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언홍 지음 / 이상천 옮김 ≪중국고대의 환관≫, 울산대학교출판사, 2009.
四․환관의 혼인과 가정
환관의 몸은 거세를 당해 성기능을 상실한 때문에 보통 사람들처럼 생리적으로 결혼해 자식을 낳으며 살 수 없다. 역사에 환관의 결혼을 금지한다는 명문화된 법령이 보이지 않는데 굳이 금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환관이 처첩을 거느렸다는 기록은 사서에 흔히 보인다. 환관은 입궁 후에 오랜 세월 제일 많이 접촉하는 것이 바로 여인들이다. 후비(后妃)로 말하자면 그녀들은 주인이었고 환관은 그녀들의 의복․음식․거주․거동을 시중드는 노비들이었다. 일반 궁녀나 제왕의 유모 입장에서 보면 환관은 평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환관들이 매일 그녀들과 귀와 살쩍을 문지르듯 서로 보살펴 주며 지내다 보니 정분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상적인 성생활은 할 수 없지만 흡사 부부처럼 지내게 된다. 이런 기형적인 양성(兩性)관계를 “대식(對食)” 혹은 “채호(菜戶)”라고 불렀다.《추등록(秋燈錄)》이라는 책의 기록에 의하면 “궁중의 옛 관례에 내감과 궁녀가 부부로 짝짓는 것을 일러 마주하여 밥을 먹는 사이라는 의미의 ‘대식’이라고 하며......짝을 이룬 이들은 민간의 부부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宮中舊例, 內監與宮女各配夫婦, 謂之‘對食’......偶俱相比, 無異民間伉儷.)”라고 하였다.
명사(明史)의 기록에 따르면, 명대의 대태감이었던 위충현(魏忠賢)과 명 희종(熹宗) 주유교(朱由校)의 유모 객씨(客氏)가 바로 “대식자(對食者)”로 맺어졌다고 한다. 객씨는 18세에 입궁하여 주유교의 유모가 되었다. 명 희종은 황제가 된 후 에 자신을 키워 준 유모의 은공을 잊지 않고 그녀를 “봉성부인(奉聖夫人)”으로 봉하는 등 큰상을 내렸다. 위충현은 입궁한 후에 갖은 방법을 동원해 객씨의 비위를 맞추었다. 원래 객씨와 사이가 좋았던 태감 위조(魏朝)는 아주 불편스러워하다가 결국 위충현과 대판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주유교가 나서서 싸움을 멈추게 한 후 객씨에게 물었다. “유모, 누가 그대에게 필요한 사람인지 그것만 말하시오. 내가 그대를 위해 결정해 주겠소!(客奶,你只管說要誰爲你管事,我給你做主!)”(《음주 속에 품은 뜻(酌中志)》) 결국 황제가 주선하여 위충현과 객씨를 “대식”으로 맺어 주었다. 후에 두 사람은 한 패가 되어 온갖 못된 짓을 일삼았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소개하겠지만 어쨌든 명대에 이런 기형적인 양성관계가 이미 공개화 되고 합법화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파악하고 있는 사료를 살펴보면, 환관이 아내를 얻었다고 하는 가장 이른 시대는 동한이라고 여겨진다. 역사학자들도 동한․당․명이 환관들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던 시대로 평가한다. 동한의 환관들은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것은 기본이고 대부분 아내를 취하였다.《통감(通監)․한기(漢紀)․성제기(成帝紀)》에 “높은 수레를 타고 승진을 다투는 자들은 모두 환관의 마누라들이었다.(高軒鬪升者,盡是閹官之嫠婦.)”라는 기록이 있다.1)
