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唐楊貴妃

3. 번화한 황제의 도시 환락의 도성

마장골서생 2009. 11. 9. 22:38

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3. 번화한 황제의 도시 환락의 도성


 성당시기의 수도 장안성은 규모가 광대하였으며, 건축은 웅장하고 도성은 바둑판처럼 잘 정비되어, 당시 세계에서 유명한 국제 대도시였다. 도성은 주로 궁성、황성、외곽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성은 황제(후비를 포함)의 주거와 조정의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황성은 또 자성(子城)이라 하며, 중앙정부기관의 소재지이다. 외곽성은 문무관원과 사대부와 서민 백성들의 주거지이다. 성당 시기의 장안은 대략 100만 명의 인구가 있었다.

 당 왕조가 건국한 뒤, 수 왕조의 수도인 대흥성(大興城)을 고쳐 장안성이라 하였다. 고종 이치(李治) 영휘(永徽) 5년(654) 봄、가을 두 계절에, 정부는 4만 명의 주민을 동원하여 연이어 성의 담장과 동、서、남 3면의 9개 성문과 문루(門樓)를 세웠다. 고대 자료에 따라 실제로 측량하면, 성의 담장은 둘레의 길이가 36.7킬로미터이며, 성 전체 면적은 84평방킬로미터이며, 13개의 성문이 설치되어있다. 성내 거리는 가지런하고 단정하고 거리의 폭이 넓다. 사방으로 열려있는 거리는 모두 25개 구간이며, 서로 교차하여 성 전체를 109개의 이방(里坊: 주거 단위)과 동、서 시장으로 구획하였는데 마치 바둑판과 같다. “육가(六街)”라고 부르는 6개의 주요 거리는 남부 연평문(延平門)과 연흥문(延興門) 사이의 동서 거리의 폭이 55미터인 것 외에도 그 나머지 5개의 거리는 모두 폭이 100미터 이상이다.

唐朝 長安城 里坊과 東市 鳥瞰 復原圖.(제공: 黃河水利職業技術學院)


그림: 당나라 장안성 이방도(里坊圖).


 황성의 주작문(朱雀門)과 남곽성 명덕문(明德門) 사이의 “주작대가(朱雀大街)”는 폭이 155미터에 달하였다. 또 주작문과 궁성 정문이 서로 마주하고, 황성의 이러한 큰 거리는 당시 “천가(天街)”라고 불렀다. 주작대가는 수도 중심선에 위치하였으며, 모든 도성을 절반으로 나누어 동으로는 만년현(萬年縣)에 속하고, 서로는 장안현에 속하였다. 성내 주요 큰 거리 양편에는 모두 건축을 세우면 수로가 배열되고, 수로에는 섬돌이나 나무로 짠 다리가 있어 왕래할 수 있었다. 큰 거리 양편에는 또 푸른 홰나무(槐)와 각종 꽃나무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이당(李唐) 한 시대에, 장안성은 모두 3개의 황궁이 있었다. 태극궁(太極宮)、대명궁(大明宮)、흥경궁(興慶宮)을 총칭하여 “삼대내(三大內)”라 불렀다. 서내태극궁(西內太極宮)은 초당 시기의 정치 중심이었으며,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이 여기에서 조정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고종 이치 시기에 대명궁으로 옮겼으며, 당명황 이융기 또한 대명궁에서 흥경궁으로 옮겼다.

