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언홍 지음 / 이상천 옮김 ≪중국고대의 환관≫, 울산대학교출판사, 2009.
2. 군사대권을 조종했던 당대(唐代)의 환관
역사학자 전목(錢穆) 선생은 “역사상 환관이 권력을 좌지우지 한 것은 왕실의 교만이나 사치와 정비례한다. 동한․당․명 세 왕조가 다 그랬다. 서한과 송대의 왕실은 모두 절제하고 법도를 신중히 하였다. 동진을 비롯한 남조의 왕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환관들이 설칠 수 없었다.(歷史上宦官擅權, 與王室驕奢成正比. 東漢、唐、明三代皆是. 西漢與宋代之王室, 皆能制節謹度. 東晉、南朝王室不像樣, 故均無宦寺擅權.)”1)라고 지적하였다.
위징(魏徵)이 “환관들은 비록 미천하기는 하나 총애를 받은 때문인지 임금의 곁에서 때때로 믿기 쉬운 말들을 해대곤 합니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하는 참소의 말이 근심이 되는 경우가 특히 깊습니다.(閹豎雖微, 狎近左右, 有時言語, 輕而易信, 浸潤之譖爲患特深.)”라고 하였다. 당 태종(太宗)은 그렇다고 생각하고는 내시성(內侍省)에 3품관을 두지 못하게 하고 내시장관(內侍長官)을 4품으로 제도화하였다. 고종(高宗) 영순(永淳) 연간(682~683)에 이르는 70여 년 동안 환관은 이렇다 할 권력을 가지지 못한 채 궁문이나 지키고 궁전을 청소하며 황실의 의식 같은 일들을 맡아했을 뿐이었다. 무측천(武則天) 때는 환관의 수가 약간 증가한다. 당 중종(中宗) 사성(嗣聖) 연간(684)에 이르렀을 때는 환관이 이미 3000명이나 되었고, 7품 이상의 품계를 받은 자만도 1000여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자색 옷을 입는 자는 오히려 줄어들었다(당의 제도상 3품 이상은 관복이 자색이었고, 4품은 붉은 색이었으며, 5품은 옅은 붉은 색이었다). 당 현종(玄宗) 때는 장안의 대내궁(大內宮)․대명궁(大明宮)․흥경궁(興慶宮), 황자의 십택원(十宅院)․황손의 백손원(百孫院)․동도(東都)의 대내궁․상양궁(上陽宮)에 궁빈(宮嬪)이 4만 명 정도 있었다. 당시의 시구(詩句)에서도 그 면모를 짐작해 볼 수 있는데, 백낙천(白樂天)《장한가(長恨歌)》의 “후궁과 가인들이 삼천 명이나 되었네(后宮佳麗三千人)”라는 구절과 두보(杜甫)《검기행(劍器行)》의 “선제의 시녀가 팔천 명이나 되었네(先帝侍女八千人)”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후궁인 비빈이나 궁녀들의 수가 늘면서 이들에게 시중을 드는 환관도 자연히 많아졌고, 게다가 현종은 궁궐 안의 환관들을 중시하여 몇몇 환관들에게는 3품 정도의 감문장군(監門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환관 중 황색 이상의 옷을 입는 자가 3,000명, 자색 옷을 입는 자가 1,000여 명이나 되었다. 당대부터 환관을 태감(太監)이라고도 불렀는데, 명대는 환관아문(宦官衙門)의 장관을 태감이라고 했으며, 청대는 모조리 태감이라고 칭했다.
범문란(範文瀾) 주편의《중국통사간편(中國通史簡編)》당대 부분은 “당 현종은 사족계층 외에 환관계층을 육성하여 통치술의 핵심으로 이용했는데, 이것은 당의 정치상에서 가장 큰 변동이다.(唐玄宗在士族階層外, 扶植起宦官階層作爲行施統治術的核心, 這是唐政治上最大一個變動.)”라고 지적하였다. 대부분의 환관들은 어린 시절에 거세하고 궁궐에 들어온 자들로 친족이나 가족이 없다. 당 현종은 황실에 충실하고 순종적인 이들에게 권력을 주어도 아무 위험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환관에 대한 현종의 신임은 당 후기에 환관들이 조정을 농단하는 발단이 되었다.
