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秦始皇陵

4. 재가 된 비늘 같은 석갑(石甲)

마장골서생 2009. 11. 9. 13:58

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4. 재가 된 비늘 같은 석갑(石甲)


진시황제는 자신의 선조처럼 동관(潼關)을 나서 황하(黃河)를 건너 최후에는 무력으로 육국(六國)을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처음 진정으로 통일된 봉건전제독재의 대제국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무력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사후 능원 안 동쪽에 대량의 질흙으로 빚은 군대를 묻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용(秦俑) 3갱인데 군사가 8천으로 추산되며 황제의 능을 웅장하게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진릉 안팎에 상징적으로 군복창고(軍服庫)를 설계하였다. 이것이 바로 1999년에 발견된 돌 갑옷과 돌 투구 갱(石甲石冑坑)이다.

이 군복고는 진시황제릉 동남쪽 내외성 사이에 위치하는데, 남북으로 105m이고 동서로 129m이며 면적은 14000㎡에 가깝다. 현재 발굴한 면적은 145㎡로써 전체 면적의 십분의 일에 불과하다. 석질의 갑옷 90벌과 석질의 두무(兜鍪) 36개를 출토하였다. 두무가 바로 투구(頭盔; tóukuì)를 말하는데, 주(冑)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갑주(甲冑)가 바로 몸에 걸치는 갑옷과 머리에 쓰는 투구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번에 진시황제릉에서 출토한 석개갑(石鎧甲)에는 투구 외에도 진 병마용 갱 중의 장군용이 입고 있는 것과 유사한 정교하게 제작된 어린갑(魚鱗甲)이 있다. 갑옷의 조각이 물고기 비늘처럼 얇고 정교하게 가공되어 있어 붙인 이름이다. 갑옷마다 대략 800개의 갑편(甲片)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종류는 비교적 적어 현재까지 두 벌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다른 한 종류는 미늘 갑옷인 찰갑(札甲)이 대부분인데 대략 97%를 차지한다. 이것은 진대 무사들이 입던 갑옷이었다. 이런 갑옷 중에는 조끼 형태의 양당갑(裲襠甲)이 있는데, 가슴 및 등만 있는 갑옷으로 가슴과 등을 보호하는 것이다. 가슴과 등을 걸치는 전후갑(前后甲)․어깨에 걸치는 견갑(肩甲) 및 팔에 걸치는 피박(披膊)으로 구성된 갑옷은 보호하는 면적이 더욱 넓어 가슴․등․양어깨 및 양팔을 보호한다. 또 한 종류는 말의 목 부분부터 온몸에 씌우는 마갑(馬甲)이 있는데, 말의 목과 등의 부위를 보호하는 것이다. 돌 투구인 석주(石冑)는 지휘관의 머리 부위를 보호하는 것으로 두 눈과 코만 드러내도록 되어있다.

이런 석질 갑옷․투구․말 갑옷의 발견은 진대 군인들의 방호설비 상황을 형상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 병마용 갱 중의 갑옷을 걸친 무사용이 이미 형상적으로 이 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이런 돌 갑옷들이 더욱 구체적인데, 특히 투구 및 말 갑옷이 그렇다. 이것은 진용 갱에는 없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전국시대 때 진나라의 승상이자 종횡가(縱橫家)였던 장의(張儀)가 다른 나라의 왕들에게 진나라 군인의 용감한 선전을 자랑할 때 했던 말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진나라의 군대는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50만 명에 기병 1만 명에 불과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투구도 쓰지 않고 팔을 걷어 부치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용감하게 부딪쳐 왼팔에는 포로를 끼고 오른손에는 적군의 머리를 취한다고 하였다. 모두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섬서 난폭자(陝西冷娃)”들의 형상을 묘사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참혹한 전장에서 쌍방이 살육에 핏발이 선 정황 아래에도 있다. 현대에도 있긴 하지만 소수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양쪽 군대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상대를 전멸시키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효과적으로 더욱 많은 적을 소멸시킬 수 있고 그래야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만일에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면 어떻게 적을 소멸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갑옷과 투구가 바로 병사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필요수단인 것이다.《시경(詩經)․진풍(秦風)․무의(無衣)》편에 “그대에게 군장이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전포(戰袍)를 그대와 같이 입으면 될 것을. 왕이 군대를 일으켜 전쟁에 나갈 때, 우리는 그 갑주 잘 수리해 입고서, 그대와 함께 적진으로 뛰어드세.(豈曰無衣, 與子同裳. 王于興師, 修我甲兵, 與子偕行.)”라는 시구(詩句)가 있는데, 이는 국왕이 군대를 일으켜 전쟁을 하려 할 때 갑옷과 투구를 잘 준비해서 나아가자고 말한 것이다.