 대명궁과 흥경궁은 모두 주작대가의 동쪽에 위치하여 수도의 정치중심이 편중되는 현상이 일어나서 만년현의 귀족 저택、불교와 도교의 사찰과 도관이 상대적으로 증가하였다. 황실 귀족、공경대신、문인 학사들의 장원 별장 역시 수도의 동쪽 교외와 동남 교외에 많이 건립하였다. 진창방(晉昌坊) 자은사(慈恩寺)에 솟아 있는 대안탑(大雁塔)과 개화방(開花坊)의 천복사(薦福寺)에 솟아 있는 소안탑(小雁塔)은 일찍이 당명황이 집정하기 전에 이미 세워졌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당명황은 개원 25년(737)부터 관중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대당 제국이 번영하고 강성하여 사방 인접국을 위협하고, 이웃나라에 영웅의 나라라고 자칭하며, 당명황은 지난날에는 전력을 다하여 정치를 구현하려는 웅대한 포부를 가졌으며 이미 실현하였다. 자신이 만든 전대(前代)를 초월하는 휘황찬란한 공적에 대해 당명황은 득의만만하여 흠뻑 도취되었다. 이와 동시에 스스로 억누를 수 없는 오만과 타성 역시 그의 마음 밑바닥에서 요동치고 확대되었다. 사계절은 순조로워 만물은 풍요하고 천하는 태평하고 중국과 외국은 안정되었다. 당명황은 의지할 것이 있어 걱정이 없었고, 베개를 높이 올리고 편안히 하여 한가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 해에 발생한 궁중 풍파와 무혜비 병사는 당명황의 득의만만하던 쾌락 심경을 혼란하게 하였고, 그로 하여금 비통하고 애절한 슬픔 속에 빠지게 하였다. 일련의 주저하고 망설이는 시간을 거쳐서 당명황은 냉정하고 적당하게 황태자의 인선을 결정하였다. 그 후로 조정의 정국은 더 이상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이때의 당명황은 이미 정사에 염증을 느꼈다. 왕공 대신의 칭송과 지나친 찬미,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일은 모두 무혜비 사후 그의 마음속에 맺힌 고통과 쓸쓸함을 없애줄 수가 없었다. 이미 만년에 접어든 당명황은 더 이상 무엇을 창조할 마음도 없었으며, 그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앞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잠복하고 있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은 바로 궁궐 깊은 곳에 머물면서 실컷 향락을 누리고 도를 터득하여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하는 것이었다.

만약, 당명황이 군사와 정사를 외재상(外宰相) 이림보에게 위임하여 결단하여 처리하게 한 것이 정치상의 어리석음과 태만이라고 말한다면, 그가 인륜과 예법을 돌아보지 않고 도교에 입문시킨다는 수단으로 며느리 양옥환을 입궁시킨 까닭은 바로 그가 방탕하여 문란하고 사치스런 마음이 이미 극도로 팽창하여 터질 듯한 풍선과 같아, 방탕생활에 빠지지 아니하면 숨을 쉬고 보고 듣기가 어려워 살아갈 수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22세의 양태진이 흥경궁에 입궁한 뒤, 그녀 몸에 넘치는 청춘미(靑春美)는 마치 자석처럼 당명황을 매료시키고 감염시켜, 그로 하여금 마치 고목에 싹이 트는 것처럼 생기발랄하고 정신이 흥분되게 하였다. 즐거운 놀이에 밤 시간이 짧음을 안타까워하였고, 쓸쓸함은 그만큼 길게 느껴졌다. 양태진은 당현종의 환심을 사고 연회에 배석하여 모시고, 어가의 행차에 동석하여 모시어 당명황의 총애가 나날이 깊어갔다. 그러나 당명황은 결코 그녀에게 국모(國母) 즉 6궁의 비빈들의 귀감이 되는 황후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바로 그녀의 향기로운 옥같은 육체로부터 육욕(肉慾)의 환락을 향유하였으며, 게다가 그녀에게 도교를 수양하고 신선에 기도하여 함께 선경(仙境)으로 가는 이상적인 동반자가 되게 하였다.

 양옥환은 도교를 신봉함으로써 입궁하게 되고 최초로 황색 치마를 차려입고, (무측천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가발로 만든 쪽(假髻)을 즐겨 머리에 시용하였다. 황색 치마는 도교의 여사도가 입는 의복이며, 가발로 만든 쪽은 두발 모양이 빗질을 높게 하여 각종 장식물을 두루 착용하기 편하였다.