현종의 중․후기로 넘어가면서 환관들의 정치적 개입은 갈수록 두드러진다. 군사적으로도 환관들은 실권을 쥐고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환관 양사욱(楊思勗)이 반란을 일으킨 남방의 소수민족을 여러 차례 토벌한 “군공(軍功)”으로 정2품인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에 봉해졌고, 후에 또 정1품인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과 괵국공(虢國公)에 봉해졌던 것이 그 예이다. 현종이 가장 신임했던 환관으로는 고력사(高力士)를 꼽아야 할 것이다. 고력사는 어릴 때 거세되어 입궁한 후로 개원(開元) 연간에 좌감문위장군(左監門衛將軍)에 지내시성사(知內侍省事)라는 벼슬까지 겸하였고 모든 환관을 관할하기에 이른다. 현종의 후기는 정치가 부패하고 생활이 문란해져 정사가 엉망이었다. 신하들이 상소하는 공문서들을 모두 고력사가 뜯어보고 작은 일이면 직접 처리하고 큰일인 경우만 현종의 재가를 받았다. 순식간에 권력이 조야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는데, 마치 황권의 화신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안사(安史)의 난 후에 환관들은 더욱 광범위하게 정치판에 발을 올려놓으면서 점차 조정을 좌우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다. 숙종(肅宗)과 대종(代宗)의 집정기간에 대권을 장악했던 세 명의 환관은 이보국(李輔國)․정원진(程元振)․어조은(魚朝恩)이다.
안사의 난 동안에 현종은 촉(蜀)땅으로 몽진을 떠났고, 이보국은 태자 이형(李亨)을 따라 영무(靈武)까지 가서 그에게 하루빨리 즉위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반란을 진압하라고 권유하였다. 이형이 즉위하여 숙종이 되자 이보국을 태자가령(太子家令)에 임명하여 원수부행군사마(判元帥府行軍司馬)의 직무를 겸임시키고 어전에서 관인과 군에 관한 명령 등도 모두 관장하게 하였다. 안사의 난 후에 이보국은 더욱 많은 관직에 봉해져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숙종은 또 대장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의 공이 높아져 자신을 가리게 될까봐서 환관 어조은(魚朝恩)을 감군(監軍)으로 삼고, 관군용선위처치사(觀軍容宣慰處置使)에 봉한 다음 파견하여 9도의 절도사(節度使) 군대 일을 총괄 관리하도록 하였다. 762년에 이보국은 또 다른 환관 정원진과 숙종의 황후인 장량제(張良娣)를 살해하고 태자 이예(李豫)를 옹립하여 숙종을 놀래 죽게 만들었다.
이예가 바로 당 대종(代宗)으로 즉위한 후에 비록 환관 내부의 모순을 이용하여 이보국을 죽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정원진과 어조은을 신임하여 정원진을 원수부행군사마로 삼았다. 정원진은 대종을 옹립하는 데에 공이 있었기 때문에 금군(禁軍)을 독단적으로 지휘하게 되었고, 그 권세가 이보국 때보다 더 커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환관이 비록 군권을 장악했다고는 하나 제도화까지는 되지 않았는데 당 덕종(德宗) 때에 이르러 상황은 역전되었다. 건중(建中) 4년(783)에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이희열(李希烈)이 조정에 반기를 들고 양양(襄陽)을 공격하여 동도 낙양(洛陽)까지 압박해 들어오자 당 덕종은 급히 선무군(宣武軍)을 이동시켜 수비하도록 하였다. 경원[涇原; 지금의 감숙(甘肅) 영하(寧夏)의 육반산(六盤山) 이동과 포하(蒲河) 이서 지역]의 병사 5000여 명이 경사를 지나치다가 위로와 포상이 없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덕종이 금병(禁兵)을 불렀음에도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환관 두문장(竇文場)과 곽선명(霍仙鳴)이 100여 명을 이끌고 와 덕종을 호위하여 봉천[奉天; 지금의 섬서 건현(乾縣)]으로 피신시켰다. 반란이 평정된 후에 덕종은 더 이상 군대를 통솔하는 대장을 믿을 수 없어 특별히 좌우호군중위(左右護軍中尉)를 두어 중앙 금군인 신책군(神策軍)을 통솔하게 하고, 두문장과 곽선명을 파견하여 좌우호군중위를 맡도록 하였다.
이 군대는 15만 명으로 급속히 늘어 경기(京畿) 지역을 통제하였다. 대종 때 환관감군제도를 취소한 적이 있었지만 덕종이 쿠데타의 자극을 받으면서 환관감군제도를 회복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환관이 중앙은 물론 지방의 군권까지 지배하도록 한 제도화의 구실이 되었다.
