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中國宦官

五․환관의 세력이 판을 쳤던 한(漢)․당(唐)․명(明) 1. 권력을 독단했던 동한(東漢)의 환관

마장골서생 2009. 11. 9. 13:21

르언홍 지음 / 이상천 옮김 ≪중국고대의 환관, 울산대학교출판사, 2009.

 

五․환관의 세력이 판을 쳤던 한(漢)․당(唐)․명(明)



1.  권력을 독단했던 동한(東漢)의 환관


서한(西漢)이 수립된 초기에는 대외적으로 봉해진 동성의 왕족을 왕으로 삼았고, 대내적으로 봉해진 공신을 열후(列侯)로 삼았다. 황제는 이들이 안과 밖에서 지켜주는 것도 부족하다고 느껴 외척까지 보조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1) 이후에 왕족들의 지위는 갈수록 강등되고 공신들도 의심을 받게 되었지만 외척세력은 더욱 왕성해졌다.

동한에 이르러 황실은 세도가들과 혼인을 통해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이로써 정권을 공고히 하였다. 일부 세도가들은 황실과 혼인을 통해 황제의 친척이 되자 권력과 세도가 급속히 커지면서 점차 외척 전횡의 국면을 형성하였다. 동한의 여러 황제들은 또 대부분 유년기에 즉위하거나 요절하거나 혹은 후사가 끊기거나 해서 결국 대부분 모후가 정치에 개입했는데, 이것은 바로 외척들에게 있어 권력을 전횡할 계기였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정사는 모조리 어머니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어머니는 자연히 외가 쪽 사람들을 신임하게 되고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고 만다. 황제는 자라면서 대권이 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지만 조정의 신하들은 대부분 외척의 조종 아래에 있어 황제는 자기 주변의 환관들에게 의지하여 외척에게 대항할 수밖에 없다. 광무제(光武帝) 때 엄인만을 환관으로 기용하면서 환관 집단이 정식으로 형성되었다. 동한 중기와 말기는 외척과 환관이라는 두 세력간의 대결로 점철된 시기였다. 투쟁이 반복되는 가운데 환관의 권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조정을 독단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서기 76년에 즉위한 한 장제(章帝)는 두씨(竇氏)의 딸을 귀인(貴人)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황후로 맞아들였다. 황후의 오빠인 두헌(竇憲)을 시랑(侍郞)․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으로 삼았고, 동생인 두독(竇篤)을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삼아 왕궁을 지키게 했을 정도로 지나치게 총애하였다. 그들은 함부로 토지나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는 황실 사람조차 무시할 정도였다. 한번은 두헌이 형편없는 가격으로 명제(明帝)의 딸인 심심공주(沁心公主)의 장원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공주는 문제삼고 싶지 않았으나 장제가 아직까지는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던 터라 두헌을 불러 질책하였다. “네놈이 공주의 장원을 빼앗으려한 짓이 어찌 조고(趙高)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것과 다르겠느냐?! 공주에게서도 땅과 재물을 빼앗으려 드는데 하물며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조정에서 네놈을 새나 쥐새끼처럼 내칠 것이다!” 두헌은 여동생인 두후(竇后)에게로 달려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사죄하자 장제는 그제야 그만두었다.

장화(章和) 2년(88)에 한 장제가 죽자 10살 난 태자가 즉위했는데 이가 바로 화제(和帝)이다. 두태후(竇太后)가 섭정하고, 두헌이 시중의 신분으로 기밀을 관장하여 황제의 명령을 출납하였다. 동생인 두독은 호분중랑장이 되었고, 동생 두경(竇景)과 두환(竇環)은 함께 중상시(中常侍)가 되는 등 요직을 독차지하였다. 영원(永元) 원년(89)에 두헌과 경기(耿夔)가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내몽고 지역인 계락산(稽落山)에서 흉노(匈奴)를 깨뜨려 20여만 명을 투항시켰다. 두헌은 이 전공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자 조정의 대신들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언제나 그들의 안색을 살피는 처지가 되었다. 지방의 자사(刺史)나 군수(郡守) 그리고 현령(縣令)도 대부분 그들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그들은 관리와 백성을 속이고 핍박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물론 뇌물도 받아 챙겼다.

