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唐楊貴妃

二. 아버지가 며느리를 빼앗아 귀비로 책봉하다 1. 아버지가 며느리를 빼

마장골서생 2009. 9. 11. 17:53

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二. 아버지가 며느리를 빼앗아 귀비로 책봉하다 


1. 아버지가 며느리를 빼앗아 황궁에 들이다.


무혜비가 병사한 후, 당명황은 반년 여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 충왕 이형을 태자로 책립하여 국본(國本)과 관계된 황위계승문제를 매듭지었다. 그러나 54세의  황제의 마음속을 맴도는 근심과 슬픔 그리고 감정상의 공허함은 메워지지 않았다. 흥경궁 안의 경관은 그대로였고, 여산 자락의 온천은 변함 없이 흐르고 있었지만 시간은 가고 사람은 떠나가니 마음만 더 아파질 뿐이었다. 궁중의 비빈들은 얼굴을 가꾸며 총애를 갈구하였으나 당명황은 옛 사람에게만 미련을 둘뿐 그녀들을 총애하지 않았다.

당명황은 일생동안 황자 30명과 공주 29명을 두었다. 그의 후비 중에 사서에 보이는 사람으로는 왕황후(王皇后)(폐헤짐)、양비(楊妃)[속종의 생모로, 원헌황후(元獻皇后)로 추증됨]、무혜비、양귀비(옥환)、조려비、유화비、황보숙비(皇甫淑妃)、전비(錢妃)、황보덕의、곽순의(郭順儀)、무현의(武賢儀)、동방의(董芳儀)、고첩여(高婕妤)、유첩여(柳婕妤)、종미인(鍾美人)、노미인(盧美人)、왕미인(王美人)、진미인(陳美人)、두미인(杜美人)、유재인(劉才人)、염재인(閻才人)、정재인(鄭才人)、고재인(高才人)、상재인(常才人)、조야나희(曹野那姬) 등 총 25명이 있다.

당대의 후비 제도는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황제의 후궁에 황후 1인을 두고, 그 아래로 정1품에 해당하는 사부인(四夫人)으로 귀비、숙비、덕비、현비 각 1인이 있고, 정2품에 해당하는 구빈(九嬪)으로는 소의(昭儀)、소용(昭容)、소원(昭媛)、수의(修儀)、수용(修容)、수원(修媛)、충의(充儀)、충용(充容)、충원(充媛)에 각 1인을 두었으며, 정3품인 첩여(婕妤) 9인, 정4품인 미인(美人) 9인、정5품인 재인(才人) 9인이 있는데, 총 27명의 세부(世婦)를 두고 있다. 또 정6품인 보림(寶林) 27인、정7품인 어녀(御女) 27인、정8품인 채녀(采女) 27인이 있는데, 총 81명의 어처(御妻)를 두고 있다. 당명황은 개원시기 혜비、여비、화비를 삼부인(三夫人)으로 삼은 적이 있다.

후궁의 여관(女官)과 궁녀들의 전체 숫자에 대해 백거이는 시에서 “후궁에 아리따운 미인이 3000명(後宮佳麗三千人)”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당태종 이세민이 제위에 있을 때 대신들이 올린 주소(奏疏)에는 “남아도는 궁인들이 늘 수만이 됩니다(無用宮人, 動有數萬)”라고 지적하고 있다.《신당서(新唐書)》에는 “개원、천보 연간에 궁녀와 비빈들이 대략 40,000에 달한다(開元、天寶中, 宮嬪大率至四萬)”라고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 사람은 이것이 한나라 이후로 제왕의 후궁에 사람이 가장 많았던 시기라고 지적하였다. 심지어 전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유명무실한 당나라 말기에도 “육궁에는 지위의 고하를 떠나 궁인들이 10,000명 이상이었다(六宮貴賤不滅萬人).” 이렇게 많은 후궁의 여인들은 대체로 예를 갖춰 책봉되어지는 경우、가문 있는 집안의 딸을 골라 맞이하게 되는 경우、귀척(貴戚)과 대신들이 올리는 경우、부친이나 조부의 범죄로 액정(掖庭)에 몰수되는 경우 등의 경로를 통해 궁중에 들어왔다. 상술한 품계가 있는 100여명의 후비 외에  나머지는 전부 여관(女官)(궁중의 구체적이면서 사소한 사무를 담당)과 보통 궁인들로, 당대에는 “궁녀(宮女)”、“궁아(宮娥)”、“궁비(宮婢)”로 불렀다. 그들 대부분은 장안、낙양의 황궁에 거주하였고, 그 나머지는 각지의 별궁(別宮)과 별관(別館)에 분산되었다.

