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唐楊貴妃

四. 흥경궁、화청궁의 연회 즐거움1. 태평 천자 다시 무엇을 더 추구하리오

마장골서생 2009. 11. 9. 22:33

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四. 흥경궁、화청궁의 연회 즐거움은 길었네


1. 태평 천자 다시 무엇을 더 추구하리오!


 당명황1) 이융기는 수공(垂拱) 원년(685) 8월 5일 동도 낙양에서 출생하였다. 3세 때 초왕(楚王)에 봉하여졌으며, 9세 때 임치군왕(臨淄郡王)으로 봉해졌다. 18세 때부터 그는 우위낭장(右衛郎將)、상련봉어(尙輦奉御)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21세 이전은 이융기가 조모 무측천이 집정하던 시기였다. 황실의 자제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양호한 궁정교육을 받았으며, 장성한 뒤로 외모가 수려하고 기사(騎射)에 뛰어났으며, 성격은 용맹스럽고 결단력이 강하였으며, 다재다능하고, 음악、천문에 능통하고, 서예를 애호하여 팔분서(八分書)2) 즉 한예(漢隸)에 뛰어났다.

 무측천이 황제라 자칭한 이후 그녀의 딸 태평공주(太平公主: 약665~713)가 이융기에게 타도되어 사사당하기까지 20여 년간 당나라 중앙정권은 불안한 상태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융기는 바로 궁정 정변 속에서 입신출세하여 황제의 옥좌를 차지하였다.

 경룡(景龍) 4년(710) 26세의 임치군왕 이융기는 고모 태평공주와 함께 금군(禁軍)이 쿠데타를 일으킨 기회를 이용하여 임조칭제(臨朝稱制)3)한 백모 위황후(韋皇后)、위황후의 딸 안락공주(安樂公主)와 위황후의 일당들을 살해하고 그의 부친 예종(睿宗) 이단(李旦)을 옹호하여 황제로 즉위하게 하였다. 이융기는 공으로 인하여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선천(先天) 원년(712) 7월에 이융기는 부친의 양위로 황제라 칭하였다. 다음해(713) 7월 그는 공을 믿고 권력을 남용하고 정치에 간섭하던 고모 태평공주를 살해하고서 모든 정권을 얻었다. 이러한 두 차례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벌한 골육상잔의 궁정 권력쟁탈 속에서 이융기는 원대한 꿈을 품은 정치역량을 발휘하여 과감히 살육을 저지르는 강인한 성정을 드러내었다.

 이융기는 걸출한 봉건정치가이다. 개원(開元) 시기(713~741)에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정치에 힘을 쏟아 잇달아 재능이 있는 요숭(姚崇)、송경(宋璟)、장구령(張九齡) 등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무주(武周: 690~704) 이래의 폐정을 혁파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고, 여러 차례 쓸모없는 관직들을 정비하고, 남아도는 사감서(司監署)를 폐지하고, 기구를 정예화 하여 감축하고, 관리의 업무를 투명하고 깨끗하게 만들었다. 정치를 바로 잡으려는 마음이 간절하였기 때문에 이융기는 신하의 간언을 중시하고 사치를 억제하고 악습을 개선하여 미풍양속을 강조하여, 마침내 당태종 재위 시기의 “정관지풍(貞觀之風)”이 개원 연간에 다시 출현하게 되었다. 대다수 백성들은 남자는 농사를 짓고 여자는 베를 짜는 근면한 생활의 기초에서 ”국가와 백성의 곳간이 가득 차고(公私倉廩俱實)”, “전국의 도로마다 사나운 짐승들이 없는(九州道路無豺狼)”(두보의 시《억석(憶昔)》) 역사에서 소위 개원지치(開元之治)”라 불렸던 경제가 번영하는 태평 국면을 맞이하였다.


그림 흥경궁(興慶宮) 근정전(勤政殿) 무본루(務本樓)의 유적

 

  당명황(현종)의 전반부 인생은 근정전에서 백성을 위한 정치에 정열을 다하였으며, 늙어서는 향락에 도취하여 하마터면 천하 강산을 잃고 늙은 목숨마저 부지하지 못할 뻔하였다.


 그러나 개원 24년(736) 이전에 관중(關中)에 식량부족문제가 줄곧 당나라 조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고종(高宗) 이치(李治) 이래로 동도 낙양으로 식량을 구하러 가는 것은 전해오는 오래된 방법이었다. 고종은 잇달아 7차에 걸쳐 낙양으로 어가를 옮겼는데, 그 시간은 모두 곡식이 여물지 않은 겨울철과 봄철이었다. 무측천이 집정한 이래 병사하기까지 20여 년 가운데 18년은 낙양에서 지냈었다. 당명황이 즉위한 뒤에도 부득이 식량이 있는 곳을 찾아 가는 천자인 “축량천자(逐粮天子)”가 되었으며, 잇달아 5차에 걸쳐 동도 낙양으로 어가를 옮겼다.