그림: 흥경궁 한쪽 모서리, 청결하고 고요하여 사람의 시선을 끌게 한다


이렇게 단장하여, 속세 미인의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고, 또한 속세 밖의 선녀의 풍채까지 겸비하였다. 궁중의 성대한 연회가 열리어 음악과 무용이 연출될 때마다 당명황은 양태진의 시중으로 보고 듣는 즐거움을 극진히 하였고, 마치 몸이 근심걱정이 없고 즐거움이 영원한 인간 선경에 머문 것과 같았다.

 옛 역사 자료와 시문(詩文)에서 양옥환의 용모와 자태에 대한 서술에서 성당 시기의 심미(審美) 취향(趣向)을 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속의 향락주의 실상을 반영하였다. 당시의 심미관은 현실주의와 낭만주의의 병중(幷重: 동등하게 중시하다)이며, 인물회화와 조각예술에 반영된 것은 형상과 정신의 겸비였다. 세속생활에서 여성미에 대한 평가는 이미 6조 시기(229~589) 이래로 날씬한 여성을 여성미로 간주한 것에서 풍만한 여성을 숭상하는 방향으로 성향이 바뀌었다. 무측천이 당시 입궁한 뒤로 신체가 풍만하고 네모난 이마에 넓은 턱이어서 미인 무씨(武氏)라는 의미의 “무미낭(武媚娘)”이라는 미칭(美稱)이 생겨났다.

 게다가 수나라 왕조 이래의 불상 조각상은 이미 앞 시대 그러한 위엄이 있고 엄숙하며, 얼굴은 길고 목은 가늘어, 속세를 초월하여 신비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비범한 외모가 점차 풍만한 형상과 인자하고 복스럽고 편안한 모습으로 변모하여, 당시 세속의 정서가 충만하였다. 사람들은 경직되고 차가운 불상과 보살의 형상으로부터 온화하고 자비로운 형상을 보고서 모종의 친근함과 관심을 느꼈다. 회화작품에서의 불상은 더욱 더 인간세계의 온유하고 돈후한 미소를 더하였다. 그러한 풍만하고 윤택이 넘치는 천사、옷깃을 휘날리며 춤을 추며 하늘을 비상하는 모습、표정이 각양각색인 신분이 고귀한 여성과 궁녀들은 예술의 형식으로써 당나라 사람들이 쾌락과 행복、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을 향유하려는 현실사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전성시대의 세속 향락의 분위기는 자연히 경성을 중심으로 집중적이고도 현저하게 나타났다.

 양옥환이 입궁한 뒤, 당명황의 쾌락과 연회는 두드러지게 증가하였다. 황궁 금원(禁苑) 및 명승지는 모두 그들이 환락을 추구하고,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이러한 행락 행사는 때로는 옛 전통명절 행사이기도 하였고, 대부분이 한가로운 흥취 속에서 전혀 절제가 없는 욕구충족의 행동이었다.

 장안성 북쪽 황실 금원의 망춘루는 동쪽으로 산수(滻水)에 다다랐다. 해마다 늦은 봄에 금원의 수목은 신록으로 수놓이고 화초가 만발하였다. 이화(梨花)는 눈처럼 희고, 도화(桃花)는 분홍빛으로 물들고, 달콤한 향기가 그윽하였다. 금원 밖 산수 양쪽에는 푸른 풀로 가득하고 들에는 꽃향기 나며, 봄바람에 따뜻한 햇살이 비추어 봄날 교외에서 계제(禊祭)를 올리기에 좋은 곳이다. 이러한 춘계(春禊)는 오래된 전통 민속이다. 사람들이 음력 3월 상사일(上巳日)에 물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즐거운 민속놀이를 거행하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다. 상사일은 위(魏)나라 이래로 3월 3일로 고정하였다. 당명황 시기의 춘계는 하나의 교외에서 거행되는 연회(宴會) 행사가 되었다. 참가자는 황제 이하 내궁의 비빈、왕공대신 등이었다. 군신들은 화려한 배위에 앉아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면서 가무를 감상하고, 일몰이 될 때까지 유흥을 만끽하고 귀가하였다.