한 환제(桓帝) 때 외척이었던 양기(梁冀)가 권력을 찬탈하자 단초(單超)․서황(徐璜)․당형(唐衡)․구원(具瑗)․좌관(左悺)이라는 다섯 명의 환관이 황제를 도와 양기를 비롯한 그 잔당들을 제거했는데, 이로써 그 공로를 인정받아 “5후(五侯)”에 봉해졌다.《후한서(後漢書)․환자열전(宦者列傳)》에는 단초가 죽은 후 당형 등 4후가 전횡하여 “대부분 양가의 미녀들을 첩으로 삼고 모두 진귀한 보배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며 궁인들 같았다.(多取良人美女爲姬妾,皆珍飾華侈,擬則宮人.)”라는 기록이 있다. 위의 사료를 참고하면 한나라 때 환관이 아내를 얻는 것은 이미 흔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나라 특히 당 후기에 이르러 사치스러운 궁궐 속에서 득세한 환관들은 예외 없이 노골적으로 아내를 맞이하였고, 또 처가 쪽과 손을 잡고 악행을 일삼았다. 심지어 황제가 나서서 환관을 위해 아내를 맞이해 주기도 하는 등 황당하기 그지없었다.《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라는 책에서는 당대 환관의 창궐은 앞 시대를 뛰어넘었고, 아내를 취하는 데에도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당 현종(玄宗) 때 고력사(高力士)라는 환관이 총애를 받았는데, 현종은 늘 “고력사가 내 자리를 맡고 있으니 나는 잠자리에 들어도 편안하기만 하다.(力士當上,我寢則穩.)”라고 말하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고력사는 그야말로 잠시도 황제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간(河間)사람 여현오(呂玄晤)라는 자가 장안(長安)에서 관직을 지냈는데 그의 딸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고력사는 그의 딸을 아내로 맞는 대신에 여현오를 소경(少卿)과 자사(刺史)로 발탁해 주었고, 여현오의 부인이 죽었을 때는 장안성 동쪽에다 아주 후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안팎에서 앞다투어 보내온 제사에 쓸 물품들이 길거리에까지 넘쳐날 정도였고, 집에서 무덤까지 가는 길은 수레와 말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황당한 일을 하나 더 소개한다. 재상 배광연(裴光延)이 무삼사(武三思)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고력사가 그녀와 간통을 했다. 이렇게 환관은 아내를 얻는 것은 기본이고 정부를 두기도 하였다. 환관 이보국(李輔國)은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태자 이형(李亨)을 영무(靈武)까지 수행하며 제위에 오를 것을 권했는데, 이가 바로 숙종(肅宗)이다. 장안으로 돌아온 후 숙종은 더욱 그를 총애하게 된다. 이보국을 죽은 이부시랑(吏部侍郞) 원희성(元希聲)의 조카인 원탁(元擢)의 딸에게 장가들도록 해주고, 원탁을 양주장사(梁州長史)로 발탁하였다.
당 후기에 환관의 폐해를 거울삼아 송대는 환관을 관리하는 데에 엄격한 편이어서 아내를 두었다고 하는 기록은 크게 없지만 간간이 그런 기록이 보이기는 한다.《송사(宋史)․후비전(后妃傳)》에 “환관이 아내를 두어도 조정에서는 사실 암암리에 묵인하고 허락했다.(是宦官有妻,朝廷實黙允之.)”라는 기록이 있다. 이밖에《송사․후비전》과《송사․환관전》에 기록된 유사한 사건을 소개한다. 남송(南宋) 경원(慶元) 연간(1195~1200)에 환관 임억년(林億年)이라는 자는 별장에 기녀를 두고 있었고, 진원(陳源)이라는 자는 폄소(貶所)에 음탕한 기녀를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진짜 환관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정사(正史)에는 환관이 아내를 두었다는 기록은 아주 드물어 동관(童貫)이나 양사성(梁師成) 같은 대환관의 전기에도 아내를 두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원대(元代)에는 정사에도 환관이 아내를 두었다는 기록이 간간이 보인다. 이를테면《신원사(新元史)․환자전서(宦者傳序)》에 “처첩을 많이 거느린 자들만이 여전히 아내를 둘 수 있었다.(惟蓄妻妾者,仍偶有之.)”라고 하였고,《원사(元史)․오고손량정전(烏古孫良楨傳)》에 한인(罕因)이라는 환관이 첩을 아낀 나머지 아내를 죽이고 그 살을 도려내어 개에게 먹였다고 하였다.
