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孫子兵法譯注>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두 번째 역서
제1편~제5편 姜秉喆 譯 / 제6편~제9편 權容浩 譯 / 제10편~제13편 李商千 譯
第三. 謀攻篇
본편은 진공(進攻)을 계획하는 문제를 주로 서술하였으며, 계책으로써 적군을 이기는 것을 강조하고, 아울러 “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유명한 군사 원칙을 명시(明示)하였다.
[1] 손자가 말하였다. 무릇 전쟁에서 군대를 운용하는 용병술 방면에서, 적국을 온전하게 존속시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계책이며, 적국을 파괴하는 것은 차선책이다.
적국의 군단(軍團: 12,500명)을 온전하게 존속시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계책이며, 적국의 군단을 파괴하는 것은 차선책이다. 적국의 여단(旅團: 500명)을 온전하게 존속시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계책이며, 적국의 여단을 파괴하는 것은 차선책이다. 적국의 졸(卒: 100명)을 온전하게 존속시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계책이며, 적국의 졸을 파괴하는 것은 차선책이다. 적국의 오(伍: 5명)를 온전하게 존속시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계책이며, 적국의 오을 파괴하는 것은 차선책이다. 고로 백 번을 싸워서 백 번을 다 이기는 것은 가장 훌륭한 계책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서도 적군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훌륭한 것 가운데 가장 훌륭한 계책이다.
<원문> 孙子曰:凡用兵之法, 全国为上, 破国次之.1) 全军为上2), 破军次之;全旅为上3), 破旅次之;全卒为上4), 破卒次之;全伍为上5), 破伍次之. 是故百战百勝, 非善之善者也6);不战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7).
<직역> 孙子가 말하였다. 대체로 用兵의 法에서, 国을 保全(存續)하게 함이 上으로 爲함이며, 国을 破하게 함은 次之이다. 军을 全히 함이 上으로 爲함이며, 军을 破함은 次之이다. 旅를 全히 함이 上으로 爲함이며, 旅를 破함은 次之이다. 卒을 全히 함이 上으로 爲함이며, 卒을 破함은 次之이다. 伍를 全히 함이 上으로 爲함이며, 伍를 破함은 次之이다. 是故로 百战百勝은, 善의 善한 것은 아니며, 战하지 않고서 人의 兵을 屈함이, 善의 善한 것이다.
[2] 고로 최고의 병법은, 사전에 적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사전에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방법은, 외교수단을 동원하여 적군의 동맹 관계를 와해시켜 고립시키는 일이며, 그 다음의 방법이 무장한 군대를 동원하여 적군을 공격하는 일이다. 그리고 최하의 방법이 적군의 성을 공격하는 일이다.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부득이하여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진행한다. (성을 공격하려면) 큰 방패나 목로(적군의 해자를 메우는 흙을 운반하는 수레)를 정비하고 전투에 사용할 장비를 준비하려면 3개월이 걸려야 가능하다. 토산을 쌓아올리는 일에도 또 3개월이 걸려야 완성된다. 장군이 그 분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휘하의 사졸들을 마치 개미떼를 부리는 것처럼 성벽에 기어오르게 함으로써 성을 공격하여 아군의 병력을 3분의 1이나 죽이고서도 적군의 성을 함락시킬 수가 없다면, 이는 성을 공격하는 수단에만 연연한데서 발생한 재앙이다.
<원문> 故上兵伐谋8), 其次伐交9), 其次伐兵, 其下攻城.10) 攻城之法为不得已. 修橹轒辒11), 具器械12), 三月而後成, 距闽又三月而後已13). 将不勝其忿14),而蚁附之15), 杀士三分之一, 而城不拔者16), 此攻之災也.
<직역> 故로 上兵은 谋를 伐하고,其次는 交를 伐하고,其次는 兵을 伐하며,其下는 城을 攻한다. 攻城의 法은 不得已하여 爲한다. 橹와 轒辒을 修하며,器械를 갖추며,三月而後에 成하며,距闽은 又三月而後에 已한다. 将이 其忿을 不勝하여,而蚁처럼 附之,士를 杀함이 三分의 一이고,而城이 不拔者이다. 此는 攻의 災也이다.
[3] 전쟁을 잘하는 자는 적군을 굴복시키되 전투로써 하지 않고, 적군의 성을 함락시키되 강경한 공격으로써 하지 않으며, 적국을 멸망시키되 지구전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아군이 온전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다투는 것이다. 고로 아군의 병력을 손상시키지 않고, 아군의 실리를 온전하게 하여 승리를 거둘 수가 있다. 이것이 적군을 공격하는 진공(進攻)의 문제에 대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방법이다.
<원문> 故善用兵者, 屈人之兵而非战也, 拔人之城而非攻也, 毁人之国而非久也17), 必以全争於天下18), 故兵不顿而利可全19), 此谋攻之法也.
<직역> 故로 用兵을 善하는 者는, 人의 兵을 屈하되 非战하며, 人의 城을 拔하되 非攻한다, 人의 国을 毁하되 而非久하며, 必히 全로써 天下를 爭하며, 故로 兵이 不顿하고 而利가 可全하는 것, 此가 谋攻의 法이다.
[4] 군대를 부리는 용병술에서 아군의 병력이 적군보다 10배가 많은 우세의 병력이라면 적군을 포위하며, 5배가 많은 병력이라면 공격하며, 2배가 많은 병력이라면 적군을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하며, 맞먹는 병력이라면 최선을 다하여 적군과 싸우며, 적군보다 수적으로 적은 열세의 병력이라면 도망치며, 여러 조건에서 적군보다 상황이 불리하여 전세가 승산이 없다면, 강력한 적군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고로 아군의 병력이 소규모일 경우에는 적군에게 굳게 수비를 하는 전략으로 대처하며, 아군의 병력이 대규모일 경우에는 적군을 포위하여 일망타진한다. (② 다양한 전황의 변환에 대처하여 임기응변의 전략을 구사한다면, 소수의 적군이라도 견고히 수비할 수가 있으며, 대군의 적군이라도 대패하여 포로가 될 수가 있다. 조조와 원소의 관도대전. ③ 열세의 아군으로써 우세의 강적을 공격하면 결국은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만다.)
<원문> 故用兵之法, 十则围之20), 五则攻之, 倍则分之, 敌则能战之21), 少则能逃之22), 不若则能避之23). 故小敌之坚, 大敌之擒也.24)
<직역> 故로 用兵의 法에, 十이면 之(敵)를 围하고, 五이면 之를 攻하고, 倍이면 之를 分하고, 敌이면 能히 之에 战하며, 少하면 能히 之를 逃하며, 不若이면 能히 之를 避한다. 故로 小로써 敌함에는 坚히 하며, 大로써 敌함에는 擒하도록 한다.
[5] 무릇 장수란 주군의 보좌역이다. 보좌역과 주군의 관계가 친밀하면 나라는 반드시 강대 해지고, 반대로 보좌역인 장수가 주군과의 소통하는 관계에 틈이 나면, 그 나라는 반드시 약해질 것이다.
<원문> 夫将者, 国之辅也25), 辅周则国必强, 辅隙则国必弱26).
<직역> 夫 将者는, 国의 辅이며, 辅가 周하면 国은 必히 强하며, 辅가 隙하면 国은 必히 弱할 것이다.
[6] 고로, 주군이 잘못된 판단이 아군을 위태롭게 만드는 원인에는 3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군이 진격하여서는 안 될 때를 모르면서 진격의 명령을 내리고, 아군이 후퇴하여서는 안 될 때 이를 모르면서 퇴각의 명령을 내린다. 이를 일컬어 아군의 행동을 속박하는 일이라고 한다. 둘째는 군대의 일을 모르면서 군대의 행정에 간섭하게 되면, 아군의 사졸들은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셋째는 군대의 권모술수와 같은 전략을 구사할 줄 모르면서 아군의 지휘에 간섭하면, 아군의 사졸들이 의심을 품게 된다. 아군에게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게 하고 또한 의심을 품게 하면, 그런 기회를 틈타서 주변의 제후국들이 공격해 오는 재난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아군을 혼란의 상태에 빠뜨리고 결국은 승리를 적군에게 내어주는 일이라고 한다.
<원문> 故君之所以患於军者三27). 不知军之不可以进而谓之进28), 不知军之不可以退而谓之退, 是谓縻军29). 不知三军之事, 而同三军之政者30), 则军士惑矣. 不知三军之权31)而同三军之任32), 则军士疑矣. 三军既惑且疑, 则诸侯之难至矣33). 是谓乱军引勝34).
<직역> 故로 君이 軍에 患을 所以한 者가 三이 있다. 军이 不可以进함을 不知하고 之를 进이라 謂하며, 军이 不可以退를 不知하고 之를 退라 謂한다. 是를 谓하여 縻军라고 한다. 三军의 事를 不知하고, 三军의 政에 同한 者이면, 军士가 惑하니라. 三军의 权을 不知하고 三军의 任에 同하면, 军士가 疑하니라. 三军이 既惑하고 且疑하면, 诸侯의 难은 至하니라. 是를 谓하여 乱军하여 引勝하게 한다는 것이다.
[7] 고로 승리를 예측하는 방법은 다섯 가지가 있다.
아군이 대적할 수 있는 적군과 그렇지 못한 적군이 있음을 안다면 승리하고, 쌍방 병력의 많고 적음에 따른 전황을 살펴서 적절한 전법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승리하고, 상하가 마음을 같이한다면 승리하고, 아군이 만반의 준비를 철저히 하고서 그렇지 못한 적군에 대처한다면 승리하고, 장수가 유능하고 군주가 장수의 전략을 신임하여 간섭하지 않으면 승리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는 승리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원문> 故知勝有五35). 知可以战與不可以战者勝, 识众寡之用36)者勝, 上下同欲37)者勝, 以虞待不虞者勝38), 将能而君不御39)者勝. 此五者, 知勝之道也.
<직역> 故로 勝을 知함에는 有五이다. 可以战과 不可以战를 知하는 者는 勝하며, 众寡의 用을 識하는 者는 勝하며, 上下가 同欲하는 者는 勝하며, 虞로써 不虞를 待하는 者는 勝하며, 将이 能하고 君이 不御한 者는 勝한다. 此 五者는, 勝을 知하는 道이다.
[8] 고로 상대방을 잘 알고 자신을 잘 알면, 백 번 전쟁하여도 위태롭게 되지 않는다. 상대방을 잘 모르지만 자신을 잘 알면 일승일패하고, 상대방도 잘 모르고 자신도 잘 모르면, 전쟁을 할 때마다 반드시 위태로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원문> 故曰 知彼知己者40), 百战不殆41).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负. 不知彼, 不知己, 每战必殆.
<직역> 故曰 彼를 知하고 己를 知하는 者는, 百战하여도 不殆한다. 彼를 不知하되 己를 知하면, 一勝一负하고, 彼를 不知하고, 己를 不知하면, 每战에 必히 殆한다.
<戰史> 성복대전(城濮大戰)은 진(晉)과 초(楚)간에 기원전 632년에 발생하였다. 晉이 비록 초에 비해 약소국이었으나 정확한 전략(외교, 군사)을 구사하여 초나라를 대패시키고 새로운 중원의 패자가 된 것이다.
十一家注
三国以来,注释《孙子》,有魏曹操,梁孟氏,吴沈友,隋张子尚、萧吉,唐李筌、杜牧、陈?、贾林.但沈友、张子尚、萧吉的注都已失传,其他都在《十一家注孙子》内,我叫“六家注”.