화제가 15살이 되었을 무렵부터 두헌과 같은 외척들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무척 불만스럽게 느꼈다. 하지만 조정의 대신들과 가까이할 방법은 없고 언제나 환관들과 마주칠 뿐이었다. 화제는 중상시이면서 구순령(鉤盾令)인 정중(鄭衆)이라는 자가 기민하고 지략이 있다고 여겨 마침내 그와 함께 두헌을 제거할 일을 도모한다. 정중이 낸 계책은 두헌이 서울로 돌아오는 기회를 틈타 손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두헌이 서울로 돌아오자 화제는 대신들을 파견하여 교외에까지 나가 영접하도록 하는 한편 집금오(執金吾)와 오교위(五校尉)에게 명하여 군사로 남궁과 북궁을 지키도록 하고, 성문을 닫고는 두헌의 수족들을 모조리 체포하였다. 무력으로 두헌을 핍박하여 대장군의 관직을 내놓도록 하고, 관군후(冠軍侯)로 봉하여 형제들을 데리고 봉국(封國)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다. 또 얼마안가 사람을 보내 자살하도록 핍박하였다.

환관 정중은 대장추(大長秋)로 승진하였고 나중에 또 소향후(鄛鄕侯)에 봉해졌다. 환관은 이때부터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역사가들은 환관들이 권세를 훔치는 재앙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화제가 27살에 죽자 어린 아들은 겨우 백일 만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화제의 등황후(鄧皇后)가 태후의 신분으로 섭정을 하게 된다. 이 어린 상제(殤帝)가 몇 개월 후에 죽자 등태후는 또 장자인 호(祜)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이가 바로 안제(安帝)이다. 이때 그의 나이가 겨우 13살밖에 안되어 등태후가 여전히 섭정하게 된다. 태후의 오빠인 등즐(鄧騭)이 대장군에 임명될 정도로 중용되는 등 등씨 집안은 역대로 총애를 받았는데, 후(侯)에 봉해진 자만도 29명에, 대장군 이하 13명, 주목(州牧)과 군수(郡守) 48명으로, 시중(侍中)․장(將)․대부(大夫)․낭(郎)․알자(謁者) 등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121년에 등태후가 죽으면서 외척들도 그 배경을 잃게 된다.

안제는 친정을 하게 되자 즉각 손을 써 “등씨의 황제폐위 음모(鄧氏陰謀廢帝)”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외척들을 제거하고, 등씨 형제들도 죽여 버렸다. 그리고 그 일가와 자식들은 관직에서 파직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동시에 측근의 환관 강경(江京)을 도향후(都鄕侯)로, 이윤(李閏)을 옹향후(雍鄕侯)로 봉하였다. 이외에도 번풍(樊豊)․유안(劉安)․진달(陳達) 등의 환관도 당대에 큰 권세를 누린 자들이었다. 번풍과 같은 자들은 돈이나 재물 혹은 목재를 징발하여 가옥이나 묘지 혹은 정원을 마구 지어대었는데, 태위 양진(楊震)이 이를 보다 못해 이들의 횡포를 막아보고자 간언했다가 오히려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서기 125년에 안제는 남쪽 지방을 순시하는 도중에 죽게 된다. 살기 가득한 왕궁 안에서는 손정(孫程)을 우두머리로 하는 19명의 환관들이 치열한 권력쟁탈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들은 12세의 제음왕(濟陰王) 유보(劉保)를 추대하여 즉위시켰는데 이가 순제(順帝)이다. 안제의 황후 염씨(閻氏)를 핍박하여 이궁(離宮)으로 옮기도록 하고, 그녀의 동생인 염현(閻顯)과 강경(江京) 등의 환관은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손정은 부양후(浮陽侯)에 봉해졌는데 식읍이 만 호(萬戶)였다. 또 중황문(中黃門)인 왕경(王庚)은 화용후(華容侯)에, 장락태관승(長樂太官丞)인 왕국(王國)은 역후(酈侯)에 봉해졌는데 이들의 식읍은 9천 호였다. 나머지 환관들도 모두 후에 봉해지고 식읍도 받았는데 그 수가 19명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왕실과 환관이 천하를 공유한다고 빈정대었다.

