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2. 신선을 사모하고 도교를 숭배하고 불로장생을 부러워하다
당명황의 형제 4명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큰 형 영왕 이헌이다. 개원 29년(741) 11월 영왕이 병사하였다. 당명황은 슬퍼한 나머지 큰형의 시호를 황제의 자리를 양보한 황제라는 의미의 “양황제(讓皇帝)”라고 추서하였다. 비록, 형제가 서로 투쟁하여 황제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는 잠재된 근심이 이로써 완전히 사라졌으나, 형제간의 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57세의 당명황의 심중에는 자연히 고독하고 쓸쓸한 비애의 정서가 생겨났다. 태평성세의 천자의 몸으로서 세속의 권세와 부귀영화와 인생의 쾌락은 그는 얻지 못할 것이 없었다. 단지 생로병사하는 자연의 생명규율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가 없었다.
1년 전에 양태진(楊太眞)이 입궁하여 무혜비 사후 당명황 심중에 남아 있는 허탈감을 채워주었다. 젊고 아름다운 양태진은 “눈동자를 굴리며 한 번 웃으면 온갖 아름다운 자태가 생겨나고(回眸一笑百媚生.)”1), 당명황이 하루 종일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질 않게 하였다. 꽃과 옥처럼 아름다운 최고의 보물을 바라보면서, 당명황은 마치 봄바람 속에 앉아서 마음이 흥분되고, 온 몸이 다시 청춘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호탕하고 낙관적인 당명황은 다재다능하고 다정다감하였다. 그는 축구(공차기)、격검、말타고 활쏘기、사냥을 좋아하였으나, 이러한 모든 취미는 청춘을 오래 머물러 두지 못하고 생명을 늙지 않게 하지도 못하였다. 비단옷과 진귀한 음식과 마시면 신선이 된다는 경장옥액(瓊漿玉液)과 미인들이 항상 함께 어울리며, 미인들이 수행하며 시중드는 이와 같은 인간세계의 지존의 쾌락생활을 어떻게 하면 영원히 유지하고, 오래 누리며 끊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이가 60에 가까운 당명황의 심중에는 불로장생의 꿈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더 강렬하고 절박하였다.
“개원 시기의 천자 당명황은 만사가 풍족하였으나,
오직 당시의 자신의 수명이 짧은 것이 안타깝구나!
(開元天子萬事足, 唯惜當時光景促.)”
(제목: 《삼향진 역루에 올라 당명황 현종이 지은 『여기산을 바라보며 지은 시』를 엎드려 읽고서, 소신 유우석은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三鄕驛樓伏睹玄宗『望女幾山詩』, 小臣斐然有感)》)
이는 중당(中唐: 762~827)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이 당명황의 마음 상태에 대해 사실대로 표현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영원히 생명을 향유할 수 있을까? 불교 각 종파는 모두 출가하여 고행의 수행과정을 거치는 금욕주의를 받들어 행하면서, 현실에서 선행을 행하고 덕을 쌓아야 “내세(來世)”에는 더욱 더 나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음을 널리 홍보하였다. 이는 향락주의를 받들어 행하는 당명황에 대해서 말하자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토속 종교인 도교는 무병장수와 득도하여 신선이 되고 불로장생하는 극락 경계를 추구하였다. 이는 바로 당명황이 지향하는 동경과 부합하였다.
