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3.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외척 집안
중국 봉건사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전한 이후로 한 사람의 황후가 당대(當代) 황제의 총애(寵愛)를 받게 되면, 그녀의 아버지와 형제자매 및 친척들은 벼슬을 하사받고 상을 받고 승진하여 공후(公侯)의 반열에 올랐다. 이것은 옛 역사에서 “외척(外戚)”세력이라 불렸다. 외척이 만약 재물을 탐하고 이익을 쫓는 무리라면, 군사와 국가와 조정에 끼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만약 그중에 재능이 출중하거나 권력의 야심으로 남을 현혹시키려는 자가 있다면, 바로 외척이 조정의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나 권력을 남용하는 심각한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전한 고조 유방(劉邦)이 죽자, 여태후(呂太后)가 조정을 장악하고 호령하였으며, 친정집안의 형제자매와 조카들까지 중용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하고, 구실을 만들어 유씨(劉氏) 황족(皇族) 제왕(諸王)들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여태후가 죽자, 전한에 충성하였던 대신들이 바로 연합행동을 하여 여씨 일가의 남녀노소들을 체포하여 살해하였다. 이것은 외척이 권력을 전횡하여 초래하게 된 참화(慘禍)였다. 전한 이래로 일단 외척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바로 궁정(宮廷)의 잦은 변란(變亂)을 초래하였으며, 변란의 반복된 발생은 역사의 교훈이 되었다.
이당(李唐) 왕조(王朝)는 국가 건립부터 천보시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100년이 넘은 세월이었으며, 이 기간에 외척세력들은 무측천(武則天)이 조정을 관장할 때 그 포악성(暴惡性)이 팽창(膨脹)하였다. 그 뒤에 또 중종(中宗) 이현(李顯: 705∼709년간 재위)의 위황후(韋皇后) 및 그녀의 일가친척들이 조정을 좌지우지하여, 인심이 흉흉(洶洶)하였으며, 천하가 온통 원성과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현종은 바로 위씨(韋氏) 세력 가운데 입신출세한 일당들을 처형하였다. 황위를 계승한 뒤에 현종은 그러한 교훈을 명심하고 경계심을 가졌다. 황후(皇后) 왕씨(王氏),총비(寵妃) 조려비(趙麗妃)의 부형(父兄) 등은 비록 모두 거듭 벼슬을 하사받았으나, 모두 조정에 간섭할 수 없었다. 무혜비(武惠妃)가 20여 년 동안 총애를 얻었어도 도리어 무측천(武則天)의 조카손녀인 질손녀(侄孫女)로서 “무씨는 불공대천의원수(武氏乃不共戴天之仇)”라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황후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보 연간에 이르러서는 현종은 도리어 점차 교만하고 우둔하였으며, 도교에 심취하고, 미색에 빠져서 드디어 부패하고 사악한 외척세력으로 하여금 혼탁한 국가 정치생활과 부패한 권력의 중심에서 신속하게 그 세력을 키우고 확장시켜 나가게 하였다.
양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총관후궁(寵冠后宮)이 되자 현종의 은택(恩澤)이 커져서 드디어 양씨 가문은 마치 강물이 범람하고 봄꽃이 만발한 것처럼 권세가 크게 높아지고, 가문이 흥성하여 신귀족(新貴族)이 되었다. 여러 양씨 형제자매들 가운데 양섬(楊銛)과 진국부인(秦國夫人)은 일찍 죽었고, 한국부인(韓國夫人)、괵국부인(虢國夫人)、양국충(楊國忠) 등 세 집안이 가장 오랫동안 권세가 높았다. 양씨일가(楊氏一家)의 자녀들은 황족(皇族) 종실(宗室)과 혼사가 가장 빈번하였다. 예를 들면 양국충의 아들 중 막내 양불(楊昢)은 현종의 막내딸인 만춘공주(萬春公主)에게 장가를 들었고, 장자인 양훤(楊暄)은 태자의 딸인 연화군주(延和郡主)에게 장가를 들었다. 한국부인(韓國夫人)의 외손녀(外孫女)는 황손(皇孫)인 대종(代宗) 이예(李豫)의 비로 시집갔다. 괵국부인의 아들은 태자(太子) 숙종(肅宗) 이형(李亨)의 일곱 번째 딸인 연광공주(延光公主)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영왕(寧王) 이헌(李憲)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비(妃)가 되었다. 양씨가문에서 귀비(貴妃) 한 명, 국부인(國夫人) 세 명이 나왔으며, 황실(皇室)의 두 명의 공주(公主), 친왕(親王)의 두 명의 군주(郡主)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래서 은총과 권세가 천하를 흔들었다. 현종 시기에 일찍이 역사에서 없었던 권세가 높은 외척일가였다.
