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언홍 지음 / 이상천 옮김 ≪중국고대의 환관≫, 울산대학교출판사, 2009.
三․환관의 생활과 심리상태
일반적으로 말해서 남에게 거세되었건 스스로 거세했건 궁궐에 들어 온 환관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로서 대부분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환관의 직책이란 어느 정도의 소양을 필요로 해서 주로 궁궐 안에서 공부를 시켰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한대(漢代)의 등태후(鄧太后)가 권력을 독점하던 시기(106~121)에는 내시(近臣)를 선발하여 동관(東觀) 안에서 경전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이 환관 학교의 시초일 것이다.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에 후진(後秦)의 부견(苻堅)은 엄인들 가운데 총명한 자들을 선발하고는 경학박사로 하여금 그들에게 경학을 가르치도록 명하였다. 송대의 가창조(賈昌朝)는 왕이나 동궁의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는 시강(侍講)이었는데 자선당(資善堂)의 서적을 편수하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시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명대 초에 태조는 환관의 글공부를 엄격히 금지시켰지만 나중에 사례감(司禮監)이 들어서면서 전적과 문서를 관장해야 했기 때문에 영락(永樂) 연간(1403년부터 시작)부터는 어쩔 수 없이 내관도 글공부를 하도록 명하였다. 선덕(宣德) 원년(1426)에 환관 학교인 내서당(內書堂)을 설립하고 열 살 또래의 어린 환관 2, 300명을 선발하여 교육시켰다. 길일을 택해 지성(至聖)․사림(詞林)이라고 하는 글을 가르쳐 줄 선생에게 절하고 양초․손수건․용계향을 “속수(束脩)”라고 하는 입학금으로 삼아 내게되면 나이가 많은 자 18명을 학생 대표로 파견하였다. 배우는 책은 천자문(千字文)․백가성(百家姓)․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신동시(神童詩) 등이었다. 잘못이 있으면 사림 선생이 질책할 부분을 지적하고 감점시켰다. 형부주사(刑部主事) 유충(劉翀)과 대학사(大學士) 진산(陳山)도 내서당에서 훈육을 한 적이 있었고, 후에는 네 명의 한림관(翰林官)을 교사라고 할 수 있는 교습(敎習)으로 두었다. 청대에 이르러서는 교습 1명을 파견하여 만선전(萬善殿)에서 나이 어린 태감들을 가르쳤다. 건륭(乾隆) 연간에 이르러 고종(高宗)이 “내감은 궁정에 사용되도록 공급되니 그들에게 약간의 글을 알게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나 굳이 전문가를 보내 그들에게 문장의 깊은 의미까지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 전대 명나라에서 환관들이 권력을 전횡하게 된 것은 바로 내시들에게 글을 많이 읽힌 탓이다. 이와 같은 폐정은 속히 근절시켜야 한다.(內監是供給宮廷使用的, 使他略知文墨卽可, 何必派專人與他們講文義呢? 前代明朝閹寺全權, 就是因爲內監讀書多了. 此等弊政, 急宜痛絶.)”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는 고문을 가르치는 교사인 한문교습(漢文敎習)이 만선전(萬善殿)에서 글을 가르치는 일이 없게 되었다.(《청패류초․내감의 글공부를 개혁하라는 고종의 명(高宗改內監讀書之制)》)
환관에게는 엄격한 등급이 있는데, 부의의《나의 젊은 시절》에서 소개한 것에 따르면, 대체로 총관(總管)․수령(首領)과 일반 태감(太監)으로 나눌 수 있다. 청대에 3품인 화령도령시(花翎都領侍)는 각처 태감 중 최고의 우두머리로 궁궐 안 48곳의 태감들을 관리하였다. 그 아래는 구당총관(九堂總管)으로 3품에서 5품까지 있었다. 또 그 아래는 태감수령이 있는데 4품에서 9품까지였다. 또 그 아래는 일반 태감으로 대부분 죄를 지은 자들이었다. 청말의 태감총관 이연영(李蓮英)과 장겸화(張謙和)는 2품 정대에 추대되는 상을 받았다.