일찍이 전국시대에서 도교학파의 중요인물인 장자(莊子)는 바로 “신인(神人)”、“지인(至人)”과 관련된 미묘한 상상을 남겼다. 신인은 먼 고야산(姑射山)에서 살며, 얼음이나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처녀와 같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고야산의 신인은 오곡을 먹지 아니하고 맑은 바람을 들이마시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나는 용을 몰며, 사해의 밖에서 유유자적한다. 그의 정신이 응집되면, 만물이 재해를 입지 아니할 수 있으며, 오곡이 풍년이 들게 할 수 있었다.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 지인은 매우 신비하다. 산림을 태워도 불의 뜨거운 열기를 두려워하게 할 수 없으며, 강물을 얼려도 추위를 두려워하게 할 수 없으며, 천지를 진동시키는 천둥소리도 그를 위협할 수 없으며, 바닷물을 요동치게 하는 광풍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었다. 그는 구름을 몰고, 해와 달을 타고 다니며, 사해 밖에서 유유자적하며, 이해관념과 생사변화는 그에게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
바로 선진(先秦) 도가의 이러한 허망한 이상과 도인(道人) 방사(方士)들이 열심히 수련한 “신선술(神仙術)”은 당명황에게 인간세계의 황제로서 신선의 미묘한 환상을 꿈꾸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술에 취한 듯 어리석은 듯이 도교를 숭배하여 받들게 하고, 많은 황당하고 가소로운 일을 하게 만들었다. 당명황이 도교를 숭배하는 광기는 진시황、한무제(漢武帝)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는 도교에 대해 죽을 때가지 깊이 빠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독실하게 추구하였으며, 또 양태진이 입궁한 시기를 시한으로 하여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도교는 당나라 초기에 국교(國敎)로 받들어졌다. 수나라 말기에 이연(李淵) 부자가 태원(太原)에서 기병하여 천하를 쟁탈할 때, 그들의 가문을 높이고, 상류층 귀족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우연의 일치인지 도교 조사(祖師: 창시자) 노자(老子)의 성이 이씨(李氏)라는 사실2)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노자를 받들어 그의 가문의 조상으로 삼았으며, 자신은 신선의 후예라고 선전하고, 이를 빌어 군주의 권력은 신에게서 내려진다는 의미의 “군권신수(君權神授)”의 여론을 조성하였다. 일부 도교 상류층 인사들도 각지에서 노자의 신령이 모습을 나타내다는 의미의 “노군현령(老君顯靈)”이라거나, 하늘이 천자가 될 사람에게 내리는 징표라는 의미의 “부명(符命)”을 하사받았다는 신화와 예언을 선전하여, 이연 부자의 요구에 부응하여, 이씨 당나라의 신왕조가 도교에 대한 기반을 세웠다. 태종 이세민의 시기에 도교는 불교보다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무측천의 집정시기에 이르러 승려들이 무측천을 위해 당이란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심혈을 기울여 불교를 숭상하고 도교를 억제하고 불교사원을 확장하였다. 예종(睿宗) 이단(李旦)이 복위하기에 이르러, 도교는 또 다시 대두하였다.
당명황이 청소년 시절에 개국 이래 여러 황제들이 도교를 숭상하는 기풍의 영향을 받아 바로 도교에 대해 큰 흥미를 가졌다. 특히 조모인 무측천이 집정할 시기에 그는 이미 종실 친왕으로서 시기와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도교는 청정(淸靜)과 현묵(玄黙: 무언[無言]의 감화)을 숭상하여, 그가 정치 포부를 덮을 수 있는 외투로 삼을 수 있었다. 그는 청년시기에 많은 도사、승려들과 교류하였으며, 이러한 사람들은 뒤에 모두 그가 정변을 일으켰을 때 거사를 주도한 최측근이 되었다. 당명황이 황제로 즉위한 뒤 도교를 숭배하는 일은 바로 대부분 국가 정치의 객관적 요구로부터 나왔다. 그는 무측천의 주(周)나라 이래 폐정을 혁파하고자 하였고, 또 공개적으로 조모를 비평하지는 않았으나, 도교 숭배와 불교 억제의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조모 무측천을 비평하려는 그의 속마음을 감추었다. 그치지 않는 궁정 정변이 만든 정국의 불안으로 사회가 혼란하였다. 백성의 부담이 지나치게 무거웠기에 나타난 현상은 주민들이 달아나거나 도적이 약탈을 자행하여, 당명황이 도가의 “청정무위(淸靜無爲)”의 사상으로 국가의 정치를 지도하여 관대하고 간략한 정치 도리를 세우고, 부역을 경감시키고 조세를 인하하여 백성과 함께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이러한 치국 방침의 지도하에서 물자를 절약하고 성렴(省斂)3)하고, 농업을 중시하고 근본에 힘쓰며, 번거롭고 가혹한 정책을 폐지하는 등 청정무위의 정치를 실시하였기에 개원연간의 번영과 태평의 시대를 출현하게 할 수 있었다.
