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唐楊貴妃

2. 당나라 사회에는 “이민족의 풍속”이 많았다

마장골서생 2009. 9. 11. 17:56

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2. 당나라 사회에는 “이민족의 풍속”이 많았다


양옥환이 세속을 떠나 출가한 것에 대해 제도하는 칙문에는 그녀 자신이 “진심으로 청한 것(由衷之請)”이라고 당당하게 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거짓말은 분명히 당명왕이 수왕의 비가 자청하여 도교에 입문한 것처럼 하기 위해 강제로 명을 내린 것이었다. 이처럼 황제 시아버지가 강제로 며느리를 빼앗아 궁궐에 들여 여색을 즐기는 것은 인륜을 어지럽히는 금수와도 같은 행동이었다. 설사 봉건사회라고 할지라도 “명교를 해치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虧損名敎, 毁裂冠冕)” 죄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만민의 백성이자 신처럼 존경을 받는 황제에게서 발생하였으니, 어찌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겠는가!

독자여러분은 너무 크게 놀라지 마시라. 이런 인륜을 어지럽히는 추태는 고대 궁정에서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당대만 봐도 당명황 이전에 태종과 고종에게도 이러한 전례가 있다.

당태종 이세민은 형제 중에 둘째로, 황제가 되기 전 진왕(秦王)에 봉해졌다. 그는 “현무문 정변”에서 친형인 태자 건성(建成)과 동생 제왕(齊王) 원길(元吉)을 죽이고, 아버지[고조(高祖) 이연(李淵)]를 핍박해서 양위하게 하여 황제가 되었다. 제왕이 피살된 후 그의 비 양씨는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이세민은 그를 궁중으로 들여와 크게 총애하였다. 정관(貞觀) 10년(636), 본처인 장손황후(長孫皇后)가 병사하자 이세민은 양씨를 황후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위징(魏徵)의 권고로 그만두었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여황제 무측천은 원래 당태종의 비빈이자 고종 이치(李治)의 서모(庶母)였다. 태종이 붕어한 후 무씨는 감업사로 보내져 비구니가 되었다. 후에 이치는 태종의 기일에 감업사에서 분향을 하다가 무씨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갖게 되고 옛 정을 못 잊어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오래지 않아 고종은 무씨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 소의(昭儀)로 책봉하고 다시 황후로 세웠다.

당나라 황실에서는 왜 형이 동생의 부인을 거두고、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들이고、아버지가 며느리를 빼앗는 봉건예법에 어긋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남송의 이학자(理學者) 주희(朱熹)는 “당나라의 뿌리는 이적(夷狄)에서 나왔기 때문에 규방에서 예도에 어긋나는 일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唐源流出於夷狄, 故閨門失禮之事不以爲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적”은 봉건시대 한족이 소수민족을 경시할 때 사용한 명칭이었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당나라 황족의 조상은 북위시기의 육진(六鎭)에 속했다. 육진은 바로 당시의 선비(鮮卑)、흉노(匈奴)、유연(柔然)、고거(高車) 등의 소수민족들이 함께 거주했던 북방과 서북지역에 두었다. 당나라의 개국황제 이연의 조상은 무천진(武川鎭)[지금의 내몽고(內蒙古) 무천(武川) 서쪽]에 거주하였다. 북위가 동、서로 분열된 후 서위(西魏)의 권신 우문태(宇文泰)[선비족화된 흉노족 사람]는 관롱(關隴)지역의 이민족、한족 중에 무력과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인물로 대업을 이루었다. 그 후 양씨의 수나라는 서위、북주의 기반을 이어받아 남북을 통일하였다. 수、당의 황실과 그 개국공신들은 대부분 서위 이래의 관롱 지역 군부 출신이었으며, 그 중에 “팔대주국(八大柱國)”이 핵심이었다.

