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秦始皇陵

3. 동물갱(珍獸坑)과 마구간갱(馬廐坑)

마장골서생 2009. 11. 9. 13:38

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3. 동물갱(珍獸坑)과 마구간갱(馬廐坑)


진릉의 진수갱(珍獸坑)과 마구갱(馬廐坑)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옛날 일을 하나 해야할 것 같다. 진릉의 서쪽 지역에 악가구촌(岳家溝村)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는데 1927년 가을 이 마을에 한 여자가 병으로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그녀를 위해 무덤을 파다가 진흙으로 만든 인형인 도용(陶俑) 하나를 발굴하였다. 이 도용은 몸에는 긴 저고리를 걸치고 상투는 머리 뒷부분으로 빗겨진 채로 얼굴과 몸에는 채색까지 되어 있었다. 그 도용은 두 무릎을 땅에 대고 둔부는 두 발꿈치에 붙이고 있으며 두 손은 대퇴부에 두고 있는 모습으로 높이는 대략 60㎝가 넘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상(神像)이라고 여겨 그것을 받들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향을 사르고 절을 하며 복을 비는 등 난리법석이었다. 후에 서안(西安)의 한 골동품 상인이 150개의 은화로 이 도용을 사들였고, 또 500개의 은화 가격으로 그것을 한 상해(上海) 상인에게 양도하였다. 상해 상인은 또 더 높은 가격으로 그것을 외국인에게 팔았다. 진릉 동남쪽에 상초촌(上焦村)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는데, 현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토우를 마을 사람들은 “와관파(瓦罐婆; 진흙으로 빚은 여자)”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머리 위가 부풀어 있어 여자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런 토우를 적지 않게 발굴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앉아있는 남자 토우이다. 고대인들은 모두 머리를 길렀다. 어떤 사람은 뒤통수 쪽으로 상투를 틀었는데 흡사 해방 전 결혼한 여자들의 머리 모양과 같아서 현지 사람들이 그것을 여자라고 생각하여 “와관파”라고 했던 것이다.

바로 현지 사람들이 병마용(兵馬俑)을 “와와야(瓦瓦爺; 진흙으로 만든 남자)”라고 부른 것처럼 모두 신기한 표정들을 약간씩 짓고 있다. 1985년 12월에 이곳에서 또 한 차례 이런 토우들을 발굴했는데, 그것들의 손과 얼굴은 모두 분홍색이었다. 이런 토우들은 모두 진릉의 진수갱과 마구갱에서 출토되었다.

진수갱과 마구갱은 어떻게 된 것인가? 고대의 제왕들은 도성 안 혹은 도성 부근에 큰 구역을 정해 진귀한 짐승과 말을 전문적으로 사육하여 즐거운 놀이에 공급되도록 하였다. 이런 곳을 원유(苑囿)와 구원(廐苑)이라고 하였다. 원유는 비교적 일찍 생겨났다. 주(周) 문왕(文王) 때 지금의 섬서성 서안 서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영유(靈囿)라는 동산이 있었고 그 안에 우록(麀鹿)과 백조(白鳥)가 있었다고 한다. 진나라에도 상림원(上林苑)이 있었는데 한(漢)나라에서는 그것을 여전히 상림원이라고 불렀다. 동산 안에는 영(令)과 위(尉) 등의 관원을 두어 동산 안의 짐승과 궁관(宮觀)을 관리하였으며, 사육하는 짐승들의 장부를 만들고 기록하는 책임을 졌다. 이런 동물들을 전문적으로 사육하는 사람을 유인(囿人)이라고 하였다. 한(漢)나라 때의 양웅(揚雄)은《상림부(上林賦)》라고 하는 유명한 부 한 편을 지었는데, 상림원 안에는 기러기․백로․기린․낙타․사자 등의 날짐승과 길짐승이 있다고 묘사하였다. 구원은 말을 사육하던 곳이었다. 진나라 때에는 제왕의 구원을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한나라 때의 천자에게는 여섯 군데의 마구간이 있었는데, 그 중에 미앙구(未央廐)와 승화구(承華廐)가 가장 컸으며, 한 마구간에 일만 필의 말을 사육하였다. 말을 사육하는 사람을 어인(圉人)이라고 하였다. 원유와 구원을 관리하는 장관은 품계가 현령(縣令)에 해당하였고 수형(水衡)과 태복(太僕) 같은 중앙 관서의 관할을 받았다.

진시황은 “저승을 이승처럼 만들기(事死如事生)” 위해서 자신의 능원에도 원유와 구원을 배치했던 것이다.