도가의 자연스러운 정치를 시행하다는 의미의 “무위이치(無爲而治)”의 사상학설을 응용하여 국가를 다스리고 정치를 바로 세움으로써, 단약(丹藥)을 복용하여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되고자 갈망하는 것과 상당히 큰 거리를 두었다. 개원 연간의 두드러진 문치(文治)와 무공(武功)과 창고의 재물이 충만한 상황 아래에서의 태평무사함은 당명황으로 하여금 향락을 추구하고 불로장생을 도모하려는 사상의 징조가 잠복상태에서 신속하게 발전하는 정도로 심취하게 되었다.
개원 22년(734) 정월에, 당명황이 동쪽으로 낙양에 행차하였다. 2월에 그는 대신을 항산(恒山)에 파견하여, 유명한 도사 장과(張果)를 초청하였다. 장과는 낙양에 온 뒤, 가마를 타고 입궁하는 예우를 받았다. 당명황이 “사람의 수명을 잘 알아보는” 형화박(邢和璞)에게 장과의 나이와 선악(善惡)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형화박은 장과의 나이가 얼마인지를 전혀 알아내지 못하였다. 당명황은 또 “귀신을 잘 알아보는” 사야광(師夜光)을 입궁하게 하였는데, 사야광은 비록 장과가 궁전 안에 있는 것을 알지만, 마주 대하고도 오히려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어서 당명황은 또 장과에게 연이어 독이 든 세 잔의 제비꽃 즙액을 마시게 하였는데, 장과는 술에 취한 듯 곤드레만드레하였다. 입안의 치아가 온통 새까맣게 변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아무 일이 없는 듯 태연하였다. 장과는 사람을 시켜 쇠망치를 가져오게 하여 마음껏 검은 치아를 두드려 부러뜨리게 하고 요대(腰帶) 안에 감추게 한 뒤에, 품속에서 한 포의 불그스름한 색을 띤 “신선약(神仙藥)”을 끄집어내고서 부러진 치아에 바르고는 정신이 몽롱하다가 잠이 들었다. 한참 뒤에 잠에서 깨어나니 입안 가득히 또 새하얀 색의 새로운 치아가 자라나 있었다.
장과의 이러한 마술、기공、화학약물을 사용한 기묘한 공연은 당명황으로 하여금 신선방술의 선약에 대해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게 하였다. 명령을 내려 장과에게 종삼품인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라는 벼슬을 하사하고, “통현선생(通玄先生)”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아울러 (예종의 아홉 번째 딸이자) 자신의 여도사이자 여동생인 옥진공주(玉眞公主)를 장과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총명하고 교활한 장과는 그 말을 듣고 나서 크게 웃으며 어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궁중에 오래 머물게 되면 그의 술수가 들통 날 것을 꺼려하여, 거듭 항산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당명황은 어쩔 수가 없어 바로 장과에게 의복과 갖가지 예물을 상으로 하사하고 산으로 돌려보냈다. 장과 이외에도 연이어 당명황의 부름을 받은 소위 “기이한 선비”들로는 나공원(羅公遠)、강무(姜撫)、손증생(孫甑生)、이하주(李遐周) 등이 있었다.