환관은 득세하게 되면 방자한 집단으로 변질된다. 손정을 비롯한 19명의 후(侯)들도 궁궐 안에서 싸우는 경우가 허다했고 신하의 예절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대신들 중에 손정과 같은 무리들은 패역무도하여 서울에 오래두면 틀림없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고 상소하는 자도 있었다. 순제는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조서를 내려 손정을 비롯한 그 무리들을 먼 지방으로 보냈다. 그러나 2년 후에 다시 조서를 내려 서울로 불러들이고 이전처럼 총애하였다. 손정은 임종직전에 자신의 후국(侯國)을 동생 손미(孫美)에게 물려주고자 유언으로 상서하였다. 순제는 이를 허락하면서 바로 후국을 이등분하여 절반은 손정의 양자인 수(壽)에게 주도록 하였다. 이듬해에 또 조서를 내려 환관의 양자는 모두 봉지와 작위를 세습할 수 있도록 규정했는데 결국 상례가 되고 말았다.

순제가 19년을 재위하는 동안 황후 양씨(梁氏)의 친정 쪽 사람들이 점차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아비 양상(梁商)과 오빠 양기(梁冀)가 차례로 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외척세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순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궁의 아들 병(炳)을 태자로 삼았다. 144년에 순제가 죽고 태자 병이 즉위하여 충제(沖帝)가 되었는데 겨우 두 살이었다. 양황후는 태후(太后)가 되어 섭정을 했지만 1년 만에 충제가 죽었다. 그래서 발해왕(渤海王)의 아들 찬(纘)을 맞이하여 옹립하니 이가 질제(質帝)이다. 질제가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8살 밖에 되지 않아 양태후가 여전히 섭정하였고 이틈에 오빠인 양기는 조정을 장악하였다. 양기가 권력을 전횡하게 되자 하루는 질제가 양기를 가리켜 “이 자가 바로 제멋대로 하는 장군이로군!”라고 하였다. 양기는 속으로 놀라며 “이 조그만 황제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사나우니 성장하면 어찌될꼬!”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내시를 시켜 독이 든 떡을 질제에게 먹여 죽였다. 그런 후에 여오후(蠡吾侯) 지(志)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이가 환제(桓帝)이다. 나이가 15살에 불과해 양태후가 여전히 섭정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양씨 집안의 권세는 천하를 뒤흔들어 7명의 봉후(封侯), 3명의 황후, 6명의 귀인(貴人), 2명의 대장군이 났으며, 경(卿)․장(將)․윤(尹)․교(校) 57명․궁위내시(宮衛內侍) 등 모두 양씨 집안의 심복이 되었다. 사방에서 황제에게 바치는 진상품일지라도 우선 좋은 것을 골라 양씨 집안으로 보내고 난 뒤에야 황제에게 바칠 수 있었고, 내외의 관원이 영전하게 되면 양씨 집안에 가서 감사를 표시해야 했다. 양기의 편에 서지 않으려고 하는 관료는 모조리 살해당하였다. 양기는 사치스럽고 음란한 생활을 즐겨 낙양성(洛陽城)에 웅장하고 화려한 저택을 두 채나 건축하고, 동산을 넓혀 기이한 날짐승과 길짐승을 사육하였다. 또 성의 서쪽에는 토끼를 키우는 동산인 토원(兎苑)이 수십 리에 이어져 있었다……

