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秦始皇陵

3. 수상악무(水上樂舞)

마장골서생 2009. 12. 1. 17:44

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3. 수상악무(水上樂舞)


짙푸른 강과 호수의 물은 깊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물이 얼마나 깊은지 물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두 사람들에게 신비스러운 느낌을 준다. 고인들은 더욱 이렇게 산 위에 신선의 거처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물 속에 귀신의 집이 있다고도 여겼으며, 심지어는 물이 하늘에 통할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 진 혜문왕(惠文王)은 일찍이 초(楚)나라 사람을 저주하는 글을 새긴 옥판(玉版)을 큰못의 물귀신에게 보내어 초나라 사람들이 불행해지를 바랐다. 이것이 바로〈초나라를 저주하는 글(詛楚文)〉이다.

진시황은 추연(鄒衍)의 다섯 가지 덕이 처음과 끝을 관장한다는 “오덕종시(五德終始)”의 학설에 근거하여 물(水)․불(火)․나무(木)․쇠(金)․흙(土)의 오덕 중에서 진나라는 수덕(水德)으로 주(周)나라의 화덕(火德)을 대체했다고 하여 심지어 황하를 봉쇄하여 수덕으로 삼았다. 수덕은 북방을 상(上)으로 삼았다.

진시황제는 자신의 능원을 설계할 때에도 이 점을 잊지 않아 능의 북쪽에 못과 늪을 만들었다. 이것은 주나라 사람들의 습속을 계승한 것이다. 주나라의 도읍은 장안이었다. 주 문왕(文王)은 장안 서쪽 30리 되는 곳에 영소(靈沼)를 만들었는데, 바로 영유(靈囿) 중에 건설한 큰못이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기를 영소에는 어미사슴이 놀고, 백조가 날며, 물고기가 물에서 뛰어오른다고 하였다.

 

구리로 만든 물새(銅水禽)

 

진시황제릉은 함양의 구도에 따라 건설되었는데, 능 북쪽의 못과 늪은 최근에 발견된 것이다. 2001년부터 2003년 초까지 진시황릉의 외성 동북쪽 모서리에서 900m떨어진 곳에 700㎡의 순장갱을 하나 발굴했는데, 이 갱에서 출토된 도용과 청동 물새는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자아내었다. 갱에서 44건의 청동 물새를 출토했는데, 식별이 가능한 것으로는 청동 선학․청동 백조․청동 기러기 등이 있다. 그것들의 몸통에는 아직 부분적인 색채가 남아있다. 그 중에 청동 백조가 14건이다. 이 청동 물새들은 모두 갱 밑바닥 양측의 침목 층계 위에 비스듬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양측 침목 층계 아래에 홈통이 있는데 물이 흘렀던 홈은 강물을 상징한다. 청동 백조의 몸길이는 57.6㎝에 높이는 27.5-47.5㎝이다. 한 청동 선학은 높이가 77㎝에 몸길이가 125㎝이다. 청동 기러기 16건은 몸길이가 48㎝에 높이가 40㎝이다. 이렇게 많은 물새들은 강물이 흘러드는 홈통 양측에 깃들어 재잘거리며 자유로웠을 것이다.

이 갱의 다른 한 곳에서 대형 도용 15존이 출토되었다. 이미 복원한 2존에서 보면 1존은 다리를 뻗은 자세로 앉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 몸을 곧추 세우고 앉아 두 다리를 앞으로 뻗고 윗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손바닥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많은 자취에서 보면 이 토우는 왼손에 긴 물건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악기 같기도 한데, 오른손은 아래로 악기의 줄을 퉁기는 듯 해서 연주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머리에 띠를 하고 몸에는 긴 저고리를 걸쳤으며 아래는 긴 바지를 입고 있다. 허리에는 혁대를 매고 있고 오른쪽 허리 끝에는 장방형의 납작한 주머니가 매달려 있으며, 머리는 약간 낮추고 표정과 태도는 집중하는 모습으로, 정부의 관원이 아니라 기예에 정통한 음악인이라는 것을 더욱 잘 보여준다. 다른 1존은 꿇어앉은 도용으로 왼쪽 팔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리고 두 무릎은 바닥에 꿇고 있는데, 왼쪽 무릎은 앞으로 내밀고 오른쪽 팔은 약간 구부려 위로 들고 있으며, 엄지는 펴고 있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반쯤 오므리고 있다. 흔적에서 보면 오른손 안에 원래 뭔가 장방형의 물건을 잡고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머리에 띠를 하고 몸에는 긴 저고리를 걸쳤으며 허리에는 혁대를 매고 있고 오른쪽 허리 끝에는 장방형의 납작한 주머니가 매달려 있다. 발에는 양말을 신고 있고 눈은 아래를 보고 있으며 얼굴은 온화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토우의 형상에서 보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도용인 것 같다. 15존의 도용은 거의 대부분 아직 복원이 끝나지 않았지만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형상이라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이기도 하고 물새이기도 하며 악무라고도 하는 이것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신선이 하늘을 오를 때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것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할 승선악무도(升仙樂舞圖)이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만들었다는 못과 늪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견우성을 모방하여 위수(渭水)가 함양 도성을 관통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못과 늪을 조성하지 않았다. 한나라 때는 장안성에 많은 못과 늪이 있었다. 한나라 때의 곤명지(昆明池)에는 두 명의 돌 사람(石人) 즉,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서있는데 은하수를 모방한 것이다. 곤명지 북쪽에 호지(鎬池)가 있다. 호지의 신은 호지군(鎬池君)으로 바로 수신(水神)이다. 진시황제 36년에 강신(江神)이 화양현(華陽縣) 평서도(平舒道)에서 관동으로부터 이 땅을 거쳐 돌아올 사신으로 하여금 “금년에 조상이 되는 용이 죽었다(今年祖龍死)”라는 한 마디를 적은 편지를 호지군에게 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신들이 서로 소식을 전하는 장면이다. 장안성 서쪽에 태액지(太液池)가 있다. 태액지 중에 고래를 새긴 돌이 있고, 못 속에 세 개의 작은 산을 만들어 영주(瀛州)․봉래(蓬萊)․방장(方丈)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비석에 어룡(魚龍)․기금(奇禽)․이수(異獸) 같은 것을 새겼다.《서경잡기(西京雜記)》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액지는 주변에 모래가 많고 그 모래 위에는 제호(鵜鶘; 사다새)․자고(鷓鴣; 메추라기)․교청(鵁鶄; 해오라기)․홍준(鴻鵔; 기러기)이 서식하고 있다. 또 백자지(百子池)가 있는데 7월 7일이면 못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부부의 금실은 물론 행복과 장수를 기원하였다. 태액지에도 많은 물새들이 있었고, 특정한 시간에 음악을 연주하며 행복과 장수를 빌었다.

진시황제릉 북쪽의 물새들도 태액지 등의 기능과 같아서 음악을 감상하기도 하고 신에게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진시황제는 육국을 통일한 후에 동해 쪽에 봉래․방장․영주라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동해로 사람을 보내 장생불사의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한 무제도 시황제에게 뒤지지 않는다. 태액지에 삼신산을 만든 것도 이런 함의가 있다. 학(鶴)은 고대에 신격화 된 동물로 장수를 나타낸다. 시황제릉 북쪽의 물새 구덩이인 수금갱(水禽坑) 역시 행운과 행복 그리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그래서 길조(瑞鳥)뿐 아니라 음악도 있는 것이며, 수신을 빌어 기도의 뜻을 하늘에 전달하기도 했던 것이다.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토우(陶樂舞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