 관중에 식량이 부족 현상이 발생한 원인은 자연적인 재해 이외에도 방대한 중앙관료기구의 관원과 황실 귀족의 호화스런 소비 때문이며, 수도과 그 주변의 수만 군대의 식량 소비 때문이며, 장안과 관중에서 부단히 증가하는 인구에다 장기간 장안에 거주한 서역 외국상인과 외국 사절단 때문이다. 그리고 관중의 토지 면적이 한계가 있었고, 생산한 양식도 이러한 엄청난 인구의 소비를 따라가기에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매년 수로를 통해서 관동(關東)과 강회(江淮) 지구에서 생산된 양식을 수도로 공급한 것이 백만 석을 넘었다. 그러나 강회에서 관중까지 수륙간의 수송로가 멀고도 험하였다. 특히 황하를 이용하여 물길을 역행하여 운송할 때 “삼문(三門)” 협곡과 “지주(砥柱)”의 천연요새가 있어 상당히 길이 험난하여, 비용의 급등으로 손실이 방대하였다. “민간에서 전하는 말이 있다. 10되의 돈으로 10되의 쌀을 운송한다.(民間傳言, 用斗錢運斗米.)”(《신당서(新唐書)·식화지3(食貨志三)》)

 근본적으로 관중의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국가 형세의 안정과 관련이 있다. 개원 중기 이후로 당나라는 북방과 서남지구의 유목민족 정권인 돌궐、토번과의 전쟁이 빈번하여 끊이질 않았다. 관중은 국가의 기반이며, 황제의 도읍이 있는 곳이며, 만약 양식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황제와 백관들로 하여금 부단히 (식량을 구하고자) 동분서주하게 할 것이며, 그러한 형세는 정치안정과 군사력 증강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게다가 장안에서 낙양 간의 거리가 800리가 넘고, 그 사이에 300여 리가 도로의 기복이 심한 산길(효함고도[崤函古道])이며, 겨울과 봄에 그 길을 왕복하려면 20일에서 30일간 고달픈 여정으로 수레와 말이 모두 지치고 파김치가 되어 벌써 나이가 반백을 넘긴 당명황으로서는 심중에 정말로 곤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만약 도중에 다시 악천후(惡天候)를 만났다면 여로에 많은 시일이 걸리고 어려움도 가중되었을 것이다.

 개원 22년(734) 정월에 당명황은 동으로 낙양으로 행차하기 전에 경조윤(京兆尹)인 배요경(裵耀卿)을 불러들여 수로 운송 업무를 개선할 것을 상의하였다. 배요경은 길가에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세분화하여 운송하고 대역전(代役錢)을 징수하여 운송비용에 충당하는 방법을 주장하였다. 다음해 배요경은 명을 받아 수로운송 업무를 책임졌으며, 한 차례 개혁의 노력을 통해서 해마다 수로로 관중까지 운송하는 양식이 230여 만석에 달하였으며, 아울러 운송비용을 절감하였다. 이렇게 하여 관중의 양식부족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였으며, 수도 장안과 경제 중심지인 강회(江淮) 지구간의 관계를 더욱 더 긴밀하게 하였다.

 개원 24년(736) 10월에 당명황은 장안으로 돌아와 최후의 동도 낙양행을 결속하였다. 그 뒤로 천보 15년(756) 여름 “안사(安史)의 난”이 발생하여 관군이 동관(潼關: 지금의 섬서성[陜西省] 동관항구)이 함락되어 당명황이 촉으로 황급히 피난하기까지 당명황은 관중에서 20여 년간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배요경의 뒤를 이어 수로로 식량을 운송하는 일을 계속 개선한 사람은 위견(韋堅: ?~746)이다. 천보 원년(742) 위견이 섬주(陜州: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섬현[陜縣] 서남)의 자사(刺史) 겸 수륙운사(水陸運使)에 임명되었으며, 위수(渭水) 남부의 수로(수도 궁궐 서쪽에서 시작하여 위수를 끌어들여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중간에 산수[滻水]와 파수[灞水]를 가로질러서 화음[華陰] 동북쪽의 영풍창[永豊倉]까지 통하게 하고 다시 위수와 합류하게 함)를 관장하였다. 수로가 완공된 뒤 또 장안성 동쪽 금원(禁苑)의 망춘루(望春樓)에서 광운담(廣運潭)을 만들어 양식 수송선을 통과하게 하였다.(10배 이상의 효과를 보았다.)