품계가 있고 봉호를 받은 후비들은 혈통이 고귀하고 명망 있는 가문이라는 기본조건 외에도 우선 출중한 용모와 몸매를 가지고 수양이 아주 잘 되어 있어야 했다. 다음으로 노래와 춤 그리고 시와 그림 등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후궁에 뽑혀 황제의 이목을 사로잡고 총애를 받기 어려웠다. 당명황이 황제가 되기 전후로 총애를 받은 왕황후、조려비、황보덕의、유재인、양비 등은 하나같이 용모와 재능이 출중했던 미녀들이었다. 왕 황후가 서인에 폐해진 후 무혜비가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후궁의 많은 미인들은 당명황의 총애를 거의 받지 못했다. 무혜비가 세상을 떠난 지금, 당명황은 2여 년 동안 마음을 줄 사람이 없어 쓸쓸해하며 불안해했다. 그는 어떤 여인에게 자신의 끝없고 인색한 은총을 내리려고 했을까?

하늘 아래 별의별 일이 다 있기 마련이다. 다정하고 욕심 많은 당명황의 눈빛은 뜻밖에도 자신의 며느리인 수왕의 비 양옥환에게로 향했다. 이 젊고 아름다운 며느리는 경국지색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 실력이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빼어났다. 그녀는 이미 작고한 왕 황후、무혜비와는 다른 유형의 여자였다. 그녀만이 시아버지 황제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작고한 시어머니 무혜비의 위치를 대신할 수 있었다.

시아버지인 황제가 며느리에게 마음을 둔 것은 여색을 탐하는 음란한 마음을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어서일까? 아니면 신하가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을 추천해서였을까? 사서에는 “누가 아뢰었다(或奏)”、“누가 말했다(或言)”라고 되어있을 뿐 도대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당명황 전기에서 이 기묘한 잔꾀는 환관의 우두머리 고력사가 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고력사는 당명황이 제위에 오르기 전에 마음을 다해 당명황을 모신 충실한 “노복(老奴)”이었다. 그는 주인의 생각을 헤아리는데 아주 뛰어났다. 대종(代宗) 황제의 생모 오씨(吳氏)[장경황후(章敬皇后)로 추증된다]는 처음에 고력사가 조서를 받들고 후궁의 여인들 중에 골라 태자(즉, 숙종)에게 하사한 사람이었다. 이로 봤을 때, 고력사가 당명황에게 수왕의 비 양옥환을 입궁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도록 건의한 것은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서에는 고력사가 조서를 받들고 일을 행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만 있을 뿐이다. 당시 고력사의 지위로 봤을 때 환관으로서 그는 이미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이를 이용하여 공을 얻어 승진을 도모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당명황을 충실하게 시중들며 성지를 받들어 계속 일을 하기만 하면 이미 얻은 신임과 권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수왕의 비를 입궁토록 하는 조서를 읽는다는 것은 인륜에도 어긋났고, 도덕적으로도 위배되는 일이었다. 수왕은 모친의 사망으로 아버지에게서 받는 총애는 줄었지만 그는 분명히 황자였고 큰 잘못도 없었다. 사서에서 고력사를 총명하고 신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어찌 황제의 골육들을 이간하는 것이 무슨 죄인지를 모를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수왕의 비를 입궁토록 하는 조서를 선포한다는 것은 당명황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당태종이 “현무문(玄武門) 사태” 후에 동생의 부인인 제왕(齊王)의 비 양씨(楊氏)를 들였고, 고종(高宗)이 감업사(感業寺)에서 부친의 첩이었던 무측천을 황궁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처럼 대신들의 간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황제의 사랑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물며 고종이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려고 했을 때 외삼촌이었던 장손무기(長孫無忌) 같은 개국공신이자 고명대신(顧命大臣)조차도 황제의 뜻을 따르지 않아 유배를 당해 자진하였다.《구당서》에 “누구 아뢰었다”、“누가 말했다”라고 된 부분은 사관들이 천하지존인 당명황을 가리기 위한 모호한 말일뿐이었다.