이밖에 각 궁전의 환관 중에도 총관(總管)․수령(首領)․문서관리자․전달자와 소태감(小太監)이 있었다. 궁내의 각 처소는 또 수령(首領)․대사부(大師父)․대반(帶班)․진인(陳人)․도제(徒弟)로 나뉘었다. 등급이 아주 엄격해서 한 등급 차이라도 넘을 수 없었다. 규정에 따르면 태감 중 월봉이 가장 높은 자가 은 8량․쌀 8근․엽전 1관 300이었고, 가장 낮은 월봉은 은 2량․쌀 1근 반․엽전 600이었다. 실제로 고위층 태감의 수입은 이들보다 훨씬 많았다. 부의가 소개한 것에 의하면, 자신의 이총관(二總官)이었던 완진수(阮進壽)는 겨울이면 매일 한 벌 씩 가죽 도포를 갈아입었는데 같은 것을 입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 새해 때면 그는 안감이 털로 되어있고 전체를 해달 가죽으로 만든 마고자를 입었다고 하는데, 하급 중앙관료 한 사람이 평생 생활할 수 있는 값이었다고 한다.
태감수령이나 총관들은 많은 어린 태감들의 시중을 받으며, 자신의 주택․가족․주방을 가지고 있어 매일 산해진미를 즐겼지만 그 아래 태감들은 그들이 남긴 것을 먹을 뿐이었다. 특히 막 궁궐에 들어 온 어린 태감들은 일년 내내 고생하면서도 매까지 맞았다. 청말의 늙은 태감 신수명(信修明)에 의하면 “하루라도 빨리 들어오면 스승이 되고 하루라도 늦게 오면 도제가 되었는데, 태감이 태감을 관리하는 것은 궁형보다 더 심했다.(早來一日爲師, 晩來一日爲徒, 太監管太監, 尤甚于宮刑.)”라고 하였다.
환관이 옷을 입고 모자를 쓰는 것에도 다 일정한 규정이 있었다. 예를 들어 명대의 경우 태감은 강차모(鋼叉帽)1)를 쓰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장수(長隨)․내사(內使)․소화자(小火者)는 가늘게 자른 죽오리로 태(胎)를 만들고 푸른 비단으로 씌웠다. 옷은 세 겹으로 입어야 했는데, 첫 겹은 개면(蓋面)이라고 부르는 안감(貼裏)과 둥근 깃(圓領) 같은 것이고, 두 번째 겹은 친도포(襯道袍)라고 하였으며, 세 번째 겹은 철령도포(綴領道袍)라고 하는 것으로, 그 옷깃은 백장포(白漿布)로 만들었다. 이 세 겹의 옷안에는 마고자(褂)나 저고리(襖)를 입을 수 있었고 바깥에는 외투(罩甲)를 입을 수 있었다. 일반 옷은 감색․군청색․검은색이었다. 태감들은 모두 하얀 모시나 누런 비단으로 만든 행주 같은 수건을 가지고 다녔다. 길이는 5척, 너비는 3촌에 장식용 술이 없는 헝겊으로, 의복 안감의 오른쪽에 반 정도가 바깥으로 드러나도록 단다. 발에는 부드러운 바닥에 얇은 안감을 댄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 내사(內使)와 소화자(小火者)는 한쪽 면이 청색 천으로 된 신발에 청색 양말(靑布襪)을 신었다.
청대의 환관 복식은 회색․남색․진홍색․다갈색․연 다갈색의 다섯 가지 색으로 구분하였다. 봄에는 궁궐 내의 대총관(大總管)부터 시작하여 일률적으로 남색 의복으로 바꿔 입는다. 여름에는 다갈색과 연 다갈색 의복을 입는다. 가을과 겨울에는 남회색 도포를 입는다. 상전의 생일 때는 진홍색 옷을 입고, 기일(忌日) 때는 반드시 푸른색이 도는 자주색 옷을 입어야 했다. 태감총관과 수령은 마고자를 입을 수 있었고, 그 외 태감들은 반 팔 조끼만을 입을 수 있었다. 총관과 수령은 긴 장화를 신을 수 있었고, 그 외 태감은 뿔처럼 각이 진 신발(角靴)만을 신도록 하였다. 사시장철 언제나 무명양말(老布襪)을 신었다. 바짓가랑이만 있는 덧바지(套褲)를 입는 것은 발목부터 무릎까지 3, 4촌 정도로 하고, 바지허리와는 허리띠로 연결하였다. 우측 바지 띠에 삼각형으로 접은 손수건을 꽂고 다니다가 수시로 꺼내어 손위에 펼쳐 상전을 도울 준비를 한다.
