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唐楊貴妃

5. 화청궁에서의 총애는 비할 데가 없었다

마장골서생 2009. 11. 9. 22:46

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5. 화청궁에서의 총애는 비할 데가 없었다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남부의 여산(驪山)은 진령(秦嶺)의 한 지맥(支脈)으로 해발 1350여 미터이다. 여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일설에 따르면, 은상(殷商) 시기의 여국(麗國)、서주(西周) 시기의 여융(驪戎)이 일찍이 여기에 머물렀다는 것이며, 일설에 따르면, 그 수목이 무성하여 울창한 모습이 마치 한 필의 청색 말인 여마(驪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 산이 울창하고 푸르며, 구름과 노을이 둘러싸고 있어 수령(繡嶺)이라 불렀다. 석옹곡(石瓮谷)을 경계로 하여 동서부 두 개의 수령(繡嶺)은 마치 떠다니는 폐엽(肺葉: 허파모양)과 같아 그래서 부폐산(浮肺山)이라 불렀다. 석양이 서산으로 질 무렵 여산은 노을에 빛을 내어 색채가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아 경치가 유난히 수려하고 기이하다. “여산 노을”은 고대에 관중(關中) 팔경의 하나로 칭송되었다.

 여산의 기슭에 위치한 온천은 수온이 43℃에 달하며, 염화칼륨(KCl)、염화나트륨(NaCl)、탄산망간(MnCO3)、황산나트륨(Na2SO4) 등의 여러 물질이 함유된 광화수(礦化水: mineralizing water)이며, 풍습병(風濕病)、관절염、피부병을 치료할 수 있다. 일찍이 진한(秦漢) 시대에 여산 온천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는 것으로 세상에 유명하였다. 진시황은 일찍이 이곳에 연못과 가옥을 지어 별궁으로 삼았다. 한(漢) 무제(武帝) 시기에 큰 건축공사를 일으켜 여기에 중요한 별궁으로 삼았다. 북위(北魏: 386~534) 시기에 귀족 사이에 온천에서 병을 치료하는 유행이 있었다. 북주(北周) 무제 우문옹(宇文邕)은 여산에 “황당석정(皇堂石井)”을 지었다. 수 문제 양견(楊堅) 시기에 정비를 하여 수 천 그루의 송백나무를 심었다.

 당나라 초기 태종 이세민 시기에 이르러 여산의 궁전을 증축하고 “탕천궁(湯泉宮)”이라 이름을 지었다. 고종 이치(李治) 시기에 다시 “온천궁”이라 고쳤다. 당명황 천보 6년(747) 서진(西晉)의 좌사(左思)가 지은《위도부(魏都賦)》에 나오는 “온천물은 콸콸 솟아올라 저절로 물결을 이루고, 화청1)의 온천물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목욕하는 사람에겐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溫泉泌涌而自浪, 華淸蕩邪而難老.)”라는 의미를 취하여 그 이름을 “화청궁”이라 불렀다. 당명황은 화청궁에 대해 여러 차례 증축공사를 하였으며, 천보 6년 공사규모가 가장 컸다. 어가행차 시에 도로 보수를 하는 인부의 충원과 음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천보 3년(744) 신풍(新豊)과 만년(萬年) 두 현의 일부 지구를 할애하여 회창현(會昌縣)을 만들었다. 화청궁과 경성 사이에는 황제 어가의 전용도로를 만들었다.

