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商千/權容浩/姜秉哲,<中國古代의 雜技>,울산대 출판사,2010.
5. 무무(巫舞)․나무(儺舞)․무무(武舞)
무당춤인 무무(巫舞)․악귀를 쫓는 춤인 나무(儺舞)․칼춤인 무무(武舞)는 순수한 잡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 잡기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이후 잡기의 발생과 발전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무무는 무격무(巫覡舞)라고도 한다. 중국의 무속문화는 대략 원시사회 후기에 기원한다.《국어․초어(楚語)》에는 “남자에게 신이 내리면 격이라 하고, 여자에게 신이 내리면 무라고 한다(在男曰覡, 在女曰巫.)”라고 하였다. 무격은 사람을 대신해 신에게 기도하여 신명의 보호를 구하는 동시에 신의 뜻을 사람에게 전해준다. 무사(巫史)는 귀신을 대신해서 말을 하고, 나라의 정치와 군주의 행동을 지도할 수 있다. 상고시기에는 사회 전체가 무인의 지배를 받았다. 무인(巫人)이 신을 섬길 때에는 반드시 노래와 춤을 이용하였다. 그래서 왕국유(王國維; 1877∼1927)는《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에서 “고대의 무인은 실제로 가무를 본분으로 하여 신과 사람을 즐겁게 한 사람이었다(古代之巫, 實以歌舞爲職, 以樂神人者也.)”라고 하였다. 하나라는 “천제(天帝)”를 숭상하였고, 상나라와 은나라는 귀신을 믿었는데, 특히 점을 중시했기 때문에 무인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았다. 갑골문의 기록에 따르면, 상나라의 왕은 어떤 경우에 직접 춤을 추며 제사를 올리고 점복(占卜)을 행했는데, 우(禹) 임금이 남긴 우보(禹步; 巫步라고도 함)를 모방하여 춤을 추었다고 한다. 동진 사람 갈홍의《포박자(抱朴子)》에는 고대의 무보(武譜)라고 할만한 “우보법(禹步法)”을 기록하고 있다. 하․상 시기에는 무인의 주관 하에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쳤다. 그들은 손에 짐승의 꼬리나 새의 깃털을 들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는데,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무인들이 행하는 가무를 무무(巫舞)라고 했는데, 모든 씨족 혹은 사회의 인정과 중시를 받았다. 무무의 동작은 특이하면서도 우아했으며, 그들이 손에 들고 있었던 채색 장식물은 만사형통을 상징하였다. ‘무무’는 제사를 지내고 점을 보는 것 외에 기우제(祈雨祭)에도 이용되었다.《은허서계(殷墟書契)》에는 “오늘밤 무당이 춤을 추며 기우제를 올리니 비가 내렸다.(今夕奏舞★(有)從雨.)”라고 하였다. 무격은 귀신에 의지했지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표현형식 및 점차 더해진 특이한 동작과 신기한 내용 가운데 어떤 것들은 잡기와 관련이 있다.
‘나무’는 ‘무무’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것이다. 고대인들이 매년 음력 섣달 초파일에 “천지신명에게 납제를 올릴 때(臘祭百神)”, 무인을 청해 가무를 행하여 역귀(疫鬼)를 쫓고 재앙을 없애는 동시에 하늘에다 복을 빌었다. 후에 매년 섣달 그믐날 밤에 ‘무무’를 추며 역귀와 요괴를 쫓았다. 사냥했을 때 포획한 짐승을 신에게 바치고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데, 이 때에도 ‘무무’를 추어야 했다. 이런 역귀를 쫓고 제사를 지낼 때의 ‘무무’를 개혁하여 고대의 ‘나무’를 형성하였다. 나(儺)는 본래 집을 뒤져 역귀를 쫓아내는 것이었다. ‘나무’는 일반적인 ‘무무’와 달리 변화가 큰 편이었다.《논어》․《예기》․《한서․예의기(禮儀記)》․《여씨춘추》․《회남자》등의 책에도 역귀를 물리치는 의식인 나의(儺儀)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 ‘나의’는 1년에 세 차례 거행하였다. (1) 봄철에 “백성들이 역귀를 물리치는 의식을 행할 때, 궁궐 안으로 통하는 9개의 문에다 희생물을 잡아 그 피를 뿌려 한기와 음기인 봄기운을 그치게 한다(國人儺, 九門磔禳, 以畢春氣)”. (2) 가을철에 “천자가 나서서 역귀를 물리치는 의식을 거행하여 질병을 멈추게 하고 더운 기운을 멀리하게 하여 가을의 기운을 통하게 한다(天子乃儺, 御佐疾, 以通秋氣)”. (3) 겨울철에 “천자가 유사에게 역귀를 물리치는 대나 의식을 거행하도록 명한다. 