대종 때에는 또 환관을 추밀사(樞密使)로 기용하여 “조서를 받들고 왕명을 출납하도록 했는데(承受詔旨, 出納王命)” 실제로 황제를 대신하여 정무를 처리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군권과 행정의 중요권한은 모조리 환관의 수중에 떨어져 마침내 환관이 권력을 전횡하는 국면이 형성되었고, 두 명의 중위와 두 명의 추밀사가 당 왕조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환관은 대권을 손에 넣자 황제의 옹립과 폐위는 물론 살리고 죽이는 일까지 마음대로 조종하였다. 820년, 당 헌종(憲宗)이 환관에 의해 살해되면서 903년까지 도합 8명의 황제, 즉 목종(穆宗)․경종(敬宗)․문종(文宗)․무종(武宗)․선종(宣宗)․의종(懿宗)․희종(僖宗)․소종(昭宗)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8명의 황제 중 경종만이 태자로서 제위를 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환관이 옹립하였다. 환관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할 때마다 제위를 계승한 원래의 황제를 폐위시키거나 죽이고 조정의 신하와 대립각을 세우던 환관들을 파면하거나 죽여버렸다. 황제는 완전히 환관 수중의 꼭두각시로 변하였다.
조정 대신의 진퇴용사(進退用舍)도 언제나 환관의 지배와 통제를 받아야 했다. 이용(李鄘)이나 황보단(皇甫鏄) 같은 사람들은 환관 토돌승최(吐突承璀)와 결탁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대시인 원진(元稹) 역시 최담준(崔譚峻)과 위인간(魏引簡)과 어울린 덕에 재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환관에게 불만을 가졌던 재상이나 대신들은 모조리 배척되었다. 문종(文宗) 때의 재상 이석(李石)의 경우 환관들이 사람을 시켜 암살하여 강제로 그를 재상자리에서 끌어내렸던 것이 그 예다. 당대의 환관은 “정원 연간 후부터 그 위세와 권력이 나날이 강해져 힘있는 장군이건 신하이건 아무도 말을 못하였고,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조차도 반드시 뇌물을 써야 일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기회를 주거나 빼앗는 것을 마음대로 하였고, 구중궁궐 안의 폐위와 옹립도 제멋대로 하였다.(自貞元之後, 威權日熾, 蘭錡將臣, 率皆子蓄, 藩方戎帥, 必以賄成, 萬機之與奪任情, 九重之廢立由己.)”(《구당서(舊唐書)․환관열전(宦官列傳)》).
환관의 거대한 권세와 강력한 재력은 당시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저택․정원․옥답들 중 환관들 명의로 된 것이 경기지역의 절반이었다(甲舍、名園、上腴之田爲中人所名者半京畿矣)”(《신당서(新唐書)․환관열전》). 이로부터 환관들이 백성들의 땅과 재산을 교묘한 수단으로 빼앗고 강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덕종(德宗) 때 환관이 주관했던 “궁시(宮市)”는 궁중에 필요한 물건을 사들인다는 핑계로 백성들의 재산을 노략질하듯 강탈하였다. “당시에 환관들은 자주 경성의 상점에서 강제로 상인들 사이에서 매입했다. 대개 100전에 해당하는 물건 값으로 수천 전에 해당하는 물건을 강제로 사들이는 것은 고사하고 운임료의 청구에다 사례금까지 바치도록 했는데, 이를 궁시라고 하였다.(時屢有中官、于京城市肆, 强買人間. 率用直百錢物, 買人數千錢物, 仍索脚價, 及進奉門戶, 謂之宮市.)”(《당회요(唐會要)․시(市)》)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쓴《숯 파는 늙은이(賣炭翁)》2)가 바로 궁시에서 환관들이 부렸던 횡포를 폭로한 시이다.
당 후기에 환관들이 군정 대권을 주무르게 되자 조정 대신들의 불만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어떤 황제는 환관의 속박을 달가워하지 않아 환관들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투쟁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환관들의 업무처리 기구들은 북쪽 궁성에 있었고, 조정 대신들의 관청은 남쪽 궁성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환관과 조정 대신들의 투쟁을 ‘남북사의 투쟁(南北司之爭)’이라고 불렀다. 당 후기에 조정 대신들은 환관 집단과 몇 차례 투쟁을 벌였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영정혁신(永貞革新)”3)이 바로 조정 대신들이 황제의 지지아래 환관집단의 권력을 빼앗아 통치세력을 강화하려했던 투쟁이었다. 정원(貞元) 21년(805)에 순종(順宗)은 즉위하자마자 왕비(王伾)와 왕숙문(王叔文)을 중용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순종이 태자였을 때의 시독(侍讀)이었다. 순종은 왕비를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한림학사(翰林學士)에 등용하고, 왕숙문을 기거사인(起居舍人)․한림학사로 삼았다. 당시에 순종은 병으로 말을 할 수 없었고, 환관 이충언(李忠言)과 소용(昭容) 우씨(牛氏)가 측근에서 수발을 들었다. 그래서 두 왕씨는 안으로는 이충언․우씨 두 사람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이부상서(吏部尙書)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한 다음, 한태(韓泰)․유종원(柳宗元)․유우석(劉禹錫)과 같은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고 당시의 폐단을 개혁하는 동시에 환관들의 권세에 타격을 가하였다.