현재의 고고학적 탐사 상황에서 보면 진릉의 서남부가 원유 구역이다. 1977년에 고고학자들이 이곳에서 일련의 순장했던 구덩이인 순장갱(陪葬坑)을 발견하였다. 이 순장갱은 진릉 내성 서문 남쪽 130m되는 곳에 있는데, 남북으로 80m․동서로 25m․면적이 약 2000㎡의 범위 안에 분포되어 있으며 모두 3줄의 장방형 진흙구덩이(土坑)가 있다. 양쪽 갱 안에 도제(陶制)의 좌용(坐俑; 앉은 자세의 토우)이 묻혀져 있었는데, 바로 본 장의 시작부분에서 언급했던 그런 토우이다. 도용(陶俑)은 동쪽을 향해있고 얼굴부분과 손은 분홍색 안료가 칠해져 있으며, 도포자락에는 녹색 혹은 붉은 색이 남아 있고, 어떤 것은 입술위쪽에 수염까지 나 있는데, 그들이 젊은 남자라는 것을 설명한다. 그들 앞에 질그릇(陶盆)․항아리(陶罐) 등이 놓여있었다.

 

마구갱의 꿇어앉은 토우(馬廐坑的跽坐俑)

 

중간에 한 줄로 된 토갱 안에 와관(瓦棺; 질흙으로 구워만든 널)이 있고, 관 안은 온통 수골(獸骨; 짐승 뼈)로 가득 차 있었다. 와관의 한 쪽 끝에는 또 한 개의 도발(陶鉢; 질흙으로 만든 밥그릇)과 한 개의 동환(銅環; 구리로 만든 고리)이 있다. 이런 상황은 곧 와관 중에 놓인 것은 동물이고 동환은 동물의 장식품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이런 도좌용(陶坐俑)들은 바로 이런 동물들을 사육하는 유인이고, 질흙으로 만든 대야와 단지는 그들의 생활 도구이다. 이 도좌용들이 진짜 사람을 대신하였고, 그 당시 와관 속에 놓아두었던 것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물들이었다.

함양궁 안의 동물원 형태(廐苑形式)도 진릉 속으로 옮겨졌다. 1976년에 고고학자들이 진릉 외성 동쪽의 상초촌 이북에서 진릉의 마구갱 상황을 탐사하였다. 이 1500여m의 범위 안에서 이미 90여 개나 되는 장방형의 마구갱이 분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마구갱 속에 진수갱 속의 좌용과 서로 닮은 도좌용이 있는데, 높이가 약 70㎝이고 역시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두 손을 대퇴부에 두고있고 어떤 것은 두 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있다. 갱 안에 또 말뼈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순장(陪葬)한 것은 살아있던 말이었다. 어떤 도좌용은 말과 함께 갱 안에 들어있고 어떤 말은 토우와 따로 매장되어 있다. 토우․말과 동시에 출토된 것으로는 또 질흙으로 만든 그릇(陶盆)․접시(陶盤)․등잔(陶燈)․독(陶瓮)․항아리(陶罐), 구리로 만든 소반(銅盤)․고리(銅環), 쇠로 만든 도끼(鐵斧)․칼(鐵刀)․대패(鐵鏟)․등잔(鐵燈) 등이 있다. 어떤 질흙으로 만든 커다란 접시 안에는 말에게 먹이는 조와 짚이 들어 있다. 이 기물들은 유인이 필요로 하는 생산 도구이자 생활 용구이다. 이런 배치는 주도면밀한 사고를 거친 것으로, 그 배치가 매우 흥미롭고 적당하다. 말은 풀을 먹어야 하니 쇠 낫이 있게 된 것이고, 말이 물을 마셔야 하니 대야가 있게 된 것이다. 민간에 떠도는 말에 말이 밤에 풀을 먹지 않으면 살이 찌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어인도 저녁이면 말에게 먹이를 먹이려고 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등잔 켜는 것을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등잔은 필수였을 것이다. 진나라 사람들의 조상은 말을 잘 사육한 탓에 말의 습성을 잘 알았고, 이 때문에 순장하는 부장품을 배치할 때에도 실제 상황에 따라 엄격하게 배치했던 것이다. 출토된 기물에 “대구(大廐; 대형 마구간)”․“중구(中廐; 중형 마구간)”․“소구(小廐; 소형 마구간)”․“좌구(左廐; 좌측 마구간)”․“궁구(宮廐; 궁궐 마구간)” 등의 글자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 도문(陶文)들의 진귀한 점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진나라의 구원제도를 현대인에게 암시해주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진나라 궁중의 양마제도(養馬制度)와 마구간의 편제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 진나라의 양마제도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실증적 자료로 제공된다. 어떤 기물에는 또 “좌구용팔두(左廐容八斗; 좌 마구간 기물의 용량은 여덟 말)”․“대구사두삼승(大廐四斗三升; 대 마구간 기물의 용량은 네 말 세 되)”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기물들이 어느 마구간에 있었던가를 설명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물의 용량을 밝혀주는 것으로 진나라 때의 도량형 제도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진릉의 마구간에 말을 얼마나 생매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지 않은 말들이 매장된 것은 분명하다. 그 당시 생산력이 비교적 낮은 상황에서 말은 주요한 생산 수단이었다. 대량으로 말을 순장시킨 것은 생산력에 대한 심각한 파괴였다. 이것은 진시황이 제왕의 존엄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축내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이 점은 후대 일부 제왕들과 식자들은 반대했던 것이다. 한 무제 때 노대(露臺) 하나를 지으려고 기술자를 불러 계산해 보았더니 일백 금이나 되는 비용이 든다고 하였다. 문제(文帝)가 일백 금은 중산층 백성 열 가구의 재산과 맞먹는데 구태여 노대를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고 건의해서 노대의 건축계획을 취소했다고 한다. 문제는 패릉(覇陵)에 묻혔는데 산을 능으로 삼았기 때문에 거대한 봉분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능 안에 약간의 도기(陶器)를 묻었을 뿐 금․은․동으로 만든 기물들을 묻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당나라 때의 허혼(許渾)이라는 시인은 《진시황릉의 묘를 지나며(途經始皇墓)》라는 시를 한 수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龍盤虎踞樹層層,   용과 범 같던 모습도 우거진 숲 속에 묻혔고,

