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4. 흥경궁의 연회 즐거움은 영원하여라
당나라 흥경궁의 옛터는 지금의 서안시(西安市) 흥경 공원 일대이다. 무측천 시기에 융경방(隆慶坊) 거주지에 우물물이 넘쳐 커다란 연못이 형성되었다. 당시 “융경지”라고 불렀다. 대족(大足) 원년(701) 임치군왕(臨淄郡王) 이융기 형제 5명이 여황제이자 조모인 무측천을 따라 동도 낙양으로 돌아온 뒤, 융경방에 지어진 저택을 하사받고 “오왕택(五王宅)”이라 불렀다. 이융기가 황제에 즉위한 뒤, 휘호를 피하여 융경방과 융경지를 “흥경(興慶)”으로 바꾸었다. 개원 초기 당명황이 큰 형 이성기(李成器) 즉 영왕(寧王) 이헌(李憲)과 여러 친왕 형제들이 흥경방 왕택을 이궁(離宮) 즉 황제의 별궁으로 헌납하겠다는 주청을 받아들여 흥경궁을 증축하게 하였다. 뒤에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북쪽으로 영가방(永嘉坊) 절반을 궁내로 편입하였으며, 평면에 장방형(남북으로 길고 동서로는 짧다.)의 황궁으로 되었다.
그림: 송나라 시대에 판각한 흥경궁 그림.
흥경궁은 서내태극궁과 동내대명궁(東內大明宮)의 남쪽에 위치하여, “남내(南內)”라고 부른다. 그 중 궁전 구역은 “용지(龍池)” 즉 흥경지(興慶池) 북쪽에 위치한다. 중요한 전당 건축의 분포는 동쪽으로 금화락(金花落)、신사전(新射殿), 가운데에는 남훈전(南薰殿), 서쪽에는 흥경전、대동전이 있다. 흥경전은 정전이며, 당명황이 조정 대신들을 입조시키어 정치를 행하는 곳이었다.
용지를 중심으로 남쪽은 원림(園林) 풍경지구이다. 용지 남쪽의 용당(龍堂)은 해마다 중춘에 제사를 거행하는 곳이었다. 용지 동쪽에는 침향목으로 세운 침향정(沉香亭)이 있다. 이것은 당명황이 양귀비와 모란을 감상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용지의 서남쪽은 개원 8년(720)에 세운 두 개의 높은 누각이 있다. 남향 누각에는 “근정무본(勤政務本)”이란 편액이 있으며, 정사에 부지런하고 근본에 힘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당명황은 흥경궁으로 옮겨 온 뒤로 여기에서 연호를 변경하거나 대사면을 선포하거나 국가적 연회를 거행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명절 경축행사를 거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서향의 누각에는 “화악상휘(花萼相輝)”1)라는 편액이 있다. 꽃과 꽃받침이 서로 빛난다는 의미이다. 누각 아래 궁궐 담장 밖은 승업방(勝業坊)과 안인방(安仁坊)에는 영왕 이헌、신왕 이위、기왕 이범、설왕 이업 등의 저택이 줄지어 있다. 당명황은 여러 친왕 형제들과 항상 화악루에서 즐거운 연회를 열었다. “화악상휘”라는 누각 이름은《시경(詩經)․소아(小雅)․당체(常棣)》에서 유래하였다. 당명황은 이러한 《시경》의 시를 빌리어 형제간의 우애가 마치 꽃잎과 꽃부리처럼 불가분의 관계이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흥경궁의 용지는 타원형이며, 수심은 1장(丈: 3.3미터)이 넘는다. 여름에는 연못에 연꽃과 마름이 푸른 잎과 붉은 꽃으로 장식한다. 연못가에는 수양버들이 줄지어 있고, 풍경은 사람을 매료시킨다. 지상의 잔디는 양탄자를 깐듯하며, 무성한 꽃가지는 비단을 수놓은 듯하여, 높고 웅장한 전당과 누각과 대조하여, 황실 궁성이 마치 선경을 연상하게 하였다.