 화청궁은 자연지형에 의지하여, 남쪽으로 여산을 등지고, 북쪽으로 위천(渭川)을 앞에 두고, 서쪽으로는 수령(繡嶺) 제일봉을 가운데 중심축으로 삼으며, 온천 수원지를 중심으로 삼으며, 사면이 바퀴살이 가운데로 향하고 있듯이 전개되어 있다. 궁성 밖은 굽이굽이 빙 둘러 친 담이 세워져 있으며, 에워싸고 호위하고 있다. 산을 의지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궁성은 북쪽을 향한 진양문(津陽門)을 정문으로 삼으며,  문밖에는 좌우 굉문관(宏文館)이 있다. 북문 밖을 두르고 있는 것으로 좌우 조당(朝堂)과 좌우 강무전(講武殿)이 있는데 동서로 대치하는 형세이다. 남쪽에 있는 소양문(昭陽門) 또는 산문(山門) 밖에도 등산하는 어도(御道)인 옥련로(玉輦路)가 있으며, 산정으로 통하는 조원각(朝元閣)이 있다. 동쪽으로 향하는 개양문(開陽門) 밖에서 동쪽으로 둘러친 성담 사이에는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써, 의춘정(宜春亭 )、사성전(四聖殿)、중명각(重明閣)、투계대(鬪鷄臺)、안가대(按歌臺)、관풍루(觀風樓) 등 높고 큰 건축물이 지어져 있다. 중명각에서 난간에 기대어 북쪽으로 바라보면, 서로 이어진 소응현(昭應縣) 성곽이 마치 손바닥에 있는 것처럼 잘 보인다. 관풍루에 올라 서쪽으로 바라보면, 진천(秦川)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 향한 망경문(望京門)밖에서 서쪽으로 둘러 친 담 사이에는 궁중의 화원으로써 분매단(粉梅壇)、부용원(芙蓉園)、간화대(看花臺)、서과원(西瓜園) 등이 있다.

 궁성 내부에는 중축선을 따라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할 수 있다. 동부는 당명황과 양귀비의 행락 중심지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요광루(瑤光樓)、황제의 침전(寢殿)인 비상전(飛霜殿)、어탕구룡전(御湯九龍殿)、온천총원(溫泉總源)이 있고 남쪽 담장 가까이에는 옥녀전(玉女殿)이 있다. 어탕 서남쪽 옆은 양귀비의 탕인 해당탕(海棠湯)이 있다. 어탕 서쪽에 태자탕(太子湯)、소양탕(少陽湯) 등이 있다. 궁성 중축선에서 전후하여 두 개의 전(殿)이 있다. 이는 당명황이 행차하는 기간에 정사를 돌보는 곳이다. 서쪽은 칠성전(七聖殿)、공덕원(功德院)、우장(羽帳)、요단(瑤壇) 및 궁중 비빈들이 목욕하는 길쭉한 탕 16개가 있다.  모든 탕 밑바닥에는 배출구가 있어 석각 수로와 통하여 항상 물이 공급된다.

 북쪽으로 둘러친 담 밖은 지세가 낮고 평탄하여 강무전、무마대(舞馬臺)、크고 작은 구장 등은 모두 여기에 설치되어 있다. 구장 옆은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소요전(逍遙殿)이 있다.

 화청궁의 배치 구조는 방대하여 궁전 건축이 웅장하고 화려하다. 그중에 가장 높은 것은 서수령(西繡嶺)의 조원각(朝元閣)이다. 강성각(降聖閣)이라고도 한다. 사방으로 둘러싼 산정에는 갈고루(羯鼓樓)、노모전(老母殿)、망경루(望京樓)、취운정(翠雲亭) 등의 건축물이 곳곳에 솟아 있다. 백거이가 《장한가》에서 언급한 “장생전”은 바로 조원각의 동쪽으로 당명황이 목욕재계하여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여산의 풍경은 아름다우며, 온천이 솟아나고, 게다가 경성과 가까운 곳으로 당대 관중에서 가장 유명한 명승지였다. 천보 연간에 당명황은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어 거액을 투자하여 확장공사를 한 별궁인 화청궁은 웅장하고 화려하여 고대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존재였다. 화청궁은 사계절 내내 송백이 푸르고 전각과 누대가 서로 마주하여 빛나고 탕과 연못이 연이어 온천수가 흐르며, 선경(仙境)보다 훌륭하다 할 것이다.