 3월 상사일의 춘계를 거행하는 곳은 망춘루 이외에, 곡장지(曲江池)가 있었다. 당명황 천보 연간에는 일찍이 곡강에서 천 명의 군신들이 즐겁게 연회를 즐긴다는 의미로 소위 “천관희예유(千官喜豫遊)”1)하는 대형 야외 연회를 거행하였다. 곡강지는 경성의 동남쪽(지금의 서안시 동남교외의 곡강촌)에 있으며, 푸른 숲으로 감싸고 있고, 푸른 강물이 넘실거리는 명승지이다. 일찍이 진한(秦漢) 시대에, 여기에서 상림원(上林苑)의 “의춘원(宜春苑)”、“의춘궁(宜春宮)”이 있었다. 수나라 시기에는 황실 소속의 별궁이 있었다. 곡강지 동남쪽의 부용원(芙蓉苑)은 당나라 황실의 어원(御園) 즉 금원(禁苑)으로 남원(南苑)이다. 개원 연간에 일찍이 곡강지와 부용원에 대해 대규모 증축을 진행하였다. 부용원의 주요 건축물로서 황제와 후비(后妃)들만이 사용하는 “자운루(紫雲樓)”가 있다.

 곡강지 사방은 “채하정(彩霞亭)”、“행원(杏園)”과 황실 친척과 귀족이나 대신들 개인이 지은 누대와 정자가 있으며, 곡강지 안에는 화려한 채색을 한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하여 있다. 게다가 곡강지 주변에 심은 버드나무 등의 풍경 수림(樹林)과 기이한 화초들이 봄과 여름마다 여기에서 초록색과 붉은 색으로 장식하고, 연못물은 맑고 아름답다. 봄나들이 나와서 꽃을 감상하고 피서를 만끽하는 사대부와 백성들의 발길이 줄줄이 끊임이 없었다. 해마다 상사일과 중추절이나 새로 과거에 급제한 진사들을 위하여 거행한 “곡강연회”는 더욱 더 경성을 감동시킨 대형의 야외 행락 행사였다.

 당명황이 재위하던 시기의 상사일 곡강 대연회는 황제가 군신들에게 하사하는 야외 연회였다. 경성인 장안성의 문무 관원들 모두는 참가할 자격이 있었다. 아울러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올 수도 있었다. 당명황은 태평시대를 과시하기 위하여 특별히 군신들에게 백성들과 함께 즐기도록 명령을 내렸다. 상사일에는 경성의 사대부와 승려와 도사들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곡강에 와서 즐거운 연회에서 마음껏 즐기게 하였다. 그래서 상사일에 곡강 주변은 화려한 수레와 준마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남녀 수많은 군중들이 희희낙락하며 떠들썩하여 사람들을 쾌락 속에 깊이 빠져들게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상사일의 황제가 하사하는 연회는 인원수가 많이 동원되기 때문에 연회석은 나뉘어져 마련된다. 당명황과 양귀비 및 소수 측근들의 연회석은 부용원의 “자운루”에 마련한다. 자운루 위에서 높이 자리하여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편으로는 주연을 즐기고, 한편으로는 곡강의 전경을 관람한다. “붉은 꽃이 한창 피어난 화초나무 사이로 기녀들의 부채 흔들거리고, 미인들이 춤을 추며 옷자락을 휘날리네.(紅樹搖歌扇, 綠珠飄舞衣.)”2) 이러한 상사일에는 음악과 무용을 애호하는 당명황은 항상 특별히 궁중의 교방 악무단、공경대신들의 저택에 양성하던 가기(歌妓) 및 경조부(京兆府) 관할 내의 민간 악무단 단원들을 불러들이고, 곡강에 모이게 하여, 흥을 돋우게 하였다. 상사일 곡강지는 곳곳마다 주연이 성대하게 열리고, 음악과 노래와 무용이 어울렸다.