두 왕씨의 혁신은 먼저 경조윤(京兆尹) 이실(李實)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실은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백성들의 고통이나 기근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세를 강제 징수하였다. 조세납부를 독촉하기 위해 관리들은 태형과 장형을 휘둘렀고, 순종 즉위 한 달 만에 이실은 수십 명을 때려죽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이실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칠 정도였다. 두 왕씨는 순종을 통해 이실을 경조윤 직위에서 파면하여 통주(通州)[지금의 사천성 달현(達縣)]의 장사(長史)로 쫓아내자 백성들이 환호하였다.
두 번째는 백성들의 원한과 증오가 극에 달한 진봉(進奉)․궁시․오방소아[五坊小兒; 궁에 조방(雕坊)․골방(鶻坊)․요방(鷂坊)․응방(鷹坊)․구방(狗坊) 등 다섯 직소(職所)에서 공급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를 혁파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백성들이 체납한 세금 및 일체의 잡세를 면제하고, 염철사(鹽鐵使)가 매월 진상하던 “선여(羡餘)”(당대의 관원이 잉여세금 즉 초과 징수된 세금이라는 명의로 황실에 바쳤던 돈과 재물)도 면제하였다. 두우(杜佑)를 탁지(度支)와 각 도(道)의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로, 왕숙문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였고, 얼마 안 있어 또 호부시랑(戶部侍郞) 자리를 겸임시켜 재정대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왕숙문 개혁의 핵심은 환관의 병권을 빼앗는 것이었다. 숙장(宿將)․우사위대장군(右舍衛大將軍) 범희조(範希朝)를 좌우신책(左右神策)․경서제성진행영절도사(京西諸城鎭行營節度使)로 임용하였고, 한태(韓泰)를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삼아 신책군(神策軍)을 환관의 손에서 분리시키려고 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대환관 구문진(俱文珍)을 우두머리로 하는 환관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환관들은 “그들의 술책을 따르게되면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손에 죽게될 것(從其謀, 吾屬必死其手)”(《통감기사본말(通監紀事本末)․비문용사(伾文用事)》)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각 장수들에게 밀령을 내려 병권을 내어주지 말라고 하였다. 범희조와 한태가 봉천(奉天)에 도착했지만 맞이하러 온 군관이 한 명도 없었다. 몇 달 후에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병권도 빼앗아 올 수 없었다.
이밖에도 두 왕씨의 개혁은 절도사들의 힘을 누르고, 궁녀와 여자 악사를 석방하며, 궁중의 유모를 징집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들이었다. 혁신은 환관들의 반대에 부딪쳤을 뿐만 아니라 절도사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도 하였다.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 위고(韋皐)는 지탁부사(支度副使) 유벽(劉辟)을 장안으로 파견하여 왕숙문을 만나보도록 하였다. 유벽은 “태위께서는 저 유벽을 시켜 변변찮은 정성이나마 공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저희에게 삼천(검남의 동천․서천 및 산남의 서도를 삼천이라 함)을 주신다면 당연히 죽음으로써 서로 도울 것이고, 만약 주시지 않는다면 또한 당연히 서로 보복할 수도 있겠지요.[太尉使辟致微誠于公, 若與某三川(劍南東川、西川及山南西道爲三川), 當以死相助; 若不與, 亦當有以相酬.]”4)라고 하여 결국 보복이라는 말로 위협하였다. 왕숙문이 대답을 하지 않게 되자 위고는 곧 환관들과 결탁하여 임금에게 글을 올려 왕숙문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조정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공격하였다. 이어서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 배균(裴均)과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엄수(嚴綬)가 함께 왕숙문을 비난하고 나섰다. 구문진은 또 일부 조정의 관료들과 결탁하고 순종을 핍박하여 이순[李淳; 후에 이순(李純)으로 개명함]을 태자로 내세운 다음 이윽고 순종을 폐위시키고 이순(李純)을 옹립했는데, 이가 바로 헌종(憲宗)이다. 두 왕씨는 바로 축출되었고, 이듬해에 왕숙문은 사약을 받았으며 왕비는 병으로 죽었다. 위집의(韋執誼)․한태(韓泰)․유종원(柳宗元)․유우석(劉禹錫) 등 8명은 모두 사마(司馬)로 강등되어 축출되었다. 혁신은 실패로 돌아갔고 806년에 순종도 환관들에 의해 독살을 당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사건을 “영정혁신(永貞革新)” 혹은 “이왕팔사마사건(二王八司馬事件)”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안사의 난 이후 조정의 신하와 환관이 겨룬 첫 번째 결투로 환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당 헌종은 만년에 단약(丹藥)을 복용한 때문에 성정이 포악해져 주변의 환관들을 구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820년에 대환관 왕수징(王守澄)과 중상시 진홍지(陳弘志)에 의해 궁중에서 살해되었다. 뒤를 이어 즉위한 목종(穆宗)과 경종(敬宗)은 완전히 정사를 환관에게 맡기고 노는 데에만 정신을 팔았다. 목종은 단지 3년 정도 황제 자리에 있었지만 금단(金丹)을 복용하다 죽었다. 경종은 헌종이 갔던 그 길을 따라 갔는데, 환관을 구타했다는 이유로 환관 유극명(劉克明)에게 옷을 갈아입는 곳에서 살해되었다. 왕수징 등은 또 강왕(江王) 이함(李涵)을 옹립했는데, 이가 바로 문종(文宗)이다.