명대 초기에 태조는 환관이 여자를 아내로 두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어기는 자는 그 가죽을 벗겼다.《만력야획편》은 당시에 뇌물을 탐한 환관에게는 가죽을 벗기고 풀을 쑤셔 넣는 형벌이 있었는데, 아내를 둔 내시들에게도 이 형벌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 성조(成祖) 때 환관을 총애하기 시작하면서 태조의 금령은 점차 폐기되었고 환관들도 따라서 거리낌없이 방자해지기 시작하였다.《만력야획편․환관선음(宦官宣淫)》중에는 하남안찰첨사(河南按察僉事) 석윤상(石允常)이 평복을 하고 나서서 환관이 여자를 겁탈하거나 여자를 죽게 한 사건들을 조사해 낸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 많은 환관들이 아내나 첩을 얻고 장가드는 양태도 다양해졌는데, 그 기기묘묘한 방법들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황제가 환관에게 처첩을 하사하는 경우이다. 섭문장(葉文莊)이 지은《수동일기(水東日記)》에 진무(陳蕪)라고 하는 환관이 선종(宣宗) 때 어마감(御馬監)의 태감으로 승진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한왕(漢王) 고후(高煦)를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고 해서 왕근(王謹)이라는 성과 이름을 받은 것 외에도 엄청난 재물과 함께 궁녀 두 명을 아내로 받았다고 한다. 천순(天順) 초년에 오성(吳誠)이라는 자에게 아내를 하사했다는 언급도 있는데, 이 오성에게는 요씨(姚氏)라는 첩이 하나 더 있었는데 오성이 죽자 그녀는 황제에게 상서하여 장례의 일을 청원하기도 했다 한다. ②궁녀와 “대식”으로 맺어지는 경우이다. 궁녀와 환관은 궁궐 안에서 같이 지내는 데다 궁녀는 아무리 사소한 것을 사려고 해도 환관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연히 정분이 들기 마련이었다. 이때 누군가 중매를 서게 되면 “대식”이나 “채호”로 맺어질 수 있었다. 궁녀 가운데 “대식”이 없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보통은 서로 좋아하며 사랑을 속삭이지만 서로 질투를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황제도 이해해서 그런지 간혹 환관에게 “너의 아내는 누구더냐?”라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궁궐 밖으로 내쳐진 궁녀들은 대부분 환관들에게 시집을 갔다. ③아내를 여럿 얻거나 기녀를 부양하는 경우이다.《유청일찰(留靑日札)》이라는 책의 ‘환관처(宦官妻)’조의 기록에 후옥(侯玉)이라는 환관에게 아름다운 처첩(妻妾)들이 많아서 한 친구에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 둘을 선물로 주었던 일과 어떤 환관이 기녀와 서로 좋아지자 아내로 삼아 집으로 데리고 갔던 일 등이 보인다. 숭정(崇禎) 말년에 내시들이 취처(娶妻)하는 것을 엄금했으나 “내관들이 사사로이 밖에서 아내를 얻거나 기녀를 좋아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內官私在外娶妻及狎妓者,尤比比也.)”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환관이 기생을 데리고 놀다 빚을 지고 궁궐로 도망하자 기녀가 남장을 하고 궁궐로 들어와 빚 청산을 요구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권세를 누렸던 일부 대환관들은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면 더 많은 애첩들을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다.
청대에는 태감이 되어 3년 정도가 되면 조정에서 반드시 고관을 파견하여 태감의 행적을 철저하게 조사해 뛰어난 자는 궁궐로 복귀시키도록 제도화했기 때문에 환관이 된 초기에 아내를 얻었다는 소리가 없었다. 청대 말기에야 비로소 아내를 얻고 양자를 들였다는 자가 나타난다.《청패류초》의 기록을 보면 도광(道光) 연간에 내감 미풍의(美豊儀)라는 자가 총애를 받게 되자 아내를 얻어 내정의 남쪽에 거처할 집을 마련했다고 한다.《황조쇄설록(皇朝瑣屑錄)》권7의 기록을 보면 동치(同治) 연간에 경오(庚午) 관보는 태감 안덕해(安德海)라는 자가 몰래 도망쳐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을 빠져나왔지만 이리저리 헤매다 잡혀서……칙령에 의해 현장에서 처형되었고……그의 부인 마(馬)씨는 군인에게 넘겨져 노비가 되었다고 하였다. 노태감 손요정이 소개한 내용에 따르면, 아내를 얻거나 여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청나라 말기에 궁궐 안에서 대단히 유행했던 일로 어떤 태감이건 돈이 있으면서도 아내를 얻지 못하거나 기생을 데리고 놀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다고 한다. 소덕장(小德張)이라고도 불렸던 장운정(張雲亭)이라는 내시는 출궁 후에 천진(天津)에 집을 마련하고 몇 명의 아내를 얻었는데, 그 중 하나가 천진(天津)에 있는 한 기루의 이름난 “소향숙옥(小香淑玉)”이라는 기녀로 그녀는 후에 정실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여자는 학대를 못 이겨 외국 조계지(租界地)내의 영국 경찰서로 도망쳐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후에 소덕장은 돈으로 경찰관을 매수해 들어가서는 그 여인을 잡아와 때려죽였다고 한다. 물론 잘 살았던 여인도 있다. 손요정이 알고 있었던 태감 위자경(魏子卿)이라는 자는 6품 정대 벼슬을 가진 자였는데 궁중에서 남모르게 예쁜 궁녀와 알게 되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溥儀)가 궁궐을 떠난 후에 위자경(魏子卿)도 궁궐을 나와 황화문(黃化門) 부근에 집을 얻어 그 궁녀와 동거했다고 한다.
