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秦始皇陵

5. 문관용갱(文官俑坑)

마장골서생 2009. 11. 9. 23:02

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5. 문관용갱(文官俑坑)


진시황제릉의 건축 구도는 진나라 수도 함양의 축소판이기 때문에 진나라 조정의 상징이어야 했다. 2000년 겨울에 진시황릉의 남부 진릉 봉토로부터 20m 떨어진 곳에서 순장 갱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순장 갱의 면적은 144㎡이며 지하갱도식(地下坑道式)의 토목건축이다. 부장 갱은 경사길(斜坡道)․전실(前室)․후실(後室)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실에서 진대의 목재 수레인 목거(木車) 한 대와 대형 도용(陶俑) 12기를 출토하였다. 목거는 경사길의 입구 지점에 있다. 12기의 도용 중에 11기는 북쪽을 향해 서있고, 1기는 서쪽을 향해 서있다. 11기의 도용 중에 8기의 모양이 특이하다. 그것들은 병마용 갱 중의 도용과 다르다. 그것들은 하나하나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모습인데, 관대(冠帶)는 턱 아래에 묶여있고 관미(冠尾)는 나비 모양으로 매듭이 지어져 있다. 몸에는 긴 도포를 걸치고 있고 허리는 혁대로 묶여있으며, 하반신은 긴 바지를 입고있고 발에는 끝이 가지런하면서 네모지고 바닥이 얕은 신발을 신고 있다. 공손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두 눈은 내리깔고 있다. 도용의 우측 요대(腰帶) 부위에는 흙으로 빚은 삭(削)과 지석(砥石)이 매달려 있으며, 왼팔과 몸통 사이에는 그리 크지 않은 타원형의 작은 구멍이 하나 있는데 뭔가를 끼웠던 것 같다. 삭(削)은 칼이고 지석(砥石)은 숫돌이다. 진나라 때에 글자는 대나무 조각에다 썼는데 잘못 썼을 경우 칼로 긁어내야 다시 쓸 수 있었다. 지석이 바로 칼을 가는 도구이다. 이런 도용의 장식에서 보면 그들은 당연히 문관 같은 인물들로서 진나라 조정의 중앙관서 관리들이다. 그 장식으로 보면 그 작위는 당연히 8급 이상일 것이다.

목거(木車)의 뒷 부분에 4기의 마부 도용이 있다. 그들의 두 팔은 앞으로 뻗었으며, 두 손은 반쯤 주먹을 쥐고있는데, 고삐를 잡고 수레를 모는 형상을 나타낸다.

부장 갱의 후실은 말을 묻은 구역이다. 살아있던 말들이 두 줄로 나란히 후실에 매장되어 있다. 현재 발견된 것으로는 앞쪽에서 4기 뒤쪽에서 5기 총 9기의 말이 매장되어 있을 뿐이고, 말의 머리가 북쪽을 향해 있다.

도용과 목거 및 말 외에도 문관용 갱 속에서 동전과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문관 토우(文官俑)              진 장군 토우(秦將俑)

 

진시황제는 육국을 통일한 후에 새로운 군주전제의 대제국을 세웠다. 진의 중앙정부는 황제의 영도 아래 삼공구경(三公九卿)이 정무를 처리하였다. 삼공(三公)은 승상(丞相)․어사(御史)․국위(國尉)를 말하는데, 조정의 행정․사법․군사의 업무를 분할하여 관리하였다. 그들은 다 황제에게 책임을 다하였다. 구경(九卿)은 봉상(奉常)으로 종묘(宗廟)의 예의를 관장하였고, 낭중령(郎中令)은 궁전 대문의 호위를 관장하였다. 위위(衛尉)는 궁문을 수비하는 군인이고, 태복(太僕)은 수레와 말을 관장하였다. 연위(延尉)는 형벌을 관장하였고, 전객(典客)은 외교를 관장하였다. 종정(宗正)은 황실의 사무를 관장하였고, 치속내사(治粟內史)는 농업과 상업을 관장하였으며, 소부(少府)는 세금의 징수를 관장하였다. 그밖에 또 객경(客卿)․박사(博士)․장작소부(將作少府)․중위(中尉) 등의 중앙 관원이 있었다. 이런 도용들이 바로 그런 관원 중의 일부분이다.

문관용 갱 중의 사람과 물건의 배치가 중앙관서의 맛을 풍긴다. 수많은 도용들은 북쪽을 향해 서있는데, 북면이 바로 진시황제릉의 봉토이다. 봉토 아래쪽이 그 천고의 황제 진시황제인 것이다. 이런 모습은 자연스럽게 제왕이 남쪽의 신하들을 바라보고 왕과 신하들은 북쪽의 제왕을 향해 배알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실(前室) 중의 목거는 관서의 관원들이 탈 교통수단이고, 후실(後室) 중의 말은 수레를 위해 준비된 것이며 마구(馬具)는 말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다. 마부들은 언제든 수레를 몰 준비를 하고 있다. 현재의 부동자세는 문관들이 왕명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기다림의 자세는 영원한 기다림이 되어 2000년 이후에 발굴 출토될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런 부동의 기다리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관들의 얼굴부분의 표정도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은 바닥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황제의 위세 아래 공손하면서도 조심스런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진왕 조정의 신하들이 제왕을 대하는 심리와 정신상태를 드러내고 있는데, 정말로 조정 신하들의 순간적인 형상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라고 할만하다. 이 점으로부터 진대 조각가들의 높은 예술적 기교를 엿볼 수 있다. 단순한 얼굴 윤곽은 인물들의 심리를 살아있는 듯이 빚어놓았는데, 그야말로 신묘한 재주라고 할만하다.

진 병마용과 똑 같이 이 도용들도 원래는 채색이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색깔들이 모두 떨어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