문종은 제위에 오른 후에 환관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국면을 바꾸어보려고 했지만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후에 한림학사 송신석(宋申錫)에게 자신의 생각을 떠보고 나서 그가 충성스럽고 침착해서 서로 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느껴 마침내 그를 재상격인 동평장사(同平章事)로 등용하였다.
대화(大和) 5년(831)에 송신석은 사람들과 환관 왕수징을 없애고자 논의했지만 이 일이 새어나가 되려 지방관으로 축출되고 말았다.
대화 8년(834)에 문종은 중풍에 걸린다. 왕수징은 정주(鄭注)라고 하는 의술에 정통한 사람을 끌어들여 문종의 병을 돌보게 했는데, 효험이 있게 되자 그를 총애하게 된다. 전 재상이었던 이봉길(李逢吉)의 조카 이훈(李訓)은 수백만 금이나 나가는 금은보화로 정주와 관계를 맺었고, 정주는 그를 왕수징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이훈은《역경(易經)》풀이에 뛰어났는데, 왕수징은 이 때문에 그를 문종에게 추천하였고, 두 사람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정주를 불러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공부상서(工部尙書)로 삼고, 이훈을 사문조교(四門助敎)․주역박사(周易博士)겸 한림시강학사 등으로 삼았다. 정주와 이훈은 총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마음도 잘 헤아렸는데, 문종이 환관을 아주 저주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는 여러 차례 환관을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문종은 두 사람을 환관이 추천했기 때문에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그들과 함께 환관들을 없애고자 하였다.
환관 구사량(仇士良)과 왕수징이 반목하는 사이에 정주와 이훈은 문종을 위해 계획을 짜고 구사량을 좌신책중위(左神策中尉)로 삼아 왕수징의 권력을 분할하고자 하였다. 구사량은 왕수징을 사지로 몰아넣고자 마침내 이훈과 모의하여 헌종을 살해한 범인을 추적 조사하였다. 궁중 내외의 사람들은 모두 진홍지와 왕수징이 헌종을 살해했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이훈은 문종에게 양양(襄陽)에 감군(監軍)으로 나가있는 진홍지를 소환시키고 도중에 없애라고 상주하였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왕수징에게 대항하여 우신책군중위(右神策軍中尉) 왕수징을 좌우신책관군용사(左右神策觀軍容使)로 바꾸어 십이위통군(十二衛統軍)을 겸하도록 문종에게 요청했는데, 이름뿐인 벼슬을 주고 실제로는 그의 권한을 빼앗았던 것이다. 후에 기회를 틈타 왕수징을 독살해버렸다. 이어서 세 명의 재상 이덕유(李德裕)․이종민(李宗閔)․노수(路隋)를 파면하고 이훈을 재상에, 정주를 봉상절도사(鳳翔節度使)에 임명하였다. 문종은 또 대리경(大理卿) 곽행여(郭行餘)를 빈녕절도사(邠寧節度使)로, 호부상서(戶部尙書) 왕번(王璠)을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임명하고, 경조소윤(京兆少尹) 나립언(羅立言)을 권지대윤사(權知大尹事)로, 대부경(大府卿) 한약(韓約)을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으로, 형부낭중(刑部郎中)겸 어사지잡(御史知雜) 이효본(李孝本)을 권어사중승(權御史中丞)으로 삼아 함께 환관 주살을 도모하였다.
그들은 애초에 다음과 같이 상의하여 결정하였다. 첫째, 정주가 봉상에 도착하면 수백 명의 장사들을 선발하여 친위대를 만들고, 왕수징을 매장할 때 장례를 호위할 수 있도록 하며, 친위대에게 무기를 숨겨두도록 한다. 둘째, 환관 가운데 중위 이하의 사람들은 모두 영구를 묘지로 옮겨가도록 한다. 셋째, 정주가 친위대를 지휘하여 환관들을 모조리 죽인다. 그러나 이훈은 정주가 공을 독차지할까봐서 원래 정했던 계획을 바꾸어 함정을 파고 선수를 쳐서 환관집단을 없애버렸다.