당명황이 며느리를 궁중에 불러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서 고력사는 자연히 일을 꾸미는 중요인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개원 28년(740) 정월에 당명황의 생모 두태후(竇太后)의 “명복을 비는(追福)” 것으로 수왕의 비를 여도사로 제도하는 그 칙명을 내렸던 것이다. 돌아가신 혼령에게 명목을 빈다는 명목으로 수왕의 비를 도교에 입문시킴으로써 가장 먼저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세속에서의 친속 관계를 끊어버렸다. 당명황이 방탕하고 음란하였지만 자신의 며느리를 차지하면 인륜을 어기면서 신하들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용안의 체면을 위해서 교묘하게 가려야만 했다. 당명황이 임금과 시아버지라는 권위적인 이중 신분으로 수왕의 비에게 세속을 떠나 도가에 입문하라고 칙명을 내린 것은 선례가 있으면서도 다음에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예비적인 조치였다. 당대 황실에는 총 200여명의 공주가 있었고, 그중 10여명의 공주가 출가하였다. 그러나 그녀들 대부분은 도교에 들어갔고 불교를 신봉하지 않았다. 예종이 제위에 있을 때 서성(西城)과 융창(隆昌) 공주(바로 당명황의 여동생이다)는 천황태후(天皇太后)(무측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여도사로 제도되었다. 두 사람의 도호는 각각 “금선(金仙)”、“옥진(玉眞)”이었다. 개원 초년, 당명황의 딸 만안(萬安) 공주가 또 예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출가하여 도교에 입문하였다. 이들 공주들은 도교에 입문한 후에도 계속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조정에서는 관례대로 일용할 물자를 제공하였다. 사교활동 등의 경우 그녀들은 도고(道姑)로써 공주 때보다 더 자유로웠고 제약을 받지 않았다.

도사는 도교경전의 규율을 받들고 신에게 제를 올리는 각종 의식에 정통한 직업적인 종교인이다. 도를 수계한다는 것은 바로 일정한 의식을 거행하여 속세의 사람을 출가시켜 도교에 입문시키는 것을 말한다. 도교는 신선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당대 남녀 도교 신봉자들은 황관(黃冠)을 썼고, 또 “황관(黃冠)”、“여관(女冠)”、“우사(羽士)”、“우인(羽人)” 등의 호칭이 있었다. 당대 도교의 규율은 그렇게 엄격하지 않아 여도사들은 가정、남편 및 예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회의 부녀자들 중에 자유롭게 로맨스를 즐기는 계층이 되었다. 이 때문에 후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녀들은 사회적 활동을 하고 외유를 하는데 아주 자유로웠다. 지체 높은 고관、유명 인사들과 교류할 때는 화장을 진하게 하고 동석하여 함께 음주하며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불렀다. 어떤 여도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세속의 애정을 추구하였으며, 어떤 여도사는 온갖 염문을 다 뿌리고 다니는 등 행적이 방탕하였다. 도교에 입문한 당명황의 친 여동생 옥진(玉眞) 공주는 수시로 궁궐을 출입하며 황제의 형을 알현하였고 왕공 귀족들과도 빈번하게 교류하고 외유하였다.

종교적으로 당대의 여도사들은 계율을 지키지 않고 교문(敎門)을 욕되게 하여 후대 학자에 의해 기녀에 가깝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당대의 사회상황에서 봤을 때, 여도사들은 자유롭고 얽매임이 없고 낭만적이었으며, 문인들은 그녀들의 용모와 재기를 아주 감칠맛 나게 이야기하였다. 당시(唐詩)에는 여도사의 유력(遊歷)、경전을 강하는 것을 읊은 많은 작품들이 있으며, 또 시인과 여도사가 주고받은 연시(戀詩)도 있고, 심지어는 서로 재미 삼아 놀리고 조소하는 부정한 시와 사도 있었다. “여성 시호(女中詩豪)”라고 불리는 여도사 이야(李冶)[자는 계란(季蘭)]는 당명황에서 덕종(德宗)에 이르는 시기에 활동하였다. 그녀의 낭만적이고 얽매임이 없는 여도사 생활은 그녀의 젊고 아름다운 용모를 사라지게 하였지만 그녀의 시명은 궁중으로 전해져 황제의 부름을 받아 상을 받았다.       

당대에는 황제가 붕어하면 자녀가 없는 후궁 비빈들은 무측천처럼 불사로 보내져 비구니가 되거나 처량하고 쓸쓸하게 후궁에서 늙어갔다. 황가의 여성들이 세속을 떠나 도교에 입문하는 것은 이혼해서 재가하기까지의 과도적 시기가 아니라 죽은 이의 혼에 명복을 빌기 위한 미신적 방식이었다. 개원 23년(734), 당명황은 옥진 공주를 유명한 도사 장과(張果)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수왕의 비 양옥환을 먼저 출가시켜 도교에 입문시키고 그 다음 다시 도고의 신분으로 입궁시켜, 아버지가 자식의 아내를 취하는 황가의 추문을 덮고자 했던 것이다.