개원 24년(736) 10월 이후, 당명황이 관중에 오래 머물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도교에 대한 숭배가 점차 정도가 높아갔다. 특히 양옥환은 “태진(太眞)”이란 도호를 갖고 여도사의 신분으로서 입궁하여 당명황의 도교를 맹신하고 선양하고 주동하는 일이 전국적인 종교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개원 29년(741)에 당명황은 어명을 내려 낙양과 장안 그리고 각 주에 숭현학(崇玄學)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하게 하여, 《노자》、《장자》、《문자(文子)》、《열자(列子)》 등을 학습하게 하였으며, 해마다 명경과(明經科)처럼 시험을 실시하였다. 9월에 당명황은 흥경궁에 친히 자리를 하고 앞에 언급한 《사자(四子)》4)에 능통한 요자산(姚子産)、원재(元載) 등을 시험하였다. 다음 해 또 《사자(四子)》를 도교의 경전인 “진경(眞經)”으로 삼았다.
천보 원년(742) 정월에, 당명황의 스물다섯 번째 아들 진왕(陳王) 이규(李珪) 휘하의 정팔품인 참군(參軍) 전동수(田同秀)가 주청하였다. 그는 대명궁(大明宮) 단봉문(丹鳳門)에서 하늘에 떠 있는 노자의 현령(顯靈)을 보았는데, 노자의 현령이 그에게 윤희(尹喜) 즉 춘추시대 도가의 인물인 관윤(關尹)의 옛 저택에 신통한 부적(符籍)인 영부(靈符)가 숨겨져 있다고 알려주었다고 하였다. 이에 당명황은 사자를 파견하여 함곡관(函谷關) 윤희의 고택인 윤희대(尹喜臺)에 가서 영부를 찾아냈다. 명령을 내려 수도 대영방(大寧坊) 서남쪽에서 노자의 사당을 세우게 하고, 영부를 모시게 하였다. 2월에 당명황이 직접 새로 세운 노자의 사당에 찾아가 제사를 올리고 동시에 도가 인물 노자、장자、문자、열자 등을 도교의 성인인 “사진인(四眞人)”으로 삼았으며, 영부를 발견한 도림현(桃林縣)을 영보현(靈寶縣)으로 고쳤다. 지금의 하남성 영보(寧寶)이다. 전동수는 이러한 일로 인하여 종오품인 조산대부(朝散大夫)으로 승진하였다.
대영방의 노자 사당은 처음에는 “현원황제묘(玄元皇帝廟)”라고 하였으나, 다음해에 “태청궁(太淸宮)”이라 하였다. 궁중에서 송백나무와 푸른 대나무를 심어 풍경이 맑고 조용하였다. 마치 선경과 같았다. 중앙 사당에는 태백산의 백석으로 조각한 노자상을 모시고 있다. 당명황은 해마다 동지에 하늘에 제사하는 교사(郊祀)에 앞서 먼저 태청궁에 가서 노자에게 제사를 올렸다.
천보 2년(744) 10월, 술사(術士) 소가경(蘇嘉慶)이 주청하였다. 기문둔갑술(奇門遁甲術)에 구궁귀신(九宮貴神)이 있는데, 천하의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전담합니다. 청컨대 수도 동쪽 교외에 단을 세우고 매년 계절의 초기에 제사를 올려야 합니다. 당명황이 명령을 내려 그의 주청을 받아들였다. 아울러 12월에 친히 동쪽 교외에 나가시어 구궁귀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천보 7년(748) 12월에 혹자가 주청을 올렸다. 노자가 화청궁 조원각(朝元閣)에 현령(顯靈)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당명황이 조원각을 강성각(降聖閣)으로 고치도록 어명을 내렸다.