당고조 이연의 조부 이호(李虎)는 북조에서 좌복야(左僕射)에 제수되었고, 조군공(趙郡公)에 봉해졌다. 후에 그는 우문태를 돕고 관중에 들어와 기반을 세워 태위(太尉)、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을 제수 받고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으며, 동시에 혼대야씨(婚大野氏)라는 성을 하사 받았다. 또 모친의 혈통으로 봤을 때, 이연의 모친 독고씨(獨孤氏)、태종의 모친 두씨(竇氏)[즉 선비족의 성씨인 흘두릉씨(紇豆陵氏)]、고종의 모친 장손씨(長孫氏)는 모두 이민족에서 유래하였으며 한족의 성씨가 아니었다. 당나라 황족에게는 이민족의 피가 섞여있고 선비족 중심의 북조 국가들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제도와 풍속 역시 북조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렇게 민족이 융합되어 공전의 번영을 이룩한 기초에서 세워진 왕조에서 이민족과 한족의 풍습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 섞이게 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위、진 이래로 관중과 황하 중、하류 지역으로 이주한 흉노、선비、돌궐、갈(羯)、저(氐)、강(羌) 등의 북방유목민족들은 “처후모(妻後母)”라는 원시적인 혼인방식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처후모”라는 혼인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이곳에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왕소군이 이민족에게 시집간(昭君出塞)” 이야기를 인용한다.

《후한서(後漢書)․흉노전(匈奴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한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 흉노의 호한사선우(呼韓邪單于)가 입조하여 한나라의 사위가 되길 원했다. 원제는 호한사에게 후궁 여인인 왕소군을 하사하였다. 왕소군은 호한사에게 시집을 가 아들 하나를 두었다. 2년 후, 호한사는 병사하였다. 황위를 이은 복주루선우(復株累單于)[호한사 전처(前妻)의 아들]는 옛 풍속에 따라 소군을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다. 소군은 이민족의 이런 나쁜 풍속을 따르길 원치 않아 한나라 성제(成帝)에게 한나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글을 올렸다. 그러나 한나라 성제는 소군에게 호족의 풍속을 따르도록 칙령을 내렸다. 소군은 복주루와 결혼하여 딸 둘을 또 낳았다. 10년 후, 복주루선우는 사망하였다. 소군은 언제 사망하였는지 사서에 분명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인류사회의 혼인방식이 시기마다 방식과 풍속이 다른 것은 사회정치、경제、법률제도의 산물이자 도덕윤리、사회풍속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당나라 전기(前期)는 중국 봉건사회가 가장 강력한 단계에 있어서 국제교류가 빈번하였고 민족 간의 결합이 지속적으로 심화되며 외래문화의 유입과 “만이(蠻夷)” 풍속의 침투로 사회상황에서 “외래화(胡化)”가 특히 두드러졌다. 혼인방식에 있어서도 전기는 후대와 다른 소박하면서고 개방적인 모습이 나타났다.

이런 개방적인 모습은 먼저 젊은 남녀가 배우자를 택할 때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보통 남녀들이 자유롭게 연애를 하다 부부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공경대부의 집안만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당명황 때의 재상 이림보의 경우 성인이 다 된 6명의 딸이 있었는데, 보통 관리의 집안이 구혼을 해오면 허락하지 않았다. 이림보는 집 한가운데 있는 대청 벽에 직사각형 형태의 창문을 만들어 놓고 비단과 여러 가지 보석으로 치장해두었다. 귀족의 자제들이 배알하러 올 때마다 딸들로 하여금 창 뒤에서 보게 하여 자신이 마음에 드는 대상을 골라 혼인시켰다. 현존하는 원진(元稹)의《앵앵전(鶯鶯傳)》[《회진기(會眞記)》라고도 한다] 같은 당대 필기소설 중에 남녀 인물들이 용감하게 혼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모습은 현대인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조관념이 약해져 여자가 이혼하고 재가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다. 당 숙종(이형) 이전 제 황제들의 공주 중에 23명이 재가를 하였고, 4명이 3번 혼인을 하였다. 각급 관리들과 일반가정에서 부친、시아버지가 직접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딸、며느리를 재가시키는 현상 역시 아주 흔했다.

