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唐楊貴妃

2. 일국의 재상으로 벼락출세한 양국충

마장골서생 2009. 11. 9. 15:55

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2. 일국의 재상으로 벼락출세한 양국충


 양국충(楊國忠)은 본명이 양교(楊釗)이다. 양귀비에게는 같은 증조부를 둔 6촌 오빠가 된다. 양교의 조부와 부친은 생전에 모두 지위가 매우 낮았다. 그의 외삼촌은 무측천(武則天: 624~705)1)의 면수2)이자 환관 장이지(張易之)이다. 장이지는 신룡(神龍) 원년(705)의 궁중의 정변이 발생하였을 때 피살되었다. 생전에 추문이 가장 많았던 인물이다.

 양교는 청년시절에 사람 됨됨이가 비록 총명하였으나 도리어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술을 좋아하고 도박을 즐기는 무뢰한이었다. 친척과 고향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천대받았다. 30세 때 그는 굳게 결심하고 사천성 촉중(蜀中)의 군대에 들어갔다. 일찍이 현위(縣尉) 같은 말단관직을 지낸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항상 도박에 빠졌다. 촉중에서 10여 년간 지내면서도 양교의 운명은 불우하여 그리 순탄하지는 못하였다. 다행히 선우중통(鮮于仲通 693 755)이라는 갑부를 사귀어 뜻밖에 물질적 도움을 받았다. 그 기간에 그는 항상 당숙 양현염(楊玄琰: ?~ 718)의 집을 왕래하였다. 그때 양현염이 죽게 되자 양교는 일찍부터 당숙의 집안 식구들을 관심을 갖고 돌보았으며, 이로 인하여 선천적으로 풍류기질을 타고난 6촌 여동생 양옥쟁(楊玉箏: 나중에 현종으로부터 괵국부인으로 봉해졌다.)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양교가 사귀었던 갑부 선우중통은 학식과 지혜를 갖춘 인물이었으며, 사천성 성도(成都)의 검남(劍南)의 절도사로 있던 장구겸경(章仇兼瓊)이 그를 관리를 감독하는 직책인 채방지사(采訪支使)로 임명할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양옥환이 천보 4년(745) 귀비로 책봉된 뒤에, 선우중통은 바로 장구겸경에게 양교를 추천하였다.

 장구겸경은 양교가 체격이 훤칠하고 용모가 단정하고 말솜씨가 재치 있음을 알고 나서 대단히 만족하고 바로 그를 관리로 추천하였으며, 그와 절친하게 교제 하였다. 얼마 뒤에 장구겸경은 양교를 수도 장안으로 파견하여 촉중의 비단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양교가 성도 근교의 비현(郫縣)을 지나갈 때에 장구겸경이 이미 준비해두었던 가치가 일만 꿰미(만관[萬貫])에 달하는 각종 촉중의 특산물을 호송하여 쉬지 않고 장안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장안에 도착한 뒤, 양교는 양씨 일가의 여러 형제자매들을 일일이 예방하여, 촉중에서 가져온 고급 선물들을 직접 전달하였으며, 아울러 이러한 일은 검남절도사 장구검경이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양교는 특별히 그가 가져온 촉중의 공물 절반을 평소 재물에 욕심이 많은 괵국부인(虢國夫人)에게 바쳤다. 괵국부인은 이 때 남편이 죽고 나서 홀몸으로 지내고 있었기에 외로움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며, 자연스럽게 젊은 시절처럼 양교와 열애하였다. 괵국부인과 양씨 집안 형제자매들의 추천을 통해서, 양교는 부름을 받아 입궐하여, 현종3)과 양귀비를 알현하였다. 현종은 먼저 양교가 대명궁의 소속 관리인 공봉관(供奉官)을 따라서 대명궁(大明宮)을 출입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해주었다. 이어서 또 금오병조참군(金吾兵曹參軍)으로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양소는 궁궐과 조정에서 자신의 본심을 속이고 남에게 영합하고, 권력자에게 아첨하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권력의 정상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갔다.