환관은 성관계는 못했지만 아내나 첩을 얻고 기녀를 데리고 놀았으며 심지어 간통까지 저질렀는데, 그 원인을 들여다보면 다음의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일종의 성(性)적 위로가 필요한 경우이다. 환관들은 원래 부모는 물론 형제자매와도 관계를 끊고 황제의 유모나 궁녀들과 오랫동안 궁궐 안에서 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서로 보살펴 주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환관들은 비록 거세를 당했지만 그들 스스로는 언제나 스스로를 성적 위로가 필요한 남자라고 여겼기 때문에 궁녀나 유모와 서로 만나 한 쌍의 부부처럼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황제까지도 이런 관계를 인정해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채호” 또는 “대식”이다. 둘째, 거세되었다고는 하지만 거세가 완벽하지 않을 경우 나중에 다시 자라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이성을 필요로 한 경우이다. 어떤 조대(朝代)는 환관이 된 후 몇 년이 지나면 다시 몸을 검사하도록 규정했는데, 재차 거세를 당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비록 남성 구실을 할 수 없는 환관이라지만 성욕은 여전하다고 여겼다. 셋째, 일종의 변태심리로 이성에게 성적 학대를 가하는 경우다. 어떤 노태감은 한평생 수많은 굴욕을 받다가 갑자기 큰돈이 생기자 바로 젊은 처첩들을 구해서는 자신이 받았던 온갖 형벌을 처첩들의 몸에다 저질렀다. 청나라 말기의 한 노태감은 늘 처첩들을 발가벗겨 놓고 담뱃불로 지지거나 매달아놓고 때리기도 하고 침으로 찌르는 등 갖은 짓을 다하였다.(《왕조 마지막 태감들의 비밀》) 진존인(陳存仁)의《남성의 혹형인 태감에 관한 고찰(男性酷刑太監考)》을 보면, 환관은 성관계를 할 수 없게 되자 성정이 비뚤어져 처첩을 아끼기는커녕 성관계를 할 때마다 여자를 깨물거나 씹고 긁거나 때려서 여자는 마치 야수에게 당한 듯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자들은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몸은 비쩍 마른 채로 슬픈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태감에게 시집갔던 어느 늙은 궁녀는 거세가 사람의 마음을 왜곡시켜놓은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악랄하고 강한 질투심에 의심까지 많아 태감의 아내 노릇은 정말 지긋지긋했다고 털어놓았다. “남편 유씨는 평상시에 날 더러 다른 남자들과는 절대로 말도 못하게 하였고 내가 외출하는 것은 더더욱 허락하지 않았으며 내가 친척을 찾거나 이웃에 들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상자 속에 갇혀 생활하는 것 같았다.……(老劉「她嫁的那个太監丈夫」平常絶不讓我跟男人說話,更不許我上街,也不許我走親戚串街坊,我就像在合子里生活一樣.……)”2)
환관이 처첩을 얻었다는 기록은 있어도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는 “세 가지 불효 가운데 후손이 없는 것이 제일 크다.(不孝有三, 無後爲大.)”라는 말을 신봉하였다. 후사를 위해 환관들은 양자를 들였다.《후한서(後漢書)․환관열전(宦官列傳)》에 한(漢) 순제(順帝) 때 환관이 양자에게 작위를 세습하도록 윤허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양자는 친족은 물론 남이나 심지어 노예의 아들까지도 가능했다. 한대의 환관 손정(孫程)이라는 자는 순제를 옹립하는데 공이 있어 식읍이 만호인 부양후(浮陽侯)에 봉해졌다. 손정이 임종할 즈음 황제에게 상서하여 자신의 봉지를 남동생인 손미(孫美)에게 물려주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순제는 이를 허락하는 동시에 봉지를 반으로 나누어 손정의 양자인 손수(孫壽)에게 주고 부양후로 봉하였다. 