양기의 횡포에 대하여 환제는 내색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환제가 화장실에 가는 기회를 틈타 시종하던 소황문(小黃門; 환관) 당형(唐衡)에게 “내 주변사람 중에 양기와 관계가 없는 자가 누구냐?”라고 묻자 당형은 환제에게 “중상시 단초(單超)․소황문 좌관(左悺)․중상시 서황(徐璜)․황문령(黃門令) 구원(具瑗)이 양씨와 틈이 있지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이리하여 환제는 단초와 좌관을 불러다 “양장군 형제들이 조정을 전횡하여 내외를 핍박하고 위협하니 공경 이하 모든 관료들이 그들의 뜻에 복종하고 있다. 지금 그들을 처단하고자 하는데 상시의 의향은 어떠냐?”라고 말하자 단초 등은 “참으로 나라의 간적들임에도 불구하고 죽여야 할 날을 지체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서황과 구원을 불러 양기를 제거할 계획을 의논하였다. 환제는 단초의 팔을 깨물어 피로써 맹세하였다. 황문령 구원은 황제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호분(虎賁)․우림(羽林)․도후(都候) 소속의 검극사(劍戟士) 천여 명을 소집하여 사예교위(司隸校尉) 장표(張彪) 등과 만나 양기의 집을 포위하고 그의 대장군 직위를 회수하였다. 양기 부부는 당일에 음독 자살하였고, 양씨 당파에 속해 있던 공경(公卿)․열교(列校)․자사(刺史)․이천석(二千石) 등 수십 명이 연좌되어 죽음을 당하였으며, 300명이 넘는 관료와 빈객(賓客)들이 축출 당해 조정이 텅 빌 정도였다.

단초를 비롯한 5명의 환관들은 외척을 제거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고 해서 모두 후(侯)에 봉해졌다. 단초는 식읍이 2만 호인 신풍후(新豊侯)에 봉해졌고, 서황은 무원후(武原侯)에, 구원은 동무양후(東武陽侯)에 봉해졌는데, 식읍이 1500호였다. 좌관은 상채후(上蔡侯)에, 당형은 여양후(汝陽侯)에 봉해졌는데, 식읍이 1300호였다. 5후 외에도 일부 관원은 향후(鄕侯)에 봉해졌다. 이후 영제(靈帝) 말년의 30년 간 동한의 환관세력은 나날이 왕성해져 내내 조정을 좌지우지하였다.

5후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호가호위하며 온갖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서기 160년에 단초가 죽자 황제는 어용의 관과 관속에 넣을 옥갑을 하사하고 오영기사(五營騎士)와 장작대장(將作大匠)을 보내어 묘지를 만들게 하는 등 성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좌관을 비롯해 4후는 더욱 교만해져 저택을 짓고 궁중의 양인(良人)이나 미녀(美女) 같은 관명을 가진 여자들을 첩으로 삼았다. 옷은 반드시 비단이라야 하고, 장신구는 반드시 금이나 옥이라야 하는 등 궁중의 비빈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좌관은 힘이 세고, 구원은 교만하고, 서황은 난폭하고, 당형은 해롭다네.(左回天, 具獨坐, 徐臥虎, 唐兩墮.)”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성이 같은 집안에서 데려오거나, 성이 다른 집안에서 얻어오거나, 노예를 사들이거나 해서 양자로 삼았다. 봉작을 세습하고자 형제간에 사돈을 맺기도 하고 출세할 기회를 엿보다 주나 군으로 나가 뇌물을 탐하고 법을 어겨가며 백성들을 착취했는데 도적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상서(尙書) 주목(朱穆)․태위 양병(楊秉)․사예교위 한연(韓縯)이 끊임없이 환관들의 악행을 탄핵하고 범죄증거를 낱낱이 열거하자 환제는 어쩔 수 없이 환관 몇 명을 벌하였다. 하지만 전체 환관세력에 대해서는 전혀 건드리지 못하였다. 환제 후기와 영제 시기(21년 재위)의 동한 조정은 거의 환관의 천하였다.