만약 용지 북쪽의 궁전 구역이 황제가 조정에서 정사를 보고 군사와 국가대사를 처리하는 곳으로 장엄하고 삼엄한 분위기로 휩싸여 있다고 말한다면, 용지 남쪽은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와 호화하고 방탕함이 넘치고 향락을 탐하는 세속의 정서를 나타내었다. 당명황이 흥경전에 앉아 있을 때는 천하를 호령하고, 중신 위에 군림하는 당나라 천자였으며, 그가 양귀비와 용지에 배를 띄우고 즐길 때는 많은 궁녀들에 둘러싸여 환락을 탐하는 이삼랑(李三郞)이 되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 원소절이면 장안성이 가장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한 날이다. 큰 거리에는 산같이 높은 등을 단 누각이 세워지고, 야간에도 등불이 수천 개가 대낮처럼 빛을 내었다.
그림: 흥경궁 화악상휘루.
금오금군(金吾禁軍)이 황제의 특명을 받들어 3일 동안 궁궐을 순찰하고, 왕공 귀족에서 평민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후궁과 궁녀까지 큰 거리로 다투어 나와 밤늦게까지 구경을 한다. 곳곳마다 음악이 연주되고, 저속한 야담으로 모두가 흥겨워하며 새벽까지 시간을 보낸다. 보름날 밤에 당명황은 양귀비와 함께 예전처럼 근정루에 올라 감상하였다. 경성 고관대작들도 누각 아래에서 무대를 설치하여 누각의 정경을 구경하였다. 밤이 깊어지면 당명황은 궁중 기녀들에게 명하여 누각 앞에서 가무를 베풀게 하여 마음껏 즐겼다.
한식 청명 시절은 대자연의 생기가 활발하고, 푸른 초원에 들꽃 향기가 가득하며, 봄빛이 아름답다. 이는 바로 교외 나들이하기에 좋은 시절이다. 황궁에는 그네가 높이 오르고, 비빈 궁녀들이 놀이에 열중한다. 궁녀가 그네에 올라 오르락내리락할 때, 환호성을 지르며, 비단 옷자락이 허공에서 휘날리는 모습은 마치 훨훨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와 같았다. 당명황은 매우 즐겁게 구경하였으며, 그네 타기는 “선녀들의 놀이와 다름이 없다.(半仙之戱)”라고 칭찬하였다. 그네 이외에 궁중에서 축구(踢球)、타마구(打馬球)、줄다리기(拔河)、닭싸움(鬪鷄) 등 오락활동이 있었다. 그리고 당명황 본인도 청년시기에 타마구의 선수였다.
어느 해 늦은 봄, 침향정 앞에 한 그루 모란꽃이 피었는데, 한 가지에 두 송이가 피었다. 그 색깔이 아침에는 짙은 붉은색이고, 정오에는 짙은 푸른색이고, 초저녁에는 짙은 황색으로 깊은 밤에는 얇은 백색으로 나타나, 밤낮으로 향기가 짙고 때에 따라 각기 달랐다. 궁녀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분분히 서로 보고하니, 당명황은 듣고 나서 말하였다. “이는 꽃의 요정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어느 날 새벽에 당명황은 양귀비와 술에 깨어나 서로 부축하여 침전 밖으로 나왔다가 함께 모란을 감상하였다. 당명황은 꽃 한 송이를 꺾어서 양귀비와 교대로 그 향기를 맡으면서 말하였다. “망우초(忘憂草)라 불리는 원추리는 사람의 근심을 덜어줄 수 있다. 이 모란은 향기가 짙어 가슴의 폐(肺)까지 파고들어 술에 취한 사람을 깨울 수 있구나.”
