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商千/權容浩/姜秉哲,<中國古代의 雜技>,울산대 출판사,2009예정.
4. 누환(累丸)․농검(弄劍)
구슬을 저글링 하는 누환(累丸)과 칼을 저글링 하는 농검(弄劍)은 춘추전국시기 남방에서 발생한 잡기로, 격양과 투호의 영향 혹은 계시를 받고, 또 중국 초기 무술과 결합하여 생겨났다.
누환은 농환(弄丸)이라고도 한다.《장자(莊子)․달생편(達生篇)》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가 초나라를 지나가다 등이 굽은 사람이 숲에서 한치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게 “매미(知了)”를 잡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공자가 탄복하며 “대단하시구려.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겁니까?(子巧乎, 有道邪?)”라고 물었다. 등이 굽은 노인은 오늘처럼 이런 기술을 습득하게 된 것은 장기간 숙달시킨 결과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처음 연습을 시작하면서 5~6개월의 시간이 흐르자 손에 두 개의 구슬을 포개놓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거의 실수 없이 매미를 잡았고, 손에 세 개의 구슬을 포개놓을 수 있게 되면서 열에 아홉은 성공하였으며, 손에 다섯 개의 구슬을 포개놓을 수 있게 되면서 손으로 물건을 줍듯이 전혀 실수 없이 잡았다는 것이다.
《장자․서무귀편(徐無鬼篇)》에 춘추전국시기 농환의 고수 웅의료(熊宜僚)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초나라의 용사 시남의료님께서는 그저 구슬로 놀이하는 것으로 양가의 분쟁을 화해시키셨습니다.(市南宜僚弄丸, 而兩家之難解.)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 후대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성현영(成玄英)의 소(疏)에는 “초나라의 백공 승이 모반을 일으켜 영윤 자서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사마자기(司馬子綦)가 ‘웅의료는 용사입니다. 만약 그를 얻는다면, 500명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그를 굴복시키려고 사자를 보냈다. 의료는 구슬을 아래위로 돌리기만 할 뿐 사자와 말을 하지 않았다……백공은 의료의 마음을 얻지 못해 모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양가의 분쟁을 해결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楚白公1)勝欲因作亂, 將殺令尹子西. 司馬子綦言“熊宜僚勇士也, 若得, 敵五百人.” 遂遣使屈之, 宜僚正上下弄丸而戱, 不與使者言……白公不得宜僚, 反事不成, 故曰兩家之難解.)”라고 하였다. 그러나《환경(丸經)․서(敍)》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옛날 초나라 장왕(莊王: ?~기원전 591)이 송(宋)나라의 수도 시남(市南)에서 용사 웅의료를 얻었다. 옹의료는 농환을 잘하여, 병사들 앞에서 9개의 구슬로 저글링을 하였다. 송나라 병사들은 싸움을 멈추고 구경하는 바람에 결국 패전하였고, 초나라 장왕은 “적과 싸우지도 않고 패왕이 되었다(免於敵而覇)”. 이 두 가지 해석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웅의료가 농환 기술에 뛰어났음을 말해주고 있다.
농검은 도검(跳劍)이라고도 한다. 기술적 측면에서 사용하는 도구만 달랐을 뿐 농환과 대체적으로 같은 종류였으나, 난도가 있어 상당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열자․설부편(說符篇)》에 고대 때 농검에 능했던 잡기예인 난자(蘭子)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는 자신의 기예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송원(宋元)을 찾아갔다. 그는 달리는 말 위에서 쌍검을 휘둘렀고, 또 “일곱 자루의 칼을 공중으로 던져 두 손으로 저글링을 했는데, 다섯 자루의 칼은 내내 공중에 떠있었다(弄七劍, 迭而躍之, 五劍常在空中)”. 이것을 농검 혹은 도검이라고 하였다. 송원은 이 묘기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바로 금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大驚, 立賜金帛)”. 후에 난자라고 불리는 연희(燕戱)에 뛰어난 잡기예인도 어떤 사람이 농검을 잘해 상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겨 송원을 찾아가 자신의 재주를 봐줄 것을 청했으나 뜻밖에도 송원은 그에게 상을 하사하기는커녕 그를 한 달 남짓 감옥에 가뒀다가 풀어주었다.
산동성 기남현 동한 묘에서 발굴된 화상전(畵像磚)에 한 노인이 웃옷을 벗고 맨발로 구슬과 칼을 저글링 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는 오른손으로 단검 세 자루를 공중에 던지고, 왼손으로 단검 한 자루를 잡는 동시에 무릎을 굽히며 발을 뒤를 향해 차자 뒤쪽에서 5개의 작은 구슬이 솟구친다. 이것은 칼과 구슬을 동시에 저글링 하는 고난도의 위험한 동작으로, 웅의료의 구슬 저글링이나 난자의 칼 저글링보다 훨씬 출중하고 연마하기 어려운 기예였을 것이다. 사천성 성도시 봉황산 한나라 초기 묘에서 출토된 화상석에는 예인이 칼과 구슬을 저글링 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잡기는 당송시기에 새로운 발전을 이루어 청대까지 이어졌으며, 현대의 리듬체조 속에조차도 계승되어 발양되고 있다.
그림6 사천성 성도 봉황산 서한의 묘에서 출토된 화상석
(《한대회화선집(漢代繪畫選集)》에 보임)
1) 백공(白公): 백읍(白邑)의 장(長)을 뜻한다--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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