대화 9년(835) 11월 21일에 문종이 자신전(紫宸殿)에 이르자 백관들이 배알하였다. 이때 좌금오장군(左金吾將軍) 한약(韓約)이 사전 계획에 따라 상주하였다. “금오 좌장원 석류나무 아래에 어젯밤 하늘에서 감로가 내렸습니다.(金吾左仗院石榴樹上昨夜天降甘露.)”라고 아뢰자 신하들이 경하하였다. 이훈이 아뢰기를 “감로는 좋은 징조를 궁전에 내리는 것이니 폐하께서 친히 좌장원에 납시어 그것을 살펴보심이 옳을 것입니다.(甘露降祥, 俯在宮禁, 陛下宜親幸左仗觀之.)”(《구당서․이훈전(舊唐書․李訓傳)》)라고 말하였다. 문종은 윤허하고 수레를 타고 자신문(紫宸門)을 나서 함원전(含元殿)에 오르며 재상과 문무백관에게 따르도록 하였다. 또 재상에게 신하들을 이끌고 좌장원으로 가서 감로를 보도록 명령하였다. 한참이 지나 이훈이 돌아와 아뢰기를 “신들은 진짜 감로가 아닐까봐 두려워 감히 가벼이 말도 못 꺼내고 있는데, 말이 새어 나가 사람들이 축하하러 올까 두렵습니다.(臣等恐非眞甘露, 不敢輕言, 言出, 恐天下稱賀.)”라고 하자 문종이 “한약이 함부로 한 것인가?”라고 말하며, 또 중위 구사량과 어홍지(魚弘志)에게 명하여 환관들을 데리고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다. 환관들이 떠나자 이훈은 곽행여와 왕번을 소환하여 “황제의 명을 받들라”라고 하였다. 이때 곽행여와 왕번의 부하들은 무기를 가지고 단풍문 밖에 열 지어 있었다. 이훈이 부른다는 소리에 왕번은 두려워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였고, 곽행여만이 궁전 아래에서 절을 하였다. 사람을 시켜 문밖의 군사들을 부르자 왕번 만이 병사들을 따라 들어왔고, 빈녕(邠寧)의 군사들은 결국 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구사량 등이 좌장원에 감로를 보러 오자 한약은 숨이 막힌 듯 진땀을 흘리며 머리를 들지도 못하였다. 구사량은 이상히 여겨 “장군 왜 그러시오?”라고 물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바람이 불어 장막이 흔들렸는데 구사량은 장막 뒤에 칼과 창을 든 군인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 문지기가 대문을 닫으려고 하자 구사량이 큰소리로 제지하였다. 이훈이 이를 보고는 급히 소리를 질렀다. “호위무사들은 들어 오라. 어가를 호위하는 자는 백 전의 상을 받을 것이다.(金吾衛士上殿來, 護衛乘輿者, 人賞百錢.)”. 구사량은 함원전으로 도망쳐서는 환관들에게 수레를 밀고가 황제를 맞이하라고 하였다. “사태가 급박합니다. 폐하께서는 안으로 드십시오!” 황제를 부축하여 수레에 태우고는 전각을 내려가 급히 떠나려고 하였다. 이훈이 수레를 붙들며 “소신은 아직 다 아뢰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입궁하셔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구사량이 “이훈은 반역했습니다!”라고 크게 외치자, 문종은 “이훈은 반역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금오의 호위무사 수십 명이 이훈을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나립언(羅立言)이 경조부(京兆府)의 병사 300여 명을 이끌고 동쪽에서 왔고, 이효본(李孝本)이 어사대(御史臺)에서 200여 명을 이끌고 서쪽에서 왔다. 이들은 모두 전각에 올라 삽시간에 환관들을 도륙했는데, 사상자만도 수십 명이었다.
이훈이 수레를 밀며 급히 달아나 선정문(宣政門)에 이르자 내관(內官) 치지영(郗志榮)이 주먹으로 이훈을 내리쳤다. 이훈은 땅에 쓰러졌다. 환관들이 수레를 동쪽 전각 문으로 밀고 들어가자 문이 닫혔고, 궁 안에서는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사량은 즉각 좌우신책부사(左右神策副使) 유태륜(劉泰倫)과 위중경(魏仲卿)에게 각각 금군 500명씩을 이끌고 나아가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고, 이런 난리 속에 목숨을 잃은 관리들만도 6,700명이나 되었다. 이훈의 잔당 천여 명도 체포되는 즉시 처형되어 피가 강을 이룰 정도였다. 재상 왕애(王涯)․가속(賈餗)․서원여(舒元輿)도 이 소식을 들었지만 도망치기는 어려웠다. 이훈은 주먹에 맞아 쓰러졌었지만 종남산(終南山)으로 달아나 종밀(宗密)이라는 승려에게 의탁하였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 했지만 종밀의 제자들이 원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봉상으로 가서 정주에게 의지하려고 하였다. 산을 나섰지만 바로 붙잡혀 경성으로 압송되게 되었다. 이훈은 군대 내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압송하는 자에게 “나를 잡은 자는 분명 부자가 될 것이네. 듣기로 금군도 지금 날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하던데, 날 보면 틀림없이 너희들과 쟁탈전을 벌일 것이 뻔하니 아예 날 죽여 머리를 보내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압송하던 자들은 그럴 것이라고 여겨 바로 이훈의 머리를 잘랐다. 재상 왕애․서원여 및 왕번․곽행여․한약 등은 모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고, 그들의 친족들도 연좌되어 모조리 처형을 당하였다.