曹操注,有一卷本、两卷本和三卷本.特点是简明.此书有影宋本《孙武司马法》(可能是元丰初刻本的残本)中的曹注本,和《十一家注孙子》不同,我在《〈孙子〉古本研究》中利用古书引文做过集校,可参看.
남조 梁나라 孟氏 注,两卷.孟氏,生平不详,旧题“梁孟氏”,只是因为他的书见于《七录》,《隋志》便题为“梁有”.他的注,见于《十一家注孙子》,比曹注更简,话很少.
당나라 李筌 注,三卷.李筌著有《太白阴经》,精通兵学,包括兵阴阳,晁公武说,他“以魏武所解多误,约历代史,依遁甲,注成三卷”(《郡斋读书志》卷三下).《孙子》中,凡涉及兵阴阳,可看他的注.
杜牧 注,三卷.杜牧是有名的诗人,他的注属于文人谈兵.他嫌曹注太简,注释比较详细.晁公武说,“世谓牧慨然最喜论兵,欲试而不得”.他的注,特点是爱引战例,“其学能道春秋战国时事,甚博而详,知兵者将有取焉”(《郡斋读书志》卷三下).
陈皥(진호) 注,三卷.陈?,生平不详.他对曹注和杜注都不太满意,晁公武说,“?以曹公注隐微,杜牧注阔疏,重为之注云”(《郡斋读书志》卷三下).
贾林注,三卷.贾林,生平不详.
另外,《通典․兵典》大量引《孙子》,附有杜佑注.佑书抄撮群书,为之注,并非专门注《孙子》,可以不算.如果加上杜佑注,唐代的注家就有五家.杜佑注,我在《〈孙子〉古本研究》中也做过集校,可参看.
旧注,只有曹注和杜佑注可以校.
关于《通典》,我想就中华书局校点本(北京:中华书局,1988年,王文锦等校点)说两句话.第一,这个本子是以浙江书局本为底本,校以宋明善本,这是倒着校,如果以宋本作底本,当更存原貌,更有条理,还可简化校语;第二,《孙子》杜佑注,《十一家注孙子》是抄《通典》的《兵典》,因为该书是集注本,位置和词句都有所变动,但中华版以《十一家注孙子》中的杜佑注为准,反过来改《通典》,此亦欠妥.
剩下的注,大家只能看《十一家注孙子》.
曹操、孟氏的注,我叫“前唐注”,李筌、杜牧、陈皥、贾林的注,我叫“唐四家注”.
【译文】
孙子说:大凡用兵的原则,使敌人举国屈服,不战而降是上策,击破敌国就次一等;使敌全军降服是上策,打败敌人的军队就次一等;使敌人一个“旅”的队伍降服是上策,击破敌人一个“旅”就次一等;使敌人全“卒”降服是上策,打败敌人一个“卒”的“队伍就次一等;使敌人全“伍”投降是上策,击破敌人的“伍”就次一等.因此,百战百勝,不算是最好的用兵策略,只有不战而使敌屈服,才算是高明中最高明的.
所以上等的用兵策略是以谋取勝,其次是以外交手段挫敌,再次是出动军队攻敌取勝,最下策才是攻城.攻城为萬不得已时才使用.制造攻城的蔽橹、轒辒,准备各种攻城器械,需要花费三个月的时间.构筑攻城的土山又要三个月.将帅控制不住忿怒的情绪,驱使士卒像蚂蚁一样去爬梯攻城,使士卒伤亡三分之一而不能攻克,这便是攻城所带来的危害.
因此,善於用兵的人,使敌人屈服而不是靠战争,攻取敌人的城池而不是靠硬攻,消灭敌国而不是靠久战,用完善的计策争勝於天下,兵力不至於折损,却可以获得全勝,这就是以谋攻敌的方法.
用兵的原则是:有十倍的兵力就包围敌人,五倍的兵力就进攻敌人,两倍的兵力就分割消灭敌人,有與敌相当的兵力则可以抗击,兵力少於敌人就要避免與其正面接触,兵力弱少就要撤退远地.所以弱小的军队顽固硬拼,就会变成强大敌军的俘虏.
将帅,是国家的辅佐,辅佐周密国家就会强大;辅佐疏漏,未尽其职,国家必然衰弱.
国君对军队造成的危害有三种情况:不知道军队在什么条件下可战而使其出击,不了解军队在什么情况下可退而使其撤退,这就束缚了军队的手脚.不通详三军内务,而插手三军的政事,就会使部队将士不知所从.不了解军中的权变之谋而参與军队的指挥,就会使将士们疑虑重重.军队既迷惑又疑虑,诸侯国军队乘机而进攻,災难就降临到头上,这就是自乱其军而丧失了勝利.
预知取勝的因素有五点:懂得什么条件下可战或不可战,能取勝;懂得兵多兵少不同用法的,能取勝;全军上下一心的,能取勝;以有备之师待無备之师的,能取勝;将帅有才干而君主不从中干预的,能取勝.这五条,是预知勝利的道理.
所以说:了解对方也了解自己的,百战不败;不了解敌方而熟悉自己的,勝负各半;既不了解敌方,又不了解自己,每战必然失败.
曹操의 注 <谋攻篇〉
〔曹操曰:欲攻敌,必先谋.〕
孙子曰:凡用兵之法:全国为上,破国次之.
〔曹操曰:兴师深入长驱,踞(據)其都邑(城郭),绝其内外,敌举国来服,为上;以兵击破得之,为次也.〕
全军为上,破军次之.
〔曹操曰:《司马法》曰:「萬二千五百人为军.」〕
全旅为上,破旅次之.
〔曹操曰:五百人为旅.〕
全卒为上,破卒次之.
〔曹操曰:自校以上至百人也.〕
全伍为上,破伍次之.
〔曹操曰:百人以下至五人.〕
是故,百战百勝,非善之善者也;
不战而勝,善之善者也.
〔曹操曰:未战而敌自屈服.〕
故上兵伐谋,
〔曹操曰:敌始有谋,伐之易也.〕
其次伐交,
〔曹操曰:交,将合也.〕
其次伐兵,
〔曹操曰:兵形成也.〕
其下攻城.
〔曹操曰:敌国已收其外粮城守,攻之为下也.〕
攻城之法:修橹、轒轀,其器械,三月而止也;距、闉,又三月然後已.
〔曹操曰:修,治也.橹,大楯也.轒轀者,轒床也;轒床其下四轮,从中推之至城下也.具,备也.器械者,机关攻守之总名,飞楼云梯之属.距闉者,踊土积高而前,以附其城也.〕
将不勝心之忿,而蚁附之;杀士卒三分之一,而城不拔者,此攻之災也.
〔曹操曰:将忿不待攻器成,而使士卒缘城而上,如蚁之缘墙,必杀伤士卒也.〕
故善用兵者,屈人之兵而非战也,
拔人之城而非攻也,
破人之国而非久也,
〔曹操曰:毁灭人国,不久露师也.〕
必以全争於天下.故兵不钝而利可全,此谋攻之法也.
〔曹操曰:不與敌战,而必完全得之,立勝於天下,则不顿兵挫锐也.〕
用兵之法:十则围之,
〔曹操曰:以十敌一,则围之,是谓将智勇等而兵利钝均也.若主弱客强,操所以倍兵围下邳,生擒吕布也.〕
五则攻之,
〔曹操曰:以五敌一,则三术为正,二术为奇.〕
倍则分之,
〔曹操曰:以二敌一,则一术为正,一术为奇.〕
敌则能战之,
〔曹操曰:己與敌人众等,善者犹当设奇伏以勝之.〕
少则能守之,
〔曹操曰:高壁坚垒,勿與战也.〕
不若则能避之.
〔曹操曰:引兵避之也.〕
故小敌之坚,大敌之擒也.
〔曹操曰:小不能当大也.〕
夫将者,国之辅也.辅周则国强,
〔曹操曰:将周密,谋不泄也.〕
辅隙则国弱.
〔曹操曰:形见於外也.〕
故君之所以患军者三:不知军之不可以进,而谓之进;不知军之不可以退,而谓之退,是谓縻军.
〔曹操曰:縻,御也.〕
不知军中之事,而同军中之政,则军士惑矣.
〔曹操曰:军容不入国,国容不入军,禮不可以治兵也.〕
不知三军之任,而同三军之权,则军士疑矣.
〔曹操曰:不得其人也.〕
军士既惑既疑,则诸侯之难至矣!是谓乱军引勝.
〔曹操曰:引,夺也.〕
故知勝有五:
知可以战與不可以战,勝.
知众寡之用,勝.
上下同欲,勝.
〔曹操曰:君臣同欲.〕
以虞待不虞,勝.
将能而君不御,勝.
〔曹操曰:《司马法》曰:「进退惟时,無曰寡人」.〕
此五者,勝之道也.
〔曹操曰:此上五事也〕
故兵知彼知己,百战不殆;
不知彼而知己,一勝一负;
不知彼不知己,每战必殆.
黄朴民:孙子伐交本义考
一
“伐交”是孙子兵学理论的重要原则之一,是孙子所阐述的对敌军事斗争的一个有力手段,原文见于《孙子·谋攻篇》:“上兵伐谋,其次伐交,其次伐兵,其下攻城.”对“伐交”含义的通行解释是:交为外交,所谓“伐交”,即进行外交斗争瓦解敌方的联盟,扩大、巩固自己的联盟,以争取战略上的主动,孤立敌手,迫其屈服.目前几种比较流行且具有一定权威性的孙子译注以及研究著作,如郭化若《孙子译注》、吴九龙主编《孙子校释》(笔者亦为作者之一)、李零《吴孙子发微》、林伊夫等《武经七书新译》等等,基本上都持这样的观点.
应该说,将“伐交”诠释为破坏敌方的外交,使之陷于孤立,既有古文献的依据,也能从逻辑上大致说得通.案《孙子十一家注》,可知大部分注家是将“伐交”释作“外交勝敌”的:
李筌曰:“伐其始交也.苏秦约六国不事秦,而秦闭关十五年,不敢窥山东也.”
杜牧曰:“非止将合而已,合之者皆可伐也.张仪愿献秦地六百里于楚怀王,请绝齐交.随和于黥布坐上杀楚使者,以绝项羽.曹公与韩遂交马语,以疑马超.高洋以萧深明请和于梁,以疑侯景,终陷台城.此皆伐交.”
陈暤曰:“或云敌已兴师交合,伐而勝之,是其次也.若晋文公敌宋,携离曹、卫也.”
孟氏曰:“交合强国,敌不敢谋.”
王皙曰:“谓未能全屈敌谋,当且间其交,使之解散.彼交则事巨敌坚,彼不交则事小敌脆也.”
张预曰:“或曰:伐交者,用交以伐人也.言欲举兵伐敌,先给邻国为犄角之势,则我强而敌弱.”
不仅《孙子》注家这样理解“伐交”,而且,其他古学者亦多持类似的意见.《汉书·息夫躬传》引“其次伐交”,颜师古就注称:“知敌有外交相援者,则间误之,令其解散也.”故到了《武经总要》那里,乃将“伐交”作了明晰而扼要的界定:“伐交者,绝敌之援,使不能合也”(《武经总要》前集卷三).从此之后,“伐交”为运用外交手段屈敌的观念遂为人们所普遍认同和接受,几乎没有任何的异议.迨至今日,更有人借鉴所谓的孙子“伐交”思想,就国际外交关系问题抒发己见,阐说高论,洋洋洒洒,好不得意.