(용반호거수층층)

勢入浮雲亦是崩.   구름을 찌를 듯 하던 그 기세도 무너졌다네.

(세입부운역시붕)

一冢靑山秋草里,   청산의 가을 풀 섶에 외로운 무덤이라지만,

(일총청산추초리)

路人唯拜漢文陵.   지나던 나그네는 한 문제의 능에만 참배하네.

(노인유배한문릉)


한나라 때의 ‘문제와 경제의 치세(文景之治)’는 한 문제의 이런 검소한 정신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한 원제(元帝) 때에 이르러 공우(貢禹)라는 대신도 전대의 제왕들이 무덤에 날짐승과 길짐승․자라와 물고기․소와 말․범과 표범 같은 것의 매장을 반대하였다. 한 원제도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진수갱과 마구갱에서 출토된 도좌용은 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들의 몸바탕은 진흙으로 한 조각씩 쌓아 빚은 후에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머리와 손은 거푸집으로 반성품을 만든 다음 눈․입․코를 새겼다. 그것들의 형태는 대체로 같지만 또 나름대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은 두 손을 반쯤 잡고 있고, 어떤 것은 두 손을 펼치고 있고, 어떤 것은 팔짱을 끼고 있는데, 그 얼굴 표정이 엄숙하고 신중해 보인다. 이것은 어인과 유인의 낮은 신분을 나타내 준다. 도용(陶俑)의 머리카락과 눈썹조차도 빈틈없이 새겨져 있고, 상투는 뒤통수 쪽으로 묶여 있는데, 단순한 형태이기는 하나 땋은 머리카락은 가닥가닥이 아주 선명하다. 이런 도용들의 높은 예술적 수준은 진나라 때 조각가들의 관찰력과 조형예술의 기교를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것들은 진 병마용과 똑 같이 진대 예인들이 후대에 남긴 예술 걸작이다. 게다가 진릉 서쪽 내외성 사이에서 발견된 곱자형 마구갱 안에서 거대한 도용 몇 기를 발견했는데, 능 동쪽의 병마용과 똑 같은 크기에다 조각방식과 형태도 같지만 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들의 신분은 당연히 어인들 보다 약간 높은 구원령(廐苑令) 같은 인물일 것이다. 그들의 관직은 높진 않았지만 황제의 주의를 받았다. 한 무제 때 상관걸(上官桀)이라는 사람이 바로 미앙구(未央廐)의 구령(廐令)이었다.

 

돌 갑옷 출토(石鎧甲出土)  


복원 후의 돌 갑옷(修復後的鎧甲)

 

복원 후의 돌 투구(修復後的石冑)

 

돌 갑옷 구덩이에서 출토된 갑옷을 입혀 장식한 말 그림(石鎧甲坑出土馬甲着裝圖)

 

한 무제가 병 때문에 상당 기간 미앙구에 가지 못하다가 병이 낫고 난 후 가봤더니 말들이 모두 병이 들어 있었다. 한 무제는 화가 나서 상관걸을 문책하였다. “너는 내가 병이 났다고 이 말들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냐? 무엇 때문에 말들이 병나도록 했느냐?”라고 하며 상관걸의 죄를 물으려고 하였다. 상관걸은 매우 영리하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였다. “제가 듣기로 황상께서 옥체가 편치 않다고 하시니 마음이 불안하고 밤낮으로 근심이 되어 이런 날들 속에서 정말이지 말을 사육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무제는 상관걸의 충심 어린 말을 듣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바로 마구간 책임자인 구령의 책임이 대단히 중대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진시황도 말을 무척 좋아해서 구원 중의 많은 말 외에도 그는 추풍(追風)․축토(逐免)․섭경(躡景)․분전(奔電)․비핵(飛翮)․동작(銅爵)․신부(神鳧) 등 700필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들도 “대구(大廐)”․“중구(中廐)”․“소구(小廐)”․“좌구(左廐)”․“우구(右廐)”․“궁구(宮廐)”라고 불리는 기구에서 사육되었고 관리자도 있었다.

진수갱과 마구갱은 한 측면에서 보면 진대 궁정제도와 황족생활의 일부분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기이한 동물과 말에 대한 구체적인 모방에서도 당시의 사회생활과 사회습속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폭의 생동하고 흥미 있는 사회풍속도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