 천보 2년(743) 봄에 광운담이 완공되었다. 3월 26일 당명황이 후궁 비빈들과 함께 망춘루에 올라 수도의 백관과 백성들과 함께 광운담의 준공식을 구경하였다.

 당명황의 행차를 영접하기 위하여 위견은 사전에 하남 지구로부터 이삼백 척의 새로 만든 배를 동원하였다. 배를 모는 사람들은 모두 강회(江淮)、오(吳)、초(楚) 지구의 차림새를 하고 머리에는 큰 삿갓을 쓰고, 몸에는 소매가 넓은 홑옷을 입고, 맨발에 짚신을 신었다. 뱃머리마다 모두 푯말이 세워져 있는데, 군(郡)이나 주(州)의 이름이 씌어져 있고, 배 안에는 쌀이 실려져 있고, 배 밑에는 각 군의 진귀한 특산물들이 놓여 있다. 그러한 특산물 가운데 광릉(廣陵) 즉 양주(揚州)의 동경(銅鏡)、직금(織錦: brocade, 무늬를 넣어 짠 비단, 양단)、해산물, 단양(丹陽) 즉 진강(鎭江)의 경구릉삼단(京口綾衫段), 진릉(晉陵) 즉 상주(常州)의 절조관단릉수(折造官端綾繡), 회계(會稽) 즉 소흥(紹興)의 오릉(吳綾: 실크)、강사(絳紗: 붉은 실크), 남해(南海) 즉 광주(廣州)의 대모(玳瑁)、진주(珍珠)、상아(象牙)、침향(沉香), 예장(豫章) 즉 남창(南昌)의 자기(瓷器), 선성(宣城) 즉 선주(宣州)의 공청석(空靑石)、지필(紙筆)、황련(黃蓮), 시안(始安) 즉 계림(桂林)의 초갈(蕉葛)4)、비취(翡翠)、염사담(蚺蛇膽: 비단뱀 쓸개), 오군(吳郡) 즉 소주(蘇州)의 삼파나미(三破糯米: 찰벼)、방장릉(方丈綾: 실크) 등이 있다.5)

 선두의 첫 번째 배에는 섬현(陜縣) 현위(縣尉) 최성보(崔成甫)가 머리에 붉은 비단 띠를 두르고 몸에는 초록색 짧은 홑옷을 입고, 외투는 비단으로 만든 짧은 소매의 작은 옷을 입고 목청을 높여 《득보가(得寶歌)》6)를 앞장서서 불렀다.


  홍농의 들판을 보배로 얻었네! 홍농의 들판은 보배로다!

  새로 만든 연못 광운담에 배와 수레가 요란하게 모여들고, 양주의 구리그릇 넘치네.

  삼랑 현종께서 조정에 임하여, 《득보가》를 듣는구나!


  得寶弘農野, 弘農得寶耶.

  潭裏船車鬧, 揚州銅器多.

  三郞當殿坐, 聽唱得寶歌.7)


최성보의 뒤를 따르는 배에는 100여명의 울긋불긋한 복장을 입은 젊은 기녀들이 있어 북을 두드리고 피리를 불며 목소리를 맞춰 합창하였다. 모든 배들은 합창대가 인도하여 천천히 지나가는데 앞뒤로 서로 연이어진 배들의 행렬은 몇 리나 되었다. 광운담의 경치는 장관을 이루었으며, 분위기 또한 대단히 뜨거웠다. 이를 구경하러 몰려든 백성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이러한 호탕하고 화려한 배들의 행렬을 보고 경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명황이 망춘루에 올라 앉아 흥미진진하게 이러한 전에 보기 드물었던 성대한 낙성식 행사를 구경하였다. 위견은 각 군의 귀중한 물품들을 당명황 앞에 헌상하였다. 당명황은 기뻐한 나머지 새로 만든 연못에 “광운(廣運)”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위견에게는 삼품 경관(京官) 겸 태수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그 나머지 속관들과 선원들에게도 모두 상을 하사하였다. 뒤이어 당명황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교방의 악공들이 가무와 잡기를 공연하여 하루 종일 떠들썩하게 보냈다.

 광운담의 성대한 연회는 강회 지구 특산물의 박람회였으며, 수로 운송 업무의 개선에 대한 검열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개원、천보 시기의 국가 자원이 풍부하고, 천하 백성들이 안정되고 풍요한 생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후 해마다 식량을 수로를 통해서 관중으로 운송하는 강회의 식량이 400만석으로 증가하였으며 운송비도 상당히 감소되었다.