粗乍一看,这样诠释孙子“伐交”义蕴,似乎亦文通字顺,合乎逻辑.然而,细加玩味,却感到这种解释未尽惬当,仍存在着一定的矛盾捍格之处.因为从根本上来说,通过外交手段屈敌,仍属于“伐谋”的范围,即运用智慧,巧假谋略以瓦解敌人之联盟.如战国苏秦、张仪之流,朝秦暮楚,纵横捭阖,左右战国七雄或合纵,或连横,从而影响战国战略格局的演变,何尝不是“伐谋”艺术的大手笔,纯属梅尧臣所谓“以智勝”的典范.所以从某种意义上讲,通行的“伐交”的解释,与“伐谋”之间实犯有同义重复之弊,而孙子之“伐交”本义果若后人所理解那样的准确,则孙子本人亦难辞概念混淆、逻辑紊乱之咎.以孙子之圣智高明,似不至于产生这样低级的失误,其“伐交”之说实当另有真实的本义所在.
二
那么,孙子“伐交”的本义又究竟是什么呢.我们认为,要真正解决这个问题,仍需要以古代文献为依据,结合孙子所处时代的军事斗争形式与特点,通过系统深入考察,全面综合分析方可达到目的.
其实,古代个别的《孙子》注者已经初步理解了孙子“伐交”的本义,如曹操注“伐交”有云:“交,将合也.”梅尧臣则更简洁地指出“伐交”即“以威勝”.遗憾的是,他们语焉不详,欲说还休,致使人们未能对此引起足够的注意,更没有顺着他们的正确思路揭橥出“伐交”的真实含义.
然而,曹操、梅尧臣有关孙子“伐交”的诠释,毕竟为我们今天探讨这一问题提供了可贵的启迪,指点了入门的途径.
我认为,正确理解“伐交”本义的关键,乃在于对“交”的原意作出如实可信的诠释.所谓“交”,按曹操的解释乃是“将合也”.这里的“将合”,指的当然是敌对两军“将合”,意即双方摆列好阵势,准备各自发起攻击的临战状态.这在《孙子》一书中并非孤证,《军争篇》云:“交和而舍”,此处的“交和”同样也是“对峙将合”的意思,故曹操注云:“两军相对为交和.”杜牧注云:“交者,言与敌人对垒而舍.”由此可见,“交”字在《孙子》一书中有特定的含义,通常是指两军面对面相对峙,摆列好阵势,引而不发的一种军事态势.理解了“交”的文义,再来考察“伐交”的本意,那么问题也就豁然开朗,迎刃而解了.所谓“伐交”,真实的含义即是在两军阵势已列,战衅将开之际,向敌显示己方严整军容、强大实力,震慑对手,吓阻敌人,从而使敌人丧失战斗的信心与斗志,被迫退兵或无奈投降,这在有关兵学典籍中就叫做“交绥而退”.换言之,“伐交”就是以列阵示威的方式挫败敌人的战略企图,迫使敌人屈服,从而以不直接进行战场交锋的途径取得勝利,实现“兵不顿而利可全”的用兵目的.梅尧臣用“以威勝”三字揭示“伐交”的实质,可谓是一语中的.
结合春秋时期军事斗争表现形式和基本特色进行考察,亦可知孙子提倡以列阵示威迫敌屈服的做法是事有所本,理有所据的,这是他对春秋时期战争经验进行总结的基础上所提出的高明军事斗争原则,而绝非空穴来风,无的放矢.它的直接来源就是三代与春秋时期盛行的“观兵”威敌程式.所谓“观兵”,即军队列阵向敌人示之以兵威,胁迫敌人屈服.《左传·襄公十一年》:“诸侯会于北林,师于向,右还次于琐,围郑,观兵于南门”.杜预注云:“观,示也.”《国语·周语上》亦云:“先王耀德不观兵”.均说明观兵示人以兵威,迫敌屈服是当时普遍实行的军事斗争重要形式.
我曾经在拙著《孙子评传》中指出:春秋时期的战争大多是以迫使敌方屈服为基本宗旨,因而军事威慑多于战略决战.换言之,以军事威慑和政治谋略迫使对方接受自己的条件而屈服,乃是当时相当普遍的现象,真正以主力进行会战决定勝负的战争为数比较有限.这样的时代军事特色,决定了“观兵”示威屈敌的做法为当时的战争指导者所普遍热衷,乐此不疲.其中尤以管仲、齐桓公召陵观兵与楚庄王观兵周疆、问鼎之轻重两大事件最为著名:
齐侯陈诸侯之师,与屈完(楚国使臣)乘而观之……齐侯曰:“以此众战,谁能御之?以此攻城,何城不克?”对曰:“君若以德绥诸侯,谁敢不服?君若以力,楚国方城以为城,汉水以为池,虽众,无所用之.”屈完与诸侯盟(《左传·僖公四年》).
楚子伐陆浑之戎,遂至于雒,观兵于周疆.定王使王孙满劳楚子.楚子问鼎之大小、轻重焉.对曰:“在德不在鼎.昔夏之方有德也,远方图物,贡金九枚,铸鼎象物,百物而为之备,使民知神、奸.故民入川泽、山林,不逢不若, 魅罔两,莫能逢之.用能协于上下,以承天休.桀有昏德,鼎迁于商,载祀六百,商纣暴虐,鼎迁于周.德之休明,虽小重也.其奸回昏乱,虽大轻也.天祚明德,有所底止.成王定鼎于郏 ,卜世三十,卜年七百,天所命也.周德虽衰,天命未改.鼎之轻重,未可问也.”(《左传·宣公三年》).
这两次“观兵”事件由于性质重要、情节丰富且富有戏剧性意义,故为史籍所详尽记载,更为后人所津津乐道.虽然它们由于种种原因未能很好地发挥出“观兵”行动应有的震慑对手、屈服敌人的作用,但本身的事实已从一个侧面反映了“观兵”在春秋时期的普遍性.这对于孙子“伐交”思想的形成和提出,实具有足沃启迪的意义.
孙子是善于总结和借鉴前人军事理论和战争实践经验的兵学大师,与借鉴齐桓公“九合诸侯,不以兵车”而系统提出“不战而屈人之兵”原则的情况相类似,他借鉴春秋大量“观兵”史实,加以提炼升华,从而形成以列阵威敌达到己方军事目的为内涵的“伐交”原则也是十分正常的现象.到了后世,由于战争形式的改变,“观兵”作为相对特殊的军事现象遂渐渐成为历史的陈迹,人们通常只能从以往史籍中略知古代“观兵”的存在,而较少能对“观兵”程式有切身的感性体验,至于“观兵”在军事上的具体作用和价值更是所知甚少.这样一来,孙子以古代“观兵”为具体参照系数而提出的“伐交”原则之本义遂很容易地为后人所曲解了,变成了运用外交手段屈服敌人的“新潮”说法.郢书燕说,莫之为甚.虽有个别熟谙军事历史的方家,如曹操、梅尧臣等省识其中的奥妙,但却因语焉不详而终不能扭转常人对“伐交”的曲解臆说.当然,也有一些人觉得以“外交斗争”诠释“伐交”并不惬当,但由于功力不逮或自信不足,终不能恢复孙子“伐交”含义的本来面目.或杜逞臆说,离题更远,如张预注云:“兵将交战将合则伐之.《传》曰:先人有夺人之心.谓两军将合,则先薄之,孙叔敖之败晋师,厨人濮之破华氏是也.”或左右摇摆,妄加折衷,如何氏注曰:“伐交者,兵欲交合,设疑兵以惧之,使进退不得,因来屈服.旁邻既为我援,敌不得不孤弱也.”这不能不说是孙子兵学研究本身的悲哀了.可见,《孙子》一书要真正读通并非易事.
我认为,孙子“伐交”本义为列阵震慑敌人迫其屈服,不但可以从文献史实中找到充分的依据,而且也合乎孙子《谋攻篇》的整个逻辑关系,用以解读《谋攻篇》“上兵伐谋,其次伐交,其次伐兵,其下攻城”的意蕴,实能豁然贯通,毫无沮滞.按笔者的理解,孙子此段论述的本义,乃是系统说明军事行动的逻辑程序关系,并加以自己的价值判断.在孙子看来,通过“伐谋”(包括外交角逐)而迫使敌人屈服的,自然是最上乘的境界,故云:“上兵伐谋”.如果“伐谋”不成,那就只好降格以求,进行“伐交”,将部队摆上来,让敌手看到我方强大的阵势后不寒而栗、自愧不如,因而表示屈服顺从;一旦列阵威慑还是没有什么效果,敌人依旧要同我方对抗,那么就再退而求其次,只好“伐兵”也就是野战了,即通过野战歼灭敌人或迫敌投降;如果敌人在野战失败后仍不认输,退守坚城,负隅顽抗,那么为了达到既定的战略目的,也只好设法攻城了.但攻城实在代价太大,纯属下策,所以有可能的话,还是应该尽量避免出现被迫攻城的情况.这样,孙子就完整地描述了一般战争行动互为关系、逐次递进的整个过程,并按自己“必以全争于天下”的价值取向尺度,对不同阶段的军事斗争原则及其优劣得失作出了相应的判断.很显然,“伐交”作为一个独立的战争行动程序,在孙子所想定的整个战争实施体系中是不可或缺的重要环节之一,它的次序和价值仅逊于“伐谋”而优于“伐兵”和“攻城”.
综上所述,孙子“伐交”的本义是通过布列阵势、显示实力,震慑敌人而逼迫其退缩或降服,它是三代与春秋时期通行的“观兵”威敌之法的理论总结和升华,是孙子想定战争程序中的有机组成部分.后人把它理解和解释为通过运用外交手段迫使敌人屈服,当属望文生义、主观臆度,只能看作是假论孙子之名而标新立异、想象比附,至于和孙子的本义则相去实不可以道里计.
作者: (春秋)孙武 撰, (三国)曹操 等注
出版社: 中华书局
十一家注孙子校理 杨丙安校理, 中华书局, 1999.
丛书名: 新编诸子集成
《孙子兵法》历代都有著录.1972年4月山东省临沂县银雀山汉墓出土的竹书《孙子兵法》为迄今最早的传世本,可惜为残简,不能窥其全貌.现存重要的版本为南宋宁宗时所刻《十一家注孙子》,宋刻与宋抄《武经七书》本,其中宋本《十一家注孙子》经清代孙星衍校定考辩后,成了近世流传最广,影响最大,最敷实用的读本.本电子版《孙子兵法》根据袁闾琨、张文才主编,辽宁人民出版社2000年1月出版的《中国兵书十大名典·孙子》扫校(辽版社《孙子》选用的是中华书局1961年出版的影印宋本《十一家注孙子》).
孙子年谱
一岁:据《史记》和《新唐书》所记,田武系陈国公子孙完后裔.至公元前544年,田武一周岁.
二岁:公元前543年,周景王二年,齐景公五年,田武在齐.子产执郑政,郑国大治.
三岁:公元前542年,周景王三年,齐景公六年,田武在齐.
郑人游于乡校,议执政善否.然朋劝子产毁乡校,子产不听,日:“其所善者,吾则行之,其所恶者,吾则改之,是吾师也,若之何毁之?”
