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3. 삼천 궁녀에게 갈 총애가 한 몸에 모이네
당명황이 예교와 인륜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로서 며느리를 빼앗아 역사에 오점을 남긴 행위는 이씨 당나라의 조상이 “이적”에서 유래한 점과 당대 사회 특유의 “외국화”된 세태 외에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당명황에게는 지고무상한 황제로서 모든 신하와 백성들을 통제하고 주재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봉건시대의 황제는 천하강산을 자신의 재산으로 간주하였다. 천하의 백성들을 부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시중들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재산의 “부수입”이었다. 진시황제가 전국을 통일하고 시행한 중앙집권 전제군주제부터 “천하의 대소사는 모두 황제가 결정하였다(天下之事無大小, 皆決于上).” 황제의 권위는 지고무상 해서 그가 하는 말은 바로 법이 되었으며, 군사적 권한 외에 관리의 인사권, 신민의 생사여탈, 혼인 및 생활방식(주거、기물의 용도、옷의 색깔、장신구)에 대해 간섭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사회적 제약을 받지 않는 전제 황권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봉건시대에 가장 먼저 지배를 당하는 대상은 바로 사람들이었다. 중국봉건사회에서 각 왕조마다 황제가 혼인할 때는 본 부인 외에 여러 명의 첩을 둘 수 있다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황제가 후비에 대한 총애는 분명히 사람의 감정이지만 그것은 또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이기적이었다. 이러한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감정은 “짐은 곧 국가다(朕卽國家)”라는 황권과 결합하여 늘 흉악무도하고 음란한 짓을 마구 일삼는 야만적인 성질로 변질되어 후비를 서인(평민)으로 폐하여 궁중에서 사사하거나 사지를 훼손하여 부장(附葬)하도록 하였다.
황제들은 결혼할 때 본 부인 외에 많은 첩을 거느렸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같이 “여색을 좋아하였다(寡人好色).” 이로 봤을 때, 황제는 후궁의 비빈과 궁녀들 그리고 관료와 서민 집안의 부인과 딸들을 보고 마음에 들면 마음대로 “은총”을 내려 욕정을 발설할 수 있었다.
정권(政權)、신권(神權)、족권(族權)、부권(夫權)의 거듭된 압박하에 생활했던 부녀자들은 사회정치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없었으며, 순한 양처럼 가장과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해야만 했다. 그녀들은 가장의 사유재산이자 남편의 대를 이를 주는 도구였다. 귀족、고관대작의 처、첩이라고 해도 자녀를 양육하는 것 외에는 집안에서 하녀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수왕의 비 양옥환이 도교에 입문하여 입궁한 후 큰 총애를 받았지만 여인으로서 그녀의 사회적 위치와 운명에는 어떤 실질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독자 여러분은 당명황이 계획적으로 며느리를 강제로 입궁시킨 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양옥환은 도고(道姑)의 신분으로 흥경궁에 들어간 후 즉각 칭호가 있는 비빈으로 책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당명황의 총애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 일년도 안되어, 양태진은 궁중에서 그녀의 시어머니인 무혜비와 같은 황후의 예를 받았다. 당명황이 밖으로 행차할 때면 양태진은 곁에서 시중들었고 함께 수레를 타고 갔다. 말을 타면 환관의 우두머리 고력사가 고삐와 채찍을 잡았다. 궁중에서 700명의 사람들이 양태진이 사용할 수 있도록 비단을 짜고 자수를 놓았다. 또 몇 백 명의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각종 금、옥 같은 귀중한 기물들을 만들어 생일이나 명절 때 사용하였다.
양태진은 촉 땅에서 태어나 신선한 여지를 좋아했다. 여지는 남방과일로, 껍질이 홍자색、청록색 등의 색깔을 띄고 있으며, 과육은 응고된 기름처럼 신선하고 희며, 즙이 많고 맛은 감미롭고 향기로웠다. 그러나 여지는 신선도를 유지하기 어려워 딴 뒤 2~3일 지나면 색과 맛이 사라져 버린다. 양태진의 입맛을 충족하기 위해 당명황은 명을 내려 사천 부주(涪州)[지금의 사천성 부릉(涪陵)]에서 여지를 경성으로 운송해오도록 하였다. 여지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먼저 부주에서 다 익어 가는 여지나무를 파내 큰 항아리에 옮겨 심고, 배를 이용해 장안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운반해온 다음 여지를 따서 신속하게 궁중으로 보냈다. 만당(晩唐)의 시인 두목(杜牧)은 다음과 같이 읊조리고 있다. “말 탄 사람 먼지 날리니 귀비는 웃고, 여지가 오는 것임을 아는 이 없네(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荔枝來).”
황궁에서 양태진의 복식과 사용한 기물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이것은 지방의 주、현 장관에게 진기한 보물들을 받쳐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영남절도사[치소는 지금의 광주시(廣州市)] 장구장(張九章)、광릉(廣陵)[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 장사(長史) 왕익(王翼)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노리개와 희귀한 옷을 올려 한 사람은 3품을 받고, 한 사람은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승진하였다.
천보 3년(744) 늦봄, 날씨가 따뜻하고 꽃은 만발하여 장안과 낙양에는 “모란제(牡丹祭)”가 열릴 시기였다. 경성의 사대부와 백성들은 각 사찰과 명승지로 가 모란꽃을 감상하였다. 모란꽃은 유명한 관상용 화초로, 매년 늦봄에서 초여름에 꽃이 피고, 홍、백、자색의 몇 가지 색깔이 있다. 꽃잎은 겹겹이 포개어져 있는데 크고 색깔이 짙어 역대로 “부귀의 꽃”으로 불려져 왔다. 황가의 금원(禁苑)과 내궁에도 각종 모란꽃을 심어 놓고 있었다.