손정이 죽고 난 후 그와 같은 시기에 후(侯)로 봉해졌던 네 명의 환관 중에 어떤 자는 성이 다른 양자를 두었고, 어떤 자는 개인이 부리던 노예를 사다 자식으로 삼았는데, 모두 봉작(封爵)을 세습하려 한 때문이었다. 순제 영건(永建) 4년(129)에 또 조서를 내려 환관의 양자는 모두 합법적인 계승자로서 작위를 세습해도 된다고 승인하였다. 양하(良賀)라는 환관이 있었는데, 순제는 그 충직하고 양순함을 기념한다며 그가 죽은 후 그 양자를 도향후(都鄕侯)에 봉하였다. 조등(曹騰)이라는 자는 “천자를 옹립한 공(定策功)”으로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졌는데, 그가 죽자 그의 양자 조숭(曹嵩)이 봉호를 계승하였다. 조숭이라는 자는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조(曹操)의 아비이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 보면 한나라 때는 환관이 양자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위(北魏) 때 황제를 옹립한 환관 중에 조묵(趙黙)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공을 세워 하내(河內)왕․난주자사(蘭州刺史)․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에 봉해졌다. 그는 족제(族弟)인 조노(趙奴)의 아들 조치(趙熾)를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았다. 조묵이 세상을 떠난 후에 조치는 하내왕의 작위를 세습하였다. 뒤에 누차 반란을 저지한 전공으로 광주자사(光州刺史)라는 관직에 올랐다. 훗날 이 가문은 번창하여 집안에서 부리는 하인만도 수 백 명이었다고 한다. 북위(北魏)의 또 다른 환관이었던 진서장군(鎭西將軍) 왕우(王遇)는 왕력(王歷)이라는 자를 양자로 들였는데, 후에 탕창후(宕昌侯)의 작위를 세습하여 관직이 풍익태수(馮翊太守)․우군장군(右軍將軍)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나라 때의 환관 중에 양자를 두었다는 기록은 많다.《신당서(新唐書)․환자전(宦者傳)》에 “지극히 날래거나 재능이 뛰어난 자를 양육하여 아들로 삼았다(至慓士奇材, 則養以爲子)”고 했다. 정원(貞元) 7년(791)에 “내시 5품 이상은 성이 같은 자 한 명을 수양하도록 허락하되 첫 양자는 열 살을 넘을 수 없다.(內侍五品以上, 許養一子, 仍以同姓者, 初養子不得過十歲.)”라는 조령을 반포하였다. 양자를 들인 환관 중에 어떤 자는 여러 명을 들여 모두 관직에 봉했던 예도 있다. 당 희종(僖宗) 때의 환관 양복광(楊復光)이라는 자는 내상시(內常侍)였던 양현가(楊玄價)의 양자였는데 그는 수십 명의 양자를 두었다. 그가 죽은 후에 수 십 명의 양자들은 모두 요직에 봉해졌다. 송대는 환관이 양자를 두는 것은 중년 이후에야 허용된다고 규정하였다. 개보(開寶) 4년(971)에 환관들이 재산싸움으로 소송을 벌이자 조서를 내려 나이 서른에도 양자가 없는 환관이어야 양자를 둘 수 있다고 조정하였다. 송 진종(眞宗)때 환관 서지통(徐志通)이라는 자는 온주(溫州)와 대주(臺州) 등의 순검(巡檢)이 되었을 때 가만히 앉아서 이환(李歡)이라는 자의 남자 아이 4명을 양자로 취하였다. 또 병사들이 민가의 아이들을 빼앗아가도 내버려두자 아이들의 어미가 바다에 투신하여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또《송사․환관전》의 기록에 의하면, 남계종(藍繼宗)이라는 자는 12살에 입궁하여 네 명의 임금을 섬긴 공적이 있었다고 한다. 죽은 후에 안덕군절도사(安德軍節度使)에 추서되었고, 양자인 원용(元用)과 원진(元震)은 관직을 받았다. 후에 원진이 화재를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고 하여 습의금대(襲衣金帶)가 내려졌고, 죽은 후에는 진해군유후(鎭海軍留後)에 추서되었다. 원진에게는 다섯 명의 양자가 있었는데 모두 내시였다.
