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唐楊貴妃

7. “녹아(祿兒)”가 환심을 사 양어미를 알아보다

마장골서생 2009. 11. 9. 22:54

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7. “녹아(祿兒)”가 환심을 사 양어미를 알아보다


안록산은 하북도(河北道) 영주(營州) 유성(柳城)[지금의 요녕성(遼寧省) 조양(朝陽)] 출신의 혼혈 호인(胡人)으로, 대략 무측천 장안(長安) 3년(703)에 태어났다. 모친 아사덕(阿史德)씨는 돌궐족의 무당이었고, 부친은 서역에서 온 강씨(康氏) 성의 호인이었다.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사덕씨는 여러 해 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자 돌궐족의 전신(戰神)인 알락산(軋犖山)에게 기도를 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때문에 “알락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혼혈아 알락산은 어려서 모친과 함께 생활을 하였다. 후에 모친은 그를 데리고 돌궐족의 장군 안연언(安延偃)에게 시집을 갔다. 그는 커서 안록산으로 개명하였다.

성인이 되자 안록산의 체구는 우람하고 비대했고 게다가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사람과 교류할 때에는 말과 표정을 잘 헤아렸다. 그는 현지의 6개 “외국어(蕃語)”에 정통하였기 때문에 당나라와 돌궐의 국경무역에서 통역 겸 중개인 역할을 했던 “호시아랑(互市牙郞)”을 맡은 적이 있었다. 개원 27년(732), 안록산은 용맹하게 전투를 벌여 유주(幽州)[지금의 북경 서남쪽] 절도사 장수규(張守珪)에 의해 “착생장(捉生將)”으로 임명되고, 그의 양자가 되었다. 개원 24년(736), 안록산은 군공으로 평로토격사(平盧討擊使)、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명을 받들고 당나라에 반기를 든 해(奚)、거란을 토벌할 때 그는 용맹함을 믿고 적을 경시하며 맹목적으로 진군하다가 대패하였다. 군법에 따라 마땅히 참수를 해야했으나 장수규가 안록산의 용맹을 애석하게 여겨 그를 체포하여 동도 낙양으로 압송해 조정에게 판결하도록 넘겼다. 결과적으로, 당명황 역시 그의 “용맹(勇銳)”을 애석하게 여겨 관직에서 파면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안록산은 큰 어려움을 잘 넘겼다. 그는 “평범한(白衣)” 군관으로 전장에서 명을 수행하여 개원 28년(740)에 다시 평로병마사(平盧兵馬使)로 승진하였다. 다음 해, 어사중승(御使中丞) 장리정(張利貞)이 하북도채방사(河北道采訪使)의 신분으로 평로에 왔다. 안록산은 장리정에게 갖은 방법으로 아첨하면서 그에게 금은비단 같은 뇌물을 주었다. 장리정은 조정에 돌아간 뒤 당명황의 면전에서 그를 추켜세우고 칭찬하였다. 천보 원년(742), 당명황은 안록산을 평로(平盧)[지금의 요녕성 조양]절도사에 임명하였다. 천보 2년(743), 안록산은 처음으로 입경하여 당명황의 면전에서 충성을 맹세하여 크게 상을 받고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종1품)에 봉해졌다.

이로부터, 무릇 조정에서 하북도에 파견하는 순방(巡訪)、감찰관원(監察官員)에게 안록산은 후한 예로 대접하고 보내주었으며, 조정에 전쟁포로、가축、진귀한 새와 짐승、귀한 노리개와 기물을 끊임없이 올림으로써 당명황의 총애는 더욱더 깊어졌다. 천보 9년(750), 안록산은 범양(范陽)、평로 두 진(鎭)(군사지구)의 절도사 겸 어사대부(御使大夫)로 승진되면서 사면특권을 나타내는 철권(鐵券)을 하사 받고 동평군왕(東平郡王)(종1품)에 봉해졌으며, 동시에 하북도채방처치사(河北道采訪處置使)를 겸하게 되었다. 당명황은 또 안록산에게 경성인 장안에 호화저택을 하사하였다.

안록산은 당명황의 면전에서 기민하게 처세하면서도 술수를 잘 부렸다. 천보 6년(747) 안록산이 입조했을 때 당명황은 그에게 태자 이형(즉 숙종)에게 인사하라고  명했다. 안록산은 뜻밖에도 인사하지 않았다. 황제 좌우의 신하들이 재촉했을 때 그는 일부러 말했다. “신은 호인이라, 조정의 법도에 익숙지 않고, 태자가 무슨 관리인지도 모르옵니다.” 당명황은 그에게 설명하였다. “태자는 저군(儲君)이오. 짐이 사망하면 그가 짐을 이어 그대의 군주가 될 것이요.” 안록산은 이때서야 짐짓 크게 깨달은 척하며 말했다. “신은 원래 우매하여 예전에는 폐하 한 분만 알고 저군이 또 계시는 줄은 몰랐나이다.” 그리고 나서 태자를 향해 절을 올렸다. 당명황은 이를 사실이라 믿고 안록산을 더욱 좋아하였다.

안록산은 40세 이후 살이 져서 배가 크게 나왔으며, 150kg이나 나가는 체중을 자랑하였다. 한번은 당명황이 안록산을 놀리며 물었다. “그대의 배속에 무엇이 있길래 이리도 큰가?” 안록산이 대답하였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폐하에게 충성을 다하는 진심만 있을 뿐이옵니다.” 그는 이렇게 일부러 멍청한 척 하고 우습게 보여 충성을 나타내고 아첨을 하였다.

