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中國雜技

제1장 先秦 잡기의 발생 - 6. 축국(蹴鞠)․추천(鞦韆)

마장골서생 2009. 9. 7. 21:19

李商千/權容浩/姜秉哲,<中國古代의 雜技>,울산대 출판사,2010.

 

6. 축국(蹴鞠)추천(鞦韆)


 공을 차는 경기인 축국은 답국(蹋鞠)이라고도 한다. 국(鞠)은 고대 피구(皮球)의 일종이고, 축(蹴)은 “차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축국은 바로 “공을 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진시기의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공을 차는 놀이를 좋아하였다. 서한 사람 유향(劉向: 기원전 9년∼기원전 8년)의《별록(別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식날에 하는 축국은 황제가 병사를 훈련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군세를 근본하고 있다. 전국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寒食蹴鞠, 黃帝所造, 以練兵士, 本兵勢也, 或云起於戰國.)


당나라 사람 채부(蔡孚)는《타구편서(打球篇序)》에서 유향의 말에 더욱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공을 치는 놀이인 타구는 축국의 옛날 놀이이다. 황제가 만든 병법으로 병사들을 훈련하여, 재목감을 알아냈다.(打球者, 往昔蹴鞠古戱也. 黃帝所作兵勢, 以練武士, 知有材也.)

 

《한서․예문지》“병기교십삼가류(兵技巧十三家類)”에《축국》2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놀이하는 과정 중에 병사들의 체력․인내력․속도․민첩성을 단련시키고 향상시킬 수 있어 병사를 훈련시키는데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축국은 고대의 전쟁․군사훈련과 관련이 있다. 명나라 사람 진계유(陳繼儒)는《태평청화(太平淸話)》에서 “축국은 헌원씨 황제 후부터 시작되었다(蹴鞠始於軒後)”라고 하여 유향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지만 상당수의 문헌은 축국이 춘추전국시기에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였다.《사기․소진열전(蘇秦列傳)》에 산동성 임치(臨淄) 일대 사람들은 부유하여 항상 “피리를 불고 큰 거문고와 작은 거문고를 타고, 축을 치고, 투계를 하고, 개에게 달리기 시합을 시키며, 주사위 놀이인 육박을 하며, 축국 하는 것(吹竽․鼓瑟․彈琴․擊筑․鬪鷄․走狗․六博․蹹鞠)”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동진 사람 갈홍은《서경잡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부친 유계(劉季)는 젊은 시절 유랑민이나 불량 소년들과 축국 하는 것을 “좋아했다(爲歡)”. 후에 유방이 황제가 되자 태상황으로 봉해진 유계는 궁궐에 너무 오랫동안 있어 늘 마음이 “울적하고 즐겁지 않았다(悽悵不樂)”. 유방은 이를 알고 궁궐 안에 부친의 고향인 풍읍(豊邑)을 모방하여 “신풍(新豊)”이라는 구장을 세우고는 축국을 잘하는 사람들을 입궁시켜 태상황과 함께 놀 수 있도록 해주었다. 동한 사람 이우(李尤)는《국성명(鞠城銘)》에서 구장․용품․경기인원․판정․규칙을 비롯하여 심판원․선수의 도덕성(“鞠政”)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는 축국이라는 기예가 춘추전국시기에 이미 시작되어 진․한대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명․청대에 와서도 여전히 쇠퇴하지 않았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네를 타는 추천(秋千; 옛날에는 鞦韆이라고 하였음)은 오늘날 민간에서도 여전히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고공에서 펼치는 고난도의 “추천비인(秋千飛人)”․“낭교비인(浪橋飛人)”․“붕상비인(蹦牀飛人)” 등의 잡기가 바로 고대 ‘추천’잡기의 토대 위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이다. 남조 양나라 사람 종름(宗懍)은《형초세시기》에서《고금예술도(古今藝術圖)》의 일문(佚文)을 인용하여 다음과 기록하였다.


추천은 북방민족인 산융의 놀이로, 날렵하고 씩씩해지도록 연습하였다. 제나라 환공이 산융을 정벌할 때 중국으로 전래되었다.(秋千, 北方山戎之戱, 以習輕趫者. 齊桓公伐山戎, 流傳入中國.)


이것은 고대 하북(河北) 일대에 거주하던 북방민족인 산융족의 놀이로, 춘추시기에 중원으로 전래된 후 강남에도 전해졌다. 당나라 사람 고무제(高無際)가 지은《한무제후정추천부(漢武帝後庭鞦韆賦)》에는 서한 초기에 후궁에서 추천 놀이를 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종름은《형초세시기》에서 유향의《별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봄과 가을에 높은 나무에다 긴 줄을 걸어 놓는다. 남녀가 나들이옷을 입고서 그 위에 앉거나 서면 밀거나 당겨주었는데, 이를 추천이라고 하였다. 초나라 때는 민간에서 “시구”라고 하였고,《열반경》에서는 “견삭”이라고 하였다(春秋懸長繩於高木,士女袨服,坐立其上推引之, 名鞦韆. 楚俗謂之“施鉤”,《涅槃經》謂之“罥索”.).


이런 놀이는 불가(佛家)에도 있었던 것 같다. 청나라 사람 저인획(褚人獲)의《수당연의(隋唐演義)》제69회에 추천을 타는 소후(蕭后)의 “날렵하고 거침없는(體態輕狂)” 매혹적인 자태를 묘사하고 있다. 당태종 이세민은 이를 보고 “신선의 놀이(半仙之樂)”라고 칭찬하였다. 왜냐하면 예인이 공중에서 추천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나는 우아한 자태가 신선이 하늘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듯한 모습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수당연의》로부터 이런 잡기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오락방식이 수․당 때에 크게 성행하였고, 명․청대에도 여전히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인획의 소설에 묘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7 은근송보완(殷勤送寶玩)

     (《수호전전(水滸全傳)》삽도(揷圖)에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