 개국부터 당명황이 재위하는 성당(盛唐) 시기까지 이당(李唐) 왕조는 100여 년 동안의 공고한 발전을 통해서 경제가 번영하고, 천하가 안정되었으며, 국력이 강성하여 “사방의 이민족 족속들”(四夷)들이 당나라 조정에 참례(參禮)하여, 세계만방에 위세를 떨쳤다. 당나라 조정의 통치역량이 미치는 곳은 동쪽으로 굴열도(窟說島)8)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안서(安西)9)까지, 남쪽으로는 안남(安南: 월남 중부), 북쪽으로는 소해(小海: 北海, 러시아의  Baykal 호수)에까지 이르렀다. 개원 말년 전국에 15도(道: 감찰 구역)에 328주(州)에 1,573현(縣)을 설치하였으며, 변방지역에는 6개 도호부(都護府)에 850여 개의 기미주현(羈縻州縣)10)을 설치하였다.


그림 궁악도(宮樂圖)


 중당(中唐)의 재상 두우(杜佑)가 지은 《통전(通典)》의 기록에 따르면, 수(隋) 왕조가 전성기 일 때 전국 백성들이 8,907,536 가구에 46,199,956명의 인구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 전란을 겪으면서 인구가 대량으로 사망하고 흩어져서 당태종 정관 초기에 전국 가구(家口)의 수가 300만을 넘지 못하였다. 당명황 천보 13년(754)에 전국 가구 수는 9,619,254이었고 인구가 52,880,488명이었다. 수나라를 초과하였다. 천보 시기, 전국 농경지의 소유면적이 800~850만경(萬頃: 6.28~6.68억 아르)이었다. 중앙 정부와 지방의 각급 관부에는 문관이 15,200여 명이며, 무관이 6,900여 명이었으며, 하급관리가 6,700여 명이었다. 문교(文敎) 과학기술에 종사한 자가 3,700여 명이고, 각 과의 생도들이 60,000여 명이었으며, 허드렛일에 종사하는 자가 5,400여 명이었다.

 성당(盛唐) 시기, 천하는 풍요로웠다. 장안과 낙양 지구의 국가 창고에서 양식이 산처럼 저장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부패한 식량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천보 8년(749)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 각지의 창고 저장 식량은 9,600만석에 달하였다. 천보 연간에 전국 일인당 양식이 350킬로그램(㎏)에 달하였다. 전국은 해마다 세수로 받은 비단과 천은 1.7억 제곱미터(㎡)에 달하였다. 당시 전국 인구 평균에 따르면, 일인당 3.5제곱미터(㎡)로 나눌 수 있다.

 당나라 중앙정부가 국내에 600여 개의 군부(軍府)를 설치하였으며, 군부에 모두 68만 여 명의 소속된 병사가 있었다. 변방지구에는 안서(安西)、북정(北庭)、하서(河西)、농우(隴右)、삭방(朔方)、하동(河東)、범양(范陽)、평로(平盧)、검남(劍南)、영남(嶺南) 등 모두 10개의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였으며, 각 진영을 지키는 병사가 49만 명과 전마 8만 여 필이 주둔하여 변방을 방비하였다.

 당 왕조의 변방지역의 판도는 당시 유럽과 중앙아시아 지구의 세계 강국인 프랑크(Frank) 왕국(486~987)、동로마제국(395~1453: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대식국(아랍제국)등을 초과하였다. 당나라 제국은 아시아 지구에서는 경제、문화교류의 중심이었다. 세계에서 명성이 높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아시아、유럽、북아프리카 지구에서 당나라 왕조와 사신을 통해서 우호를 다지는 국가가 70여 개가 있었다. 일본、신라(지금의 대한민국) 등의 나라에서 유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문화와 국가제도를 배웠다. 아랍과 페르시아의 상인들이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비단길)”를 통해서 당나라에 와서 상업무역을 하여, 당시 국내외 경제문화의 교류가 과거에 없었던 발전된 국면을 보였다.


그림

당나라 무마함배문은호(舞馬銜盃紋銀壺: 춤을 출 수 있게 훈련된 말이 입에 술잔을 물고 있는 무늬가 있는 은으로 만든 병) (높이 14.3센티미터.)