四岁:公元前541年,周景王四年,齐景公七年,田武在齐.晋赵武死,韩宣子执晋政.楚令尹围杀王自立,是为楚灵王.
五岁:公元前540年,周景王五年,齐景公八年,田武在齐.春,晋侯使韩宣子聘鲁,观书于太史氏,见《易象》与《春秋》,说:“周礼尽在鲁矣,吾乃知周公之德与周之所以王也.”
六岁:公元前539年,周景王六年,齐景公九年,田武在齐.> 齐之田氏放贷,大斗出,小斗进,“民归之如流水”.
七岁:公元前538年,周景王七年,齐景公十年,田武在齐.楚会蔡,陈,郑,许,徐,滕,顿,胡,沈,小邾之君及宋世子佐,淮夷于申(今河南省南阳北).楚灵王与陈,蔡等攻吴,破朱方(今江苏省江东),执杀齐庆封.
八岁:公元前537年,周景王八年,齐景公十一年,田武在齐.鲁废中军,四分公室.楚联越攻吴,败于鹊岸(今安徽铜陵一带).
九岁:公元前536年,周景王九年,齐景公十二年,田武在齐.楚攻徐,吴人救之,楚令尹子荡攻吴,败于房钟(今安徽省蒙城西南).
十岁:公元前535年,周景王十年,齐景公十三年,田武在齐.楚灵王六年,章华之宫落成,召鲁君往贺,鲁昭公不得已赴楚.卫襄公死,子灵公元立.
十一岁:公元前534年,周景王十一年,齐景公十四年,田武在齐.楚灭陈.
十二岁:公元前533年,周景王十二年,齐景公十五年,田武在齐.
十三岁:公元前532年,周景王十三年,齐景公十六年,田武在齐.田,鲍二氏攻栾,栾施,高疆奔鲁.田桓子无宇对贫困孤寡者都发给粮食,其势益大.
十四岁:公元前531年,周景王十四年,齐景公十七年,田武在齐.楚灵王十三年,诱杀蔡灵侯,灭蔡,以公子弃疾为蔡公.吴王馀祭死,弟馀眯立.
十五岁:公元前530年,周景王十五年,齐景公十八年,田武在齐.楚灵王十一年,派兵围徐以威胁吴.
十六岁:公元前529年,周景王十六年,齐景公十九年,田武在齐.楚公子弃疾(蔡公),公子比(子干),公子黑肱(子皙,三人均灵王之弟)率陈,蔡,不羹,许,叶之师入楚,灵王西归自杀,立子比为王.弃疾以灵王将至恐吓子比,子皙,二人自杀,弃疾即位,名熊居,是为楚平王.吴馀眯二年,来州来(今安徽省凤台).
十七岁:公元前528年,周景王十七年,齐景公二十年,田武在齐.楚平王初立,恐国人及诸侯叛之,乃施惠于民,结好邻国,息兵五年.
十八岁:公元前527年,周景王十八年,齐景公二十一年,田武在齐.吴王馀眯死,子僚立.
十九岁:公元前526年,周景王十九年,齐景公二十二年,田武蒙山求学.齐攻徐,至蒲遂(今江苏省睢宁西南).
二十岁:公元前525年,周景王二十年,齐景公二十三年,田武蒙山求学.吴王僚攻楚,战于长岸(今长江裕溪口一带),大败,失王船“余皇”,公子姬光(诸樊子)夜袭楚军,夺回“余皇”.
二十一岁:公元前524年,周景王二十一年,齐景公二十四年,田武漫游天下,考察历史古战场.
二十二岁:公元前523年,周景王二十二年,齐景公二十五年,田武漫游天下,考察历史古战场.少师费无极(忌)欲平王疏远太子建,请在城父(今河南省平顶山市北)筑城,使太子居之,以通北方.楚在州来筑城以拒吴.田书因伐莒功大,景公赐姓孙,食采于乐安.
二十三岁:公元前522年,周景王二十三年,齐景公二十六年,孙武在齐,博览群书,研究历代战争兵法理论,作著《兵法》的准备工作.费无极谮太子建将以方城之外为叛,楚平王召见,建奔宋,继又奔郑,为郑人所杀.楚杀伍子胥父兄及全家三百余口,伍子胥奔吴.
二十四岁:公元前521年,周景王二十四年,齐景公二十七年,田武,是年与田淑贤成婚.
二十五岁:公元前520年,周景王二十五年,齐景公二十八年,孙武在齐.周景王死.国人立长子猛.子朝猛争位.晋出兵助猛.猛旋死,谥悼公.立其弟訇,是为周敬王.
二十六岁:公元前519年,周敬王元年,齐景公二十九年,孙武在齐.吴王僚八年,攻州来.楚与顿,胡,沈,蔡,陈,许之兵往救,战于鸡父(今河南省固始东南,一说在安徽寿县西南),楚军大败.
二十七岁:公元前518年,周敬王二年,齐景公三十年,孙武在齐.楚平王十一年,以舟师与越人窥吴境,楚平王至图阳(今安徽省巢县南境)而还.吴蹑楚之后,灭钟离(今安徽省凤阳东北).
二十八岁:公元前517年,周敬王三年,齐景公三十一年,孙武在齐.鲁昭公率师攻伐季孙氏,“三桓”联兵反抗昭公,昭公兵败奔齐.孔子因鲁乱带弟子适齐,为高昭子家臣.
二十九岁:公元前516年,周敬王四年,齐景公三十二年,孙武在齐.楚平王死,子珍立,是为楚昭王.
三十岁:公元前515年,周敬王五年,齐景公三十三年,高昭子联合栾,鲍,田三家反晏婴,孙凭参与其中,恐遭败后株连,孙武挈妻子奔吴,隐于穹窿中.吴王僚十二年,攻楚围潜(今安徽省霍山东北).楚左尹伯却宛等绝其后,吴军被困不能退.公子光利用时机,设宴请吴王僚赴会,遣专诸刺王僚.姬光继位,是为吴王阖庐(闾).楚伯却宛等乘吴乱大败吴师,凯旋而还.费无极,鄢将师妒火中烧,设计杀伯却宛全家,伯却宛子伯喜奔吴.国人怨令尹囊瓦,囊瓦杀死费无极,鄢将师.
三十一岁:公元前514年,周敬王六年,吴王阖庐元年.阖庐举伍子胥为行人,伯喜为大夫.伍子胥奉阖庐之命,请孙武出山练兵斩姬.阖庐拜孙武为元帅兼军师,执掌吴之国政.
三十二岁:公元前513年,周敬王七年,吴王阖庐二年.孙子在吴.
三十三岁:公元前512年,周敬王八年,吴王阖庐三年.吴取分兵扰楚之策,讨吴叛臣,断楚翅翼,灭徐与钟吾.
三十四岁:公元前511年,周敬王九年,吴王阖庐四年.吴取三师以敝楚,多方以误楚之策,攻楚之夷,潜,六,楚军往救,吴军攻弦,楚军往救,吴军又退.楚人探知吴军确已返国,乃自回军.楚军一退,而吴之又一军复出,进攻养邑,楚人救援不及,吴遂攻克养邑,杀公子掩余与烛庸.
三十五岁:公元前510年,周敬王十年,吴王阖庐五年.楚联越伐吴,为吴军所败.阖庐使伍子胥增筑都城.
三十六岁:公元前509年,周敬王十一年,吴王阖庐六年.孙子在吴.
三十七岁:公元前508年,周敬王十二年,吴王阖庐七年.吴为继续施行多方误敌之策,诱桐叛楚,投饵钓鱼,囊瓦上钩,率师攻吴,被吴军击败于豫章,吴遂取巢,获公子繁以归.自此役之后,楚国豫章山以东诸邑及附庸,属国全为吴所有.
三十八岁:公元前507年,周敬王十三年,吴王阖庐八年.孙子在吴.楚囊瓦向蔡昭侯索裘及佩玉,又向唐成公索马,两君不肯,囊瓦无理扣留唐蔡二君.
三十九岁:公元前506年,周敬王十四年,吴王阖庐九年.晋以周王室名义会十八国诸侯于召陵,谋攻楚.晋荀寅向蔡昭侯求赂,不得,伐楚夭折.囊瓦围蔡,吴往救,开始了吴破楚入郢之战.吴军至淮纳弃舟,越大别山,进攻楚囊瓦军于柏举(今湖北省麻城东),勝机攻入郢都.囊瓦奔郑;昭王逃入云梦泽中,被“盗”袭击,又奔随.楚申包胥求救于秦,哭秦庭七日,秦哀公乃许出兵.
四十岁:公元前505年,周敬王十五年,吴王阖庐十年.秦救楚,败吴兵,阖庐弟夫概回吴自立,阖庐先回吴,夺回王位.吴军相继班师回国.楚昭王回郢.
四十一岁:公元前504年,周敬王十六年,吴王阖庐十一年.吴攻楚,败其舟师,又败其陆师于繁阳(今河南省新蔡北).
四十二岁:公元前503年,周敬王十七年,吴王阖庐十二年.孙武见阖庐日益专横,生活糜烂,沉溺于酒色,不纳臣谏,遂以回国探亲为由,隐遁山林,从此史无所记.有人说他回到了齐国,与家人团聚,共享天伦之乐.有人说他功成身隐,以尽天年而终,终年七十五岁,即公元前470年,终于吴国姑苏,即今江苏省苏州市所辖之吴县.如此等等,俱都传说而已,皆无史可考.(来源:大连图书馆资料库)
사기 손자 오기 열전
태사공 自序(卷一百三十 太史公自序 第七十)
非信廉仁勇不能传兵论剑,與道同符,内可以治身,外可以应变,君子比德焉.
作孙子吴起列传第五.
태사공이 말하였다.
信、廉、仁、勇을 갖춘 인간이어야, 비로소 그 사람이 전하는 병법이나 그 논하는 劍法은 大道와 합치하여, 안으로 修身의 수단인 동시에, 밖으로 임기응변의 동작을 취할 수 있다. 그것은 군자가 덕을 비교할 때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열전 제5에 손자 오기 열전을 서술했다.
史记卷六十五·孙子吴起列传第五
孙子武者,齐人也.以兵法见於吴王阖庐.阖庐曰:「子之十三篇,吾尽观之矣,可以小试勒兵乎?」对曰:「可.」阖庐曰:「可试以妇人乎?」曰:「可.」於是许之,出宫中美女,得百八十人.孙子分为二队,以王之宠姬二人各为队长,皆令持戟.令之曰:「汝知而心与左右手背乎?」妇人曰:「知之.」孙子曰:「前,则视心;左,视左手;右,视右手;后,即视背.」妇人曰:「诺.」约束既布,乃设鈇钺,即三令五申之.於是鼓之右,妇人大笑.孙子曰:「约束不明,申令不熟,将之罪也.」复三令五申而鼓之左,妇人复大笑.孙子曰:「约束不明,申令不熟,将之罪也;既已明而不如法者,吏士之罪也.」乃欲斩左古队长.吴王从台上观,见且斩爱姬,大骇.趣使使下令曰:「寡人已知将军能用兵矣.寡人非此二姬,食不甘味,愿勿斩也.」孙子曰:「臣既已受命为将,将在军,君命有所不受.」遂斩队长二人以徇.用其次为队长,於是复鼓之.妇人左右前后跪起皆中规矩绳墨,无敢出声.於是孙子使使报王曰:「兵既整齐,王可试下观之,唯王所欲用之,虽赴水火犹可也.」吴王曰:「将军罢休就舍,寡人不愿下观.」孙子曰:「王徒好其言,不能用其实.」於是阖庐知孙子能用兵,卒以为将.西破彊楚,入郢,北威齐晋,显名诸侯,孙子与有力焉.