사람의 의사를 무시하는 칙명과 목적이 분명한 제도의식 후에 수왕의 비 양옥환은 면모를 일신하여 “태진(太眞)”이라는 여도사의 모습으로 황관을 쓰고 황색 치마를 입고 대명궁 내의 “태진전”으로 옮겨와 거주하였다. 남쪽 내의 흥경궁에는 대명궁으로 바로 통하는 “이중통로(復道)”가 있었다. 당명황은 양쪽을 왕래하였고, 바깥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황제는 흥이 나면 바로 “태진전으로 몰래 건너 갈(暗度陳倉)” 수 있었다.

개원 28년(740) 정월 후로 당명황은 수시로 흥경궁에서 대명궁으로 통하는 “이중통로”를 지나다녔다. “색을 중시하고 미인을 그리워하는(重色思傾國)” 당명황에게 있어 2년 여 동안의 공허함、실망과 의지할 데 없는 아픈 마음은 마침내 따뜻한 위로를 얻었다. 그러나 천하의 지존으로 처소를 옮겨 따르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 못지 않게 혈기왕성한 당명황으로선 양태진이 곁에서 조석으로 그림자처럼 시중들어주길 간절히 필요했다.

10월, 당명황은 관례대로 여산의 온천으로 행차하여 추위를 피하면서 고력사에게 명하여 양태진에게 온천에서 목욕을 하도록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양태진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여산에 불러 황제를 알현토록 한 것으로 보아,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는 당명황의 음란하고 사치한 마음이 이미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부글부글 끓어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예로부터 여산에는 운치 있는 일이 많았다지,

비익조 한 쌍은 날고 두 나무 가지는 한데 이어졌다네.


양태진은 수왕의 비로 있었을 때 어가를 따라 여산에서 목욕하며 추위를 피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전과 완전히 달랐다. 황제가 목욕을 하사한 것은 이후 끝없는 환락과 비할 데 없는 영광의 출발점이었다. 그녀는 56세 노인의 춘심을 사로잡아야 했다. 이후의 보름 동안 맑고 따뜻한 온천물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기쁨을 누렸다. 늙은 황제의 눈에는 양태진의 희고 윤기 있는 얼굴은 젊음이 넘치듯 아름답고 요염하였으며, 반짝거리며 넌저시 주위를 둘러보는 두 눈은 강렬한 감정을 전하듯 귀엽고 매혹적이었다. 매끄럽고 풍만한 몸매는 희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특히 목욕 후의 균형 잡힌 그녀의 몸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듯 비단저고리도 감당할 수 없는 듯 했고, 사뿐사뿐 옮기는 발걸음에도 생동하는 육감적 매력이 뿜어져 나와 사람의 혼을 빼놓을 지경이었다. 이 모든 것이 어찌 당명황의 마음을 취하게 하여 몸에 활기를 넣어 회춘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春寒賜浴華淸池,  봄 추위로 화청지에서 목욕을 하사하니,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로 희고 매끈한 피부 반들반들 씻네.

侍兒扶起嬌無力,  시녀 부축해서 일으키니 온몸 나른해지고,

始是新承恩澤時.  이제 막 새로이 은총을 받을 때라네.


방년 22살의 양태진이 “뒤돌아보고 웃으니 온갖 아름다움 나오고, 육궁의 여인들은 얼굴빛을 잃었다(回眸一笑百媚生, 六宮粉黛無顔色).” 사서에는 그녀의 타고난 미모를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답다(姿質豊艶)”、“지극히 요염하고 자태가 빼어났다(殊艶尤態)”、“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살쩍은 지나치지 않을 만큼 가늘고 무성하며, 행동거지는 고상하고 교양 있어, 한무제의 이(李) 부인과 같았다(鬢髮膩理, 纖穠中度, 擧止閒冶, 如漢武帝李夫人)”라는 등의 말로 찬미하고 있다. 현대언어로써 형용하면 양태진은 몸매가 풍만하고 희고 윤이 나는 피부를 가졌으며 비단처럼 광택이 나는 검은 머리칼에 촉촉한 눈을 가진 대단한 미인이었다. 이것은 당대 사람들의 심미관을 집중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당대 사람들은 건강한 자연미를 숭상하여, 여성은 체형이 풍만하고 피부가 곱고 깨끗해야 아름답다고 여겼다. 체형이 풍만해야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질 수 있었다. 현재 당대의 채색도용、돈황과 제왕의 능묘벽화에 보이는 여성형상은 하나같이 선이 둥글고 매끄러우며 보름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양태진은 우람하고 풍만한 아름다움으로 한나라 때 날씬한 것으로 유명했던 조비연(趙飛燕)과 더불어 고대중국의 양대 미인으로 불린다.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조비연은 날씬하고 양귀비는 풍만하다(燕瘦環肥)”라는 말은 바로 한、당대 다른 심미관과 사회풍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0월의 추위를 피하기 위한 이번 온천행은 오래 동안 공허해진 당명황의 마음을 충실하게 해주었으며, 정신적으로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애정이 깊어지자 한시라도 떠날 수 없는 총애와 기쁨이 이어졌다. 18일째 되던 날, 당명황이 여산에서 어가를 움직이자 양태진은 어가를 따라 함께 경성으로 돌아와 흥경궁으로 들어왔다. 양태진은 새롭게 은총을 받았고, 큰 보물을 얻은 듯한 당명황은 “봄밤은 짧고 해가 높이 솟음을 안타까워하며, 이때부터 아침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春宵苦短日高起, 從此君王不早朝).”