강한 음기가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사방의 문에다 짐승의 피를 뿌려 역귀를 물리치고, 진흙으로 만든 소를 사람들에게 보여 농경의 시작인 입춘을 알리며, 겨울의 한기인 음기를 그치게 한다(命有司大儺, 旁磔, 出土牛以送寒氣)”. 여기에서 말하는 “봄기운을 그치게 한다(畢春氣)”․“가을의 기운을 통하게 한다(通秋氣)”․“한기를 그치게 한다(送寒氣)”라고 한 것이 ‘나’가 두어지는 목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건강, 즉 역귀를 물리치는 일과 관련이 있다. 동한 사람 채옹(蔡邕)의《독단(獨斷)》에 “역신(疫神)”의 유래에 대해 소개한 것이 있다. 고대의 제왕 전욱(顓頊)의 세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어 귀신이 되었는데(生而亡去爲鬼)”, 하나는 장강(長江)에서 전염병을 옮기는 역귀인 온귀(瘟鬼)가 되었고, 하나는 약수(若水)에서 물귀신이 되었으며, 하나는 사람이 사는 가옥의 지도리 모퉁이에 붙어살면서 어린아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전욱은 방상씨에게 역귀를 물리치도록 명했다.《주례․하관(夏官)․방상씨(方相氏)》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를 주관하는 방상씨가 손바닥에 곰 가죽을 끼고, 황금으로 만든 4개의 눈을 붙인 가면을 쓰고, 검은 웃옷에 붉은 치마를 입고서, 창을 잡고 방패를 흔들어 대며, 백관들을 거느리고 나의를 거행하는데, 집 안을 뒤지며 역귀를 쫓아냈다.(方相氏, 掌蒙熊皮, 黃金四目, 玄衣朱裳, 執戈揚盾, 帥百隶而時難[儺], 以索室驅疫.)”
동한 사람 정현(127~200)은 “곰의 가죽을 뒤집어쓴 것은 역귀를 놀라게 하여 쫓아내려 한 것으로, 지금의 가면과 같은 것이다(冒熊皮者, 以驚驅疫癘之鬼, 如今魌頭也)”라고 주석을 달았다. “기두(魌頭)”는 두 눈만 드러내는 목제 가면을 뜻한다. 요종이(饒宗頤)의《은상갑미작석[나]고(殷上甲微作裼[儺]考)》에는 “나의는 은나라에서 비롯되었으며, 원래 은나라의 예법이었다(儺肇於殷, 本爲殷禮)”라고 하였다. 선진시기부터 명청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역사책에 ‘나’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는데, 어떤 것은 기록이 아주 상세하여 2, 3천년 역사의 민속이 되었다. 고대의 ‘나무’를 행할 때는 거의 전 씨족의 남녀노소를 동원하여 참가시켰는데, 4개의 눈이 달린 황금가면을 머리에 쓴 방상씨가 각종 짐승 모양을 본뜬 가면을 쓴 사람들을 거느리고 공연했으며, 게다가 공연할 때 “북을 치고 크게 소리를 외쳐, 불길한 역귀들을 쫓아내었다(擊鼓大呼, 驅逐不詳)”. 그 중 방상씨로 분장한 사람은 그 씨족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나무’는 소박하고 동작은 힘이 있으며 재미도 있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을 잘 구현하였다. 사람을 동물로 분장시켜 가무를 하도록 한 것은 한대 이후로 줄곧 잡기의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예를 들어 용무(龍舞)․사자무(獅子舞)가 바로 그것이다. 은․주 시기에 방상씨가 가면을 쓰고 역귀를 물리치던 것에서 육조시기에 이르러 음력 섣달 초파일에 역귀를 물리치던 것을 “이민족의 머리모양을 하고 금강역사로 분장하는 것(戴胡頭及作金剛力士)”(《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으로 바꾸었는데,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나무’는 송대에 이르러 인물과 춤이 내용면에서 크게 바뀌었다. 남송 사람 맹원로(孟元老; 생졸년 미상)의《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의하면, 송대 궁정의 ‘나무’는 방상씨․12종의 짐승․어린 아이인 진자(侲子) 등의 인물들이 이미 사라졌고 대신에 진전장군(鎭殿將軍)․문신(門神)․판관(判官)․종규(鍾馗)․소매(小妹)․토지(土地)․조신(竈神) 같은 인물이 출현했다고 한다. “모두 천명이 넘는 인물(共千餘人)”들이 참가하여 규모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무판(舞判)․무종규(舞鍾馗)라고 하였다.