고종 이치(李治)의 시기에, 노자의 칭호는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 하였다. 천보 13년(754) 2월, 당명황이 태청궁에 제를 올리고 노자에게 “대성조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大聖祖高上大道金闕玄元天皇大帝)라는 존호를 추가하였다. 당명황이 집정하기 전에 전국의 노자 사당은 다만 보잘 것 없는 수에 그쳤다. 천보 연간에 전국의 도관(道觀)은 1,900여 개로 증가하였으며, 도사는 15,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천하의 여러 주(州)는 모두 노자의 사당이 있었으며, 해마다 도사가 제단을 차려놓고 재계하고 제사를 올렸다. 5악의 위에는 노자의 사당이 세워졌으며, 사족(士族)과 백성들이 향과 촛불을 갖추어 제사를 올렸다.
장안성의 노자 사당은 30여 개가 있다. 그 중에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곳은 흥당관(興唐觀)이며, 대명궁 남쪽 장락방(長樂坊)에 위치한다. 대명궁과 흥당관 사이에 황제가 전용으로 왕래하는 “복도(復道)”가 있다. 당명황이 흥경궁 안에서 도교활동을 진행한 중요장소는 대동전(大同殿)이다. 대동전 안에는 옥돌로 조각한 노자상을 모시고 있으며, 사방 벽에는 “화성(畫聖)” 오도자(吳道子) 등의 사람들이 그린 산수화、오룡도(五龍圖)가 있으며, 분위기가 매우 엄숙하고 신비하다. 수도의 도관 건축은 규모가 완벽하고도 넓고 크다. 보통 문루(門樓)、전당(殿堂)、노자상을 모신 노군전(老君殿)、도사가 평소 생활하는 정사원(精思院[堂]) 등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밖에 인공으로 만들어진 연못과 산이 있다. 이러한 붉은 칠을 한 누각 높은 전각에다 성대한 조각과 장식을 한 호화로운 도관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주거지를 빼앗고 얼마나 많은 재물을 소비하였는지 모를 정도다.
당명황은 독실한 도교신도라고 말할 수 있다. 개원 초기 이래, 그는 조정의 업무 이외의 남은 시간에는 도교 경전을 공부하고 도학을 연구하고 직접 《도덕경》의 주석을 달았다. 천보 14년(755) 10월, 당명황이 이름을 붙인 《어주노자(御注老子)》와 《의소(義疏)》가 전국에 배포되었으며, 어명으로 왕공 이하의 사람들은 반드시 평소 학습을 해야 했다. 당명황은 노자를 존숭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교의 기타 창시자、신선、생존하는 도교의 명망 있는 대가 등에 대해 특수한 영예와 후한 대우를 해주었다. 장천사(張天師)[장릉(張陵)]을 태사(太師)로 봉하고, 도홍경(陶弘景)을 태보(太保) 임명하고 상청파법사(上淸派法師)5) 이함광(李含光: 682~769)에게 “현정선생(玄靜先生)”이란 칭호를 하사하였다. 도사 사마승정(司馬承貞)、오균(吳筠)、등자양(鄧紫陽)、설계창(薛季昌) 등에게 모두 당명황은 귀한 손님이란 의미의 좌상객(座上客)이었다.
당명황이 도교를 존숭하고 도사를 예우하여 도사의 사회지위가 크게 높아졌다. 각지의 도교 명산 궁관(宮觀)은 모두 사우(祠宇)、천단(天壇)을 세우며, 도사를 양성하고, 궁관(宮觀) 부근에 있는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은 면제되었으며, 전문적으로 건축을 보수하거나 청소하는 일에 동원되었던 수치는 30~50가구에서 100~200가구까지 다양하였다.
일찍이 개원 13년(725)에 당명황이 낙양 궁중의 집선전(集仙殿)을 집현전(集賢殿)으로 바꾸었으며, 여러 차례 어명을 내렸다. 점을 치거나 제사를 하는 미신 활동을 금지하고, 각지에서 상서로운 징조를 헌상하는 일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천보 원년(742) 10월에 그는 도리어 여산 화청궁에 장생전(長生殿)을 짓도록 명령하고, 집영대(集靈臺)라고 이름을 짓고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는 그가 정치를 구현하는데 정력을 쏟고 정무에 최선을 다하고 근본에 충실하려는 정신이 상실하기 시작한 분명한 상징이었다. 이로부터 당명황은 독실하게 노자의 발아래에서 재배하고 분향하며 기도하여, 도사 황제로 변하였다.