 해마다 새로 진사에 급제한 인사들에게 있어 곡강의 주연은 조정에서 특별히 하사하는 행사였다. 이러한 행사는 당나라 중종 이현(李顯) 신룡(神龍) 연간(705~706)에서 당나라 말기 황소기의군(黃巢起義軍)이 장안성을 함락하기까지 170여 년간 지속되었다. 새로 진사에 급제한 인사들이 곡강 주연에 참여하는 이날에는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주임 시험관인 주고관(主考官)이 그들과 사제 간의 정을 나누고 아울러 문하생들의 하례를 받기도 하였다. 기타 공경과 새로 급제한 진사들의 친구들도 축하하러 왔다. 일부 고관 귀족들은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새로 급제한 진사들 가운데에서 훌륭한 사위를 고르기도 하였다. 상인들은 장터를 세우고 각양각색의 진귀한 물건을 팔았다. 만약 황제가 후궁의 비빈들을 데리고 “자운루”에 행차하여 은총을 베풀어 축하를 받을 때는 그러한 연회의 장면은 특별히 요란하고 특별하였으며, 종종 며칠 동안 계속 되었다.

 물론, 이러한 화려한 배들이 곡강지를 가득 메우고, 곡강지에 생기가 돌고, 울긋불긋한 화려한 옷을 단장한 남녀들이 천지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명승지 곡강지의 풍경은 1년 가운데 겨우 며칠밖에 안되었다. 그러한 진사에 급제하여 황제가 하사한 연회에 참여한 신진 사대부들은 곡강지의 이러한 상서로운 기운을 품고 꽃향기에 사람이 취하게 하는 금수강산의 명승지에 대해 평생 잊을 수없는 감동을 받았다.

 양옥환이 귀비로 책봉되고 당명황이 도교를 숭배하는 활동이 부단히 정도가 심해지자, 이러한 백성을 위로하고 감동을 주던 교외 연회는 감소되었다. 상사일 연회에 참석한 군신들 대부분은 흥경궁에서 거행하였다. 교외의 호수나 강가에는 문무백관과 경성 백성들에게 연회가 허용되었다. “3월 3일 날씨가 새롭고, 장안의 강가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많아라.(三月三日天氣新, 長安水邊多麗人.)”3)라고 한 것은 바로 두보가 상사일 봄나들이 행사에 대한 서술이다.

 해마다 늦봄에서 중양절까지 각종 기이한 화초와 과일 채소들이 잎이 짙은 녹색에서 황색으로 시들어가고, 꽃이 만발하였다가 또 다시 시들어가면서 동산과 채소밭 정원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황궁과 금원 가운데 각종 유명한 화초와 관상 수목이 심어져 있다. 어느 봄날, 금원의 천엽도화(千葉桃花)가 피어나 짙은 향기를 풍기자, 당명황은 양귀비와 함께 감상하러 왔다. 도화의 신선하고 향이 짙은 것이 양귀비의 아름다운 외모와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당명황은 즐거운 나머지 친히 도화 가지를 하나 꺾어서 양귀비 머리에 꽂아주면서 “이 도화는 사람의 아름다운 외모에 비길 만 하도다.”라고 칭찬하였다.


그림: 흥경궁, 본래는 이융기의 저택이다. 뒤에 당나라 3대 궁전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흥경공원(興慶公園)으로 되었다.


 장안성 동북쪽의 대명궁 역시 당명황과 양귀비가 자주 들러서 즐긴 곳이다. 대명궁은 태종 이세민이 태상황 이연의 피서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영안궁(永安宮)이라 하였다. 고종 이치가 중풍이란 병환으로 서내태극궁(西內太極宮)이 저습함을 싫어하여 대명궁을 확장 증축하여 황궁으로 삼았다. 대명궁은 안에 태액지(太液池)를 경계로 남으로 조정궁전 구역과 북으로 원림풍경 구역으로 나뉜다.