환관은 궁궐 안에서 아첨하며 비위를 맞추어 황제에게 총애를 받을 절호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고, 황제도 환관은 대부분 어려서 궁궐에 들어와 바깥 조정과 그다지 연계되어있지 않아 신뢰할 만하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일부 대환관들은 어려서부터 자신들이 성장할 때까지 시중을 들어주었던 사람들임에랴 더할 나위 있겠는가? 왕진(王振) 같은 이는 명 선종(宣宗) 때 입궁하여 태자 주기진(朱祁鎭)의 글공부를 시중들었는데, 주기진이 즉위하여 명의 영종(英宗)이 되면서 신임을 얻게 되었다. 득세한 이런 환관들은 황제의 총애를 믿고 조정을 기울게도 할 수 있었지만 일반 공경대신들은 도리어 그들을 무시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은《임안에게 알리는 편지(報任安書)》에서 “옛날에 위나라의 영공이 환관 옹거와 함께 마차를 타자 공자는 치욕을 느끼고는 진(陳)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상앙이 환관 경감의 추천으로 진(秦) 효공(孝公)의 중용을 얻게 되자 현자 조량은 낙심하였습니다. 환관 조담(趙談)이 문제(文帝)의 동승자가 되자 낭중관이었던 원앙(袁盎)이 노하여 이를 제지하였습니다. 예부터 사람들은 환관을 수치스러워했습니다.(昔衛靈公與雍渠同載, 孔子適陳; 商鞅因景監見, 趙良寒心; 同子參乘, 袁絲變色; 自古而恥之.)”라고 하였다. 사마천은 예부터 사람들이 궁형에 처해진 사람들에 속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고 말했다. 춘추시기에 공자가 위(衛)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위 영공이 부인과 마차를 타고 외출할 때 환관 옹거(雍渠)를 태우고 나서 공자를 타게 하였다. 공자는 커다란 모욕을 느껴 “나는 여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덕을 좋아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위(衛)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가버렸다. 상앙(商鞅)은 전국시기의 유명한 정치가로서 진(秦)나라에 두 차례 변법(變法)을 실시하여 든든한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그는 환관 경감(景監)의 추천으로 관직을 얻었다고 해서 진(秦)나라의 현자였던 조량(趙良)은 관직을 얻은 방법이 온당하지 않다고 여겨 물러나기를 권유하였다. 한 문제 때 환관 조담이 문제와 함께 마차를 타고 나서는데, 중랑장(中郞將) 원앙(袁盎)이 발견하고는 문제 앞에 엎드려 “제가 듣기로 천자는 오로지 천하의 영웅호걸과만 수레를 같이 탄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조정에 인재가 없다고 할지라도 폐하께서는 환관과 수레를 같이 타셔서는 아니 됩니다”라고 간하였다. 이처럼 환관은 사람들에게 무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런 얘기가 있다. 송나라 때의 환관 동관(童貫)이 황제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굴었는데 사람들은 그 앞에서 아첨을 해대었지만 전앙(錢昂)이라는 사람만이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하루는 외출하려고 동관을 기다렸다. 그러나 동관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타났다. 전앙이 “태위께서 어찌 늦으셨습니까?”라고 묻자 동관이 “당나귀가 작아 타기 어려웠네. 움직였다 하면 번번이 이리저리 날뛰어 이렇게 늦고 말았네”라고 대답하였다. 전앙이 “태위의 나귀가 수컷이지요?”라고 물으니 동관이 “그렇다네”라고 답하였다. 전앙이 “나귀가 이렇게 말을 안 들으니 불알을 까버리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하며, 동관을 아예 무시하였다.(《송인일사휘편(宋人軼事彙編)》하책).
당대에 위세가 대단했던 환관 어조은(魚朝恩)은 정국공(鄭國公)으로 봉해지자 조정의 신하들을 아예 무시하였다. 곽영예(郭英乂)라는 조정의 신하가 재상이었는데 어조은의 위세에 눌려 두 차례의 중요한 연회에서 어조은의 자리를 각 부(部)의 상서(尙書) 앞에다 배치하였다.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이에 분개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검교형부상서(檢校刑部尙書) 안진경(顔眞卿)만이 곽영예의 비굴한 행위를 질책하는 글을 지었다. 그는 유명한《쟁좌위첩(爭座位帖)》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후인들은 이 작품을《난정서(蘭亭序)》에 비견할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이백(李白)이 황제의 부름에 응하여 지은 글로 고력사(高力士)의 신발을 벗긴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고력사는 “나는 성은을 입어 큰 위세를 누리고 있고, 황태자께서도 나를 형이라 부르는 것은 물론 여러 왕․백․후들조차도 나를 노인장(翁)이나 어르신(爺)이라고 부르는데, 이백 같은 이런 하찮은 학사가 감히 궐내에서 내게 모욕을 주다니!”라고 하며 분개해하였다.