다음의 이야기는 당시 환관의 권세가 컸다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 맹타(孟陀)라고 하는 돈 많은 사람이 관원이 되고 싶어 중상시 벼슬을 하는 장양(張讓)의 집사에게 뇌물을 주며 사람들 앞에서 장양에게 인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하였다. 하루는 맹타가 장양의 집 앞에 이르렀는데 문 앞에 많은 수레가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장양의 집사도 맹타가 온 것을 보고는 바로 가노들을 데리고 나와 맹타의 수레를 들고 들어오게 하였다. 장양에게 바랄 것이 많았던 사람들은 분명 장양의 절친한 친구라고 여겨 앞 다투어 맹타에게 뇌물을 바쳤다. 맹타는 그 중 일부분의 뇌물을 장양에게 보내고 그 대가로 양주자사(涼州刺史) 자리를 요구하였다. 어리석은 영제는 “장상시(張讓)는 나의 아버지고, 조상시(趙忠)는 나의 어머니”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대었다. 주종관계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대환관 장양의 동생인 장삭(張朔)이 야왕[野王; 지금의 하남 심양(沁陽)]령이었는데, 임산부를 죽이는 짓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포학무도하였다. 이응(李膺)이라는 사람이 사예교위에 임명되어 처단하러 온다는 소리를 듣고는 놀라서 서울로 달아나 형 장양의 집 기둥 속으로 숨었다. 이응이 몰래 조사를 끝내고는 관리들과 병졸들을 이끌고 장양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기둥을 부수고 장삭을 잡아들여 법에 의거 사형에 처하였다. 장양은 황제의 면전에서 고하였고, 이응은 도리에 근거하여 반박하였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응대할 뿐이었다. 이때부터 황문(黃門)이나 상시(常侍)들은 두려워서 휴가 때에도 감히 궁궐 문을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황제가 왜들 그러냐고 묻자 머리를 조아리고 울며 “이교위가 두려워서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서울의 태학(太學)에 곽태(郭泰)와 가표(賈彪)를 우두머리로 하는 3만여 명의 태학생들이 있었다. 태학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설립한 최고학부로서 전문적으로 관리를 배양하는 곳이었다. 태학생들은 시국을 토론하며 환관을 규탄하는 반면 정직한 관료를 추앙하였다. 그들은 평론하기를 “천하의 모범은 이원례(이응)이고, 강압에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진중거(진번)이며, 천하에 걸출한 이는 왕숙무(왕창)다.[天下楷模李元禮(李膺), 不畏强御陳仲擧(陳蕃), 天下俊秀王叔茂(王暢).]”라고 하며 이런 관료의 절개와 지조를 매우 흠모하였다. 환관의 친족들이 수많은 지방 관직들을 차지하면서 태학생들의 벼슬길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위에서 언급한 정직한 관료들과 연합하여 점진적으로 환관집단을 반대하는 당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환제 말년에 태학생들은 두 차례 대규모의 청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 차례는 영흥(永興) 원년(153)에 주목(朱穆)을 위해서였다. 주목이 기주(冀州)자사에 임명되었을 때, 환관들이 배치한 현령(縣令)과 읍장(邑長)들은 주목의 탄핵을 두려워하여 한꺼번에 관인을 풀어놓고 관직에서 도망쳤는데 40여 명이나 되었다. 몇 명은 초조해하다 자살하였고, 어떤 자는 주목에게 벌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황하가 범람해서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유민들이 넘쳐났지만 환관 조충(趙忠)의 아비가 죽자 상례를 벗어나 옥으로 만든 관을 사용하였다. 주목이 이 소식을 듣고 조사를 명하자 관리들은 그의 엄격함을 알고 있는 터라 바로 무덤을 파헤쳐 관을 깨뜨리고 시신을 끌어내었다. 황제는 이 소식을 접하자 대노하여 주목을 잡아오게 하였다. 이 일은 곧 태학생들을 자극하였고 유도(劉陶)를 우두머리로 하는 수천 명이 상서하여 주목의 석방을 요구하고 아울러 주목이 개인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국가의 법과 기강을 엄격하게 집행한 현명한 신하임을 칭송하였다. 환제는 상소문을 보고는 주목을 방면하여 돌려보냈다. 또 한 차례는 연희(延熹) 5년(162)에 발생한 일에 청원한 것이다. 도료장군(度遼將軍) 황보규(皇甫規)가 강족(羌族)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는데, 환관 서황과 좌관이 뇌물을 요구하다 미수에 그치게 되자 황보규가 군대의 식량을 착복했다고 무고하여 조정으로 잡아왔다. 태학생 장봉(張鳳)을 비롯한 300여 명이 정직한 관료들과 함께 상서하여 구명에 나섰고, 황보규는 바로 석방되었다.