흥경궁 침향정 앞에 심어 놓은 모란꽃 역시 이때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었다. 당명황은 보고를 듣고 바로 양태진과 함께 모란꽃을 감상하러 갔다. 동시에 악공 이구년(李龜年)에게 명을 내려 이원제자들을 불러와 노래를 불러 흥을 돋구도록 하였다. 눈앞에는 알록달록한 모란으로 가득하여, 그 경관은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당명황은 순간 마음이 격동되어 한림대조(翰林待詔) 이백(李白)이 생각나서 말했다. “태진과 함께 명화를 감상하는데, 어찌 옛날 노래를 쓸 수 있나!” 바로 이구년에게 명하여 궁중의 “금이 칠해진 편지지(金花箋)”를 가지고 이백을 찾아 새로운 곡을 짓도록 하였다.
이구년은 출궁한 후 이백을 찾아 어명을 전하였다. 이백은 흔쾌히 어명을 받들어《청평조(淸平調)》3장을 지었다. 이구년은 이 새 곡을 가지고 회궁하여 당명황에게 올렸다. 당명황은 읽어보고 바로 이원제자들에게 악기로 연주하게 하고, 이구년에게《청평조》를 부르도록 하였다.
雲想衣裳花想容, 구름 같은 옷 꽃 같은 얼굴,
春風拂檻露華濃. 난간 스치는 봄바람인 양 꽃잎에 맺힌 이슬인 양.
若非群玉山頭見, 서왕모의 군옥산에서 볼 수 없다면,
會向瑤臺月下逢. 요대의 달빛 아래서나 만날 수 있으리.
一枝紅艶露凝香, 요염한 꽃가지에 향기 머금은 이슬,
雲雨巫山枉斷腸. 무산의 사랑도 부질없이 애만 끊나니.
借問漢宮誰得似, 묻노니 누가 한나라 황후와 비교하는가,
可憐飛燕倚新妝. 애석하다 비연은 화장한 미인인 것을.
名花傾城兩相歡, 아름다운 꽃과 양귀비 서로 반기니,
長得君王帶笑看. 임금은 언제까지나 미소를 머금고 보네.
解釋春風無限恨, 봄바람의 끝없는 시샘을 녹이려는 듯,
沈香亭北倚欄干.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서 있네.
《청평조》3장은 양태진의 미모와 다른 후궁들을 압도하는 총애를 찬양하였다. 모란꽃처럼 아름답고 장중한 미인은 신선들이 사는 옥산(玉山) 요지(瑤池) 같은 선경(仙境)에서만 만날 수 있었고, 한나라 때의 조비연 만이 그녀에 비견될 수 있었다. 군왕이 명화와 미인을 대하고 있노라면, 아무리 큰 근심이 있더라도 금방 사라질 것이다.
양태진은 이구년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희색이 만연하였다. 그녀는 칠보유리잔을 들고 서량(西凉)의 포도주를 음미하며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당명황의 눈에 양태진이 술을 음미하며 노래를 듣고 찬미를 받는 모습은 그야말로 무성하게 핀 모란꽃처럼 의젓하고 아름다웠다. 당명황은 흥겨운 마음을 누르기 어려워 옥 피리 하나를 들고 이구년의 노래에 맞춰 반주를 하였다. 노래가 끝나자 양태진은 급히 몸을 세워 당명황에게 감사의 절을 하였다.
<그림> 화청지 주변을 돌 수 있는 긴 복도
어느덧 천보 4년(745) 가을이 되었다. 7월 26일, 좌상(左相) 겸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적지(李適之)와 황문시랑(黃門侍郞) 진희열(陳希烈)이 어명을 받들어 정、부 사자의 신분으로 좌위훈이부우랑장(左衛勛二府右郞將) 위소훈(韋昭訓)의 집에 와 그의 둘째 딸을 수왕 이모의 새로운 비로 책봉한다고 선포하였다.
10일 후, 당명황의 61세 생일[천추절(千秋節)]이 막 지나자, 그는 정식으로 27세의 양태진을 “귀비(貴妃)”로 책봉하여, 명실상부한 부부가 되었다. 당나라의 후비 제도에는 귀비(정1품)는 사부인(四夫人)의 으뜸으로, 지위는 바로 황후 다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궁중에서 황후는 이름만 있을 뿐이어서 양귀비가 바로 칭호가 없는 황후였던 것이다.
10일 사이에 아들이 장가들고, 아버지는 비를 책봉하여 황궁에는 즐겁고 경축스런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근 6년 여 동안 수왕의 마음을 누르고 있었던 슬픔과 두려움은 마침내 부황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그는 공경과 순종적인 효심으로 황자인 동시인 친왕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다. 수왕의 마음을 덮고 있던 근심의 그림자는 이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저택에서 새로운 왕비 위씨(韋氏)와 예전처럼 조용하고 한적한 생활을 하였다. 천보 연간, 수왕의 두 아들이 연이어 군왕(郡王)에 봉해졌다. 조카 대종(代宗)[이예(李豫)]가 즉위한 후인 대력(大歷) 10년(775)에 수왕은 사망하였다. 그는 근 60세를 살았으니 선종(善終)한 셈이었다.
양옥환에게 있어 귀비로 책봉되는 영광은 10년 전 수왕 비로 책봉되었을 때의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여인으로서 가장 영광된 자리에 올랐고 이미 명실상부한 후궁의 주인 되었다. 그녀가 작위를 받음에 따라 양씨 집안에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영예와 부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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