여러 양씨 형제자매들이 수도 장안성의 선양방(宣陽坊)에 지은 대저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여 황궁(皇宮)의 전각(殿閣)에 비길 만 하였다. 그들은 가옥 한 채를 지을 때마다 소비한 비용은 모두 천만금 이상이었다. 만약 누구의 집이 그들보다 훌륭한 것을 보았을 때는 바로 그들의 집을 부수고 다시 지었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한 집을 짓고 최고를 추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괵국부인은 호사(豪奢)한 생활을 하여 정도에서 크게 벗어났다.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된 조정의 대신이었던 위사립(韋嗣立)1)의 저택을 마음에 들어서 바로 10여무(畝)의 공터로써 그 대가를 지불하고, 강제로 자신의 소유로 점거하였다. 그런 뒤에 위씨의 오래된 가옥을 허물고 새집을 지었다. 공장(工匠)들을 부리기를 밤낮을 쉬지 않게 하였다. 안채가 준공되자 괵국부인은 또 마땅히 지불해야 할 기술자들의 임금마저 깎고자 하여 그녀는 사람을 시켜서 땅강아지、개미、도마뱀 등을 잡아와 집안에 풀어놓게 하였다. 그래서 만약 그러한 벌레들이 빠져나갈 빈틈이 하나라도 있다면 임금을 주지 않으려 하였다.
해마다 원단(元旦)、동지(冬至)、황제의 생일인 천추절(千秋節)이 돌아올 때마다 궁정에서는 모두 성대한 의식행사를 거행하여 흥겹게 경축하였다. 왕공귀족(王公貴族)、문무백관(文武百官)、외국사신(外國使臣) 등은 모두 조정에 들어 황제에게 참배하여 축하를 올렸다. 이를 “대조회(大朝會)”라고 불렀다. 이 날에는 수도 장안성의 문무백관이 날이 새기 전에 바로 조당(朝堂) 밖에서 모여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양씨의 형제자매들은 권세가 높은 것을 빙자하여 선수를 쳐서 호화로운 의복을 입고 시종들을 데리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손에는 등불을 밝혔는데, 대낮처럼 빛났다.
또 매년 겨울과 봄마다 현종이 여산(驪山)의 화청궁(華淸宮)에 행차할 때, 여러 양씨 형제자매들도 어가를 따라 수행하였다. 양씨(楊氏)의 다섯 집안이 대열을 이루고 집안마다 하나의 복색이 같은 의복을 입었다. 양씨 다섯 집안의 행렬이 모일 때, 그 화려하고 성대한 모습은 마치 수많은 꽃들이 활짝 피어나는 것과 같았다. 그 행렬 앞으로 길을 열어 나아가는 것은 양국충이 겸임(兼任)한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의 깃발이었다. 그들의 행렬이 지나간 뒤에 길바닥에 떨어져 남아있는 진주와 비취 같은 장식물들과 나무 밑창에 비단으로 만든 신발들이 눈부시고 향기로워 거리마다 장관이었다.
양귀비의 세 자매들은 항상 황궁(皇宮)을 출입하였는데, 지위와 권세(權勢)가 높아 조정과 재야로 하여금 놀라게 하였다. 현종의 여동생이자 여도사인 옥진공주(玉眞公主)조차도 그녀들을 만나면 일어서서 맞이할 정도였다. 이러한 세 명의 국부인가운데 괵국부인이 가장 풍류적(사교성이 강함)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며 가장 탐욕스러웠다. 그녀는 입궁할 때마다 황제의 수레인 거련(車輦)을 타지 않으면 멋지고 튼튼한 자총마(紫驄馬)를 탔으며, 외모가 잘생긴 젊은 환관이 말고삐를 끌었다.
괵국부인이 당현종의 성은을 입고,
새벽에 말을 타고 황궁으로 들어갔네.
오히려 화장을 하면 얼굴을 더럽게 한다하여 싫어하고,
맨얼굴에 눈썹을 만지며 황제를 알현하였다네.2)
虢國夫人承主恩, 平明上馬入宮門.