환관들은 사인(士人)이나 백관(百官)들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늘 일종의 보복심리가 작용하였다. 그래서 일단 득세하게 되면 권력을 전횡하는 것은 보통이고 조정의 백관들에게까지 모욕을 주었다.
역대 환관의 행동거지에 대해 약간의 규정이 있었다. 예를 들면 엄인은 황제의 명을 조정에 전달하고, 재상을 만나면 무릎을 꿇고서 말을 하고 들어야 하며 일어설 수 없게 하였다. 또 길에서 백관을 만나면 배알을 위해 말에서 내리고 지나간 다음에야 말에 오르며 수레도 탈 수 없도록 하였다. 공경(公卿)을 막는 엄인은 목을 베도록 하였고, 백관을 막는 엄인은 유배를 보내도록 하였으며, 어른 환관이 말을 잘못하게 되면 죽이도록 하였고, 어린 환관이 말을 잘못하면 쫓아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런 규정들은 한 때에 집행되었을 뿐이었다. 제왕이 교만하고 방종하게 되면 환관도 이에 편승하여 갈수록 두려움이 없어져 고의든 아니든 대신들을 모욕하며 자신들의 한을 풀었다.《만력야획편》의 기록에 이런 사건이 보인다. 융경(隆慶) 2년(1568)에 환관 허의(許義)라는 자가 남의 재산을 속여 취한 일이 있었는데, 성내를 순시하던 어사(御史) 이학도(李學道)에게 잡혀 채찍으로 매질을 당하였다. 환관들이 이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하여 이튿날 좌순문(左順門)을 지키고 있다가 이학도가 지날 때 포위하고는 구타를 가했다. 이 사건이 황제에게 알려지자 구타에 가담한 환관들에게 곤장 백대를 치고 우두머리는 변방의 수비로 보내버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효릉(孝陵)으로 보내어 능을 지키는 병사인 정군(淨軍)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만력(萬曆) 30년(1602)에 예부시랑(禮部侍郞) 오문정(敖文禎)이 선무문(宣武門)을 지나다가 말을 타고 온 술 취한 환관 세 명에게 붙잡혀 이유 없이 심한 매질을 당하고 가마가 부서지는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청대(淸代) 광서(光緖) 연간에 이르러서는 중앙 관료 중 문책을 당하는 자에게는 대부분 환관을 통해 황제의 뜻이 전달되었다. 관료에게 무릎을 꿇리고 성지(聖旨)를 받들도록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때 사람들이 듣기에도 거북한 심한 욕을 퍼부어 댄 태감(太監)도 있었다. 당시에 새로 설립된 우편전달을 책임지는 우전부(郵傳部)의 상서(尙書)였던 장백희(張百熙)가 시랑(侍郞)이었던 당소의(唐紹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탄핵하고는 휴가를 내고 부서에 출근도 하지 않았다. 이 일로 두 사람 다 황제에게 질책을 받게 되었다. 먼저 장백희를 파면한다는 성지를 전하는 환관이 “염치없는 새끼, 꺼져라!(混帳王八蛋, 滾下去!)”라는 식의 심한 욕을 퍼부어 대었고, 이런 욕을 먹은 장백희는 얼굴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분노하였다. 또 당소의에게도 성지를 전달했는데 당소의는 재빨리 400냥의 은자를 주어 욕은 면할 수 있었다. 장백희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얼마안가 화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청말에 광서제와 자희(慈禧)태후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는데, 국상(國喪)기간동안은 관리들이 상소문을 올릴 수 없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대학당(大學堂)에서 감독과 편수를 책임졌던 유정침(劉廷琛)이라는 자가 상소문을 올리는 바람에 질책을 받게 되었다. 유정침은 400냥의 은자를 낼 수 없자 아는 사람을 통해 잘 말해 반만 내게 되었다. 성지를 받들 때 환관에게 들을 욕의 절반인 “염치없는 놈(混帳下去)”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를 반욕(半罵)이라고 하였다. 유정침은 물러나 사람들에게 “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을 주어서는 아니 된다고 했거늘 난 정말로 나라에 이런 더러운 관례가 있는 줄 몰랐소이다!(士可殺不可辱,我眞沒想到國家有此惡例!)”라고 하였다.(《청패류초․태감이 대신을 모욕하다(太監侮大臣)》)
《청패류초》의 기록에 의하면, 대 태감 이연영(李蓮英)도 종종 기회 있을 때마다 고관들을 모욕했다고 한다. 청말의 실권자 이홍장(李鴻章)이 이연영에게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이연영은 기회가 생기면 보복하리라고 마음속에 새겼다. 하루는 그가 이홍장에게 “황제께서 이화원을 보수하시고자 하나 재원이 어려운 관계로 공사할 자금을 아까워하십니다. 대감께서 먼저 가셔서 보시고 보수해야 할 부분을 살펴주시지요!(老佛爺要修頤和園,但錢財困難,不想拔款興修,請你先去看看,驗其該修之處!)”라고 말하였다. 이연영은 이홍장을 이화원으로 가도록 한 후 이 기회를 틈타 “이홍장이 제멋대로 금지구역으로 들어갔는데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습니다.(李鴻章擅入禁地,不知何意.)”라고 일러바쳤다. 광서제(光緖帝)는 대노하여 처벌하라고 조서를 내렸다.