그 다음으로 민족차별이 적어 이민족과 한족간에 통혼이 널리 유행하였다는 점이다. 당나라 조정은 “화친”이라는 정치적 수단으로 소수민족과 신뢰와 유대를 강화하여 국가의 통일과 안정을 공고히 하였다. 당나라 태종에서 당말에 이르는 240여  연간 당나라는 토번(吐蕃)、토욕혼(吐谷渾)、돌궐、거란(契丹)、해(奚)、회흘(回紇)、영원(寧遠)、우전(于闐)、남조(南詔)와 20여 차례의 “화친”을 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충성을 다한 이민족 장수들의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들 중에는 공주나 종실 여인을 아내로 삼은 사람도 있고, 한족의 명문가와 혼인을 맺은 사람도 있었다. 정부는 민간에서 이민족과 한족이 통혼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사신으로 조공을 하러 오거나 무역을 하기 위해 중원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당나라의 여인들과 통혼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로 말미암아 혼인관념에 있어 한족전통의 “이하(夷夏)”관념은 나날이 희미해져갔다. 게다가 수、당 시기 민족이 어울려 섞여 사는 생활로 봤을 때 이민족과 한족간의 통혼 역시 필연적인 추세였으며 막을 수 없었다.

네 번째는 부부간의 혼인관계에서 서로 금기시 하지 않은 것과 음은 성하고 양은 쇠한다는 “음성양쇠(陰盛陽衰)” 현상이다. 사서에 보이는 혼외 간통과 염문은 여황제 무측천을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황제가 된 후 “꽃미남(面首)”을 두었는데, 예쁘장한 소년들을 골라 좌우에서 시중들게 하였다. 심지어 조정의 신하들 중에는 “양의 도가 웅장하다(陽道壯偉)”는 것으로 자천하여 궁궐에 들어와 여황제를 시중하길 원했던 사람도 있었다. 몰래 사통을 일삼는 이런 풍류스런 일 역시 자연히 궁정과 황족종실이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당 고조의 비빈、중종의 위황후와 상관소용(上官昭容) 등의 사람들이 저지른 방탕하고 음란한 일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제 황제들의 공주 중에 거만하고 방자했던 사람들은 꽃미남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거리낌이 없어 황제의 사위이자 남편은 이에 대해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각급 관리와 서민들의 혼외 간통은 너무 흔해 이상할 것이 없었다.

현존하는 당대 필기소설 중에 “꿈에서 임신하다(夢中有孕)”라는 이야기가 있다. 양국충이 강절(江浙) 지역에 사신으로 나가자, 그의 아내 배씨(裵氏)는 남편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병이 생기고 말았다. 어느 날 낮에 배씨는 잠을 자다 꿈속에서 남편을 만나고 이로 임신을 하게 되어 후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양국충이 돌아오자 배씨는 꿈속의 일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양국충은 듣고 나서 “이는 부부가 서로 너무 그리워해서 마음이 통한 것이외다”라고 말했다. 이 “꿈속에서 임신한” 일이 밖으로 알려지자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훗날 사람들이 양국충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적어도 당시 부부 쌍방이 애인을 찾는 것에 관용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자들이 부인 외에 여러 명의 첩을 두거나 기녀를 사서 노는 것과는 달리 상류사회 부인들의 간통과 민간 여성들의 사통 외에 당대 남자들이 “부인을 두려워하거나(惧內)” 부인들이 “질투심이 강하고 사나운(妬悍)” 현상 역시 아주 흔했다. 지금까지도 회자인구 되는 “식초를 먹다(吃醋)”라는 전고는 당태종이 관국공(管國公) 임괴(任瓌)의 아내에게 독주(毒酒)(실제로는 식초였다)를 하사한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음강양유(陰剛陽柔)”의 이런 현상은 북방지역 이민족의 풍속을 오랫동안 흡수하고 북조의 유풍을 계승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방의 선비、돌궐、거란、당항(黨項) 등의 민족은 혼인방식이 비교적 원시적이어서 여성들은 자유롭고 거리낌이 없었고 예법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안록산이 “이민족 사람들은 모친을 우선으로 하고, 부친은 그 다음이다(胡人先母而後父)”라고 말한 것은 소수민족 중에 부녀자가 사회 내지 가정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농업을 위주로 하는 중원의 부녀자와는 달랐으며, 그녀들은 남자와 같이 말을 타고 방목하며 수렵에 참가하여 강인하고 씩씩한 기상을 길렀음을 설명한다.

소수민족이 중원으로 대량 이주한 후로 이러한 여존남비(女尊男卑)의 풍속은 자연히 점차 사회 전체의 풍조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수나라와 당나라에 “외래화”된 풍속이 만연했던 까닭이었다.