천보 4년(745) 정월에 당명황이 재상에게 말하였다. 그가 흥경궁의 도단(道壇)에서 제사를 올릴 때 공중에서 황제가 만세를 누린다는 의미의 “성수연장(聖壽延長)”이라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재상、태자、여러 친왕(親王) 이하는 당명황의 이러한 환각(또는 황당한 말)을 사실로 믿고 잇달아 상소를 올려 축하하였다. 황제가 좋아하면 신하는 반드시 영합하는 결과를 낳는다. 천보 연간에 상서로운 징조를 헌상하는 신하、도사들이 잇달아 늘어났다. 재상 이림보는 또 자신의 저택을 헌납하여 도관으로 삼아 당명황의 불로장생을 축복하였다. 또 다른 재상인 진희열(陳希烈)은 정사를 처리할 때 모두 이림보의 주장을 따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능한 관리라는 의미의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 불렀다. 게다가 그는 노장의 도학을 강조하고, 신선과 상서로운 징조를 전용하여 당명황에게 아첨하여 승진의 기회를 얻은 총신(寵臣)이 되었다.
우상숭배는 모든 종교현상의 공통된 특징의 하나이다. 당명황은 노자 형상을 그리고、조각하고、주조하는 것 이외에 자신의 모습을 동상조각물로 만들어 태청궁(太淸宮) 노자상 오른 쪽에 놓아두고, 재상 이림보、진희열、양국충 등의 석상을 자신의 동상 옆에 두었다. 천보 8년(749) 당명황이 각 주에 어명을 내려 노자와 자신의 동상을 주조하게 하여 도관 가운데 모시도록 하였다.
당명황은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도교를 숭상하는 분위기를 최대한 고조시키려 하였다. 그는 도사들에게 도교음악을 짓게 하고, 노자에게 제사를 올리고 제단을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 연주하게 하였다. 그는 직접 궁중 도사들에게 “보허성(步虛聲)”을 가르쳤다. 이것은 도사들이 제단을 만들어 도교의 의식을 행할 때 낭송하는 가락이다. 마치 신선이 유유히 허공을 날며 노래하는 것과 같다하여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실제로는 도사들이 의도적으로 현허(玄虛) 즉 신비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허무한 일을 내세워 사람을 속이며 신도들을 우롱하는 술수의 하나였다.6)
당명황의 천보 연간의 각종 도교를 옹호하는 영도행위(佞道行爲: 사악한 술수에 호응하다)는 신명에 대한 신앙과 숭배를 통해서 하늘에서 국운의 발전과 불로장생과 같은 큰 복을 내려 줄 것을 기도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순수한 유심주의 행동으로써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수명을 연장하는 일에 작용한 것은 도사들의 단약(丹藥)과 양생술(養生術)이었다. 일찍이 위진 시기에 한식산(寒食散) 또는 오석산(五石散)이라는 금석의 약이 있었다.
신선이 되어 비상하는 일을 추구하는 도사들은 대대로 이어가며 열심히 수련하여 쇠를 가지고 금으로 만든다는 “점철성금(點鐵成金)”의 신비한 영단묘약(靈丹妙藥)을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역대 귀족과 관료계층에서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예를 들면 영웅의 기질을 가진 당태종 이세민은 만년에 금석약을 복용하고 중독되어 병에 걸렸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미신에 집착하여 깨닫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인도 승려가 조제한 수명을 연장하는 약을 복용하기도 하였다.
