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四. 진시황제릉의 부장갱 2 : 위락시설
1. 백희용갱(百戱俑坑)
1999년 5월에 진시황제릉 동남방향의 내외성 사이에서 동서로 40m, 남북으로 15m, 면적이 600㎡나 되는 순장갱을 하나 발견하였다. 시험적인 발굴을 거쳐 매우 보기 드문 일군의 도용들을 출토하였다. 이 도용들은 모두 11기였다. 그것들은 상체에 옷을 걸치지 않았고 아래는 스커트 차림으로 종아리 부분을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채색이 되어 있다. 스커트와 스커트 끈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직물 도안이 되어있다. 이런 도용은 그 장식과 자세에서 보면 진릉에서 한번도 출현한 적이 없는 새로운 부류의 진릉 도용이다. 이런 도용들의 기능은 무엇일까? 그것은 온갖 잡기의 모습을 빚은 백희용(百戱俑)이다. 같은 곳에서 또 구리로 만든 뚜껑 없는 큰솥 하나를 출토하였다. 이런 도용들과 동정(銅鼎)에서 보면 진대 오락문화의 일부를 생동감 있게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오락활동은 제왕의 궁정에서 했던 것으로 모두 제왕 및 그 신하들이 감상하고 즐겼던 것들이다.
백희(百戱)라고 하는 것은 강정(扛鼎; 솥 들어 올리기)․심동(尋棟; 밧줄 타기)․각력(角力; 씨름)․배우(俳優; 연극) 등등과 같은 고대의 산악잡기(散樂雜技)를 가리킨다. 이 놀이활동은 춘추전국 시대에 시작되어 진한(秦漢) 때에 성행하였고 후세에까지 이어지면서 더욱 발전되고 보충되었다.《동파지림(東坡志林)》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춘추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선비들을 양성하는 풍기가 성행했다고 하는데, 모사(謀士)와 세객(說客) 등 고급 사인(士人) 외에도 아래로는 격검(擊劍; 칼잡이)․강정(扛鼎; 역사)․계명구도(鷄鳴狗盜; 도둑)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기술을 몸에 지닌 각종의 인물들이 양성되었다고 한다. 시황제 이후로 천하가 통일되자 “무술을 강의하는 예 중에 각저를 없애버렸다(講武之禮, 罷爲角抵)”. 각저(角抵)는 바로 두 사람이 힘을 겨루는 것으로 지금은 씨름이라고 하는데,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相扑)라고 불렸다. 진이세(秦二世)는 조정의 정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종일 주색잡기 아니면 각저라는 잡기를 구경했다고 한다. 배우(俳優)는 지금의 1인 만담가(單口相聲)처럼 사람은 일반적으로 왜소해서 솥을 들어 올리는 강정(扛鼎)도 힘을 겨루는 각력(角力)도 할 수 없었고, 입담의 예리함만으로 주인을 기쁘게 했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나라 때에도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우전(優旃)이 바로 그중 하나이다. 진시황은 금수를 기르는 동산인 원유(苑囿)를 크게 일으켜 동으로는 함곡(函谷)까지 서로는 보계(寶鷄)에까지 이르렀다. 우전이 진시황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동산에 많은 짐승들을 풀어놓았다가 만일 동방에서 적들이 쳐들어오면 동산의 이런 노루와 사슴들이 뿔로 그들을 막게 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진시황은 듣자마자 이 생각을 단념하였다. 진 이세 때 새로운 모양새를 생각하여 함양을 옻칠하려고 하자 우전이 또 나아가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황상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저도 이렇게 하시기를 건의하려고 했습니다. 옻칠을 한 성은 매끄러워서 적들이 몰려와도 오르지 못할 것이니 아주 훌륭합니다”. 이세(二世)도 성에 옻칠을 하겠다는 생각을 취소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런 배우들이 유머러스한 언어와 익살스런 행위로 사람을 웃기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강정은 바로 솥을 들어올리는 거정(擧鼎)이다. 고대인들은 대부분 거정으로써 권세와 무력을 나타내었다. 항우(項羽)는 무쇠 솥을 들어올릴 만한 힘을 가진 호한(好漢)으로 불렸다. 진시황제의 조부 진 무왕(武王)에게도 용력은 있었으나 잡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조정 내에 오획(烏獲)․맹설(孟說)․두회(杜回)라고 하는 몇 명의 유명한 역사들을 두었다. 무왕과 오획은 용의 무늬가 새겨진 솥을 들고 겨루었는데 결과는 오획의 두 눈에 피가 나오고 무왕은 무릎 뼈가 부러져 머지않아 죽고 말았다. 심동(尋棟)은 부로(扶盧)라고도 불렀는데 바로 현대 잡기 중 장대에 올라가 갖가지 곡예를 부리는 파간(爬杆)과 같은 것이다. 각저․강정․부로라는 이 놀이는 군사훈련에서 발전되어 나와 이루어진 일종의 오락활동이었을 것이다.