손자는 이름이 무인데 제나라 사람이다. 병법이라는 특기를 가지고 오왕 합려를 뵙게 되었다. 합려는 말했다. “그대가 저술한 13편의 병서는 나도 모두 읽어서 잘 알고 있다. 될 수 있으면 좀 시험삼아 실제로 군을 지휘해 보여주지 않겠는가?”
손자는 대답했다. “좋습니다.”
합려가 말했다. “그렇다면, 부인이라도 좋은가?” “좋습니다.” 이리하여 허락을 받아 궁중의 미녀들을 나오게 하여 180명이 모였다. 손자는 이것을 2대(隊)로 나누어 왕의 총희(寵姬) 두 사람을 각각 대장으로 삼았으며, 대원들에게는 모두 갈래진 창을 들게 하고 명령하였다. “너희들은 자기의 가슴과 두 손과 등을 알겠지?” “네, 압니다.” “그러면 ‘앞으로’ 하면 가슴을 보고 ‘좌로’ 하면 왼손을 보고 ‘우로’ 하면 오른손을 보고 ‘뒤로’ 하면 등을 보아라.” “네 알겠습니다.”
약속한 바를 선포하고 이에 큰 쇠도끼(주장이 갖는 것으로 생사의 권한을 갖고 군령을 행한다.)를 놓고 명령을 세 번 되풀이하고 다섯 번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軍鼓를 쳐서 ‘우로’ 하고 호령했으나 부인들은 크게 웃을 뿐이었다.
손자가 말했다. “약속이 분명치 않고 호령이 철저하지 못한 것은 주장의 책임이다.” 다시 명령을 세 번 되풀이하고 다섯 차례 설명하고서 군고를 쳐서 ‘좌로’ 하고 호령했다. 부인들은 이번에도 크게 웃을 뿐이었다. 이러자 손자가 말했다. “약속이 분명치 않고 호령이 철저하지 못한 것은 주장의 책임이다. 그러나 이미 약속이 분명한데도 법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지휘자인 대장의 책임이다.”
이에 좌우 2대의 대장을 베려 하였다. 오왕이 대 위에서 보고 있었는데 손자가 당장 총애하는 미희를 벨 기세임을 보고 크게 놀라 금시 전령을 보내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나는 벌써 장군이 능히 용병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이 두 시녀가 없으면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을 지경이니 제발 베지 말아 줄 수는 없을까?” 손자가 대답했다. “신이 이미 명령을 받아 장군이 되었습니다. 장군은 진중에 있는 한 왕명이라 할지라도 따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자가 드디어 대장 두 사람을 베어 본을 보이고 차석의 시녀를 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다시 군고를 울리자 부인들은 좌、우、전、후 무릎을 꿇고 일어나는 동작이 모두 규칙에 들어맞아 감히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손자는 전령을 보내 왕에게 보고했다. “군대는 이미 정돈되었습니다. 왕께서 몸소 대에서 내려 오셔서 시험삼아 열병하심이 어떠하올지, 그저 왕께서 용병하시고 싶으신 대로 물이면 물, 불이면 불속이라도 뛰어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왕이 말했다. “장군은 피로할 테니 휴식을 위하여 숙사로 가는 게 좋겠지. 내가 내려가서 볼 생각은 없네.” 손자가 말했다. “왕께서 한갓 용병의 이론을 좋아하실 뿐 그것을 실제로 응용하시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리하여 합려는 손자의 용병능력을 알게 되어 드디어 그를 장군으로 기용하였다. 오가 서쪽으로는 강한 초나라를 꺾어 초의 도성인 영(郢)에 돌입하고 북쪽으로는 제、진(晉)을 위협하여 명성을 제후 사이에 떨쳤는데, 손자가 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힘이 컸었다.
孙武既死,后百馀岁有孙膑.膑生阿鄄之闲,膑亦孙武之後世子孙也.孙膑尝与庞涓俱学兵法.庞涓既事魏,得为惠王将军,而自以为能不及孙膑,乃阴使召孙膑.膑至,庞涓恐其贤於己,疾之,则以法刑断其两足而黥之,欲隐勿见.
齐使者如梁,孙膑以刑徒阴见,说齐使.齐使以为奇,窃载与之齐.齐将田忌善而客待之.忌数与齐诸公子驰逐重射.孙子见其马足不甚相远,马有上、中、下、辈.於是孙子谓田忌曰:「君弟重射,臣能令君勝.」田忌信然之,与王及诸公子逐射千金.及临质,孙子曰:「今以君之下驷与彼上驷,取君上驷与彼中驷,取君中驷与彼下驷.」既驰三辈毕,而田忌一不勝而再勝,卒得王千金.於是忌进孙子於威王.威王问兵法,遂以为师.
其后魏伐赵,赵急,请救於齐.齐威王欲将孙膑,膑辞谢曰:「刑馀之人不可.」於是乃以田忌为将,而孙子为师,居辎车中,坐为计谋.田忌欲引兵之赵,孙子曰:「夫解杂乱纷纠者不控桊,救鬬者不搏撠,批亢擣虚,形格势禁,则自为解耳.今梁赵相攻,轻兵锐卒必竭於外,老弱罢於内.君不若引兵疾走大梁,据其街路,冲其方虚,彼必释赵而自救.是我一举解赵之围而收獘於魏也.」田忌从之,魏果去邯郸,与齐战於桂陵,大破梁军.
后十三岁,魏与赵攻韩,韩告急於齐.齐使田忌将而往,直走大梁.魏将庞涓闻之,去韩而归,齐军既已过而西矣.孙子谓田忌曰:「彼三晋之兵素悍勇而轻齐,齐号为怯,善战者因其势而利导之.兵法,百里而趣利者蹶上将,五十里而趣利者军半至.使齐军入魏地为十万灶,明日为五万灶,又明日为三万灶.」庞涓行三日,大喜,曰:「我固知齐军怯,入吾地三日,士卒亡者过半矣.」乃弃其步军,与其轻锐倍日并行逐之.孙子度其行,暮当至马陵.马陵道陜,而旁多阻隘,可伏兵,乃斫大树白而书之曰「庞涓死于此树之下」.於是令齐军善射者万弩,夹道而伏,期曰「暮见火举而俱发」.庞涓果夜至斫木下,见白书,乃鉆火烛之.读其书未毕,齐军万弩俱发,魏军大乱相失.庞涓自知智穷兵败,乃自刭,曰:「遂成竖子之名!」齐因乘勝尽破其军,虏魏太子申以归.孙膑以此名显天下,世传其兵法.
손무가 죽은 지 백여 년 뒤 손빈이란 사람이 나왔다.42) 그는 제나라의 阿、甄 근방에서 태어났으며, 손무의 후손이다. 손빈은 일찍이 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이 이미 魏를 섬겨 惠王의 장군이 된 후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의 재능이 손빈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고 몰래 사람을 시켜 손빈을 불렀다. 손빈이 오니 방연은 그가 자기보다 나은 것을 두려워하고 질투하여 그에게 죄를 덮어씌워 법에 의거 그의 두 다리를 자르고 얼굴에 먹물을 들였다. 그가 숨어버리고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제의 사자가 梁(위나라 수도, 開封)에 오자 손빈은 형을 받은 자이므로 몰래 제의 사자를 만나 자기의 포부를 말했다. 제의 사자는 그를 기이한 인물이라 여겨 몰래 수레에 실어 함께 제나라로 갔다. 제의 장군 田忌는 그를 알아보고 빈객으로 대우하였다. 전기는 그 무렵에 제의 여러 왕자들과 자주 돈을 걸고 마차경주 내기를 하고 있었다. 손빈은 그 말의 주력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으나 말에는 상、중、하의 등급이 있는 것을 보고 전기에게 말했다.
“그저 큰돈을 거십시오. 제가 장군을 이기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전기는 이 말을 믿어 그러리라 생각하고 왕과 여러 왕자들과 함께 천금을 걸었다.경마에 임하여 손빈이 말하였다. “자, 지금 장군의 하등의 駟馬를 저쪽 상등의 사마와 겨루게 하고, 장군의 상등의 사마를 저쪽의 중등의 사마와 겨루게 하고, 장군의 중등의 사마를 저쪽의 하등의 사마와 겨루게 하십시오.” 세 쌍의 경주가 끝나고 보니 전기가 한 번 지고 두 번 이겨 드디어 천금을 얻었다. 그래서 전기가 손빈을 위왕에게 추천하였다. 위왕이 병법을 문답하다 드디어 그를 軍師로 받들었다.
그후 위가 조를 치니, 조의 형세가 위급하게 되자 제의 구원을 청했다. 제의 위왕(威王)이 손빈을 장군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손빈이 사양하였다. “전과가 있는 몸으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기를 장군으로 삼고 손빈을 군사로 삼아 치거(짐수레)에 태운 후 계략을 세우게 하였다. 손빈이 말하였다.
“무릇 엉킨 실을 풀려면 주먹으로 때려서는 안되며 맞붙은 싸움을 말리려면 역시 그저 쳐서는 안됩니다. 급소인 목을 움켜잡고 허를 찌르면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스스로 풀릴 뿐입니다. 지금은 위와 조가 서로 맞붙어 공격하고 있으니 날렵하고 정예로운 병졸은 밖으로 다 나가고 노약한 잡병들만이 안에 남아 있을 겁니다. 장군은 병사를 이끌고 속히 대량(大 梁)으로 달려가 그 시가를 점령하고 적의 취약한 곳을 찌르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렇게 하면 적은 반드시 조를 버리고 자국의 방위를 위하여 철군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잔 번에 조의 포위를 풀 뿐만 아니라 위를 피폐하게 하는 상책입니다.”
전기가 그 계략을 따르니 위는 과연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철수하고 제군과 桂陵에서 싸웠으나 제군이 크게 위나라 梁軍을 쳐부수었다.
그후 13년이 지나고 위가 조와 함께 韓을 쳤고 한은 위급함을 제에 고하였다. 제가 전기를 장군으로 삼아 파견하여 곧바로 위의 도읍 대량으로 진격하게 했다. 위의 장군 방연이 이 소식을 듣고 한을 철수하고 귀국하였으나 제의 군사는 이미 국경을 넘어 서진하여 위나라 안까지 침입하고 있었다. 손빈은 전기에게 말했다.
“저 삼진(三晉; 韓、魏、趙)의 병사는 원래가 사납고 용맹하여 제를 경멸하고 겁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잘하는 자는 적의 세력을 이용하여 이것을 이쪽에 유리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병법에도 백리 밖에서 승리하고자 급히 진격하면 상장군을 전사케 하고 50리 밖에서 승리하고자 급히 진격하다가는 병의 절반만이 도착한다.’라고 했습니다.”
제군이 위땅에 침입하여 10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고 다음날은 5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고 또 그 다음날은 3만 개로 줄였다. 방연이 제군을 추격하여 사흘이 지나자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본래 제의 군사가 겁쟁이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 땅에 침입한 지 불과 사흘 만에 도망한 사졸이 절반이 넘을 줄이야 몰랐다.”