당명황은 신선약、양생술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믿었고, 아울러 적극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는 의술에 정통하여 스스로 처방을 하고 조제할 수 있었다. 일찍이 황제에 오르기 전에 그는 기력 증강과 음경 확대의 기능을 가진 적전(赤箭) 즉 천마(天麻)의 가루를 복용하였다. 집정 후에는 진귀한 보양약품을 지속적으로 복용하고, 도인(導引)、벽곡(辟穀) 등의 양생술을 연마하였다.
도인은 선진시대에 출현한 근육과 관절을 흔들어 신체를 부드럽게 하고 호흡을 순환시키는 양생술이다. 벽곡은 또한 단곡(斷穀)、절곡(絶穀)이라 한다. 오곡을 먹지 않고 약물을 복용하며 도인의 신선술을 수련하는 “수선(修仙)”법을 겸한다. 당명황은 임종 전의 1년이 넘는 기간에도 여전히 벽곡이란 수련법을 사용하여 정숙하게 기거하며 기운을 증대하였다. 그는 78세의 일생을 누렸는데, 이것은 지금은 평범한 일이지만, 과학기술과 의약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고대에서는 장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맹목적으로 불로장생술을 추구한 황당한 생활 속에서 어느 정도에서 과학방법을 사용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후인들이 비평하는 것은 당명황이 불로장생을 추구하기 위하여 어명을 내려 도가의 방사(方士)와 강호의 협잡꾼들에게 전국 각지에서 약물을 채집하게 하고 단사(丹砂)를 만들게 하는 것 이외에 도교를 옹호하고자 낭비한 백성들의 피와 땀이 얼마나 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신선과 도교를 숭배하는 일과 조정을 황폐하게 하여 나라를 그르치게 한 이것은 당명황에게 기생하는 이러한 쌍둥이로서 정치적 패륜아였다.
당명황의 불교에 대한 억제에 관해서는 또한 국가 정치의 필요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밀종(密宗)”에 대한 태도는 다른 점이 있었다. 개원 시기, “밀종”이 전래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이 불교 기타 종파가 “금욕(禁慾)”을 주장하는 것과 상반되었으며, 방종과 정욕을 강조하고, “밀법(密法)”을 연마하는데 여성을 동반자로 삼아야 했다. 이러한 세속의 향락을 추구하는 종교이론을 제창하자 자연히 당명황의 주의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밀종”의 전파와 창시자인 고대 인도의 승려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志)、불공(不空) 등이 잇달아 당명황의 융숭한 예우를 받았다. 불공 스님은 일찍이 당명황을 위하여 “오부관정법(五部灌頂法)”을 전수하였다.
1)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장한가(長恨歌)》의 詩句.
2) 노자의 이름은 이이(李耳) 이다.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생졸년은 기원전 600년 전후하여 기원전 470년 전후까지 이다.
3)《맹자(孟子)·양혜왕하(梁惠王下)》“봄에 순수하여 밭갈이를 살피어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고, 가을에 순수하여 추수를 살피어 부족한 것을 원조하였다(春省耕而補不足, 秋省斂而助不給.)”
4) 사자(四子)》:《노자》、《장자》、《문자(文子)》、《열자(列子)》.
5) 상청파(上淸派)는 동진(東晋) 시기에 형성된 도교의 일파이다. 《상청경》、《황정경(黃庭經)》을 경전으로 하며, 여선(女仙)인 위존화(魏存華)를 창시자로 한다. 인체 내 정기의 수련을 중시하며, 영부나 예언과 단약 등을 중시하지 않는다. 특히 방중술(房中術)을 배척하였다. 《상청경》을 학습하기에 상청파라 하였다. 상청파의 중요 대표인물은 도홍경(陶弘景: 456~536)이다.
6)《한비자(韓非子)·해로(解老)》“성인이 그 신비한 이치를 살피어 좋은 일에 사용한다. 굳이 이름을 짓는다면 도라 한다.(聖人觀其玄虛, 用其周行, 强字之曰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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