5호 백희용(五號百戲俑) 4호 백희용(四號百戲俑) 1호 백희용(一號百戲俑)
진릉의 백희용 갱에서 12기의 도용을 출토해서 3기를 복원하였다. 이 3기의 토우는 모두 상반신을 드러내고 하반신에는 스커트를 입은 채 맨발이다. 1기는 두 다리를 똑바로 한 채 왼손은 오른손목을 잡고 배 앞에 교차시키고 있다. 1기는 왼팔은 아래로 내려 몸에 붙이고 엄지손가락을 허리띠 안에 꽂고있으며, 오른팔은 들고 왼쪽 다리는 앞으로 굽히고 있다. 1기는 두 발을 똑바로 한 채 두 손은 배 앞의 허리띠에 걸치듯이 하고 있는데 몸집이 장대하다. 기타 아직 복원되지 토우의 형상 중 어떤 것은 한 손을 허리춤에 꽂고 한 손은 높이 들고 있고, 또 어떤 것은 두 다리가 활을 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 어떤 것은 반쯤 꿇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토우 갱의 상부 시렁 나무에서 대형 구리 솥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두 귀에 세 다리가 붙은 원형에다 무늬가 정교하고 무게가 212kg이나 되는 것이었다. 이 도용들의 의상과 자세에서 보면 그것들은 당연히 진대의 백희 장면이나 백희를 상징하는 장면을 반영한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 구리 솥 즉 동정은 당연히 거정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고대 역사들의 거정에는 천근(千斤)으로 불리는 것이 있었다. 진나라 때 1근은 대략 지금의 250g이니 1천근이면 대략 250kg으로 동정의 무게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이 정도 중량에 이르렀다면 지금의 역도 선수 가운데 중량급의 성적과도 비슷하다. 이 때문에 이 동정은 여기서 이미 종묘의 제기가 아니라 거정 운동의 도구였던 것이다. 다른 한 도용의 오른 팔꿈치 부분에 목질의 긴 막대기가 있는데 마치 부로(扶盧) 운동선수의 모방인 것 같다. 장차 이런 도용들이 완성된 후에는 틀림없이 우리들에게 진대의 백희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떠들썩한 광경이 될 것이다.
진시황제는 백희를 즐긴 때문에 진시황제릉에 백희용을 함께 묻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태어나 살았던 함양 궁전의 벽화에도 백희 그림을 그려 넣었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궁 제3호 궁전 유적지에서 진대의 벽화를 출토하였다. 동쪽 벽 다섯 번째 칸 하반부 벽화에 연회 장면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백희 공연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폭의 벽화는 연간(緣竿) 놀이이다. 연간놀이(緣竿之戲)라고 하는 것은 대나무 장대를 오르는 놀이이다. 진궁(秦宮) 및 진릉(秦陵)의 백희용으로부터 우리는 진시황제의 다른 한 측면을 볼 수 있다. 이 천고의 황제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는 매일 온갖 정무를 처리했지만 여유가 있을 때에는 난쟁이의 해학(배우)와 잡기를 보았을 것이다.
고대의 백희는 진나라 이후부터 한․당․송․원․명․청(漢唐宋元明淸)을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미 하나의 전문적인 오락 레저 활동이 되었으며 종류도 풍부해졌는데 이것이 바로 잡기(雜技)이다. 그 중 가장 이른 것은 군중의 강무(講武)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국말기 및 진한 시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궁중의 오락이었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 장안에서 한 차례 대형 백희를 연출하면서 백관 및 시민들이 구경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때부터 백희는 점차 민간 쪽으로 발전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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