안록산은 분명히 용맹한 장수였다. 당명황은 그를 동북변방을 지키는 “만리장성(長城)”으로 보았다. 안록산은 또 겉으로는 멍청한 듯 하였지만 사실은 술수에 능한 야심가로, 아첨을 하여 충성심을 나타냈으며 매년 끊임없이 예물을 올려 총애를 공고히 하였다. 화청궁의 조원각(朝元閣)[강성각(降聖閣)]에 모셔져 있는 근 6척이나 되는 한백옥로군상(漢白玉老君像)은 바로 안록산이 유주에서 만들어 당명황에게 올린 것이었다.

천보 6년(747) 초 안록산이 입조했을 때 양옥환은 이미 공식적으로 귀비로 책봉되어 있었다. 당명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록산은 입궁하면 먼저 귀비에게 문후를 올렸고 그리고 나서 당명황에 문후를 올렸다. 당명황이 이상해서 그 까닭을 묻자, 안록산이 대답하였다. “호인에게는 모친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부친입니다(胡人先母而後父).” 당명황은 너무 기뻐하여 양귀비의 오빠、언니들에게 안록산과 의형제를 맺도록 하였다. 이후 안록산이 입궁하여 조정에 나오면 당명황은 귀비를 옆에 앉도록 하였다. 안록산의 요구는 끝이 없었다. 그는 염치없이 양귀비에게 “양아들(養兒)”로 거두어 줄 것을 청했다. 양귀비의 나이는 안록산보다 13~4세가 적었다.

천보 9년(750) 10월, 안록산이 다시 입조하자, 당명황은 화청궁으로 행차하는 길에 양국충과 양귀비의 언니들에게 신풍(新豊)[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임동(臨潼)] 희수(戱水)에 와서 영접하라고 명했다. 안록산이 화청궁에 도착하자 양씨 형제들이 그를 수행하여 놀며 연회를 베풀었다. 당명황이 이렇게 한 것은 후한 예로 안록산을 구슬리려는 동시에 양씨 형제들이 큰 총애를 받는 실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다음해 정월 1일은 안록산의 생일이었다. 당명황과 귀비는 이 “양아들”에게 대량의 의복、금은기물과 각종 진귀한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셋째 날, 양귀비는 안록산을 궁중으로 불러, 궁녀들에게 비단으로 수놓은 큰 강보로 안록산을 둘둘 말아 채거(彩車) 위에 두고 장난치며 놀았다. 당명황이 별전(別殿)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니, “귀비께서 정월 3일에 아들 녹산(祿山)을 씻어주고 계십니다(貴妃爲祿山作三日洗兒).”라고 보고하였다. 당명황은 즉시 그 소란스런 광경을 보러 가서는 귀비와 함께 크게 웃었다. 이어 당명황은 귀비에게 “아들을 씻어주도록(洗兒)” 많은 금、은 같은 재물을 하사하였다. 이 혐오감을 주는 아이를 씻는 의식 후로 궁중에서는 안록산을 장난삼아 “녹아(祿兒)”라고 불렀고, 당명황은 또 특별히 그에게 마음대로 궁궐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안록산은 이로 당명황이 궁중에서 거행하는 가무연회에 참가하여 귀비와 모자(母子)지간처럼 마주 앉아 식사를 하였다. 황실의 모든 왕과 괵국부인(虢國夫人) 등도 늘 안록산과 농담을 하거나 가까이 앉아 연회를 하며 즐겼다. 안록산이 궁중에서 황제의 친척、귀족들과 밤새워 놀며 즐길 때 궁녀와 빈장(嬪嬙)[고대 궁중의 여관(女官)의 명칭-옮긴이]과 다정하게 굴며 떠들며 담소하였는데, “추한 소리(醜聲)”가 궁 밖으로 전해졌다.


<그림> 호인의 춤을 그린 당나라 때의 벽화. 안록산이 현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말 이러한 춤을 추었을까?


《개원천보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록산이 당명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욕을 돋구어주는 붉고 향기가 나는 꽃잎 100매를 올렸다. 밤에 잘 때 한 잎 물고 있으면 성욕이 일어나 침상에서의 기쁨을 더해주었다.

당명황이 당시 “호인”의 풍속에 따라 안록산을 “양아들”로 삼은 것은 군신관계에 또 “부자” 관계를 더해 안록산으로 하여금 더욱 충성을 다해 동북변방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양귀비는 안록산의 양어미가 되었지만 사실은 조연을 맡은 것에 불과하였다.

당명황은 안록산에게 지방의 군사권을 계속 넘겨주고, 두터운 예와 많은 상을 하사하는 것으로 총애와 신임을 나타냈다. 당명황이 근정루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백관들은 누각 아래에 줄지어 앉고, 안록산 한 사람을 위해 어좌의 동쪽에 금계병풍을 설치하여 좌석을 마련하고 발을 말아 올리게 하는 것으로 큰 총애를 나타냈다. 경성 안과 여산 행궁을 제외하고 안록산 만을 위해 지은 저택이 있었다. 안록산은 경성에 새 저택이 완공되었을 때 크게 연회를 열고 당명황에게 묵칙(墨勅)을 내려 재상들이 연회에 와서 축하해줄 것을 주청하였는데, 당명황은 흔쾌히 윤허하였다. 그러나 당명황이 시종 헤아리지 못했던 것은 그를 신임하고 중용하였기 때문에 안록산의 군대가 너무 강해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후환을 남겨 그 자신이 도리어 해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그림> 돈황 12굴의 연무(軟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