또 어느 해 단오절에, 당명황이 양귀비와 함께 용지에 유람선을 탄 뒤, 용지 가에 지은 수전(水殿)에서 휴식하였다. 수전 밖에서는 궁중의 비빈들이 난간에 기대어 다투어 물속에서 놀고 있는 원앙을 구경하였다. 당명황은 수놓은 휘장 안에서 밖의 환호성과 웃음소리를 듣고 귀비를 끌어안은 채 궁중 비빈들을 조소하며 말하였다. “너희들은 물속의 원앙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우리처럼 한 이불 속의 원앙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
해마다 7월 7일 칠석날에 궁녀들이 정원에서 향기로운 꽃과 과일과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견우와 직녀에게 은혜를 내려 줄 것을 기원하였다. 그녀들은 또 각자 거미를 잡아 작은 상자 속에 넣어 다음날 새벽이 되어 상자를 열어서 거미줄이 촘촘히 쳐진 정도를 보고 자신의 바느질 솜씨가 잘 될 것인가의 징후를 살폈다. 거미줄이 촘촘한 사람은 그 솜씨가 잘 발휘되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솜씨가 잘 발휘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솜씨를 기원하는 놀이는 궁 밖으로 전해졌으며, 민간 여성들도 서로 다투어 모방하였다.
칠석날 밤 당명황은 양귀비와 연회를 거행하였다. 먼저 “걸교루(乞巧樓)”를 쌓는 데 그 높이가 몇 장(丈: 3.3미터)이나 되었다. 그 아래에 제사용 탁자를 설치하고, 그 위에 온갖 과일과 야채를 공양하고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를 올렸다. 비빈들이 별에 제사를 올리고, 손에는 구공침(九孔針)과 오색실을 잡고 달 아래에서 바늘귀를 통과하면, 바로 바느질 솜씨가 훨씬 좋아졌다. 밤 연회가 시작된 뒤, 궁중 기녀들이 (서역 지방의 외국 음악인) 청상악곡(淸商樂曲)을 연주하며 밤이 새도록 음악소리가 귀에서 끊이질 않았다.
8월 5일은 당명황의 생일이다. 개원 17년(729) 당명황의 45세 생일에, 화악루에 백관들을 연회에 초청하였다. 재상 장열(張說)、원건요(源乾曜) 등이 앞장서서 이날을 “천추절(千秋節)”로 삼자고 주청하였다. 당명황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어명을 내려 제도로 정하게 하고, 경성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각급 관원들은 이날에 모여 연회를 즐기며 축하하게 하고, 3일간 휴가를 주었다. 뒤에 또 민간의 전통 중추절 “사신(社神: 토지신)”에게 제사 올리는 활동을 “천추절”에 편입시키어, 토지신、오곡신에게 제사하고,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는 명분으로 생일잔치를 거행하였다. 천보 7년(748)에 또 “천추절”을 “천장절(天長節)”로 바꾸었다. 고대 제왕이 그의 생일을 천하 절령(節令: 명절)으로 삼고 백관에게 연회를 베풀었던 것은 당명황부터 시작한 것이다.
당명황이 군신들에게 연회를 하사하거나 포회(酺會)2)를 베푸는 것은 대부분 근정루에서 거행하였다. 연회일에 날이 밝기 전에 궁중 금군 장졸들은 수놓은 도포와 갑옷을 입고 근정루 아래와 궁밖에 깃발을 성대하게 세워두고, 호위병을 줄줄이 세웠다. 연회가 시작하면, 먼저 태상사(太常寺) 소속의 악무단에서 아악을 연주하고, 뒤이어 교방과 각 부현(府縣)의 산악(散樂)이 연주된다. 연회가 성대하면, 줄타기(走索)、농환(弄丸)、검무(劍舞)、정간(頂竿)、각저(角抵) 등 잡기가 공연된다. 그리고 산거(山車)3)、한선(旱船)4)、투계(鬪鷄)、마희(馬戱)의 희마(戱馬)、대상(大象)、서우(犀牛) 등이 음악에 맞추어 절을 하는 반악배무(伴樂拜舞)가 있었다. 그런 뒤에 수백 명의 궁녀들이 비단옷에 비취를 장식하고 장막 뒤에서 등장하여 북을 두드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파진악(破陣樂)》、《태평악(太平樂)》、《상원악(上元樂)》 등을 연주하였다.
