․樂志》)
이 사료의 태종은 북위 명원황제(明元皇帝) 척발사(拓跋嗣)를 가리킨다. 백희를 공연할 때의 음악반주는 주로 대곡이었다. 대곡은 처음과 끝이 있는 완전한 체계를 갖춘 곡으로, 잡기공연은 대곡의 요구에 맞기만 하면 반주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잡기는 음악과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비교적 완전한 내용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북제 시기에 잡기는 또 새롭게 발전하였다.《통전(通典)․악육(樂六)․산악(散樂)》과《수서(隋書)․음악지(音樂志)》에 의하면, 북제 후주(後主) 고위(高緯) 무평(武平) 연간(570~575)에 아래와 같은 공연이 있었다고 한다.
어룡난만․배우․난쟁이․산거․거상․발정․종과․살마․박려 등의 기괴하고 신비로운 것들이 백 여 가지나 되었는데 이름하여 백희라고 하였다(魚龍爛漫․俳優․侏儒․山車․巨象․拔井․種瓜․殺馬․剝驢等奇怪異端, 百有餘物, 名爲百戱).
이중 발정․종과․살마․박려 등의 “기괴하고 신비로운 것”이 바로 비교적 대형의 마술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잡기는 양한 시대의 토대 위에서 발전을 거듭 하는데,《서경잡기》․《포박자》․《진서(晉書)》․《업중기(鄴中記)》․《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남제서(南齊書)》․《수서(隋書)》․《태평광기(太平廣記)》등의 책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서진(西晉) 사람 부현(傅玄; 217~278)의《정도부(正都賦)》에는 다음과 같은 잡기종목을 언급하고 있다.
도로연간․도환․척굴․비검․무륜……(都盧緣竿․跳丸․擲掘․飛劍․舞輪……)
또 진나라 사람 갈홍의《포박자․변문(辨問)》에는 다음과 같은 잡기종목들을 기록하고 있다.
도환․농검․유봉․투협․이긍․등당……(跳丸․弄劍․踰鋒․投狹․履緪․登幢……)
이상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잡기종목들은 진대에 가장 흔히 보였던 것으로, 가장 환영을 받았던 레퍼토리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마희(馬戱)․후희(猴戱)․환술(幻術)이 크게 발전하면서 사자춤도 나타났다. 이러한 레퍼토리는 선진양한의 잡기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내용을 더하여 중국잡기의 발전에 새로운 공헌을 하였다.
1) 우보(羽葆): 새의 깃으로 장식한 의장용 수레의 양산--옮긴이.
2) 건고(建鼓): 서서 북을 칠 수 있도록 세워놓은 북으로, 주로 전쟁 때 지휘용으로 사용된다--옮긴이.
3) 희거(戱車): 공연할 때 사용하는 수레--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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