방연은 이에 보병을 버리고 날래고 정예로운 기병만을 이끌고 배로 하여 밤낮없이 제군을 추격했다. 손빈이 그 행군을 예측하니 해질 무렵에 馬陵에 닿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마릉은 길이 좁고 양옆에 험준한 산이 많아 병사를 매복시킬 만했다. 그래서 큰나무를 희게 깎고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으리라’라고 글을 써놓았다. 그러고는 제나라 군사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자를 골라 일만 장의 쇠뇌를 좁은 길 양옆에 매복시켜 ‘해가 질 무렵 불빛이 오르는 것을 보면 일제히 발사하라’라고 명령하였다. 방연이 과연 밤에 그 깎은 나무 밑에 이르러 흰 바탕에 쓴 글씨를 보고 부싯돌을 쳐서 불을 켜 이것을 비추었다. 그러자 그 글씨를 채 읽기도 전에 제나라 제군의 일만 장의 쇠뇌가 일제히 발사되었다. 위나라 군사가 크게 혼란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방연은 스스로 지혜가 다하고 패전한 것을 알고 이에 “드디어 애숭[송]이에게 명성을 얻게 해주었구나!”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제는 이리하여 승세를 타 적군을 모조리 무찌르고 위의 태자 申을 사로잡아 개선하였다. 손빈은 이로 인하여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기 되었고, 그의 병법이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吳起>者, <衛>人也, 好用兵. 嘗學於<曾子>, 事<魯君>. <齊>人攻<魯>, <魯>欲將<吳起>, <吳起>取<齊>女爲妻, 而<魯>疑之. <吳起>於是欲就名, 遂殺其妻, 以明不與<齊>也. <魯>卒以爲將. 將而攻<齊>, 大破之.
오기는 위나라 사람으로 용병(군사작전)을 좋아했다. 일찍이 증자에게 배우고 노나라 임금을 섬겼다. 제나라 사람이 노나라를 공격했을 때 노나라에서 오기를 장군으로 쓰려했지만 오기가 제나라 여인을 아내로 삼고 있어서 이 점을 의심했다. 오기는 이에 명성을 얻고 싶어서 마침내 그 아내를 죽이고 제나라와 관계없다는 것을 밝혔다. 노나라에서는 드디어 그를 장군으로 삼았고 제나라를 쳐서 크게 이겼다.
<魯>人或惡<吳起>曰 : “<起>之爲人, 猜忍人也. 其少時, 家累千金, 游仕不遂, 遂破其家. 鄕黨笑之, <吳起>殺其謗己者三十餘人, 而東出<衛>郭門. 與其母訣, 齧臂而盟曰 : 『起不爲卿相, 不復入衛.』
노나라 사람 중 어떤 이가 오기를 미워하여 말하기를, “오기의 사람됨은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다. 그는 젊었을 때 집에 천금이 쌓여 있었지만 돌아다니면서 벼슬자리를 구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자신의 집을 파산시켰다. 고향 마을 사람들이 이를 비웃자 오기는 자기를 비방한 자 30여인을 죽이고, 동쪽으로 위나라 성곽문을 나와 어머니와 이별하면서 자신의 팔을 깨물며 맹세하기를 ‘나는 재상이 되기 전에는 위나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遂事<曾子>. 居頃之, 其母死, <起>終不歸. <曾子>薄之, 而與<起>絶. <起>乃之<魯>, 學兵法以事<魯君>. <魯君>疑之, <起>殺妻以求將. 夫<魯>小國, 而有戰勝之名, 則諸侯圖<魯>矣. 且<魯><衛>兄弟之國也, 而君用<起>, 則是弃<衛>.”
그리하여 증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얼마가 지난 뒤, 그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오기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증자는 박정하다고 생각하여 오기와 관계를 끊었다. 오기는 이에 노나라로 가서 병법을 배워 노나라 임금을 섬겼다. 노나라 임금이 그를 의심하자 오기는 아내를 죽이고 장군이 되고자 했다. 대저 노나라는 작은 나라인데 (제나라를 이겼다는) 전승의 명성을 얻게 되면 제후국들이 노나라를 도모하려 할 것이다. 또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국인데 임금이 오기를 기용하면 위나라와의 정의를 버리는 것이 된다.”라고 말했다.
<魯君>疑之, 謝<吳起>. <吳起>於是聞<魏><文侯>賢, 欲事之. <文侯>問<李克>曰 : “<吳起>何如人哉?” <李克>曰 : “<起>貪而好色, 然用兵<司馬穰苴>不能過也.” 於是<魏><文侯>以爲將, 擊<秦>, 拔五城.
노나라 임금이 이를 의심하여 오기를 물러나게 했다. 이에 오기는 위나라 문후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이를 섬기고자 했다. 문후가 이극에게 묻기를, “오기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이극이 대답하기를, “오기는 탐욕스럽고 여색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용병에 있어서는 사마양저라도 그보다 낫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위나라 문후는 그를 장군으로 삼아 진나라를 쳐서 다섯 개 성을 빼앗았다.
<起>之爲將, 與士卒最下者同衣食. 臥不設席, 行不騎乘, 親裹贏糧, 與士卒分勞苦. 卒有病疽者, 起爲吮之. 卒母聞而哭之. 人曰 : “子卒也, 而將軍自吮其疽, 何哭爲?” 母曰 : “非然也. 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 遂死於敵. <吳公>今又吮其子, 妾不知其死所矣. 是以哭之.”
오기가 장군이 되자 가장 낮은 병졸과 먹고 입기를 같이하며 누울 때도 자리를 깔지 않고 갈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으며 친히 양식을 꾸려서 지는 등 사졸과 노고를 함께 나누었다. 병졸 중에 종기가 난 자가 있었는데, 오기가 그것(종기의 고름)을 빨았다. 병졸의 어미가 그 말을 듣고 통곡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 아들은 병졸이고 장군이 스스로 그 종기의 고름을 빨았는데 어찌 통곡을 하는가?”하니 어미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해에 오공(오기)이 저 애 아비의 종기를 빨았는데 그 아비가 전쟁에 나가 물러서지 않다가 마침내 적에게 죽었습니다. 오공이 지금 그 아들의 종기를 빨았으니 저는 아들이 언제 어디서 죽을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통곡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文侯>以<吳起>善用兵, 廉平, 盡能得士心, 乃以爲<西河>守, 以拒<秦>·<韓>. <魏><文侯>旣卒, <起>事其子<武侯>. <武侯>浮<西河>而下, 中流, 顧而謂<吳起>曰 : “美哉乎山河之固, 此<魏國>之寶也!”
문후는 오기가 용병을 잘하고 청렴 공평하며 사졸의 마음을 얻고 있는 것을 보고 서하의 태수를 삼아 진나라와 한나라를 방어하게 했다. 위나라 문후가 죽자 오기는 문후의 아들 무후를 섬겼다. 무후가 서하에 배를 띄우고 아래로 흘러 내려가다가 중류에서 오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산과 강의 견고함이여. 이것이 위나라의 보배로구나.”라고 했다.
<起>對曰 : “在德不在險. 昔<三苗氏>左<洞庭>, 右<彭蠡>, 德義不修, <禹>滅之. <夏><桀>之居, 左<河濟>, 右<泰華>, <伊闕>在其南, <羊腸>在其北, 修政不仁, <湯>放之. <殷><紂>之國, 左<孟門>, 右<太行>, <常山>在其北, <大河>經其南, 修政不德, <武王>殺之. 由此觀之, 在德不在險. 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 <武侯>曰 : “善.”
오기가 대답하기를, “(나라의 보배는) 임금의 덕행에 있지 산천의 험함에 있지 않습니다. 옛날 삼묘씨의 나라는 왼편에 동정호, 오른편에 팽려호가 있었지만 덕과 의를 닦지 못하여 우 임금이 멸망시켰습니다. 하나라 걸 왕의 거처는 왼편에 황하와 제수가 있고 오른편에 태산과 화산이 있으며 이궐(낙양 남쪽의 절벽)은 남쪽에 있고 망양산은 북쪽에 있었으나 정치가 어질지 않았기에 (은나라) 탕 임금이 쫓아냈습니다. 은나라 주 임금의 나라는 왼편에 맹문산이 있고 오른편에 태행산이 있으며 상산은 북쪽에 있고 큰 강(황하)이 그 남쪽을 지나고 있으나 정치를 하는데 덕이 없었으므로 주나라 무왕이 죽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나라의 보배는 임금의 덕에 있지 산천의 험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임금님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적국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무후가 “옳은 말이다.”라고 했다.
(卽封)<吳起>爲<西河>守, 甚有聲名. <魏>置相, 相<田文>. <吳起>不悅, 謂<田文>曰 : “請與子論功, 可乎?” <田文>曰 : “可.” <起>曰 : “將三軍, 使士卒樂死, 敵國不敢謀, 子孰與<起>?” <文>曰 : “不如子.” <起>曰 : “治百官, 親萬民, 實府庫, 子孰與<起>?” <文>曰 : “不如子.” <起>曰 : “守西河而<秦>兵不敢東鄕, <韓><趙>賓從, 子孰與<起>?” <文>曰 : “不如子.”
오기가 서하의 태수가 된 후 매우 평판이 좋았다. 위나라에 재상을 두어 전문을 재상으로 삼자, 오기는 기분이 나빠서 전문에게 말했다. “그대와 공적을 논해 보고 싶은데 어떤가?” 전문이 말하길, “좋다.”라고 했다. 오기가 말하길, “삼군을 거느리고 사졸로 하여금 즐겨 죽게 하며, 적국이 감히 도모하지 못하게 한 점에서 그대와 내가 누가 나은가?” 하니, 전문이 “내가 그대만 못하다.”고 하였다. 오기가 말하기를, “백관을 다스리고 만민과 친하며 국고를 충실하게 한 점에서 그대와 내가 누가 나은가?”하니, 전문이 “내가 그대만 못하다.”고 하였다. 오기가 말하길, “서하를 지켜서 진나라 군대가 감히 동쪽으로 못 나오게 하고 한나라와 조나라를 복종하게 한 점에서 그대와 내가 누가 나은가?”하니, 전문이 “내가 그대만 못하다.”고 하였다.
<起>曰 : “此三者, 子皆出吾下, 而位加吾上, 何也?” <文>曰 : “主少國疑, 大臣未附, 百姓不信, 方是之時, 屬之於子乎? 屬之於我乎?” <起>黙然良久, 曰 : “屬之子矣.” <文>曰 : “此乃吾所以居子之上也.” <吳起>乃自知弗如<田文>.
오기가 말하기를, “이 세 가지 점에서 그대는 나보다 못한데 자리는 나보다 위이니 어찌 된 것이오?”하니, 전문이 “임금은 나이가 어려서 국정이 불안하고 대신들은 안정되지 못하고 백성들도 믿지 않는다. 바로 이런 때에 (재상자리를) 그대에게 맡기겠는가, 나에게 맡기겠는가?”라고 했다. 오기가 한참 말없이 있다가 말하기를, “그대에게 맡겨야 하겠지.”라고 했다. 전문이 “이것이 내가 그대보다 윗자리에 있는 까닭이다.”라고 하니 오기가 이에 자신이 전문만 못한 것을 알았다.