 천보 시기에 진입한 뒤, 당나라 사회경제는 여전히 지속발전의 추세를 보였다. 가구와 인구、농경지、저장창고、수공업、상업、교통운수 등 모두가 부단히 증대하였다. 이러한 시기에서 기본적으로 날씨가 좋았으며, 자연재해도 비교적 줄었으며, 그래서 고대 역사상 보기 드문 태평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과 발전의 뒷면에서는 심각한 사회 위기가 마치 수면 아래에서 점차 상승하는 암초처럼 나날이 두드러졌다. 방대한 국가기구를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과 관리의 봉록、막대한 군사비용、황실의 호화사치와 남용되는 상과 하사품 등이 재정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게 하였다. 또 국가가 세금 징수와 재물의 강제 수탈을 위한 방법을 총동원하고, 변방의 전쟁이 빈번하여 더 이상 징집할 수 없는 병역과 노역으로 인하여, 이미 하늘을 찌를 듯한 민중의 분노를 초래하여 당나라 왕조가 강성(强盛)하는 정점(頂點)에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봉건국가 경제문화의 번영의 전성기 형성과는 지극히 대조적으로 나타난 것으로는 첫째, 최고 통치자인 당명황이 이미 어리석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당명황이 즉위 초기에는 증조 태종의 공적을 매우 존경하여 20여 년의 시간동안 마음에 웅지를 품었고, 정치에 힘을 쏟기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며 일찍이 게을리 한 바가 없었다. 만약 “개원성세(開元盛世)”의 국면의 출현이 당명황의 부단히 노력하는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가 어리석은 길로 걸어간 일은 바로 자만에 빠지고 허명을 추구한 데서 시작한 것일 것이다.

 존호(尊號) 즉 휘호(徽號)는 봉건시대 신하와 백성들이 제왕이나 그의 황후를 칭송하고자 한 미칭(美稱)이다. 국가의 경축행사가 거행될 때마다 존호가 거듭 늘어난다. 당명황이 즉위한 초기에 존호를 “개원신무황제(開元神武皇帝)”라고 하였다. 그 뒤로 조정의 관리 가운데 아첨을 일삼는 자들이 종종 존호를 추가하기를 청하였는데 당명황은 한결같이 거절하였다. 그러나 개원 27년(738) 이후 그의 허영심이 날로 두드러져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였다. 이에 4차에 걸쳐 존호를 추가하였으며, 천보 13년(754)에 당명황의 존호는 “개원천지대보성문신무증도효덕황제(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證道孝德皇帝)”11)라고 하였다. 당명황이 초심을 어기고 군신들의 이러한 휘황찬란하지만 실속 없이 겉치레뿐인 말로써 자신을 미화하는 것을 받아들여, 드디어 경계의 마음이 자아도취 속에서 완전히 해이해졌다.

 태평성세 형세에 대한 자아도취는 또 필연적으로 조정의 업무에 염증을 가진 것과 관련이 있다. 양옥환이 입궁한 뒤로부터 당명황은 날로 가무와 오락 속에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며, 일상 군대와 조정의 업무의 심리 판결을 모두 재상 이림보(李林甫)의 손에 위임하였다. 봉건 국가의 최고 주재자로서 이러한 정치상의 교만과 태만이 상층부에서 비롯되면 먼저 정신상으로부터 국가의 발전과 통치역량의 강화를 약화시킨다.

 봉건국가의 정치부패는 항상 통치계급의 교만과 사치와 방탕한 생활과 육체적 향락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북송의 위대한 사학자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당명황을 평론할 때에 사치생활은 쉽게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당명황 역시 이러한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집정 초기에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솔선수범하였다. 개원 2년(714) 당명황은 궁중의 호화 사치스런 주옥(珠玉)과 비단 등을 대전 앞에 쌓아두고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또 금은으로 만든 그릇이나 노리개들을 녹여서 저장하여 군대와 국가 대사의 비용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향후 천하가 주옥을 채집하지 못하게 하고 비단을 짜지 못하게 하고 아울러 낙양과 장안의 비단 공장을 폐쇄하도록 조치하였다. 9월에 또 성대한 장례식을 금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만약 범법자가 있으면, 태형 즉 곤장으로 100대를 치는 형벌에 처하였고, 지방 장관들이 이에 대한 단속이 부실하면 관직을 빼앗고 멀리 추방하였다. 당명황의 이러한 방법은 계몽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그가 사치를 억제하고 정치 구현에 다급했던 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당명황이 우연히 금군 병사가 음식을 먹다말고 버리는 것을 보고서 당장 대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는데, 수행 대신들의 만류로 비로소 사소한 일이 큰 일로 변할 결과를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원 말기 이후로 당명황은 이미 태평시대에 살면서 장차 닥칠 위기를 망각하여 다가올 우환을 생각하지 않고, 예부터 제왕들이 모두 가졌던 그러한 천하를 자신의 이기심을 위하여 욕심을 부려서 악성이 팽창하여 날로 호화 사치가 절제되지 않는 향락생활 속에 깊이 빠져 자신이 고심하고 남다른 수양에서 주장한 소박하고 순박하고 두터운 기풍을 남김없이 훼손시켰다.