却嫌脂粉汚顔色, 淡掃蛾睚朝至尊.3)
이 시는 성당(盛唐) 시기 위대한 시인 두보(杜甫)의 시《괵국부인(虢國夫人)》이다. 그녀의 교만하고 상도(常道)에서 벗어난(驕橫狂妄) 이미지를 묘사한 것이다. 괵국부인과 양국충이 장기간 사통하여 주변사람들로부터 추문이 끊이질 않았다. 새벽에 입궁할 때 그 두 사람은 항상 나란히 말을 타고 다녔다. 나며 시종 백여 명이 말을 타고 따랐으며, 등을 들고 길을 밝혔으며, 앞에서 소리치며 길을 열고 뒤에서 에워싸고 따랐다. 괵국부인이 황궁에서 상도에서 벗어난 활동을 하여 현종이 그의 자손들을 위해 세운 십왕택(十王宅)과 백손원(百孫院)에 사는 황족 자식들의 혼사는 모두 괵국부인과 한국부인이 중매를 하였는데, 그 때마다 모두 먼저 엄청난 뇌물을 받고나서 현종에게 허가를 주청하였다.
이 세 명의 국부인과 양섬、양기(楊錡)의 저택은 모두 현종이 상으로 하사한 것이다. 그 중에서 양기가 태화공주(太華公主: 현종이 가장 아낌, 수왕의 여동생)에게 장가를 가고, 하사받은 저택도 황궁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현종은 일찍이 지방의 주현에서 진상되는 진귀한 물건들을 양씨 형제자매에게 상으로 하사하였으며, 매번 모두 집안마다 하나씩 분량이 똑같게 나눠주었다. 이밖에 여러 양씨 형제자매는 뇌물을 두루 챙겨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경성과 지방의 관리들은 그들에게 청탁하는 것을 마치 황제의 칙령과 동일시하였으며, 감히 태만하지 못하였다.
호부시랑 겸 어사중승인 양신긍(楊愼矜)은 술사(術士) 사경충(史敬忠)과 각별한 교분을 가졌는데, 집안의 젊고 아름다운 시녀 명주(明珠)를 예물로 보냈다. 사경충이 명주를 수레에 태워 선양방(宣陽坊)을 지나가는데 진국부인의 저택을 지나가는데 진국부인이 누각 위에서 그 광경을 보고서 누각으로 초청하였으며, 명주를 요구하였다. 사경충은 진국부인의 위세를 꺼려하여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기에 부득이 고통을 참으면서 아끼는 것을 내줄 수밖에 없었으며, 명주는 이로부터 진국부인의 몸종이 되었다.
천보 10년(751) 정월 원소절(대보름) 밤에 경성은 예전대로 웅장한 등축제가 열렸다. 여러 양씨 형제자매들은 가솔들의 호위 하에 등을 구경하였다. 서시(西市) 문전에 이르러 광평공주(廣平公主) 집의 말을 탄 시종들과 서로 마주쳐서 서로 언쟁이 붙었다. 양씨 집안의 가솔들이 주인의 위세를 믿고 채찍을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광평공주의 옷에 닿았으며 광평공주는 놀라서 말에서 떨어졌고, 부마 정창예(程昌裔)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공주를 부축하다가 몸에 채찍을 맞았다. 다음날 공주가 입궁하여 당명황 면전에서 통고하였다. 당명황은 먼저 양씨 가솔을 죽이도록 명하고 뒤이어 정창예의 관직을 빼앗았다. 이와 같이 각각 양족에다 책임을 물은 것을 보면 당명황이 여러 양씨 형제자매들에 대한 은총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양씨 형제자매들이 위세를 믿고 제멋대로 설치는 행동이 황족조차도 안중에 두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양씨 형제자매들의 생활상에서의 호화사치와 방탕함은 이전의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다.
매년 원소절을 지낼 때, 양국충은 집에 천 개의 등을 달았다. 어느 해 원소절에, 한국부인은 집에서 백 개의 가지가 달린 등나무(燈樹)를 제작하였는데, 높이가 몇 길이나 되고 높은 곳에 놓아서 십리 밖에서도 그 빛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재물이 넘치고 위세가 높은 괵국부인에게는 밤에 빛을 내는 배게인 야명침(夜明枕)이 있었는데, 방안에 두면 방안 가득 빛을 발산하였다.