청나라 궁전 중 의란전(儀鸞殿) 곁에 한 칸의 작은 방이 있는데, 당직 대신이 쉬는 곳이었다. 한 번은 이연영이 이 방안에서 유리 창문을 사이에 두고 대학사 복곤(福錕)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고의로 남은 찻물을 입에 머금고 있다가 복곤이 창문 앞에 이르렀을 때 커튼을 확 젖히고 복곤의 얼굴에다 찻물을 뿜었다. 이연영은 “학사께서 이곳으로 오실 줄 몰랐습니다. 너무 경솔했습니다!(不知中堂到此,殊冒昧!)”라고 거짓 사죄를 했지만 복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환관은 어려서 거세했기 때문에 말소리는 젊은 여자 같아지고 몸은 통통하게 살이 쪄 피부가 부드러워진다. 성인이 되어 거세된 자는 귀를 찌르는 듯한 수놈 오리 목소리를 내게 되고 나이가 많아지면 살이 빠져 주름이 쪼글쪼글한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그들은 대부분 어릴 적에 입궁한 때문에 친척도 없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늘 분해하고 불만스러워하였다. 또 상심할 것도 아닌 것에 눈물을 흘렸고, 마음속에 둘 것도 아닌 것에 화를 내기도 하였다. 약자에게는 강한 연민을 느끼기도 하였고, 고양이나 개를 친구 삼아 키우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재물을 아낌없이 희사하기도 하였고, 소상인에게는 가격을 따지지 않는 대범한 면도 보였지만, 도둑질은 유별나게 경멸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사적인 비밀을 사람들에게 언급하는 것을 가장 꺼려하였다. 심지어 꼬리가 없니 짧니 하는 개에 관한 이야기든 손잡이가 없는 차 주전자 이야기든 아주 사소한 말조차도 자신들에 관한 것이라면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관직을 얻게되면 거세한 날을 생일로 삼았고 모든 운세와 점괘에도 이 날을 사용하였다. 죽기 전에 보관하고 있던 “보배(寶)”를 관속에 넣어달라고 유언을 했는데, 이는 저승에서 “남자의 몸(男兒身)”으로 회복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부족한 탓 때문인지 심리적으로는 변태성향이 나타나 상리(常理)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르곤 하였다. 부모조차 모른 채 하거나 제 아비를 매질하는 짓들이 바로 변태심리에 기인한 행동들이라고 하겠다.《엄산당별집(弇山堂別集)․중관고(中官考)》부분에 보면 명나라 때의 환관이었던 장웅(張雄)이라는 자는 계모의 핍박으로 자궁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훗날 권세를 얻고 나서도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지 않다가 다른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를 받고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에게 20대의 곤장을 친 다음 아는 척을 했다고 한다.《숙원잡기(菽園雜記)》에도 기녀를 어머니로 삼았던 어떤 환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복건성(福建省) 출신의 어떤 환관이 권세를 얻은 후에 자신의 어머니가 생존해 있는 것을 알고는 사람을 보내 서울로 모셔오게 하였다. 그러나 멀리서 제 어미의 추한 모습을 보고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주변에다 대고 “저 여자는 내 어머니가 아니니 다시 찾아 보거라!(此非吾母,當更求之!)”라고 하고는 복건성으로 다시 사람을 보냈다. 후에 나이는 들었어도 여전히 고운 자태가 남아있는 기녀를 하나 데리고 돌아오자 앞으로 다가가 아는 척을 하고 봉양을 잘했다고 한다.
1) 가늘게 자른 죽오리로 태(胎)를 만들고 주름진 푸른 깁으로 덮은 Y자 모양의 비녀를 지른 모자--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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