 당명황의 사치와 낭비는 먼저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고 궁실을 크게 세우는 일에서 나타났다. 개원 26년(738)에 낙양과 장안에서 잇달아 행궁(황제가 행차할 때 머무는 별궁)을 100여 칸을 세웠다. 천보 6년(747) 겨울에 화음(華陰)、풍익(馮翊: 지금의 섬서성 대려[大荔]) 두 현의 백성을 동원하여 회창성(會昌城: 신풍현[新豊縣]에서 분리되어 나옴)을 건설하였다. 그 성에는 백관들의 기구와 왕공의 저택 등을 갖추었는데 한 이랑(100보의 면적)의 부지(敷地)가 천금의 가치를 가졌다. 천보 13년(753) 10월에 수도의 공장(工匠) 13,000명을 고용하여 흥경궁(興慶宮)의 담장과 누관(樓觀)을 지었다.

 그 다음은 만족을 모르는 먹고 마시는 연회이다. 황궁 내 어주(御廚)에서 만든 온갖 맛있는 음식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왕공(王公) 귀척(貴戚)들이 훌륭한 음식을 진상하여 서로 자랑을 삼으니 하루에 바치는 산해진미가 수백 수천 가지에 달하였다. 한 접시의 음식에 소비되는 비용이 중산층 10가구의 재산과 같았다. 당명황이 환관 원사예(袁思藝)를 특별히 파견하여 검교진식사(檢校進食使) 삼았다. 어느 날 중서사인(中書舍人) 두화(竇華)가 퇴궐하여 귀가할 때, 마침 황실 공주가 음식을 헌상하는 대열이 큰 거리 가운데에서 행진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앞에는 수백 명의 궁중 정원의 어린아이들이 곤봉을 손에 들고 길을 열고, 뒤따르는 사람들은 쟁반과 찬합을 든 하인들이며, 또 수행 전담가가 말을 타고 지휘를 하였다. 두화가 그 상황을 보고서 황급히 피하여 그 길에서 달아났다.

 다음은 상을 남발하였다. 당명황은 금옥(金玉) 포백(布帛)을 흙덩이로 간주하였으며, 총애하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을 조금도 절제하지 않았다. 재상 이림보는 일찍이 본래 설왕(薛王)에 소유인 성동(城東) 별장을 하사받았다. 천보 6년(747) 겨울에 당명황이 백관을 상서성(尙書省)에 불러 연말 각지에서 헌상해온 공물들을 참관하고, 참관을 마친 후에 모두 수레에 실어 이림보에게 하사하였다. 당명황 시기에 이림보는 첫 번째 사치와 허세를 부리는 재상이었다. 그는 전권을 독단하여 원성이 자자하였기에 방비가 빈틈없이 철두철미하여 외출할 때는 항상 기사와 보졸(步卒) 백 여 명이 수행하며 호위하였다.

 당명황이 서북방 이민족인 호족 장수 안록산을 구슬리기 위하여 천보 10년(751)에 수도 친인방(親仁坊)에서 안록산에게 하사할 저택을 세우기 위하여 재력을 총동원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도록 명령하였다. 준공 이후, 또 실내의 모든 장막과 기물을 갖추었다. 그 중 흰 박달나무 (단향목) 침대 2개를 각각 길이가 1장(丈)이며, 너비가 6척(尺)이다. 얇은 은(銀) 조각 도안에 은박을 입힌 병풍 1개는 사방 1장(丈) 6척(尺)이다. 주방에는 금으로 만든 밥솥、은으로 만든 이남박(반팅이: 쌀을 씻어 이는 기구) 각각 2개, 모두 5말의 쌀을 담을 수 있으며, 또 은실로 짠 광주리와 조리(쌀을 이는 기구) 각각 1개가 있다. 이러한 가재도구는 정밀하고 아름다우며 화려한 정도가 황궁에서 사용하는 물건보다 훨씬 훌륭하였다. 천보 13년(754) 정월에 또 안록산에게 식봉(食封) 1000호、노비 10 명、장원(莊園)과 주택 각각 하나씩 하사하였다.

 천보 13년 3월에 당명황이 약룡전(躍龍殿) 앞에 연회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군신들을 초대하였다. 정갈한 음식과 맛있는 술을 차린 뒤, 우재상(右宰相) 양국충(楊國忠)에게 명주비단 1,500필、채색한 엷은 비단 300필、채색한 무늬비단 500필을 하사하였다. 좌재상(左宰相) 진희열(陳希烈)에게 명주비단 300필、채색한 엷은 비단 50필을 하사하였다. 그 나머지 관원들에게는 능라(綾羅)비단을 하사하였는데 3품관에게는 80필을, 4품관과 5품관에게는 60필을, 6품관과 7품관에게는 40필이었다.