양국충은 집안에 “사향각(四香閣)”을 지었는데, 침향목과 단향목으로 만들었으며, 사향、유향(乳香)、섬세한 흙、진흙을 사용하여 담장을 만들었다. 당명황은 일찍이 양국충에게 몇 그루의 작약(芍藥)을 하사하였는데, 그는 온갖 보석으로 장식하고 꽃으로 단장한 난간을 만들어 “백보란(百寶欄)”이라 불렀다. 봄마다 작약이 만개할 때, 양ㄱ구충은 빈객을 초청하여 꽃을 감상하게 하였다. 사향각의 웅장하고 화려함은 흥경궁의 침향정을 능가하였다. 백보란의 화려함은 궁중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양국충의 아들들은 총애를 믿고 호화 사치하여 해마다 봄나들이 할 때, 채색 비단으로 큰 수레를 장식하고 누대를 올려 수 십 명의 여자 악단을 태우고 문을 나서면 악기를 일제히 연주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자랑하며 길거리를 지나가며, 이름난 동산과 연못에서 오락을 즐겼다. 경성의 귀족과 부호들 역시 다투어 모방하였다.
양씨 자제들은 항상 따뜻한 봄꽃이 필 때,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유명한 화초와 나무를 구하게 하였으며, 찾아내면 바닥이 낮은 함처럼 생긴 수레에다 옮겨 심고 바퀴를 달아서 사방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수시로 옮겨 다니며 감상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봄을 옮기는 수레(移春檻)”라고 불렀다.
여름 무더울 때, 양씨 자제들은 공장들을 시켜 미리 저장해놓은 얼음 덩어리를 조각하여 빙산을 만들게 하고, 연회를 열 때, 사방으로 둘러싸게 하여 더위를 식히게 하였다. 인심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공장으로 하여금 얼음 덩어리를 봉황、짐승의 모양으로 조각하게 하여 황금고리와 채색 띠로 장식하고, 조각한 선반 위에 올려놓고 왕공 대신들에게 선물하였다.
겨울 추운 날씨에 양국충은 집안에다 목탄과 벌꿀로 한 쌍의 봉황을 만들어 화로에 넣고 태워서 온기를 얻었다. 그는 집안의 시녀와 첩 가운데 풍만한 자를 뽑아서 항상 자신의 옆에 둘러싸게 하여 한기를 막게 하였다. 그녀들의 체온을 빌리어 자신을 따뜻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육진(肉陣: 육체의 진)”이라 불렀다.
양국충은 일찍이 솔직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이 “우리 집은 본래 가난하고 미천하였으며, 다만 양귀비의 친척이란 신분으로 그 권세에 의지하여 비로소 오늘날 부귀영화를 얻었다. 나도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결국 좋은 명성은 남길 수는 없을 것이니, 차라리 지금의 부귀영화를 최대한 누리는 것이 제일 좋다.”라고 하였다,
1) 위사립(韋嗣立): 자(字)는 연구(延構)이며 무측천(武則天) 시기에 내무현령(萊蕪縣令)을 지내었고, 그 정치업적이 탁월하여 695년 증성원년(證聖元年)에 그의 형 위승경(韋承慶)이 봉각사인(鳳閣舍人)으로 있다가 병사하자 조정에서 내천현령으로 있던 위사립을 봉각사인으로 임명하였다. 무측천의 신임이 두터웠다. 무후에 의해 봉각시랑(鳳閣侍郞)에 임명되었다. 당시 혹리(酷吏)가 들끓어 폐단이 심할 때 직간(直諫)하기도 하였으며, "학교를 발전시키다(興學校),부정부패의 위법행위를 근절하자(洗枉濫)"등을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에 주현(州縣)에서 비방이 잇달아 수도 장안을 떠나 외지로 부임할 것을 주청하였고, 그래서 봉각시랑에서 검교변주자사(檢校汴州刺史)로 물러났다. 그의 형 위승경이 장이지(張易之)의 형제에 빌붙었다가 그 형제가 사사되고 나서 위사립은 장씨 형제와 사이가 좋았다는 이유로 요주(饒州)로 좌천되었다. 중종(中宗) 경룡(景龍: 707∼709) 시기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위사립이 위후(韋后)와 성이 같은 이유로 일찍이 위후의 일가에 편입되었으며, 위후(韋后)가 조정을 전횡하여 실정을 하자 현종에 의해 살해되었다. 위사립도 이 때문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2) 송(宋)나라 악사(樂史)가 지은《太眞外傳》(卷上) “괵국부인은 화장을 바르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운 미색을 자랑할 수 있었다. 항상 맨 얼굴로 천자를 알현하였다.(虢國不施妝粉, 自炫美艶, 常素面朝天.)”
3) 이 시의 작가에 대해서 당나라 시인 장호(張祜)의《집영대(集靈臺)》두 수 중 제2수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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