 태액지는 또 봉래지(蓬萊池)라 부르며, 중앙에 인조산이 있으며, 산 위에는 태액정(太液亭)이 있다. 어느 해 가을에, 태액지 가운데에서 몇 송이의 천엽 백련(白蓮)이 활짝 피어났다. 당명황은 양귀비 및 황실 친척들과 함께 감상하러 갔다. 아울러 태액지 물가에서 주연을 베풀고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태액지는 물이 맑고 깨끗하며, 잔잔한 물결이 일고, 말발굽 모양의 연꽃잎이 수면에 넘실거리며, 줄기에 기대어 흔들거리며, 흰색의 꽃송이는 햇빛 아래 깨끗하고 윤택하며, 맑은 향기가 바람에 실려 간다. 황제 자리 양쪽을 둘러싼 귀족과 친척들은 연달아 소리를 지르면서 백련의 아름다움을 감탄하였다. 그러나 당명황은 오히려 웃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양귀비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태액지의 연꽃이 아무리 아름답다하지만, 인정에 통하지 않는다. 나의 사람의 말을 이해할 줄 아는 꽃인 양귀비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4) 이로부터 세상에는 “해어화(解語花)”의 전고가 있게 되었다.

 천보 14년(755) 8월 15일 밤에 당명황은 양귀비와 태액지 물가의 정자 난간에 기대어 달구경을 하였다. 서 있는 곳이 크게 높지 아니하여 달구경을 마음껏 할 수가 없었기에 당명황은 마음속으로  상당히 실망하여, 시종하던 사람에게 말하였다. “태액지 서쪽에 백 척의 누대를 하나 지어서 나와 귀비가 내년에 달구경하러 오게 하라.” 몇 개월 만에 안록산의 반란이 발생하여 백 척 누대의 공사는 다만 시작에 그쳤다.


1) 왕유(王維: 701~761)의 시《삼월삼일곡강시연응제(三月三日曲江侍宴應制)》 “천자 친히 상사일 제사를 올리고, 무수한 관리들 즐거이 노니네. 어명으로 황제의 동산 상원에 행차하고, 신에게 액운을 떨치고자 강으로 향하네. 초목은 사방을 호위병처럼 둘러싸고, 산하는 황제의 면류관 앞으로 흐르네. 화려한 깃발 물가에 휘날리고, 봄소식은 얕은 물가에 가득하네. 황제 머무는 궁궐과 준마 있는 곳, 경성 신성한 곳에 봉황의 자취 남으리라. 지금부터 억만년 세월, 천보의 역사가 전하리라.(萬乘親齋祭, 千官喜豫游. 奉迎從上苑, 祓禊向中流. 草樹連容衛, 山河對冕旒. 畵旗搖浦漵, 春服滿汀洲. 仙籞龍媒下, 神皐鳳蹕留. 從今億萬歲, 天寶紀春秋.)”

2) 당나라 진자량(陳子良)의 시《수소시중춘원청기(酬蕭侍中春園聽妓)》(一作 李元操의 詩) “가랑비 속에 향기 잔잔히 흐르고, 정원에 일몰의 어두운 빛이 드리우네. 붉은 꽃나무처럼 어여쁜 노래하는 기녀 홍수는 부채를 휘저으며, 초록 구슬같이 어여쁜 춤추는 기녀 녹주는 옷자락을 휘두르며 춤을 추네. 현악기 소리 들으면서 술잔을 들고, 온갖 생각에 언뜻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간절해지네. 근심에 젖은 사람 이 밤에는 떨어져 흩날리는 꽃잎에 부끄러워하리라.(微雨散芳菲, 中園照落暉. 紅樹搖歌扇, 綠珠飄舞衣. 繁弦調對酒, 雜引動思歸. 愁人當此夕, 羞見落花飛.)”

3) 두보(杜甫)의 시《여인행(麗人行)》의 첫 구절이다. 두보가 양옥환 자매의 봄나들이의 호화사치와 귀족들의 무절제한 생활을 폭로하였다.

4) 오대(五代) 왕인유(王仁裕)《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해어화(解語花)》“明皇秋八月, 太液池有千葉白蓮數枝盛開, 帝與貴戚宴賞焉. 左右皆嘆羡久之, 帝指貴妃示於左右曰 ‘爭如我解語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