 어가의 행차기간에 물자공급과 인력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천보 7년(748)에 명령을 내렸다. 신풍을 회창에 편입하여 소응현(昭應縣)으로 개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화청궁의 정대(亭臺)와 전각(殿閣)、원림(園林) 경구(景區)에 조정 백관들의 기구의 관서와 왕공 귀족들의 저택이 들어서서 드디어 여산의 기슭은 하나의 건축이 화려하고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 되었다. 경성에서 여산 별궁으로 통하는 관역(官驛) 대로 양편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다투어 점포와 주점을 열었다. 황제의 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상인들은 구름이 바람에 실려 오듯이 모여들어 화청궁 사방은 떠들썩한 시장바닥처럼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양옥환이 어명을 받들어 수왕부 저택을 떠나 도문(道門)에 막 진입할 때 자신의 향후 처지에 대해 근심을 하였다면, 개원 28년(740) 10월 어명을 받들어 당명황과 “여산에서의 만남”(驪山相會)은 바로 그녀의 인생 여정에서의 세 번째 대전환기였다.

 당명황이 해마다 설날에 여산에 행차하는 것은 주로 온천에서 사기를 물리치고 정기를 기르는 효용을 이용하여 온천욕으로 한기를 물리치고 신체를 강건하게 하고자 한 것으로, 체류 기간은 열흘에서 보름 정도였으며 가장 길게는 한 달 가까이 머물렀다. 그러나 양옥환이 입궁한 이후로 당명황의 여산행차의 횟수는 증가하였으며, 체류시간도 증가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행락에 탐닉하여 회궁할 생각을 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개원 28년 10월부터 “안사의 난”이 폭발한 시기까지 16년간 당명황은 여산의 행차가 모두 19회였다. 시간이 가장 긴 경우는 무려 96일이나 되었다. 행차기간에 송구영신의 설날을 맞이하면, 당명황은 궁중의 관풍루(觀風樓)에서 원단(元旦)의 백관들의 하례 의식을 거행하였다.

 초겨울의 여산은 불타는 듯이 피었던 석류꽃이 벌써 떨어지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한기를 품고 사람을 춥게 한다. 산과 들의 붉은 꽃과 푸른 잎은 서리를 맞아 황량하게 변하여 풍경은 쓸쓸하다. 다음해 봄이 되면 여산의 송백은 굳세게 자라고 잔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가운데 하늘은 높고 북풍은 한기가 다소 매서웠다.

 이러한 계절에 여산 기슭은 물소리가 궁중의 담을 돌아가며 일어나고 행궁 안에는 온천에 향기가 그윽하다. 날씨는 춥고 밤은 길어 전당의 화롯불은 붉게 타고 연회의 음악소리는 높았다. 당명황은 양귀비의 시중 속에 노래를 듣고 춤을 감상하며, 밤새도록 연회를 즐겼다. 밝은 대낮 여산의 정상에는 산안개가 푸르게 감돌고 풍경은 넓게 펼쳐져 있다. 당명황은 양귀비와 함께 높은 곳에 올라 구경하며, 북쪽으로 위수(渭水)에 떠가는 겨울 범선을 구경하고, 서쪽으로 경성의 높은 탑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바로《장한가》의 다음과 같은 내용과 같다.


여산 화청궁 높은 곳에 자리하여 푸른구름 오가고,

선악이 바람 따라 전하니 곳곳에 음악소리 들리네.

느린 노랫가락에 느린 춤사위는 연주음악에 맞추고,

온종일 황제가 한없이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네.


驪宮高處入靑雲, 仙樂風飄處處聞.

緩歌曼舞凝絲竹, 盡日君王看不足. 


그림 당 화청궁 그림


이러한 인간세계의 황제이자 고명한 덕을 가진 천자 당명황 현종이 별궁을 신선이 사는 별천지로 만들고 조정 대사를 멀리하고, “노래 한 곡에 술을 한 잔 마시고, 춤 한 자락에 사람을 취하게 하네.(歌一聲而酒一杯, 舞一曲而人一醉.)”라는 시를 지어 인생을 즐기고, 미인을 가슴에 품고, 낮에는 유람하고 밤에는 연회를 베풀어, 마음껏 욕정을 불태워, 옛날 “여산의 봉화로 제후를 농락한” 주나라 유왕(幽王)을 탄복시킬 수 있었으며, “신선을 연모하고 함양(咸陽)의 별궁을 200 리에 걸쳐 지었던” 진시황과 비교할 수 있었다.