갑옷으로 말하자면 동물이 인류의 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갑옷의 제작은 아주 이른데, 전설에 “서(抒)라는 사람이 갑옷을 만들었다(抒作甲)”고 한다. “서”는 하(夏)나라 임금 소강(小康)의 아들이고, 소강은 전설상의 임금 대우(大禹)의 제4대 손자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0여 년 전의 일이다.《석명(釋名)》이라는 책에서 “갑(甲)”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갑은 미물 같고 껍질이 있어 스스로 지킬 수 있는데, 개(介)라고도 하고 함(函)이라고도 하며 개(鎧)라고도 한다. 모두 단단하고 두텁다는 의미이다(甲, 似物有孚甲以自衛也, 亦曰介, 亦曰函, 亦曰鎧, 皆堅重之名也.)”. 천산갑(穿山甲)의 두껍고 딱딱한 껍질, 물고기의 비늘은 모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동물의 몸에서 얻은 힌트이다.

고고학적 발견에서 봤을 때 가장 이른 갑옷은 하남성 안양(安陽)에서 출토한 가죽 갑옷으로 검은색․빨간색․노란색․흰색으로 그려진 무늬가 있다. 여기에서 청동 투구도 출토된 적이 있다. 이것은 은대(殷代)의 고분이다. 은나라 이후에 출토된 주(周)․춘추(春秋)․전국(戰國) 시기의 갑옷과 투구는 더욱 많다. 문헌 및 고고학적 출토품에서 보면 갑옷과 투구의 재질 중 가장 이른 것은 가죽 재질로 들소 가죽․무소 가죽․코끼리 가죽 혹은 쇠가죽․말가죽이 있다. 굴원(屈原)은 자신의 명작《국상(國殤)》중에서 “오나라의 창을 잡고 소가죽 갑옷을 입었네(操吳戈兮被犀甲)”라고 노래했는데, 소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설명하는 것이다. 진대의 갑옷은 주로 소와 말의 가죽을 사용했던 것 같다. 잠들어 있는 진나라의 무덤에서 출토한 죽간(竹簡)에 피혁 관리에 관한 많은 규정들이 적혀 있다. 만약에 관리자가 관리한 피혁에 곰팡이나 쥐에 의해 구멍이 날 경우 형벌을 받았다. 피혁은 갑옷을 만드는 원료이기 때문에 엄격한 관리가 요구되었다. 이후에 점차 동과 철을 사용해서 갑옷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당대의 시인 잠삼(岑參)의 시에 “장군의 철활은 얼어 당길 수도 없고, 도호의 철갑은 차가워 입기도 어려워라.(將軍鐵弓不得控, 都護鐵衣冷難着.)” “장군은 밤에도 철갑을 벗지 않고, 야간행군에 창날끼리 부딪치는데, 바람 끝은 칼날 같이 얼굴을 에어내네(將軍金甲夜不脫, 半夜軍行戈相拔, 風頭如刀面如割.)”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두 금속으로 만든 갑옷이었다. 발전이 늦은 근대의 일부 민족들이 등나무 줄기로 갑옷을 만든 것도 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돌로 갑옷을 만든 경우는 중국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진시황제릉의 석질(石質) 갑주(甲冑)는 진릉의 문물 가운데 또 하나의 훌륭한 경관임에는 틀림이 없다. 발굴현장에서 보아도 그 수많은 방형․원형․대형․소형의 석질 갑옷 조각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층층이 쌓여 아름답고 장관이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눈요기를 제공해주는 동시에 고대의 군사장비 및 진릉 순장제도를 연구하는 데에 또 하나의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며 관상용적인 성격도 강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장품이지 실용적인 기물은 아니다. 첫째, 석질은 너무 무겁다는 것인데, 진나라의 무사가 만일에 몇 십 근이나 되는 돌 갑옷을 입고 몇 근이나 되는 돌 투구를 썼다면 전쟁은 고사하고 제자리에 서있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둘째, 석질은 너무 취약하다는 것인데, 적의 병기에 부딪히는 즉시 산산이 부서져 보호역할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부장품으로 진시황제릉 곁에 따라 묻힘으로써 진대 군인장비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돌 갑옷 갱의 발견으로 또 한번 세상사람들에게 경탄해 마지않을 중국의 진귀한 문화 유산을 보여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