무무(武舞)는 당시의 문무(文舞)와 구별되는 춤이었다. 북송사람 진양(陳暘; 1064~1128)의《악서(樂書)․악무(樂舞)》에는 문덕(文德)으로 천하를 복종하게 하는 것을 ‘문무’라 하고, 무공으로써 천하를 얻는 것을 ‘무무’라고 했는데, “하나라 우 임금 때의《대하》위로는 문무이고, 상나라 탕 임금 때의《대호》이후로는 무무이다(《大夏》而上, 文舞也;《大濩》而下, 武舞也.)”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무’를 공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새 깃털․채색 명주비단․암소 꼬리를 들고 춤을 추는데, 뭇 짐승들이 다 같이 춤추는 것을 상징한다. ‘무무’를 공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붉은 방패․옥 도끼를 들고 춤을 추는데, 자태의 용맹함은 전쟁을 상징하였다. 그래서 ‘문무’와 ‘무무’를 “간우무(干羽舞)”로 통칭하였다.《주례․춘관(春官)․대사악(大司樂)》과 정현의 주석에는 황제(黃帝)의《대권(大卷)》․요 임금의《대성(大成)》[함지(咸池) 혹은 대장(大章)이라고 함)․순 임금의《대소(大韶)》[구소(九韶)라고도 함]․하나라 우 임금의《대하(大夏)》[구성(九成)이라고도 함]는 모두 ‘문무’라고 기록하였다. 은나라 탕 임금이 걸왕(桀王)을 멸하고 주나라 무왕이 주(紂)를 정벌한 것은 모두 무공으로 천하를 얻었기 때문에 은나라 탕 임금 때의《대호(大濩)》와 주나라 무왕 때의《대무(大武)》는 유명한 무무가 되었다.《대무》는 무왕이 은상(殷商)을 멸하고 이를 경축할 때의 공연으로,《여씨춘추》에 따르면 이 춤은 주공 단(周公旦)이 지었다고 하는데 악무 안에 찌르고 치는 무술 성격의 동작을 가미하고 있기 때문에 후대에 군사를 훈련시키는 내용으로 발전하였다.《악기(樂記)․빈모가(賓牟賈)》에 공자가 이 춤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제순원년(帝舜元年)” 조항에는 “순 임금이 즉위하자, 백성들이 석경을 두드리며《구소(九韶)》를 노래하자, 뭇 짐승들이 따라 같이 춤을 추었다(舜卽帝位, 擊石拊石, 以歌九韶, 萬獸率舞)”라는 기록이 있다. 동진 사람 왕가(王嘉)는《습유기(拾遺記)》“신농씨(神農氏)” 조항에서 “백성들이 신농씨의 덕을 칭송하고 태평성세를 노래하자, 뭇 짐승들이 따라 다 같이 춤을 추니, 팔음이 음률에 맞아 조화로웠다(奏九天之和樂, 百獸率舞, 八音克諧)”라고 기록하였다. 일찍이 신농씨와 요순 시기에 이미 “뭇 짐승”들을 모방하거나 “뭇 짐승” 모양의 가면을 쓰고 행한 가무가 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아마도 무무(巫舞)․나무(儺舞)․무무(武舞)의 전신이었을 것이다.《주역․점괘(漸卦)》“효사(爻辭)”에서 “기러기가 구름 위로 날아간다. 그 깃털은 의식을 거행할 때 쓸모가 있다(鴻漸於陸, 其羽可用爲儀)”라고 한 구절이 바로 기러기를 사냥하여 그 깃털로 춤을 추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무무(巫舞)․나무․무무(武舞)는 상고시기의 민속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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