청대 특히 청말에 이르러서는 “태감들 대부분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낼 양자를 들였다.(大凡太監几乎沒有不認過繼子以承香火.)”(《왕조 마지막 태감의 비밀》) 이연영(李蓮英)은 복항(福恒)․복덕(福德)․복립(福立)․복해(福海)라는 네 명의 양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돈으로 3품에 해당하는 낭중(郎中) 벼슬을 사느라 도합 은자 1만냥을 썼다. 청대의 대태감 장운정(張雲亭)이라는 자를 두고 사람들은 ‘소인배 장씨’라는 의미의 소덕장(小德張)이라고 불렀는데, 이 자는 한 때를 풍미하다가 출궁한 후에는 천진(天津)의 여러 곳에 집을 두었다. 그는 친형인 장운교(張雲橋)의 아들 장빈여(張彬如)를 양자로 들였다고 하는데 형에게도 이 아들 하나 뿐이었다.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상황(後繼無人)”을 막고자 장운교는 자신의 손녀보다 더 어린 여자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는데, 이 여자는 장운교에게 세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는데, 이 때문에 유산승계 문제로 싸움이 벌어졌다.
청말 궁궐 안의 이총관(二總官)이었던 요맹삼(姚孟三)이라는 자는 두 명의 양자를 두었으면서도 또 정해(靜海) 지역에 사는 덕쟁(德爭)이라는 처녀를 양녀로 삼았다. 후에 두 양자는 그의 노후를 부양하지 않았지만 양녀 덕쟁만이 그를 시중들며 죽을 때까지 봉양하였다.
환관은 일단 총애를 얻고 나면 처는 봉전(封典)을 받고 자손은 대대로 관직을 세습할 수 있는 것 외에도 친족들조차도 작위를 받고 관직에 봉해지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명 영종(英宗) 정통(正統) 10년(1445)에 “사례태감 왕진과 각 감의 태감 전승보․고양․조길상․채충에게 백금이나 장식용 화폐 같은 값비싼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또 왕진의 조카인 왕림을 금의위로 삼아 지휘첨사를 세습토록 하고, 전승보의 조카인 전량․고양의 조카인 고옥․조길상의 아우인 조정․채충의 조카 채영을 금의위로 삼아 천호에 버금가는 봉지를 세습토록 명하였다.(賜司禮太監王振幷各監太監錢僧保、高讓、曹吉祥、蔡忠白金、寶楮、彩幣諸物. 仍命振侄林爲錦衣衛世襲指揮詹事、僧保侄亮、讓侄玉、吉祥弟整、忠侄英俱爲錦衣衛世襲副千戶.)”(《엄산당별집․중관고일》) 명 무종(武宗) 때는 벼슬에 책봉되는 경우가 더욱 많아졌다. 사료의 기록에 의하면 “태안백 장부는 사례태감 장영의 형이다. 안정백 장용은 장영의 동생이다. 고평백 곡대관은 제독단영태감 곡대용의 형이다. 영청백은 곡대량은 곡대용의 동생이다. 진안백 위영은 사례태감 위빈의 동생이다. 평량백 마산은 제독동창태감 마영성의 조카이다. 진평백 육영은 감창태감 육은의 조카이다.……(泰安伯張富, 司禮太監永兄也. 安定伯容, 永弟也. 高平伯谷大寬, 提督團營太監大用兄也. 永淸伯大亮, 大用弟也. 鎭安伯魏英, 司禮太監彬弟也, 平凉伯馬山, 提督東廠太監永成侄也. 鎭平伯陸永, 監槍太監誾侄也.……)”라고 하였다. 이것은 작위에 봉해진 경우지만 일반 관직에 봉해지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사례태감 마영성은 “높은 신분으로 권력을 누린 자로 십여 년 동안 누차 은총을 받아 조카 마성 이하 모두 높은 작위에다 귀한 관직에까지 들어갔는데, 이미 지나칠 정도였지만 태감 조형은 거듭 승진을 요구하여 임명된 자들이 구십여 명이나 되었다.(尊顯用事者十有餘年, 且疊受恩蔭, 侄姓以下, 皆都高爵列美官, 亦已過矣, 而太監趙亨復爲陳乞升授, 見任者至九十餘人.)”(《엄산당별집․중관고》) 환관 하나가 득세하면 집안 사람 수십 명이 관직에 봉해지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한 사람이 득도하면 키우던 닭이나 개도 하늘로 오른다는 말처럼 된 것이 아니겠는가?