<田文>旣死, <公叔>爲相, 尙<魏>公主, 而害<吳起>. <公叔>之僕曰 : “<起>易去也.” <公叔>曰 : “柰何?” 其僕曰 : “<吳起>爲人節廉而自喜名也. 君因先與<武侯>言曰 : 『夫<吳起>賢人也, 而侯之國小, 又與彊<秦>壤界, 臣竊恐<起>之無留心也.』
전문이 죽자 공숙이 재상이 되어 위나라 공주를 얻어 오기를 꺼려했다. 공숙의 하인이 말하기를, “오기를 제거하기는 쉽습니다.”라고 하니 공숙이 “어떻게 하나?” 했다. 그 하인이 “오기는 사람됨이 절조가 있고 청렴하며 명예를 좋아합니다. 주인님은 먼저 무후께 이렇게 말하십시오. ‘대저 오기는 훌륭한 인물인데 임금님의 나라는 작습니다. 그리고 강한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신은 잠깐 오기가 우리나라에 머무를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武侯>卽曰 : 『柰何?』 君因謂<武侯>曰 : 『試延以公主, <起>有留心則必受之, 無留心則必辭矣. 以此卜之.』 君因召<吳起>而與歸, 卽令公主怒而輕君. <吳起>見公主之賤君也, 則必辭.” 於是<吳起>見公主之賤<魏>相, 果辭<魏><武侯>. <武侯>疑之而弗信也. <吳起>懼得罪, 遂去, 卽之<楚>.
그러면 무후가 말하기를, ‘어떻게 하지?’라고 할 것입니다. 주인님은 그때 무후에게 ‘시험 삼아 공주를 내리겠다고 하십시오. 오기가 머물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받을 것이고, 머물 마음이 없다면 반드시 사양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판단하십시오.’라고 하십시오. 주인님은 오기를 초대하여 오기와 함께 집으로 오셔서 곧 공주를 노하게 하여 공주가 주인님을 경멸하게 하면 오기는 공주가 주인님을 천대하는 것을 보고 반드시 사양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오기는 공주가 위나라 재상을 천대하는 것을 보고 과연 위나라 무후에게 (공주를) 사양하니 무후가 그를 의심하여 믿지 않았다. 오기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위나라를 떠나서 초나라로 갔다.
<楚><悼王>素聞<起>賢, 至則相<楚>. 明法審令, 捐不急之官, 廢公族疏遠者, 以撫養戰鬪之士. 要在彊兵, 破馳說之言從橫者. 於是南平<百越> ; 北幷<陳><蔡>, 卻<三晉> ; 西伐<秦>. 諸侯患<楚>之彊. 故<楚>之貴戚盡欲害<吳起>.
초나라의 도왕은 평소에 오기가 현명하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오자 초나라 재상으로 삼았다. 그는 법령을 정비하고 불급한 관직을 없애고 먼 왕족으로 벼슬에 있는 자를 물러나게 하고 그 (재원)으로써 전투병을 양성했다. (그의 정치에서) 요점은 강병정책에 있고, 유세하여 합종연횡을 주장하는 자들을 깨트리는 데 있었다. 이에 남쪽으로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진나라와 채나라를 병합했으며, 삼진(한,위,조)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쳤다. 그래서 제후들이 초나라의 강성함을 겁내게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의 귀족들이 모두 그를 해치고자 하였다.
及<悼王>死, 宗室大臣作亂而攻<吳起>, <吳起>走之王尸而伏之. 擊<起>之徒因射刺<吳起>, 幷中<悼王>. <悼王>旣葬, 太子立, 乃使令尹盡誅射<吳起>而幷中王尸者. 坐射<起>而夷宗死者七十餘家.
도왕이 죽게 되자 왕족과 대신들이 난을 일으켜 오기를 치려고 했다. 오기가 달아나 왕의 시체 위에 엎드렸다. 오기를 공격하는 무리들이 오기에게 활을 쏘아 도왕의 시체에도 맞았다. 도왕의 장사가 끝나자 태자가 왕이 되었고, 영윤을 시켜 오기를 쏘아 왕의 시체까지 맞힌 자를 모두 죽였다. 오기를 사살하는데 연좌되어 종족이 죽은 자는 칠십여 집에 이르렀다.
<太史公>曰 : 世俗所稱師旅, 皆道《孫子》十三篇, <吳起>《兵法》, 世多有, 故弗論, 論其行事所施設者. 語曰 : “能行之者未必能言, 能言之者未必能行.” <孫子>籌策<龐涓>明矣, 然不能蚤救患於被刑. <吳起>說<武侯>以形勢不如德, 然行之於<楚>, 以刻暴少恩亡其軀. 悲夫!
태사공인 나(사마천)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군사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손자 13편과 오기의 병법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것(병법)은 논하지 않고, 그가 일을 행한 것과 정책을 펼친 것을 논했다. 옛말에 "능히 행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능히 말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손빈이 방연을 죽인 계책은 현명하다. 그러나 (자신이 다리를 잘리는) 형벌을 당한 환란을 능히 미리 구하지는 못했다. 오기는 무후에게 (산천의) 형세가 (임금의) 덕행만 못하다고 말했지만, 초나라에서 행한 것을 보면 각박하고 은혜를 베풀지 못했던 탓에 제 몸을 망치고 말았다. 슬프구나.
1)全国为上, 破国次之: 형용사 “全”이 여기서는 動詞化 하여 해석해야 한다. “存”의 의미로써 적국을 완벽하게 굴복시키다.(使~全服.)라고 해석한다. 즉 “대적할 나라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않고 항복하게 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으며, 적국을 격파하고서 항복시키는 것은 차선책이다.(使敵擧國不戰而降是上策 擊破敵國使之降服是次一等用兵戰略.)”(周亨祥 역주본 20쪽) 《新注》(21쪽)에서는 “完整地使敵國屈服是上策, 經過交戰擊破敵國就次一等.”이라 하였다. 적국을 이전과 같이 그 나라의 명맥을 존속시켜주어 온전한 상태에 둔 채로 완벽하게 적국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고의 계책(計策)이며, 전쟁을 통해서 적국을 파괴(멸망)시키는 것은 그 다음 계책이다. 적국을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전쟁은 수단에 불과하다. 가능한 부득이 한 경우에 전쟁을 하는 것이다. 소위 “멸망한 나라를 존속시키고, 대가 끊어진 가문을 잇게 해준다.(繼絕存亡)”의 의미는 바로 “全”에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存續내지 保全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천하 제후들과 그들이 이끄는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강태공도 《六韬․发启》에서도 일찍이 “全勝不鬪, 大兵无创.”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의미는 고대 사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처음 주나라 천자의 仁愛의 정신을 시작으로 춘추 5패에 와서는 약간 그 본의가 왜곡되기도 하였다. “取乱存亡”(初唐 시인 陈子昂 《上西蕃边州安危事》“取乱存亡,可谓聖图弘远矣.”)의 성어에서도 알 수 있다. 즉 古代 国家의 正义를 실천하는 对外策略의 하나였다. 政治가 荒乱한 国家를 탈취한 뒤 그 망하려는 国家의 명맥을 존속시켜주는 일이다. 예를 들면 주공(周公) 단(旦)이 管叔、蔡叔、武庚의 乱을 평정한 후 은나라 후손에 대해 정중히 대한 일(《尚书·周书․康法》)과 제나라 환공의 고사가 대표적이다. “桓公嘗有繼絕存亡之功,故君子為之諱也. 繼絕存亡,賢者之事也,”(唐, 李翱의《薦所知於徐州張僕射書》),《论语·尧曰》“兴灭国,继绝世,举逸民,天下之民归心焉。”,《公羊传·僖公十七年》“桓公尝有继绝存亡之功,故君子为之讳也.” 曹操 注 “兴师深入长驱, 踞(占據)其都邑(城郭), 绝其内外, 敌举国来服, 为上, 以兵击破得之, 为次也.” 破: 파괴하다, 不完整, 使损壞, 宋나라 시인 苏轼《东坡志林》(第五卷)“상앙과 상홍양의 술수로써 나라를 멸망시키고 종족을 멸족시키는 것이 모두 이와 같다.(用商鞅、桑弘羊之术, 破国亡宗者皆是也.)” 桑弘羊은 西汉 武帝 时(기원전140~기원전88) 대신으로 法家이다 .商鞅은 전국시대(기원전390~기원전33年) 대신으로 法家이다. 商鞅变法은 商鞅이 秦 孝公의 支持下에서 기원전 361年에 秦国에서 实施한 改革이다. 《老子》(제79장 任契章)의 “和大怨, 必有餘怨;报怨以德①, 安可以为善? 是以聖人执左契②, 而不责③於人. 有德司契, 無德司彻④. 天道無亲⑤, 常与善人.”(【풀이】큰 원한을 맺게 된다면 반드시 오래 원한이 남게 된다. 그래서 덕으로 원망을 대해야 하거늘 (원망을 품는다면) 어떻게 잘 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성인은 계약서를 왼손에 잡고 있으며, 채무자에게 빚을 독촉하지는 않는다. 덕이 있는 자는 계약서를 갖고 있으며, 덕이 없는 자는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한다. 하늘의 도리는 사람을 편애하지 않는다. 항상 선한 사람과 함께 한다. 【주석】①报怨以德:学者들은 이 句가 본래 六十三章内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上下文意에 비추어 응당 本章内에 있는 것이 옳다고 본다. ②契:契约. ③责:빚을 독촉하다(索取所欠). ④司彻:징수하는 官职. ⑤無亲:偏亲偏爱하는 일이 없다.)와 같은 사상이다. 《中庸》(제10장) “子路问强. 子曰,「南方之强與,北方之强與,抑而强與?」「宽柔以教,不报無道,南方之强也. 君子居之.」衽金革,死而不厌,北方之强也.而强者居之.」故君子和而不流;强哉矫. 中立而不倚;强哉矫. 国有道,不变塞焉;强哉矫. 国無道,至死不变;强哉矫.」”(【주석】子路,孔子弟子 仲由. 子路는 好勇하여 强함을 물었다. 强은 勇者가 애호하는 바이다. 與는 “欤”와 같다. 衽(임)은 깔개, 깔다는 의미이다. 塞(색),充实하다. 抑而,抑은 어기사;而는 “尔”(너 이),즉 子路를 가리킨다. 宽柔以教는 以宽柔为教의 의미이다. 南方은 荆阳의 南部,양기가 많는 지역이다. 北方,沙漠之地,음기가 많은 곳이다. 金은 戈兵之属. 革은 甲胄之属. 金革은 军戎器械. 流,移. 倚,偏. 矫는 强한 모양.)【풀이】孔子의 弟子 子路가 孔子에게 무엇이 强大한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 孔子는 子路를 계발시키는 의미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南方 사람의 强大함을 묻느냐? 北方 사람의 强大함을 묻느냐? 아니면 子路 너가 말하는 强大함을 묻느냐? 南方은 人情이 관대하고 유순한 것으로 가르침으로 삼는다. 무도한 자에게 참을 뿐 보복하지는 않는다. 남방의 강함이다. 이것은 군자의 도이다. 북방 사람은 (호전성이 강하여) 갑옷이나 무기를 깔고서 심지어 죽더라도 싫어하지 않는다. 북방의 강함이다. 그래서 군자는 성품이 화합을 우선시하며 남들에게 휩쓸리지 않는다. 강하도다;중립을 지키고 치우치지 않으니 강하도다! 나라에 도가 바로서면 그 강직함을 지키고 변하지 않는다. 덕행이 充实하다. 강하도다. 나라에 도가 바로 서지 않으면 죽더라도,선행을 사수한다.강하도다!)《吴子·图国》“然战勝易, 守勝难. 故曰 天下战国, 五勝者祸, 四勝者弊, 三勝者霸, 二勝者王, 一勝者帝. 是以数勝得天下者稀, 以亡者众.”