 천보 4년(745) 양옥환을 귀비로 책봉할 때 당명황은 이미 60세 노인이었으나, 욕정과 환락에 대한 추구는 마치 석양의 남은 빛처럼 불타올랐으며, 열정과 역량은 모두 세월을 따라 서서히 식어가고 감소하였지만, 양옥환에 대한 서로 의지하는 동반자로서의 감정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호탕하고 낙관적인 당명황은 비록 지존의 권력과 위엄을 가졌으며 어떠한 세속의 간언(諫言)과 번뇌도 그가 추구하는 향락의 욕망을 막을 수는 없었을지라도, 세월이 변화로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주름살은 지울 수가 없었으며 나날이 증가하였다.


그림 화청궁 안의 이러한 어탕지(御湯池)에 당나라의 운치가 있는 일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나날이 노쇠해가는 육체가 그의 마음을 울적하게 한다는 사실을 항상 떨쳐버릴 수가 없었으며, 황제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노쇠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청춘을 원하였으나 그러한 세월은 이미 지나가버렸으며, 그가 욕정을 불태우고자 하였으나 체력은 이미 그러한 마음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는 날마다 젊고 정숙한 미인을 가까이 하고, 그녀들의 혈기왕성하고 어여쁜 얼굴과 교태를 감상하고, 그녀들의 포근하고 생기가 넘치는 피부를 만지고자 하였으며, 그는 이러한 육감과 심리상의 만족을 통해서 예전의 청춘과 환락을 되찾고자 하였다. 당명황이 경성의 그러한 방정하고 규범적인 분위기에서 정사(政事)에 힘쓰던 황궁을 떠나, 풍경이 뛰어난 화청궁에 왔을 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세속의 환락을 추구하고 싫증을 모르는 가무의 연회에 탐닉하였다.

 여산의 골짜기와 가파른 바위에 가득 자라는 송백나무와 관목수림은 그 풍경이 울창하였다.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면 띠처럼 흐르는 위천(渭川)은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었다. 화청궁의 전각은 복잡하게 뒤엉켜 있고, 조각하고 그림을 그려놓은 크고 작은 기둥은 오색으로 찬란하여 황실의 풍채를 띠고 있으며, 제왕의 높은 위엄이 서려있다. 게다가 온천의 훌륭한 물은 따뜻하여 추위를 막을 수 있으며, 정기를 기를 수 있고, 심신을 즐겁게 해준다.


따뜻한 화청궁 구룡전에 흐르는 온천탕은 수십 개나 되고,

옥돌 수로에 향기로운 온천수가 물결을 치며 돌아 흐르네.

暖殿流湯數十間, 玉渠香細浪回環.2)


천보 6년(747), 당명황은 양귀비에 대한 사랑과 은혜는 이미 그녀 한 몸에 일편단심이었으며(專房之寵), 이 해에 당명황이 대규모로 화청궁의 건축물을 확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화청궁의 온천탕에서 등급이 가장 높은 것은 당연히 어탕(御湯)과 귀비탕이다.

 어탕은 연화탕(蓮花湯)이라고도 하며 소재하는 “구룡전(九龍殿)”은 온천의 수원지에서 가까운 곳에 지어져 있으며, 그 전각의 이름은 수원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마치 아홉 마리 용이 토해내는 것과 같다는데서 유래하였다. 구룡전의 온천탕은 타원형이며, 그 둘레가 몇 장(丈)이나 되며, 네 계단의 섬돌이 놓여 있으며, 첫 계단 모양은 연꽃 같다. 사용한 청색 돌의 품질은 정밀하고 섬세하며, 옥처럼 반짝이며, 돌 표면에는 연꽃 도안 물고기와 용과 오리와 기러기 등을 조각하였는데 정결하고 담박하면서도 형태가 생기가 넘친다. 북송나라 사람 왕당(王讜: 1110년 전후 생존)의 기록에 따르면, 어탕의 중앙에는 한 쌍의 배 부분이 연결되고 주둥이가 서로 다른 흰색의 돌로 만들어진 항아리가 있는데, 항아리 주둥이에 두 송이 돌로 조각한 연꽃이 돌출되어 있으며, 온천수는 연꽃에서 분사되어 연화탕에 쏟아진다.