 양교가 장안에 온 뒤에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로 첫째, 황제의 측근 후궁들의 힘을 빌린 것이다. 즉 양귀비의 세 자매들과의 파벌관계가 있었다. 둘째, 양교 자신의 총명한 천성과 유능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교는 항상 궁궐을 출입할 수 있었으며, 현종과 양귀비 등이 오락을 즐길 때에 양교는 항상 그들 옆에서 점수 계산을 책임졌으며,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처리하였다. 이 때문에 현종의 칭찬과 상금을 받았으며, 현종은 양교를 일컬어 훌륭한 회계사하는 의미의 “호탁지랑(好度支郞)”이라 불렀다. 그리고 양귀비 자매들은 현종의 그러한 농담을 근거로 하여 양교에게 당시의 총신인 호부낭중(戶部郞中) 왕홍(王鉷)의 휘하의 판관(判官)이 되게 하였다. 얼마 뒤에 양교는 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승진하였다.

 천보 5년(746)부터 벼슬에 올랐는데 양교는 먼저 감찰어사(監察御史)에서 검교탁지원외랑(檢校度支員外郞)、시어사(侍御史)、감수륙운사(監水陸運使)、 사농사(司農使)、출납전물사(出納錢物使)、내중시매사(內中市買使),소모검남건아사(召募劍南健兒使) 등의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또 맡은 소임에 충실하여 (국가의 재정을 관장하는) 탁지낭중(度支郞中)으로 승진하였다.

1년 안에 한 몸에 15개 이상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뒤이어 2년 동안 양교는 또 급사중(給事中)、어사중승(御史中丞)、전판탁지사(專判度支事) 등의 직책을 맡았다.

 “탁지(度支)”라는 사무는 국가의 재정수지(財賦收支)를 통계내고 계산하는 일을 책임진다. 양교는 왕공(王鉷) 등과 모두 백성들로부터 재산을 긁어모으고 재물을 수탈(收奪)하는 일에 솜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천보(天寶: 742∼755) 시기에 현종은 신하가 공을 세우는 일을 크게 좋아하여, 변방 국경지역의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군비(軍費)의 지출이 엄청 컸다. 게다가 궁궐의 사치와 낭비로 인하여 비용이 날로 증가하였다. 이리하여 재정과 양식을 관장하던 양교는 날로 현종의 신임을 두텁게 얻었다.

 천보 8년(749) 봄에 현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태극궁(太極宮, 西內)의 좌장(左藏)이란 국가의 창고를 참관하였으며, 그 속의 재화전폐(財貨錢幣)가 산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현종은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으며, 즉시 양교에게 자의금어대(紫衣金魚袋)를 상으로 하사하였다. 자의금어대는 바로 황제가 3품(三品) 관원(官員)에게 하사하는 복장(服裝)으로써, 또한 (관직의 품계를 나타내는 표식이 달린 관복이라는 의미로) “장복(章服)”이라 하기도 한다. 장복(章服)을 상으로 하사받는 것은 당연히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다음해 양교는 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겸직하였다. 그해 10월에 양교는 그의 외삼촌 장이지(張易之) 형제의 명예회복을 위해 주청하였다. 현종은 마침내 양교의 주장에 동의하고 아울러 그때 모반을 도모한 “역적(逆賊)”이란 오명을 없애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이어서 양교는 천보 9년(750) 10월에 자신의 이름인 “교(釗)” 자(字)가 당시 도참설(圖讖說)에서 주장하는 “묘금도당위(卯金刀當位)” 즉 “유씨(劉氏)가 황제가 된다.”라는 것과 서로 일치한다고 하여 현종에게 개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현종은 바로 양교에게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4)