환관은 일반적으로 입궁한 후 집안사람들과 왕래를 끊고 한 평생 괴롭게 지내며 몇 푼의 돈을 쫓다가 늙게 되면 출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몇 칸의 방이 딸린 집을 짓고 약간의 땅을 산 다음 양자를 들여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듯(落葉歸根)” 노후를 보내게 된다. 가산을 둘 수 있었던 것도 득세한 대환관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환관들의 집에 재산이 많았다는 것은 약탈한 재물이 많았다는 것과 다름없다. 환관들은 횡령은 물론 강탈도 서슴지 않았으며 관직이나 작위도 팔고 심지어는 고리대금으로 재물을 긁어모으기도 하였다. 명대 환관들이 긁어모은 거대한 재물은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데 몰수했던 몇몇 가산목록자료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명 영종(英宗) 때 영종이 환관 왕진(王振)을 믿고 친히 몽고의 토목보(土木堡)를 공격했다가 몽고장수 에센(也先)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정변이 발생하였다. 환관 왕진은 나라를 망친 죄로 살해되었다. 영종의 대를 이은 경종은 경태(景泰) 연간에 왕진의 가산을 몰수했는데, 금과 은이 60여 상자․옥반이 100개․6~7자 높이의 산호가 20여 그루․기타 무수히 많은 진귀한 노리개가 나왔다고 한다. 명 헌종(憲宗) 성화(成化) 연간에 태감 양방(梁芳)은 “역대 왕조의 황금 일곱 상자(累朝金七窖)”를 삼켰다. 명 효종(孝宗) 때의 환관 이광(李廣)은 장부에다 각 문무대신에 “황백미 각 천백 석을 보냄(饋黃白米各千百石)”이라고 기록해 두었는데, 효종이 놀라서 “먹을 사람이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많은 쌀을 받는고?(廣食幾何, 乃受米如許?)”라고 물으니, 좌우에서 “이것은 은어로써 누렇다고 한 것은 금이요 희다고 한 것은 은입니다.(這是隱語, 黃者金、白者銀也.)”(《명사․이광전(明史․李廣傳》)라고 대답하였다. 재산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명 세종(世宗) 때 금의위(錦衣衛) 태감 육병(陸炳)이라는 자는 “재물을 수백 만 금이나 쌓아두었고, 별장이 십여 곳에 두었으며, 장원을 사방에 두고 있었다. 세력은 천하를 기울게 할 정도였다.(積貲數百萬, 營別宅十餘所, 莊園遍四方, 勢傾天下.)” 역대 환관들이 재물을 모으고 부동산을 샀다는 기록이야 어느 시대이건 있지만 명대에 가장 두드러진다. 청말의 태감 손요정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태감 왕순산(王順山)에게서《오경(五經)》과《사서(四書)》를 배웠다고 한다. 왕순산이라는 자는 천진의 정해 지방 사람으로 서울에 적지 않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향에도 천 경(頃)이 넘는 전답을 사두어 일년에 700석이 넘는 보리를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또 이 시기의 대환관 소덕장(小德張)도 출궁 후에 천진의 영국 조계(租界)에 부동산을 샀는데, 자신이 사는 집은 두 동의 3층 건물이었지만 성의 북쪽과 서쪽에 작은 건물 8~9동을 가지고서 세를 주는 데에 이용했다고 한다. 소덕장은 출궁해서 천진으로 돌아간 후에 3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들여 3층 건물을 지어 군벌(軍閥)인 조곤(曹錕)의 동생에게 양도하여 몇 만원의 차익을 챙겼으며, 후에 또 7~8만원을 들여 한 동을 짓고는 14만원에 경친왕(慶親王) 재진(載振)에게 팔아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환관들은 마침내 부동산 사업에도 손을 댔던 것이다.
1)《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권1에 “태후가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게 되자 환관들이 총애를 독점하였고, 환관들의 집에는 재물로 가득 채워졌다. 이 때문에 소흔은 ‘높은 수레를 타고 승진을 다투는 자들은 모두 환관의 아내들입니다’라고 하였다(太后臨朝, 閽寺專寵, 宦者之家, 積金滿堂, 是以蕭忻云: ‘高軒斗升者, 盡是閹官之釐婦.’)”라는 구절이 있는데, 저자가 그 출전을《통감(通鑑)》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혼동한 것 같다--옮긴이.
2) 《궁녀의 옛 이야기(宮女談往錄)》, 자금성출판사(紫禁城出版社) 1992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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