 귀비탕은 해당탕(海棠湯)이라고도 하며, 어탕 서북쪽에 위치하며 규모가 약간 작고, 바닥은 해당화 모양이며, 활모양으로 다듬은 섬돌로 둘러쌓았으며 두 계단의 대좌(臺座)가 있으며(첫 계단은 16개 두 번 째 계단은 8개로 구성됨), 돌 표면에는 꽃문양을 조각하고, 바닥에는 푸른 돌로 깔아놓았고, 중앙에는 원형으로 된 물을 배출하는 구멍이 있다. 이러한 탕은 어탕과 같이 크고 화려하고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연화탕

해당탕


 온천에는 따뜻한 기운이 흐르고, 탕에는 향기와 안개가 일어나고, 화청궁안의 등에는 밝은 초가 타고, 궁의 시종들은 옷을 갈아입혔다. 몸매가 풍만하고, 피부가 백옥처럼 고운 양귀비가 목욕을 마치고 물에서 나오면 온 몸이 윤택하며, 얼굴표정과 거동은 지쳐 넘어질듯이 연약하게 보였으나 더욱 더 요염함이 돋보였다. 둥글고 시원하게 뻗은 몸의 곡선과 사람을 유혹하는 성적 매력은 청춘미의 모든 특징을 나타내주었으며, 연꽃이 물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순결한 나체는 속세 미인으로서 최고이며, 부드럽고 온화한 등불 아래에서 따뜻하고 향기롭고 달콤한 세속적 향락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정교하고 밝은 화청궁 욕실배경은 향기롭고 따뜻한 물안개속의 귀비와 시녀들을 돋보이게 하였으며, 몽롱한 분위기에 날렵하게 움직이는 여인들의 자태는 마치 환상속의 선녀들과 같았다. 온천에서 목욕을 마치면 온몸이 상쾌하였으며, 양귀비는 곧장 당명황의 침전으로 보내졌다. 연꽃을 수놓은 휘장 속에서 미인은 따뜻한 옥과 부드러운 향기와 같았고, 용을 새긴 황제의 침상에는 황제의 욕정이 여전히 식을 줄 몰랐으며, 붉은 얼굴의 양귀비가 당명황의 은총을 받음에 그 은총을 독차지하였다.《장한가》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봄밤이 짧아 안타까운데 해는 높이 솟았고,

이때부터 황제는 아침조회에 빠지게 되었네.

春宵苦短日高起, 從此君王不早朝.


이는 바로 당명황이 화청궁에서 “환락에 탐닉하여 경성으로 환궁하는 일을 잊었다.”는 사실을 절묘하게 묘사한 것이다.

 당명황과 양귀비는 온천욕을 하는 것 이외에 또 항상 독창적인 생각을 가졌고, 놀이를 즐거움으로 삼았다. 궁녀들이 목욕하는 길쭉한 탕은 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당명황이 탕 속에다 푸른 구슬과 정향(丁香) 나무를 등을 전설의 영주(瀛洲)와 방장(方丈) 등의 신선이 사는 산처럼 쌓고, 백향목(白香木)으로 만든 작은 배(은색을 칠을 한 꽃무늬를 상감하고 노에다 주옥을 장식함)와 비단으로 만든 오리와 기러기 등을 물에 띄워 물 위에 떠다니게 하였다. 이러한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처럼 노는 모습으로부터 당명황이 도교를 수양하고 신선을 추모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당명황과 양귀비가 온천에 들어가 마음껏 즐길 때는 항상 보배 구슬로 장식한 갓끈이 하수구를 통해 흘러나갔으며, 그 지방 백성들이 그것을 습득하면 마치 진귀한 보물처럼 여겼다.

 화청궁에는 양귀비가 전용으로 화장하고 단장하는 단정루(端正樓)가 있다. 당명황의 오랜 환심을 얻고자 양귀비는 날마다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몸에 성대한 의상으로 차려입고 온갖 장식물을 붙이어 다른 비빈들에 비해 훨씬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궁중의 수많은 비빈들과 시녀들은 언제든지 황제에게 아름답게 보여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양귀비도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려면 반드시 오랫동안 시들지 않는 꽃다운 젊음과 표정이 부드러운 아름다운 자태와 봄물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온화한 애정을 간직해야만 한다는 그러한 사실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피부가 곱고 몸매가 풍만한 타고난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대한 의상을 차려입어서 금상첨화였다.