천보 연간에 당명황은 양귀비와 흥경궁에서 연회를 거행할 때 항상 화려하게 하도록 하였다. 백여 명의 기녀가 노래하고 춤을 추게 하거나, 교방의 기녀에게 잡기를 공연하게 하여 주흥을 높였다. 교방의 기녀 가운데, 장대나무로 잡기를 공연하는 정간(頂竿)을 잘하는 왕대낭(王大娘)은 정수리에 장대나무를 올릴 수 있었는데, 그 장대나무 위에는 나무로 만든 산(전설상의 선경을 묘사한 것)이 있고, 손에 붉은 부절(符節)을 든 소아(小兒)가 장대나무를 타고 그 산위에 올라가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당명황은 양귀비와 여러 빈어(嬪御: 육궁의 비빈)들과 술을 마시면서 구경하였는데, 환호성이 궁궐 담 밖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연회가 주흥이 오를 때까지 진행되었으며, 당명황이 흥이 지나칠 때는 마치 시정잡배나 다름이 없이 스스로 백여 명의 어린 환관들을 거느리고 귀비에게도 백여 명의 궁녀들을 거느리게 하여 도사의 의복인 하피(霞帔)와 비단이불로써 깃발로 삼아 두 팀이 진을 치고 서로 경기를 하였다. 패자는 큰 술잔의 벌주를 받아 마셨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하여 온갖 추태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주체할 수 없는 향락은 당명황은 좋게 표현하여 “풍류진(風流陣)”이라 하였다.
어느 해 겨울 동짓날에 하늘에는 대설이 내리고 오후에는 눈이 그치자 날씨가 매우 추워서 처마 끝에 주렁주렁 고드름이 매달렸다. 양귀비는 시녀에게 명하여 몇 개의 고드름을 따서 장난감으로 삼았다. 당명황은 저녁 조회를 마치고 돌아와 양귀비에게 물었다. “손에 갖고 노는 것은 무슨 물건인가?” 양귀비가 귀엽게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제가 갖고 노는 것은 얼음 젓가락입니다.” 당명황은 기뻐하며 좌우 시종에게 “귀비가 총명하니 사람의 귀여움을 받는구나.”라고 말하였다.
앞에서 말한 대로 1970년에 출토된 빈왕(邠王) 이수례(李守禮) 왕부 저장창고에서 금은으로 만든 기물 가운데, 하나의 무마(춤추는 말)가 입에 술잔을 물고 있는 모양을 새긴 은제 술병(높이가 14.3센티미터)이 있는데, 술병 중간에는 한 필의 금빛 말이 상감되어있으며, 입에는 술잔을 물고 있고, 목에는 긴 가슴걸이 끈이 있으며, 앞 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는 굽혀 앉아있고, 긴 꼬리는 흔들고 있는데, 그 생생한 모습은 마치 살아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이러한 훌륭한 수공예 작품에서 당명황의 사치、낭비、방종、향락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담겨있다.
당명황은 궁중에 명하여 100필의 무마(舞馬)를 사육하게 하였고, 금은보화로 말갈귀와 가슴걸이 끈을 장식하였으며, 비단옷을 입히고, 털의 색깔에 따라 분류를 하여 어떤 집안의 보배(某家寵)、어떤 집안의 귀염둥이(某家驕)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또 젊고 아름다운 악공 몇 명을 선발하여 황색을 물들인 채색 옷에 줄무늬 허리띠를 착용하고 무악(舞樂)을 연주하게 하였다. 해마다 “천추절(8월 5일)”이면, 당명황은 근정루 아래에서 마무(馬舞)를 공연하게 하였다. 이러한 춤추는 말들은 《경배악(傾杯樂)》의 리듬에 맞추어 고개를 들고 꼬리를 흔들며, 사방으로 오락가락하고, 음악은 그 아름다움을 모두 표현하고, 말은 그 재능을 마음껏 나타내어 진실로 참신한 모습을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군마(群馬)들의 합무(合舞) 이외에도 독무(獨舞) 공연도 있었다. 3층의 평상위에서 기수(騎手)가 말을 타고 올라가 회전하며 날듯이 움직였으며, 장사들에게 명하여 나무 탁자를 들게 하고 그 위에 춤추는 말이 올라가 고개를 들고 꼬리를 흔들며 네 말굽을 높이 올리고 술잔을 입에 물고 춤을 추었다.