그밖에 많은 중하층의 관리들도 환관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어 각자의 직권범위 내에서 환관 및 그 수족들을 벌하였다.

관료와 태학사가 환관의 전횡을 반대했지만 환관집단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첫 번째 당고(黨錮)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연희 9년(166), 환관의 당파였던 장성(張成)이라는 자는 점을 잘 쳤다고 하는데, 장차 대사면이 있을 것임을 알고는 아들을 시켜 사람을 죽였다. 사예교위 이응에게 잡혀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정말로 사면령이 내려졌다. 이응은 살인범이 석방되는 것에 분개하여 결국 사면령을 무시한 채 장성의 아들을 처형해버렸다. 대환관 후람(侯覽)이 장성의 제자였던 뇌수(牢修)를 시켜 상소하도록 하였다. 이 뇌수라는 자는 “이응을 비롯한 그 무리들은 태학생들과 떠돌이 선비들을 양성해 각 군의 생원들과 결탁하여 서로 치켜세우고 붕당을 결성하여 조정을 비방하고 풍속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膺等養太學遊士, 交結諸郡生徒, 更相趨馳, 共爲部黨, 誹訕朝廷, 疑亂風俗.)”라고 무고하였다. 환관들의 속임수에 환제는 대노하였고, 각 군에 명령하여 당인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태위 진번(陳蕃)은 체포에 응하지 않고 “현재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충신들인데, 어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죄명을 뒤집어씌워 체포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자 환제는 더욱 노하여 이응을 잡아다 황문북사옥(黃門北寺獄)으로 보내고, 연루된 어사중승(御史中丞) 진상(陳翔) 등 200여 명을 모두 하옥시켜버렸다. 그리고 사방에 사람을 풀어 도망친 “당인(黨人)”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응과 그의 무리들이 옥중에서 당인들을 진술할 때 의도적으로 일부 환관들의 아들들을 연루시키자 환관들은 연좌될 것을 두려워 해 더 이상 당인들을 체포하려 들지 않았다. 외척 두무(竇武)나 상서(尙書)였던 곽서(霍諝)도 “당인”들에게 원통함을 당했다고 상소하였다. 장인의 체면 때문에 환제는 너그럽게 처분하여 이응을 비롯한 “당인”들을 사면시켜 고향으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평생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관직을 얻을 수 없게 만들었다.