 당나라 궁정과 백관들의 아녀자들이 차려입은 기본 형식은 적삼(衫)、치마(裙)、어깨에 걸치는 치마(帔: 쇼올, 배자) 등 세 가지이다. 적삼의 아랫자락은 치마의 허리띠에 집어넣는다. 치마는 대부분 폭이 넓고 땅에 닿으며, 어깨에는 장방형의 얇은 비단 치마를 덮는다. 또 적삼 밖에 장식용의 짧은 소매의 옷(반팔)을 걸친다. 이것은 서역 구자국(龜茲國)의 복식(服食) 영향을 받아 유행하는 “호복(胡服: 서북 이민족 의상)”이며, 고위층 아녀자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받았다. 이러한 여성 복장은 옷깃을 세우고 소매가 좁은 웃옷과 줄무늬에 폭이 작은 통바지에 부드러운 밑창이 있는 비단장화와 위로 높이 올린 호모(胡帽)3)로 구성되었다. 이밖에 향낭을 허리에 차는 것은 당시 귀족 부인들의 유행하는 문화였다. 양귀비의 셋째 언니도 바로 당명황이 상으로 하사한 향낭을 받았는데, 향낭 안에는 외국에서 공물로 들어오는 진귀한 향료가 들어있었다.

 궁정 비빈들과 상류사회의 여성들의 화장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에 붉은 색을 칠하며, 푸른 먹으로 눈썹을 칠하고 연지를 말랐다. 귀족 여성들은 더욱 더 짙은 화장을 하였다. 눈썹을 칠하는 방법으로는 원앙미(鴛鴦眉)、소산미(小山眉)、오악미(五嶽眉)、삼봉미(三峰眉)、수주미(垂珠眉)、월릉미(月棱眉)、분초미(分梢眉)、함연미(涵煙眉)、불운미(拂雲眉)、도운미(倒暈眉) 등의 스타일이 있었다. 천보 연간에 유행한 것은 가늘고 긴 버들잎 눈썹인 유엽미(柳葉眉)였다. 이밖에 노란 분인 액황(額黃)을 바르고, 눈썹에 금박지나 채색종이를 오린 “화전(花鈿)” 또는 화자(花子)라고 하는 장식물을 붙이고, 양쪽 볼에는 붉은 색과 황색 반점을 찍거나 달과 동전 모양과 같은 장식물인 “장엽(妝靨)”을 붙였다. 이렇게 세심하게 화장을 하면 특히 피부가 새하얗고 아름다움이 두드러진다. 헤어스타일은 당나라 초기 이래로 궁중에서  각종 스타일의 고계(高髻)4)가 유행하였으며, 그것은 특히 머리장식물을 부착하거나 비녀를 꽂는데 편리하였다. 예를 들면, “보요(步搖)”는 유행하는 장식물의 하나이다. 보요에는 오색의 주옥이 달려 있어 걸어갈 때 찰랑찰랑 흔들거린다.

 성당시기, 사회의 물질생활이 상당히 풍족하였으며, 또 북조의 상무정신의 유풍이 남아 있고, 예교를 소홀히 하여 풍기가 개방되어 상류사회 여성들은 복식 장식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당나라 사람들 안중에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는 보통 건강하고 풍만하고 늘씬한 키에 피부가 하얗고, 맑은 눈동자에 예쁜 얼굴을 가져야 했다. 이러한 외모의 풍만한 몸매를 추구하는 심미관은 자연히 온화한 자태와 화려한 복식의 유행과 서로 부합되었다.

 양귀비는 궁중에서의 예우가 황후와 다름없었으며, 그녀의 복식 상태는 자연히 그 아름다움을 극진히 하였다. 앞에서 서술한 바대로 궁중에는 700명의 기술자들이 만들은 비단은 양귀비에게 전용으로 제공되었다. 당명황의 은총이 지극한 가운데 양귀비의 복식과 화장은 아름답고 기이한 것을 추구하였으며, 새로운 유행을 이끌었다. 이러한 사치와 낭비는 훗날 송나라 사람들에 의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을 보여주는 “복요(服妖)”5)라고 비난을 받았다.