정주는 본래 이훈과 밖에서 원조하기로 모의했었다. 그래서 정주는 군사 500명을 이끌고 봉상에서 부풍(扶風)에 이르렀는데 이훈의 사고소식을 접하고는 봉상으로 되돌아갔다. 이때 구사량은 이미 사람을 시켜 봉상의 감군 장중청(張仲淸)에게 정주를 잡아 죽이라고 밀령을 내렸다. 장중청은 정주에게 감군부에 들어와 의논 좀 하자고 요청하였고, 정주는 호위병을 데리고 갔지만 매복한 병사들이 들이쳐 정주를 죽여 버렸다.
환관을 제거하려던 계획이 미수에 그치고 장안의 남북 관청을 피로 물들인 이 사건을 감로수로 인한 정치적 변고라는 의미의 “감로지변(甘露之變)”이라고 통칭한다. 문종은 두 차례에 걸쳐 환관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나자 이때부터 종일 술로 슬픔을 달래며 “주나라의 난왕과 한나라의 헌제가 제후들에게 속박을 받았다고 하던데, 지금은 짐이 가노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으니, 이대로 산다면 짐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구나!(赧、獻受制于諸侯, 今朕受制于家奴, 以此言之, 朕殆不如!)”라고 탄식하였다.
“감로지변” 후에 환관집단의 세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당 소종(昭宗) 때 가장 신임을 받았던 재상 최윤(崔胤)은 황제와 함께 밖으로는 절도사들의 힘을 누를 방안과 안으로는 환관들을 제거할 계획을 논의하였다. 최윤은 아무도 모르게 주전충(朱全忠)과 결탁하였다. 주전충은 원래 봉기군 황소(黃巢)의 부하였는데, 반군 내에서 정변을 일으키고 당에 투항하여 하중행영초토부사(河中行營招討副使)에 임명되었으며, 후에 이극용(李克用)과 연합하여 황소의 봉기군을 진압한 공으로 양왕(梁王)에 봉해져 지방의 할거세력이 되었다. 환관들은 최윤을 지독하게 미워하였다. 환관 한전해(韓全海)가 나서 소종에게 최윤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동시에 금군을 선동하여 소란스럽게 하고는 최윤이 군인들의 겨울옷을 착복했다고 하였다. 소종은 결국 최윤의 재상 자리를 철회하고 염철사(鹽鐵使)에 임명하였다. 최윤은 원한을 품고 비밀리에 주전충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울로 와서 황제의 주변을 쓸어내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주전충은 편지를 받자 곧장 군대를 출동시켰다. 한전해가 이 소식을 듣고는 먼저 황제를 겁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금군을 파견하여 궁궐의 각 문을 지키게 하고, 오가는 사람은 물론 문건의 왕래까지 모조리 검열하였다. 또 대전에 들어 황제에게 서쪽 봉상의 행재소(황제가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처소)로 행차해주기를 청하였다. 소종은 또 친필 서한을 밀서로 하여 최윤에게 서행하는 일을 알려주었다. 그 날 저녁에 한전해는 입궁하여 황제에게 바로 떠나자고 압박하며 “주전충이 서울로 들어와 천자를 위협하여 대당천하를 빼앗으려 합니다.(朱全忠欲入京劫天子, 搶大唐天下.)”라고 하였다. 소종과 후비를 비롯한 제왕(諸王) 백여 명은 서쪽 봉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주전충이 군대를 몰아 장안으로 들어와 스스로 대장군이 되었다. 즉시 대군을 이끌고 봉상을 향해 진군하였다. 성 아래에 이르러 크게 소리쳤다. “환관 한전해가 성상의 수레를 위협한다고 하던데, 내가 오늘 그 죄를 묻고 성상의 수레를 영접하여 회궁시키려고 왔노라!(宦官韓全海勒逼聖駕, 我今來問罪, 迎聖駕回宮!)” 한전해는 소종을 위협하여 주전충에게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명을 내리게 했지만 주전충의 군대는 여전히 봉상을 포위하였다. 성안에 식량이 떨어지자 많은 병사들이 야간에 몰래 밧줄을 이용해 성을 내려와 주전충에게 투항하였다. 봉상절도사 이무정(李茂貞)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게 되자 자신의 책임을 피하고자 환관들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편지를 쏘아 주전충에게 강화의 뜻으로 환관들을 죽이겠다고 하였다. 