수나라에서 당나라 초기까지 최고통치자들은 역대로 “중화는 귀하고, 이민족은 천하다(貴中華, 賤夷狄)”라고 하는 한족전통관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위로 황제와 친왕、귀족과 고관대작에서 아래로 사、농、공、상을 망라하는 각 계층이 “이민족의 풍습(胡風)”을 대단히 좋아하였다. 일상생활의 의식주에서 춤、스포츠、오락에 이르기까지 이민족의 풍속이 선명하게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외래화”된 이런 경향은 자연히 장안、낙양과 일부 대도시에서 가장 성행하였다.


<그림> 흥경궁 내의 침향정(沈香亭)은 침향목(沈香木)을 사용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당나라 때 무수한 주연(酒宴)、시사(詩詞)、가무들이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당태종 정관 연간, 장안성에는 이미 “호모(胡帽)”가 유행하였다. 당명황 개원연간, 궁중의 어가를 따르는 궁녀들은 말을 탈 때 이민족의 모자를 쓰고 진한 화장을 한 채 얼굴을 드러내어 당나라 초기처럼 더 이상 망토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안록산의 난” 전후로 돈이 있는 도시인들 가운데 “회흘복(回紇服)”을 입는 것이 유행하였다. 지존인 황제에서 비천한 하인들의 “평상복(常服)”에 이르기까지 일률적으로 옷깃이 둥근 두루마기를 입고 두건으로 머리를 싸매며 목이 긴 장화를 신었다. 황제와 백관들의 예복인 “법복(法服)”은 품이 넓고 소매가 큰 두루마기에 높은 관을 쓰고 헐렁한 허리띠를 찼는데, 대부분 제사나 조회 등의 정식적이고 성대한 상황에서 입었다.

부녀자들의 의상과 화장은 더욱 “외국화” 되었다. 호모、호복、융장(戎裝)、남장(男裝)、“앞쪽이 작은 신발과 몸에 달라붙는 의상(小頭鞋履窄衣裳)”과 헐렁한 블라우스를 입고 가슴을 노출시킨 의상들은 지금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부녀자들의 헤어스타일 역시 매우 다양하였다. 고계(高髻)、추마계(墜馬髻)、오만계(烏蠻髻)、추계(椎髻)、포가계(抛家髻)、쌍라계(雙螺髻)、쌍환망선계(雙鬟望仙髻) 등 종류가 아주 많았고 모양도 각양각색이었다.

위、진 이래로 유행한 “외국음식(胡食)”은 당대에 더욱 성행하였다. 만드는 방법이 다양한 호병(胡餠)、고창(高昌)의 포도주、페르시아의 삼륵장(三勒漿)은 당나라 사람들이 즐겨먹던 음식들이었다. 당 태종 때 궁중에 이미 서역의 기술로 포도주를 빚기 시작하였다. 서역에서 온 장인、상인들이 잇따라 주점을 열었다. 장안성 동남쪽의 곡강(曲江) 일대, 특히 성내의 서시(西市)에는 호상들이 연 주점이 많았다. 주점에는 가무로 술시중을 드는 호기(胡妓)(외국여성)가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돈이 있는 공자나 도령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백 같은 문인학사들도 호인들이 연 주점의 단골손님이었다. “떨어진 꽃 다 밟고 나면 어디에서 놀까? 미소지으며 서 있는 호기의 주점에 들어가네(洛花踏盡遊河處? 笑立胡姬酒肆中).” “꽃 같이 아리따운 호희, 방긋 웃으며 술을 파네(胡姬貌如花, 當壚笑春風).” 그들의 마음은 술을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리따운 손으로 손님을 부르는(延客招素手)” 미모의 호희에게 친근한 접대를 받는데 있었다.

또 당나라 때 높은 형태의 가구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땅바닥에 앉는(꿇는) 옛 전통이 다리를 세우고 앉는 새로운 생활습관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각양각색의 높은 탁자와 등받이가 없는 낮은 의자 중에 “호상(胡床)”이라고 하는 접이식 의자가 있었는데 이동에 편리하였다. 일상에서 사용되는 기물 중에는 해마(海馬)와 포도 문양이 새겨진 동경(銅鏡)도 있었는데 서역에서 왔다.