 개원(開元: 713∼741) 후기 이래로 재상 이림보(李林甫)가 조정(朝政)을 장악하고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당파들을 배척(排斥)하였다. 그래서 양교는 처음부터 바로 이림보에게 몸을 의지하여 이림보를 위하여 정치권의 하수인을 자처하였다. 양교는 먼저 시어사(侍御史) 양신긍(楊愼矜)과 함께 이림보의 사주(使嗾)를 받아서 태자(太子) 이형(李亨: 현종의 셋째 아들, 훗날 숙종으로 즉위함)의 비(妃) 위씨(韋氏)의 오빠인 위견(韋堅) 일당을 모함하였으며, 뒤에 또 왕홍(王鉷)과 함께 양신긍(楊愼矜) 형제를 함정에 빠뜨려 살해하였다. 경조부(京兆府)의 법조(法曹)인 길온(吉溫)이 양국충(楊國忠)의 권세(權勢)가 날로 높아지는 것을 보고서 바로 남몰래 양국충을 위해 좋은 계책을 내었다. 이림보의 재상 권력을 빼앗아 양국충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것이었다. 양국충은 길온의 계책을 활용하여 기회를 틈타 이림보의 일당인 경조윤(京兆尹) 소경(蕭炅),어사중승(御史中丞) 송혼(宋渾) 등을 조정에서 몰아내었다. 결국 현종으로부터 받는 은총(恩寵)과 지위와 명망이 양국충 자신보다 높은 왕홍을 향하여 칼을 뽑았으며, 왕홍의 아우인 호부낭중(戶部郞中) 왕심(王鐔) 등이 “몰래 반란을 도모한 일”을 기회로 삼아, 우물에 빠진 사람을 돌을 던져 괴롭히듯이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옥사(獄事)를 날조하여 왕홍 형제 일당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5∼6년의 짧은 시기 동안에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고심(苦心)한 끝에 양국충은 8품(八品) 말단관리에서 그 권세가 재상 이림보 다음가는 높은 자리까지 신속하게 승진하였다. 이것은 특권을 누리는 귀족자제들의 경우 아무리 빠른 승진이라 할지라도 보통 20여 년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양국충이 처음 입신출세를 하였을 때, 조정의 관리들은 양국충이 파벌관계에 의지해서 갑자기 요직에 오른 일을 두고 모두 조소하고 멸시하였다. 그러나 양국충의 초고속 승진하여 순풍에 배를 몰듯이 그에게 의지하거나 아첨하는 사람들도 나날이 많아졌다. “구밀복검(口密腹劍)” 즉 달콤한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항상 음모로써 남을 해치려하여 “육요도(肉腰刀)”5)라고 불렸던 이림보조차도 양국충이 자신의 측근과 일당들을 제거하는 것을 빤히 쳐다볼 뿐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 때 당나라 중앙의 조정에서도 천보(天寶: 742∼755) 후기부터 시작해서 현종은 이미 양국충에 의지하여 점차 이림보를 멀리하게 되었다. 비록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하여 정사(政事)를 등한시하고 어리석음이 날로 심하였다하지만, 현종은 결국은 노련하고 정확하여 빈틈이 없는 정치가였다. 각종 권모술수를 능숙하게 부리며 권력(權力)의 균형과 전환을 주도하였다. 이림보가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18년 동안 권력을 전횡(專橫)하였으나, 이미 몸은 늙고 병도 깊었다. 이러한 요소가 있었기에 양국충은 정치권력상의 “벼락출세자(暴發戶)”가 되었으며, 객관적 형세를 만들었다.

 이밖에 또 흥미진진한 요인이 하나 있다. 이림보가 처음에 무혜비(武惠妃)에게 아첨을 하고 아울러 수왕(壽王) 이모(李瑁)에 의지하려한 바가 있었다. 뒤에 양옥환(楊玉環)이 도교에 입문하여 입궁하던 일에 대해 태도가 분명하지 않았다.(역사서에서는 기록이 없음) 게다가 이림보는 또 처음에 어명을 받들어 양옥환을 수왕의 비로 책봉하는 일을 선포하러가는 정식 사신인 정사(正使)였다. 이러한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 속에서 이림보는 양귀비와 사이가 나빠져서 얼마만큼이나 틈이 벌어졌을까? 이러한 일은 현종이 이림보를 신임하는 것에 영향을 주었을까? 역사서에 분명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천보 11년(752) 11월에 이림보가 병사하였다. 며칠 뒤 현종은 양국충을 우상(右相) 겸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임명하고, 이림보의 직책과 권한을 승계하게 하였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림보는 생전에 위선적이고 아첨을 잘하며 매우 교활하고, 권력을 전횡하고 독단적이며, 재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과 명망이 높은 사람과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는 관리들을 배척하고 모함하여 수많은 원한과 저주를 초래하였다. 이림보가 죽기 몇 달 전에 당나라 남부의 속국인 남조(南詔 649∼902)6)가 검남(劍南: 지금의 사천성과 운남성)의 변경을 끊임없이 침범하는 기회를 빌리어, 양국충을 수도 장안에서 몰아내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현종에게 양국충을 검남으로 파견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도록 주청하였다.(양국충은 천보 10년 11월부터 검남절도사의 직책을 명받았다. 당시 부임하지는 않았음.) 양국충은 검남으로 떠나기 전에 현종 면전에서 통곡하며 호소하여 이것은 이림보가 양국충 자신을 모함하여 해치려는 의도라고 주장하였다. 양귀비도 양국충을 위해 적극적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양국충은 검남에 도착한 뒤 얼마 안 되어 또 다시 수도 장안으로 불려왔다.