 양옥환이 입궁하여 총애를 얻어 황비가 된 뒤, 당명황은 여러 양씨 형제자매들에게 하사한 저택、진귀한 노리개、재물들은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당명황이 천하 지존의 신분으로 앞장서서 사치와 낭비생활을 하여 정치상 어리석은 길로 걸어가서 국가 기강의 부패 타락과 사회 세속의 퇴폐 음란을 직접 초래하였다. 개원 후기부터 점차 심각한 사치 기풍이 자연히 황실 귀족이나 문무 관원들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이어서 수도의 사대부와 서민들에게 영향을 끼쳐 막을 수 없는 나쁜 현상이 번지게 되었다.


 당명황의 “우용(優容)”12)한 태도로써 “화변(禍變)”을 방지하는 권력 강화 책략으로 그의 여러 형제들은 명철보신하여 군사와 국가의 대소사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종일 음악과 여색과 주연의 쾌락에 깊이 빠졌다. 영왕 이헌(李憲)의 저택에서 야간 주연이 거행되었을 때, 빈객과 기녀들이 뒤섞이어 앉아 주흥이 오를 때 경박하고 방탕한 광란(狂瀾)의 물결이 추태가 수없이 자행되었다.

 신왕(申王) 이위(李撝)의 저택에서 용단목(龍檀木)으로 독발동자(禿髮童子: 대머리 동자)를 조각하여 푸른 도포를 입히고 끈으로 묶고 손에 화려한 촛불을 들게 하고 “촉노(燭奴)”라 불러다. 여러 왕손들과 고귀한 황족 친인척들의 저택에 모여 연회를 벌일 때마다, “촉노”를 연회석 사방에 놓아 배치해 두었다. 신왕은 연회에서 술에 취한 뒤, 기녀들로 하여금 비단실로 가마(轎子)를 만들게 하여 그를 침실로 실어서 옮겨가게 하였다. 겨울에 바람과 눈이 세차게 몰아치는 날에 신왕은 기녀에게 명하여 자신을 둘러서 앉게 하고 차가운 기운을 막게 하고 이를 “기위(妓圍)”라 불렀다.

 기왕(歧王) 이범(李范)이 특별나게 여색에 유혹되어 겨울 손이 시릴 정도로 추운 날씨에 추위를 피하러 불을 쬐러가지 않고, 바로 손을 뻗어 묘령의 기녀 가슴에 넣고 그 피부를 어루만지면서 온기를 취하였으며, 이를 향기로운 여성의 피부로 손을 따뜻하게 하다는 의미로써 “향기난수(香肌暖手)”라 하였다.

 당명황이 조정에서 퇴청한 뒤, 항상 여러 형제들과 연회、바둑、투계、격구、사냥 등을 하였다. 연회에서는 항상 음악과 무용으로 흥을 돋우었으며, 영왕이 피리를 불고, 기왕이 비파를 타고, 당명황이 갈고를 두드리며 마음껏 오락을 즐겼다. 이때, 군신간의 예의를 따지지 않고 형제간의 다정한 정을 나누었다. 마음껏 연회를 즐긴 뒤에는 거액의 상금이 뒤따랐다. 황실 친족들의 생활은 사치스럽고 음탕하고, 분에 넘치도록 절제하지 않는 상황은 1970년 서안시(西安市) 하가촌(何家村) 즉 당나라 장안의 흥화방(興化坊)에서 발굴된 빈왕(邠王) 즉 당명황의 사촌형 이수례(李守禮)의 저택 창고에 저장된 금은으로 만들어진 그릇에서 그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창고에는 각종 금 그릇 298개、은 그릇 3,700개、옥대(玉帶) 10개 등이 있으며, 당나라 시대에 사용된 화폐로 환산하면 모두 3,830만전(萬錢)에 상당하였다.

 당명황의 유희、연회、상금 남발 등은 황궁의 비용이 크게 지출되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하였다. 황궁의 경림고(瓊林庫)와 대영고(大盈庫)는 바로 지방의 주현(州縣)에서 진상하는 재물을 특별히 저장하는 곳이다. 당명황의 명을 잘 받들고, 백성의 피땀을 수탈하는 데 뛰어난 대신 왕홍(王鉷)13)은 대량의 세공(歲貢) 초과 금액을 천자의 창고인 내고(內庫)로 남몰래 빼돌려 황궁에서 하사하는 상금비용으로 충당하였다. 왕홍은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여 아첨하여 조정과 재야의 원성을 초래하였으나, 당명황은 오히려 왕홍이 “부국(富國)”의 재능을 가진 인재로 여기고, 그에게 부단히 벼슬을 높여주어 그 한사람에게 20여 개의 사직(使職)14)을 겸하게 하였다.