2)军: 军队, 고대 주(周)나라의 军队의 编制 单位. 《周禮·地官·小司徒》》“五旅爲师, 五师爲军.” 郑玄 注 “军,萬二千五百人.” 曹操、杜牧 注引《司马法》 “一萬二千五百人为军.” 춘추시대 이후 각 제후국의 군대 편제는 각기 달랐다.
3)旅:《说文》“五百人为旅.” 曹操의 注와 같다.
4)卒: 古代 兵制单位,百人为卒. 卒长为百夫长.《周禮·地官·小司徒》“五人为伍,五伍为两,四两为卒.”
5)伍:고대 基本 兵制单位, 五人为伍.
6)百战百勝,非善之善者: 百战百勝은 진실로 最善,그러나 결국에는 杀伤、耗损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善之善者는 아니다.
7)善之善者: 좋은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다.
8)上兵伐谋: 上兵은 用兵作战의 上策이다. 张预 注 “兵之上也.” 易培基(1880.2~1937.9)《杂记》谓“义不能通”, “上兵”应作“上正(政)”, 其说非是. 伐谋는 智谋로써 敌人을 屈服시킨다는 의미. 曹操 注 “敌始有谋,伐之易也.” 上等의 用兵策略은 谋略으로써 승리를 얻는 것이다. 伐: 토벌하다, 공격하다. 《老子》(제64장 守微章)의 “其安易持, 其未兆易谋, 其脆(柔軟)易泮(解), 其微易散, 为之於未有, 治之於未乱.”
9)伐交: 伐以交. 外交의 방법을 통해서 적국에 战勝한다. 敌國의 연맹군(联盟軍)을 와해시키고, 자신의 동맹국을 확대하거나 공고히 하여 적국을 고립시키어 결국은 부득이 아군에 굴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국시대에서 秦나라가 “遠交近攻”의 전략을 구사하여 6국을 멸하고 외교수단으로써 군사에 응용하여 성공한 것이다. 진나라 재상 張儀의 활약이 대단하였다.(《사기․장의열전》, 6국은 맹약을 맺고 있었지만, 장의는 자신의 주장을 밝혀 열국을 흐트러뜨렸다. 6국의 재상인 소진이 합종책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던 시기에서 연횡책을 주장한 장의의 역할은 엄청 컸다.) 陈皞(진호)、张预 등은 “交”를 “伐於两军交合”이라 풀이하였는데, 내용이 편협되었다. 李筌(이전) 注에서 “伐其始交也.” 梁孟氏 注 “交合强国,敌不敢谋.”이라 하였다. 故로 “交”를 “外交”라고 풀이하는 것이다.
10)其下攻城: 其中 最下等의 用兵方略이 攻城(적군의 요새를 공략함)이다. 其는 指示代名词, “其中”의 의미이다.
11)修櫓轒辒: 修는 수리하다.《国语·周语》“修其簠簋”,韦昭 注 “修, 备也.” 曹操 注 “治也.” 櫓는 曹操 注에 “大楯也.”(큰 방패)이라 하였다. 轒辒(분온)은 古代 攻城用의 四轮车로써 나무로 덮고 그 위에 牛皮로 감싸며 그 밑에는 수십 명의 사졸이 배체된다. 杜牧 注 “분온은 사륜거이다. 큰 목재를 사용하여 위를 덮고 그 위에다 소가죽으로 덮어씌우고, 그 밑에는 10명의 사졸을 수용할 수 있다. 왕래하면서 흙을 운반하여 적군의 성을 두르고 있는 해자[水路]를 메우며, 나무나 돌에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의 목로[나무로 만든 당나귀]이다.(轒辒,四轮车,排大木为之,上蒙以生牛皮,下可容十人,往来运土填堑,木石所不能伤,今俗所谓木驴是也).”
12)具器械: 具는 갖추다(修置, 准备). 攻城할 때 쓰이는 각종 器械를 준비하다.
13)距闉(거인): 垒道(누도), 土山, 攻城하기 위하여 적군의 성 가까운 곳에 흙을 쌓아올린 토산이며, 적군의 상황을 살피고 성을 지키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토산 위에서 火器를 발사하거나, 성을 건너가기에 편리하다. 고대 전쟁에서 성을 공격하는 데는 필수였다. 闉은 “堙(인: 토산)”자와 통한다. 已는 止, 完工하다. 三月: 시일이 장기간 지체된다는 의미.
14) 忿: 분노하다, 자제력이나 인내심을 잃다. 공을 세우는 일에만 급급하여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15)將: 將帥. 장수가 지나치게 그의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면 휘하 사졸들을 마치 개미처럼 부리어 성을 공략하게 한다. 蚁附: 휘하 사졸들을 개미처럼 성을 기어오르게 한다. 蚁는 “如蚁一样……” 으로 해석한다.
16)拔(발): 성을 격파하여 탈취하는 것을 발이라 한다.(破城而取之曰拔.) 군사상의 거점을 탈취하는 것. “연이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탈취하다.(连拔数城.)” 明나라 唐顺之《重修解州关侯庙开颜楼记》“그러나 관후[관우]로 하여금 적군의 날카로운 사기를 꺾고 성을 공략하는 장군이 되게 하기 보다는, 관후로 하여금 결사전을 벌이는 장군이 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孰與는 孰若과 같으며, 후자를 강조한다.
17)非久: 시일을 지연시켜 지구전을 펼쳐서는 안된다.
18)必以全争於天下: 全은 온전하게 하다. 全勝의 战略으로써 천하를 쟁탈한다는 의미이다.
19)兵不顿: 병력의 우세와 사기가 왕성함을 가리킨다. 頓(돈)은 鈍(둔)과 통하며, 피로하거나 좌절하다는 의미이다. 兵刃不钝,兵锋未损. 战鬪力未损,士氣未挫.
20)十则围之: “十”은 적군의 병력보다 10배가 우세일 때. 아군의 병력이 절대 우세일 때는 반드시 적군을 포위하여 굴복시킨다.
21)倍则分之,敌则能战之: 倍는 적군의 병력보다 두 배가 많을 때. 敌은 匹敌하다는 의미. 적군의 병력보다 두 배가 많은 아군이 있을 때는 군대를 양분하여 적군을 공격하여 소멸시키고, 만약 쌍방의 병력이 대등하다면 대항하여 공격할 만하다.
22)逃: 아래의 “避”자와 異文同义로써 벗어나다는 의미이다. 主动적으로 적에게 대항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후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의미이다. “逃”는 不战일분만 아니라 “屈於人”(피동사이다)이다. “避”는 一时之策에 불과하며, 时機가 도래하면 즉시 적군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23)不若: 각종 조건이 적군에 비해서 불리하거나 열세(劣勢)일 경우.
24)小敌之坚, 大敌之擒: 장수가 아군의 역량을 잘 분석하여 적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초래된 결과를 말한 것이다.
26)隙: 缺也,疏漏之意. 此言将领佐君不周, 有疏漏.
27)患於军: 患은 动词로써 危害를 끼치다. 군대에 해를 끼치다는 의미이다.
28)谓之进: 谓는 “부리다, 명령하다(使)”의 의미이다. 《廣雅·释诂》에서 “谓之进”을 “使之进”으로 풀이하였다. 휘하 사졸들에게 전진하도록 명령을 내리다는 의미이다.
29)縻军(미군): 縻는 본래 소의 고삐(牛辔)라는 의미이나, 여기서는 속박하다는 의미로써 “羁绊(재갈과 올가미)、束缚”와 통한다. 杜牧은 “縻军,猶驾御羁绊,使不自由也.”이라 하였다.《新注》에서 “군대를 속박하여 군대로 하여금 전세에 근거하여 임기응변하지 못하게 한다.(束缚军队,使军隊不能根据情况相机而动.)이라 하였다.
30)同三军之政: 同은 毕以珣의 《孙子叙錄》에서 “冒”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즉 參與、干涉(干预)의 의미이다. 政은 政事、军中行政事务. 曹操 注“军容不入国,国容不入军,禮不可以治兵也.” 梅尧臣 注“不知治军之务而参其政,则众惑乱也.” 주나라 천자의 군대는 六軍으로 구성되고, 제후국에는 三軍으로 구성되었다.
31)权: 权变,权謀. 임기응변.
32)任: 指揮.
33)诸侯之难: 诸侯国乘其军士疑惑之機,起而攻之的災难. 旣~且~: 이미 ~하고 또한 ~하다.
34)乱军引勝: 乱军은 自乱其军(스스로 자신의 군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다)는 의미. 引勝은 勝利를 적군에게 빼앗겨 버린다는 의미이다. 引은 초래하다는 의미이다. 杜牧、王皙 等은 “引勝”을 “적군에게 승리를 안겨주다(致敌之勝)”라고 풀이하였다. 梅尧臣은 “스스로 자신의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스스로 그 승리를 빼앗기게 하다.(自乱其军,自去其勝)”라고 풀이하였다.
35)知勝: 勝利를 예측하다.
36)识众寡之用: 유능한 장수라면 쌍방의 군사적 우열 상황에 대해 면밀한 파악한 다음에 탄력적으로 전세에 부합하고 적절한 작전(전략)을 전개하여 승리할 여건을 만들어 갈 수 있다.
37)上下同欲: 欲은 마음, 의지의 의미. 同欲은 同心同德, 齊心(合心)하다는 의미. 上下는 曹操의 注에서 君臣의 의미로 풀이하였다. 君臣이 同心同德하여 승리의 여건을 조성한다는 의미이다.
38)虞(우): 備, 적군의 공격에 대비하다. 준비를 철저히 하다.
39)将能而君不御: 御는 수레를 몰다(驾驭)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制约、牽制、干涉하다는 의미로 사용됨. 장수가 才能이 있으면 君主가 장수를 믿고서 일체 干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40)《十家注》,《武經》(손자병법) 각 판본에서는 모두 “者”자가 없다. 彼: 敵軍. 己: 我軍.
41)百战不殆: 殆(태)는 危險, 失敗의 의미. 어느 战爭에서도 必勝하며 危险에 빠지지 않는다.
42)《孙膑兵法》又名《齐孙子》,系与《孙子兵法》区别之故.《汉书·艺文志》称“《齐孙子》八十九篇,图四卷”,但自《隋书·经籍志》始,便不见于历代著录,概大约在东汉末年便已失传.1972年,临沂银雀山汉墓竹简出土,这部古兵法始重见天日.但由于年代久远,竹简残缺不全,损坏严重.经竹简整理小组整理考证,文物出版社于1975年出版了简本《孙膑兵法》,共收竹简364枚,分上、下编,各十五篇.对于这批简文,学术界一般认为,上篇当属原著无疑,系在孙膜著述和言论的基础上经弟子辑录、整理而成;下篇内容虽与上篇内容相类,但也存在着编撰体例上的不同,是否为孙膑及其弟子所著尚无充分的证据.1985年,文物出版社出版的《银雀山汉墓竹简(壹)》中,收入《孙膑兵法》凡16篇,系原上编诸篇加上下篇中的《五教法》而成,其篇目依次为:擒庞涓、见威王、威王问、陈忌问垒、篡卒、月战、八阵、地葆、势备、兵情、行篡、杀士、延气、官一、五教法、强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