각지의 주、현에 퍼져있는 사원에는 크고 작은 불탑들이 있었다. “아육왕탑(阿育王塔)”、“라마탑(喇嘛塔)”、“금강보좌탑(金剛寶座塔)” 같은 탑의 명칭은 멀리 보기에도 서역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고 인도풍의 건축예술은 불교를 따라 동쪽으로 전래된 것이다. 당명황이 피서하기 위해 궁중에 만든 “양전(凉殿)”、경조윤(京兆尹) 왕홍(王鉷)이 자택에 만든 “자우정자(自雨亭子)”는 불름(拂菻; 옛 나라이름으로, 서아시아 지중해 연안 일대에 있었다)의 건축적 특징을 모방하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북조 이래로 수 백년 동안 이민족 풍속의 영향에 한족 고유의 문란한 성과 오락문화는 성당 사회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풍기를 더욱 더 강렬하게 만들었다. 이 중에 특히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당대 관료 사대부계층에게는 집에 가무를 할 줄 아는 기녀를 둔 것 외에 공개적으로 기생을 데리고 노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대에는 관기(官妓)가 성행하여, 경성과 지방의 주、현에는 호적상으로 관부(官府)에 예속된 기녀가 있었다. 관부 아문의 손님접대、의식과 연회 및 관리들이 모여서 놀 때 기녀와 음악으로 흥을 돋구었다. 중당의 유명한 여성시인 설도(薛濤) 같은 경우는 촉중(蜀中)의 관기였다.

당나라는 과거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여 관직을 내렸다. 과거에 합격한 신입 진사들은 기생을 데리고 노는 것을 더욱 좋아하였다. 경성의 기녀들이 모여있는 평강방(平康坊)은 “풍류수택(風流藪澤)”으로 불렸는데, 바로 그들이 만나 모여 노는 장소였다.《개원천보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사 정우(鄭愚)、유삼(劉參)、곽보형(郭保衡)、왕충(王衝)、장도은(張道隱) 등은 예교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하였다. 만춘 시절에 그들은 늘 요염하고 아리따운 기녀 15명을 골라 우마차에 태우고 경성의 동산과 연못에서 노닐었는데, 풀 위에서 옷과 모자를 벗고 벌거벗은 채로 소리를 치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장난을 치기도 하였는데, 자신들의 이러한 자유분방한 행동을 “전음(顚飮)”이라고 하였다.

관리들과 문인들만 마음껏 낭만을 즐긴 것이 아니라 귀족의 부녀자들도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냈고, 생활은 방탕하였다. 매년 봄, 경성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답청(踏靑) 놀이(봄날 청명절 전후로 교외에 나가 산보하며 즐기는 것-옮긴이)가 성행하였다. 무릇 원림과 화초가 있는 곳에는 사람과 수레가 끊이지 않았다. 이 답청 놀이는 부녀자들이 자유와 기쁨을 만끽하는 날이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안의 한 궁녀가 교외에서 답청 놀이를 하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는 풀로 자리를 만들고 붉은 치마를 벗어 서로 이어 밖에서 연회 할 때 치는 장막인양 나무에 꽂아 걸어두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풀밭에서 뒹굴며 술을 마시고 꽃을 감상하며 실컷 즐기다가 돌아왔다.

당대에는 “외국화”의 영향으로 전통 예교를 강조하지 않았고, “규방은 엄숙하지 않고(閨門不肅)”, 정절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대 부녀자들이 받은 속박과 억압은 후대에 비하면 적었다. 또 그녀들은 오대、송대 이후처럼 두 발이 비틀어져 기형이 되는 “전족(纏足)”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롭게 규방을 나가 저자거리에서 물건을 사거나 교외에서 놀기도 하였고 밭에 나가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녀들은 또 쾌활하고 용감하여 명교(名敎)를 무시하기도 하였으며, 명랑하고 자유분방하여 호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달리기도 하였으며, 자유롭게 이성과 교류하며 발랄하고 자신감이 충만하여 남자들 못지 않았다. 그녀들은 무측천이 여자로서 임금이 되는데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시대적 색채가 분명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풍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예교를 중시하고 규방을 엄격하게 단속했던 송나라와 후대에 와서 도학자들에 의해 방탕하고 음란했던 한대 궁정과 더불어 “더러운 당나라 썩은 한나라(臟唐爛漢)”로 비평을 받았다.


<그림> 흥경궁 안의 이백(李白) 상, 이백은 흥경궁에서 술에 취한 채 1,200년을 달콤하게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