 의복이 아름다우면 사람의 눈을 감동시키며, 요염한 자태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양귀비가 단정루에서 단장을 마치고 밤 연회에서 당명황을 위하여 춤을 출 때, 가볍고 부드러운 명주치마를 입고 어깨에는 자주색 무명비단을 걸치고, 가슴에는 금실로 수놓은 향낭을 걸었으며, 머리에는 황금봉황 모양에 옥으로 장식한 보요(步搖)를 꽂았고, 안색은 시원스럽고 요염하였으며, 온몸에 향기가 감돌았다. 이러한 성대한 복식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자태는 속세를 초월하여 당명황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며, 마음을 통쾌하게 하였고, 그녀에 대한 은총은 그녀 한 몸에 쏟아졌으며 총애가 더욱 더 두터워졌다.

 화청궁은 당명황이 여색에 탐닉하던 인간 세상에 있는 신선의 나라였으며, 양귀비가 특별히 은총을 입은 영광스런 곳이며, 또한 양씨 형제자매가 황제의 은총을 받은 낙원이었다. 양귀비의 세 명의 언니는 바로 화청궁에서 같은 날 국부인으로 책봉되었다. 화청궁의 동쪽에는 양씨 다섯 형제자매의 호화저택이 줄지어 있다. 당명황이 여산에 행차할 때, 반드시 양귀비 자매들에게 수행하게 하여 앞세워 나가게 하고, 연이어 의복 및 일용품、말、향낭、보배 등을 상으로 하사하였는데 그 수를 모를 정도다. 양귀비 자매는 여산행차를 수행할 때, 각 집안에서 수레와 말의 장식에서 화려함을 서로 다투었다. 수레를 끄는 말에게 황금으로 재갈을 만들고, 자수로 말안장의 깔개를 만들었다. 그녀들은 일찍이 한 대의 송아지 수레를 장식하였는데, 사용된 황금과 주옥과 비취는 수십만 관(貫)에 달하였다. 당명황이 화청궁에서 머무는 기간에 행차가 있을 때 마다 양씨 다섯 형제자매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였으며, 모두에게 (당시 서북방에서 유행하는) 연악(燕樂)을 하사하였다.

 당명황과 양귀비가 여산에 행차할 때, “하루 나들이에 백관이 따르고, 만금의 비용이 하루에 낭비하였네.(一遊百司備, 萬費一日休.)”6)이라 하였으며, 국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으며, 백성들의 고혈을 탕진하였다. 양씨 다섯 집안이 황제의 어가를 수행할 때, 수레와 말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보옥들이 길에 떨어졌으며 길거리에 향기가 진동하였으며, 신하로서의 영예와 외척으로서 권세를 모두 다 누렸다. 이는 정말로 외척이 황실보다 잘 살았던 경우로써, 오직 양옥환이 당명황을 곁에서 모신 까닭이었다.


그림 돈황(敦煌) 341 窟舞伎.(굴무를 춤추는 무희)



1) 이선(李善)은 정화수(井華水)라고 설명하였다.

2) 당(唐)나라 시인 육구몽(陸龜蒙)의《개원잡제칠수(開元雜題七首)·탕천(湯泉)》“따뜻한 별궁 화청궁 구룡전에 흐르는 온천탕은 수십 개나 되고, 옥돌 수로에 향기로운 온천수가 물결을 치며 돌아 흐르네. 당명황이 처음 선녀와 같은 양귀비의 옷을 벗기고 함께 목욕을 하였는데, 진주를 장식한 노로 선산[모형]인 슬슬산을 두드리네.(暖殿流湯數十間, 玉渠香細浪回環. 上皇初解雲衣浴, 珠棹時敲瑟瑟山.)”

3) 

4)  唐代(618~907) 8~9세기의 彩繪陶, 높이: 47센티미터.

5) 고대에서는 이상한 복식이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는 조짐을 예시한다고 생각하였다.

6) 북송 사람 전이(錢易: 997~1022)의《온천시(溫泉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