뒤에 “안사의 난” 이 터지자 당명황은 경성을 떠나 서쪽으로 몽진하여 반란군이 장안을 점령하자, 이러한 춤추는 말의 공연도 군영과 민간에 유전하였다. 안록산은 일찍이 무마(舞馬) 공연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내심 매우 기뻐하였으며, 사람을 시켜 몇 필의 말을 찾아 그의 오랜 근거지인 범양(范陽: 지금의 북경 서남쪽)에 보내어 사육하게 하였다.
안록산이 사망한 뒤, 이러한 무마 공연은 여러 주관자들을 거치면서 마지막에는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소재지는 지금의 하북성 大名) 전승사(田承嗣)의 손에 떨어졌을 때, 이미 이것이 당명황 시기에 사육된 춤추는 말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며, 이러한 말을 전마와 함께 혼합하여 사육하였다. 어느 날, 전승사의 장사(將士)들을 위로하고자 군영에 음악을 베풀었는데 이러한 춤추는 말들이 음악소리를 듣자마자 춤을 추었다. 말을 사육하던 사병이 말에게 사악한 병이 걸렸다고 생각하고, 빗자루로 때렸는데 춤추는 말은 오히려 주인이 춤을 잘 추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더욱 더 격렬하게 춤을 추는데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말을 관리하던 관리들은 서둘러 이러한 이상한 일을 전승사에게 보고하였다. 전승사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더욱 더 세게 매질을 하게 하였다. 의외로 매질을 심하게 할수록 말은 오히려 더욱 더 열심히 춤을 추었으며, 결국 마구간에서 무참히 맞아 죽어갔다. 당시 군중에서 무마의 유래를 아는 자가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전승사의 잔학함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숨기고 감히 직언을 올리지 못하였다.
1) 출전: 《詩經․小雅․常棣》“당체나무의 꽃이 피었네. 꽃잎과 꼭지가 울긋불긋하게 빛나네. 천하사람들 많다지만, 우리 형제보다 못하리라!(常棣之華, 鄂[萼]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 형제간의 우애를 권하는 시. 常棣:나무이름. 果實은 오얏 열매와 같고 비교적 작다. 常棣의 꽃을 형제에 비유하였다. 또는 서로 의지하며 지내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鄂不:화체(花蒂), 꽃잎과 꼭지. “鄂”字는 《說文》에서“萼”으로 인용되고 있다. “不”字는 甲骨文에서는 花蒂의 象形으로 설명하고 있다. 위위(韡韡):光輝.
2) 포회: 고대 국가 경축행사가 있을 때, 황제가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즐긴 하나의 경축행사이다. 포는 본래 민간에서 화합의 모임에 연회를 베푸는 의미가 있었다. 봉건국가가 백성들이 불순한 활동을 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임에 연회를 베푸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일찍이 진(秦)、한(漢) 시대에도 있었다.
3) 산거: 대나무로 각 종 수레의 모양을 만들고 각종 채색 종이로 장식하여 사람이 그 안에서 공연하는 고대 무용의 하나이다. 광동성 불산(佛山) 등지에서 명절에 거행되었다.
4) 한선: 산서성에서 유행한 것으로, 마치 수중에서 배가 움직이는 것처럼 공연하는 민간무용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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