환제는 주색에 빠져 세 번이나 황후를 세웠고 수십 명의 귀인(貴人)을 두었으며 궁녀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자손은 없었다. 167년에 환제가 사망하였다. 황후 두씨의 아비 두무와 그 무리들은 해독정후(解瀆亭侯) 유굉(劉宏)을 황제로 옹립했는데, 이가 바로 겨우 12살인 영제(靈帝)이다. 두태후가 국정을 맡으면서 두무를 대장군으로, 진번을 우부(右傅)로 삼아 모두 정사에 참여시켰다. 황제의 유모 조요(趙嬈)는 성정이 교활한 데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 중상시 조절(曹節)․왕보(王甫)와 결탁하여 악행을 저지르고 태후에게 아첨하였다. 태후는 그들을 상당히 신임하였다. 진번이 비밀리에 두무에게 “조절과 왕보는 선제 때에 이미 국권을 농단하고 나라 안을 어지럽힌 자들인데 이처럼 간사한 자들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필시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오!(曹節、王甫在先帝時已操弄國權, 濁亂海內, 如不設計除奸, 後必難圖!)”라고 말하였다. 두무는 태후와 환관들을 주살할 것을 논의했지만 태후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 일이 새어나가자 조요․왕보․조절은 영제의 힘을 믿고 사람을 보내 두무를 죽이려고 하였다. 두무는 병영으로 피해 들어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황문과 상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힘을 다한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黃門、常侍反, 盡力者封侯重賞.)” 왕보는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두무와 대치하면서 왕보의 군대가 “두무가 반란을 일으켰다. 너희들은 모두 금병으로서 궁성을 지켜야 하거늘 어찌하여 역도들을 따르려하는가?(竇武反, 汝皆禁兵, 當宿衛宮省, 何故隨反者?)”라고 크게 소리치자 두무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두무는 말을 몰아 도망쳤고 왕보는 바짝 쫓아갔다. 더 이상 도망칠 길이 없게 된 두무는 칼을 빼어 자결하였고, 진번은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조절은 또 기회를 틈타 영제에게 주청하고는 이응을 비롯한 100여 명을 잡아들여 아무도 모르게 모조리 죽여 버렸다. 환관집단은 이응의 당인들을 며칠 만에 전국적으로 6, 7백 명이나 잡아들여 죽이거나 감금 또는 유배시켜버렸다. 계속해서 1,000명이 넘는 태학생들을 수감하였다. 이후에 각 주와 군에 명을 내려 당인의 문하생․관료 및 부자형제 등 관직에 있던 자들을 모두 파직시켜 금고형에 처하고, 아울러 5복(五服)2) 내의 친족까지 연좌시켜 처벌하였다. 당인들을 진압하는데 공이 있다고 해서 조절의 관직은 장락위위(長樂衛尉)로 바뀌는 동시에 육양후(育陽侯)에 봉해졌다. 왕보는 중상시로 영전되었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황문령을 맡았다. 이때부터 조절과 왕보는 도성 안팎을 뒤흔들었고 잔혹하게 권력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그 아비에서 형제들까지 모조리 경(卿)․교(校)․목(牧)․영(令)이 되어 천하를 휩쓸었다. 왕보는 왕길(王吉)이라는 자식을 양육했는데, 이 자가 지방관으로 있는 5년 동안에 만여 명의 백성들을 해쳤다고 한다.