 천보 14년(755) 겨울 11월에, 시인 두보가 장안에서 봉선현(奉先縣: 지금의 섬서성 포성[蒲城])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러 갔다. 그는 밤에 출발하여, 추운 날씨에 바람을 차서 길에 행인이 없었다. 새벽녘에 두보는 여산(驪山)을 지나갔다. 이때, 당명황은 바로 양귀비와 화청궁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궁 밖의 우림군의 깃발과 병장기를 바라보며, 궁 안에서 떠들썩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연주소리를 들으면서 두보는 오랫동안 절창(絶唱)된

 “붉은 칠을 한 부자의 대문 안에는 술과 고기 썩어가는 냄새 넘쳐나고,

길에는 얼어 죽은 시신들의 유골이 낭자하네.

(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이란 시를 노래하였다.

궁궐 담장 안의 술과 고기에서 나는 냄새 진동하고, 미녀들의 맑은 노래노리와 무희들의 현란한 춤이 펼쳐지고, 큰길가에는 유랑자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어 죽어갔다. 이와 같이 첨예하고도 선명한 대비는 천보 시기 귀족들의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탕한 생활과 빈민들의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회현실을 집중적으로 반영하였다.


1) 당명황: 현종(玄宗)에 대한 속칭(俗稱)이다.《신당서(新唐書) 권5(卷五) 본기제5(本紀第五)》“群臣上尊號曰 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證道孝德皇帝.”

2) 팔분: 서체명(書體名). 당(唐)나라 이작(李綽)《상서고실(尙書故實)》“팔분서는 한나라 왕차중으로부터 시작하였다.(八分書起於漢時王次仲.)” 북송(北宋), 공평중(孔平仲)《공씨담원(孔氏談苑)·명복금구(名覆金甌)》“당명황 현종 이융기는 재상을 임명할 때 먼저 팔분서로써 성명을 쓰고, 그 성명이 쓰인 자리 위를 금사발로 덮었다.(明皇命相, 先以八分書書姓名, 金甌覆之.)”

3) 임조칭제: 황제의 모후(母后)가 조정에 임하여 황제의 일을 대행하는 것. 황제의 명령을 제(制)라 함.

4) 여름에 입는 베옷, 가는 칡으로 만든 베옷. 여름에 입는 옷을 만드는 천인 하포(夏布).《문선(文選)·오도부(吳都賦)》서진(西晉) 사람 좌사(左思) “초갈과 승월[가는 베옷]은 나환[고운 비단]보다 연약하네(蕉葛升越, 弱於羅紈.)”. “초갈은 칡 중에 가는 것(蕉葛, 葛之細者.)”.

5) 《구당서(舊唐書)》 권 105,  열전(列傳) 제55, 위견전(韋堅傳).

6) 《전당시(全唐詩)》 작가는 미상(不詳)이며, 제29권 제25수(首)로 수록된《잡가요사(雜歌謠辭)》의 하나이다. 《구당서(舊唐書)》 권 105,  열전(列傳) 제55, 위견전(韋堅傳)에 보인다.

7) 삼랑(三郞): 당명황(唐明皇) 현종(玄宗)의 어릴 때의 이름. 태자비의 오빠인 위견이 현종이 장안성 동족에 새로 만든 광운담 낙성식에 참가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100여명의 대중을 동원하여 현종에게 아첨하고자 “삼랑”이란 현종의 어릴 때 이름을 집어넣어 부르게 하였다. 그 후로 위견은 더욱 더 현종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높아졌다.

8) 굴열도: 고혈도(庫頁島)라고도 함. 지금의 러시아 사할린.

9) 지금의 카자흐스탄 공화국 최대 도시 타쉬켄트(Tashkent).

10) 당대(唐代) 주변 소수민족(少數民族) 내에 부속 부락에 설치한 특수한 행정구역이다. 기미도호부(羈縻都護府)、도독부(都督府)、주(州)、현(縣) 등 사급(四級)으로 분류된다. 습관적으로 기미주(羈縻州)를 번주(蕃州)라고 불렀다. 당고조(唐高祖) 무덕(武德) 시기에 이미 사천(四川)、운남(雲南)과 귀주(貴州) 경내에 이러한 행적구역을 설치하였다.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시기에 이르러 대량으로 이러한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비로소 “기미주(羈縻州)”라고 불렀다. 보통주현(普通州縣)과 구별하고 보통주현을 기미주와 구별하여 “정주(正州)”라고 불렀다.

11) 증도(證道): 도를 깨닫다. 불교와 도교에서 진리를 깨달아 득도하다는 의미로 사용됨. 특히 선승(禪僧)들이 자주 쓰는 말.

12) 우후관용(優厚寬容), 관대함, 두터운 마음.

13)《舊唐書》(권105)의《王鉷傳》(열전제55),《新唐書》(권134)의《王鉷傳》(열전제59). 

14) 한구사(閑廐使)、원내사(苑內使)、궁원사(宮苑使)、영전사(營田使) 등의 직책을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