 앞에서 말한 대로, 양국충은 언행이 경박하고 상도에 벗어났으며, 수단이 악독한 자였다. 그는 재상의 자리에 오른 지 두 달도 안 되어 바로 사람을 사주하여, 이림보가 생전에 외국인으로 장군이 된 아포사(阿布思)와 공모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고 모함하고, 아울러 이 사건을 계기로 삼아 이림보의 잔당 세력까지 숙청하려하였다.

 천보 12년(753) 2월에 현종은 양국충 일당이 올린 무고와 거짓 증거를 신임하여, 이림보 생전의 벼슬을 박탈하고, 그의 아들 친척 중에 관직을 가진 자들은 모두 제명하고 남방으로 유배하였으며, 가산은 몰수하여 관부에 귀속시켰다. 기타 관련자들은 연루되어서 관직에서 면직되어 쫓겨난 자가 40명이 넘었다. 더 악독한 것은 양국충이 화풀이하고 보복하기 위하여 사람을 사주하여 이림보의 관을 부수고 시신 입속에 넣어 둔 옥구슬을 탈취하였으며, 몸에 걸친 “장복(章服)”인 자의금어대(紫衣金魚袋)를 벗겨낸 뒤, 작은 관으로 바꾸어 평민의 상례로 장례를 치르게 한 일이다.

 그 후로 양국충은 좌상(左相) 진희열(陳希烈)과 더불어 반란 음모 사건을 해결한 공이 있어 모두 국공(國公)이란 벼슬을 하사받았다. 이로부터 양국충은 “안사의 난(安史之亂)”이 발생하기까지 조정을 장악하였다. 조정의 공경백관(公卿百官)들은 양국충의 은총과 권세를 두려워하여 서로가 조심하여 명철보신(明哲保身)을 추구하였으며, 군사와 국정의 대사(大事)에 대해서 감히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 무측천: 당나라 고종 이치(李治)의 황후, 본명은 무조(武曌). 낙양으로 천도하고, 690~705년간 재위함. 시호(諡號)는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 하였다. 임어당(林語堂: 1895~1976) 선생의《무측천정전(武則天正傳)》이 유명하다.

2) 면수(面首): 남총(男寵), 남친(男親), 귀부인의 성적 노리개, 간통하는 남자, 간부(奸夫).

3) 당나라 현종(682∼762): 묘호(廟號)는 현종(玄宗)이며, 시호(諡號)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다. 당나라 후기에서 당명황으로 불려짐.

4) 《신당서(新唐書)》권206 《외척양국충열전(外戚楊國忠列傳)》 “양국충은 본명이 교인데, 당시 도참설에 ‘유씨가 황제가 된다.’라는 말이 있어서 어사중승을 지낼 때, (현종에게 개명을 요청하여) 현종은 고쳐서 지금의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國忠本名釗, 以圖讖有'卯金刀'當位, 御史中丞時, 帝爲改今名.)”

5) 오대(五代) 사람 왕인유(王仁裕)《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육요도(肉腰刀)》“이림보는 어진사람을 미워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시기하여, 백관들과 잘 화합하지 못하였다. 황제에게 주청을 올릴 때 마다 많은 신하들이 모함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림보를 (살로 만든 칼을 허리에 차다, 부드러운 칼[음모]로 사람을 해친다는 의미의) 육요도라고 불렀다.(李林甫妒賢嫉能, 不協群議, 每奏御之際, 多所陷人, 衆謂林甫爲肉腰刀.)”

6) 조(詔)는 왕(王)이란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