서기 189년에 영제가 죽자 황자인 유변(劉辯)이 14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해 소제(少帝)가 되었고 하태후(何太后)가 섭정하게 된다. 이전에 영제의 하황후가 아들 변을 낳았고, 왕미인(王美人)이 아들 유협(劉協)을 낳았다. 하후짐(何后鴆)은 왕미인을 죽이고, 협을 영제의 생모였던 동태후(董太后)의 궁중에서 양육하였다. 동태후가 협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영제도 이에 동의하였다. 중상시 건석(蹇碩)이 “만약에 협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하진을 죽여 후환을 끊으십시오.(若欲立協爲太子, 必先誅何進, 以絶後患.)”라고 아뢰었다. 하진은 하후의 오빠로서 대장군이었다. 황제가 하진에게 입궁하도록 하여 하진이 궁궐에 이르자 사마반은(司馬潘隱)이 “황제께서 죽이시려고 합니다(帝欲殺你)”라고 말해주어 하진은 급히 안채로 돌아갔다. 사마반은이 뒤따라가 하진에게 “황제께서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도 건석이 성지를 사칭하여 대장군을 죽이려고 하니 빨리 대책을 세우십시오!(御駕已崩, 蹇碩矯旨, 欲殺你, 趕快想辦法吧!)”라고 말하였다. 하진은 급히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기다렸다. 유변(劉辯)이 즉위한 후에 하태후가 대권을 장악하였다. 사예교위 원소(袁紹)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입궁하여 건석을 잡으려고 하자 건석은 황망히 어화원(御花園)으로 피신했지만 중상시 곽승(郭勝)에게 결국 살해되고 말았다. 원소는 하진에게 환관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권고하였다. 하진이 입궁하여 하태후에게 아뢰자 하태후는 “궁중의 환관들이 궁궐 안을 통솔하는 것은 바로 한나라 왕실의 오래된 전통이거늘 어찌하여 꼭 없애야 한다는 것이오?(中官統領禁省, 乃是漢家故事, 何必盡除?)”라고 대답하였다.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바로 사람을 시켜 하태후의 모친과 남동생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들을 태후에게 좋게 말해달라고 하였다. 하진은 할 수 없이 또 원소를 찾아가 방법을 모색하였다. 원소는 사방의 장수들을 불러 대군을 이끌고 서울을 들이쳐 내시들을 처단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원소가 명령을 내리자 동탁(董卓)을 비롯한 지방의 군벌들이 바로 군사를 이끌고 와주었다. 장양이 이 소식을 듣고는 동료들과 의논하기를 “이것은 하진의 계략이오. 우리가 만약 선수를 치지 않으면 모두 멸족을 당할 것이외다!(此何進之謀, 我等若不先下手, 皆滅族矣!)”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락궁(長樂宮)의 가덕문(嘉德門) 안에 도부수들을 매복시킨 다음, 태후에게 ‘논의할 것이 있으니 하진은 입궁하라’는 내용을 담은 조서를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원소가 이것은 환관들의 음모이니 하진에게 궁에 들어가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하진이 말을 듣지 않자 원소는 어쩔 수 없이 동생 원술(元述)을 불러 정예병 천여 명을 이끌고 가서 청쇄문(靑瑣門) 밖에 포진하도록 하였다. 하진이 가덕전(嘉德殿) 문에 이르자 원소는 문밖에 남게 되었다. 장양과 단규(段珪)가 맞이하러 나와서는 하진을 에워쌌다. 장양이 하진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자 하진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궁문이 이미 닫혀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때 잠복해있던 병사들이 튀어나와 하진을 두 동강내버렸다. 원소는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하진이 나오지 않자 문 밖에서 크게 불렀다. 장양이 하진의 머리를 담 밖으로 던지며 “하진이 모반을 꾀하여 이미 주살되었다!(何進謀反, 已伏誅!)”라고 말하자 원소가 “내시 놈들이 대신을 죽였구나!(閹官謀殺大臣!)”라고 크게 외쳤다. 하진의 부장인 오광(吳匡)이 문밖에서 불을 놓았고 원술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들이쳐 눈에 띄는 환관은 그 즉시 죽여버렸다. 장양․단규․조절 등은 태후․소제(少帝)․진류왕(陳留王)을 위협하여 북궁(北宮)으로 달아나다 대신 노식(盧植)에게 발각되었는데, 노식이 “단규, 이 역적놈! 어찌 감히 태후께 손을 대느냐!(段珪逆賊, 安敢動太后!)”라고 소리치자 단규는 몸을 돌려 장양과 함께 소제와 진류왕을 인질로 해서 북망산(北邙山)으로 도망쳤다. 뒤에서 군대가 추격해오자 도망갈 길이 없게 된 장양은 그대로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고, 단규는 잡혀 처형을 당하였다. 낙양의 아이들이 “황제는 황제가 아니고, 왕은 왕이 아니네. 천승만기가 북망산으로 갔다네.(帝非帝, 王非王, 千乘萬騎走北邙.)”라고 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바로 이 사건을 말한다. 원소는 병사들을 이끌고 궁궐 안팎에서 환관을 모조리 처단하였다. 수염이 없는 자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는데 그러다 간혹 잘못 죽인 경우도 있었다. 이즈음에 한통속이었던 장양․조충․조절․후람 등 “십상시(十常侍)”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원소가 환관들을 모조리 처단하면서 한대도 따라서 멸망하고 세발솥(三足鼎)처럼 삼국시대(三國時代)가 이를 대신하게 된다.



1) 한나라 초기에 동성(同姓)의 왕은 부세(賦稅)를 징수하는 것은 물론 소금을 제조하고 철을 주조할 권리도 가지고 있어 점차 중앙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두 황제는 조착(晁錯)의 건의를 채용하여 왕국의 봉지를 삭감하였다. 그래서 오왕(吳王) 비(濞)는 초(楚)와 조(趙) 등 일곱 나라와 연합하여 조착을 죽인다는 것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경제에 의해 진압되었다.


 

2) 다섯 등급의 상복을 입는 친척으로 모든 친족을 가리킨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