소종은 비밀리에 사자를 성 밖으로 보내어 주전충을 위로하고 비밀리에 강화를 맺었다. 천복(天復) 3년(903) 정월에 이무정이 한전해를 비롯한 환관 16명을 죽였고, 최윤은 입성하여 환관 70여 명을 잡아 죽였다. 주전충은 경조윤(京兆尹)에게 밀령을 내려 퇴직한 환관들을 잡아 죽이도록 하였다. 주전충은 또 “환관들이 군대를 일으키고 정사에 간섭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했는데, 이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재앙과 해가 아직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각 내사의 사무를 모두 파하고 성과 사가 각 도를 관장하도록 하며, 감군은 모두 대궐로 소환하십시오……(宦官興兵干政, 危害社稷, 此根不除, 禍害未已. 請悉罷諸內司事務, 統歸省寺諸道, 監軍均召還闕下……)”라고 아뢰었고, 소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주전충과 최윤 두 사람은 군대를 보내어 환관들을 대대적으로 수사하여 좌우중위 및 추밀사 이하 환관 수백 명을 잡아다 모조리 참수하고, 어린 환관 30여 명만을 남겨 궁궐 안을 청소하게 하였다. 최윤에게 판육군십이위사(判六軍十二衛事)를 겸하게 하는 것으로 당대 환관이 군대를 관할하고 정사에 간여하던 국면은 끝이 난다.
환관이 사라지면서 주전충은 조정을 틀어쥐고 시시각각 당나라의 천하를 엿보았다. 얼마가지 않아 주전충은 최윤을 죽이고 소종에게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핍박하는 동시에 소종 주변의 격구(擊毬) 시봉자와 내원(內園)의 아이들 200명을 죽였다. 904년에 소종을 죽이고 907년 4월에 주전충이 제위에 오르면서 당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군웅들이 쟁패하는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가 도래한다.
1) 《국사대강(國史大綱)》,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 1991년판, 365쪽.
2) 제목은 賣炭翁(숯 파는 늙은이)으로 그 밑에 “苦宮市也.(궁시 때문에 고난을 겪음)”라고 적혀 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賣炭翁, 숯을 파는 늙은이,
伐薪燒炭南山中. 남산에서 나무 베어내어 숯을 굽네.
滿面塵灰煙火色, 온 얼굴 재투성이에 벌겋게 달아올랐고,
兩鬢蒼蒼十指黑. 양쪽 살쩍 희끗희끗 열 손가락 새까맣다.
賣炭得錢何所營? 숯 팔아 번 돈을 어디에다 쓰는고?
身上衣裳口中食. 몸에 걸칠 옷과 입에 풀칠하는 것뿐.
可憐身上衣正單, 가련하여라 몸에 걸친 옷 홑겹인데,
心憂炭賤愿天寒. 숯 싸질까 걱정해 추워지기만 바라네.
夜來城外一尺雪, 밤새 성 밖엔 눈이 한자나 쌓였건만,
曉駕炭車輾冰轍. 새벽에 숯 수레 끌고 빙판길을 가네.
牛困人飢日已高, 소도 사람도 지치고 허기져 해 이미 높아,
市南門外泥中歇. 남문 밖 진흙길에서 잠시 쉬려 하였네.
翩翩兩騎來是誰? 두 마리 말이 달려오는데 누구일꼬?
黃衣使者白衫兒. 노란 옷 입은 환관과 흰 옷 입은 심부름꾼.
手把文書口稱勅, 손에는 문서를 들고 칙명이라 이르고,
迴車叱牛牽向北. 수레를 돌려 소를 끌고 북쪽으로 향하네.
一車炭, 千餘斤, 한 수레 숯이, 천여 근이건만,
官使驅將惜不得. 대궐 칙사가 가져간다니 아깝기 그지없어라.
半疋紅紗一丈綾, 반 필의 붉은 명주와 일 장 길이의 능라를,
繫向牛頭充炭直. 숯 값에 충당하라며 소머리에 묶어놓고 가네. - 옮긴이.
3) 당대 순종(顺宗) 때 관료와 사대부들이 환관세력을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개혁을 말하는 것으로 영정연간(805)에 발생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옮긴이.
4) 《통감기사본말(通監紀事本末)》권34《비문용사(伾文用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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