22살의 양태진은 이성을 그리워하는 성숙된 시기에 있었다. 56세의 당명황은 침상에서 환락에 빠질 나이는 더 이상 아니었다. 당명황이 욕정을 발설하고자 했다면, 양태진이 설사 출중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미인들로 가득한 후궁에서 이처럼 당명황의 마음을 사로잡기는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명황이 양태진에게 완전히 빠진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바로 그녀의 예술적 재능에 있었다.

양태진은 자질이 뛰어나고 음률에 밝고 가무에 뛰어난 천재 예술가였다. 각종 예술적 재능 중에서도 그녀는 바람처럼 신속하게 회전하는 “호선무(胡旋舞)” 같은 무도에 뛰어났다. 특히 깃털 옷과 장사(長紗)를 걸치고 학이 구름 위를 나는 듯한 춤사위를 보여주는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는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어느 해 봄, 당명황은 목란전(木蘭殿) 앞에서 연회를 열었다. 마침 목란화의 꽃 방울이 터져 있었는데도 당명황은 어찌된 연유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양태진이 상황을 보고 술기운에 무상예의(舞裳霓衣) 춤을 추자, 애비의 뛰어난 풍채를 바라보며 당명황의 근심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용안은 크게 기뻐했다.

양태진은 각종 악기에도 정통하였는데, 그 중에 경(磬)을 가장 잘 쳤다. 치는 소리가 맑고 특이하여 황궁의 이원제자라 할지라도 그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양태진은 비파를 잘 탔다. 음률은 처량하고 맑았으며, 소리가 가볍게 흘러가는 것이 다른 세상의 소리 같았다. 그녀는 노래를 자유자재로 부를 만큼 기교가 뛰어났고, 악공들의 반주에 맞춤에 있어서도 빈틈도 없이 조화를 잘 이루었다. 궁중연회에서 시중들 때, 그녀는 항상 야광유리잔을 들고 음소하며 노래를 불렀다. 당명황은 이런 모습에 항상 큰 흥미를 느껴 친히 악기를 잡고 애비를 위해 반주하였다.

당명황이 양태진과 사랑에 빠져 총애한 것은 상당부분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아주 높게 평가한 것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당명황은 걸출한 봉건정치가이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는 어려서 기악(伎樂)에 심취하였고, 6살 때 궁중연회에서 무대에 올라 공연하였다. 여장을 하고 제비 같이 늘씬한 몸으로 무극《장명서하녀(長命西河女)》를 추어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조모 무측천의 칭찬과 상을 받았다. 커서는 곡을 짓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지휘하고 교련하는 것에 정통하였다. 미모와 재능을 갖춘 절대미인을 얻은 다재다능한 풍류 황제 당명황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녀에 대한 은택이 대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전기에는 이 두 사람의 결합은 “가무인연(歌舞姻緣)”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양태진은 요염한 자태와 가무、음악에 대한 재능을 한 몸에 타고났다. 그녀는 또 입궁하기 전 수왕부에서 4년여 동안의 왕비생활로 고상하고 우아하게 수양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입궁 후 당명황을 시중들 때 갖은 애교를 다 부렸다. 후궁의 비빈들은 하나같이 단아하고 아름다웠고 화려하고 색채가 선명한 옷을 입을 입었다. 그러나 미인들이 나란히 둘러싸서 시중을 들었지만 뛰어난 미인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귀엽고 아양을 떠는 모습은 미인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요염한 사람을 더욱 요염하게 하였지만 자태가 운치 있고 고상한 것은 수양을 통해 나오는 아름다움이었다. 양태진은 용모가 아름답고 자태가 빼어났으며, 무엇보다도 총명하고 기지가 있어 상대방의 의중을 잘 파악했다는 점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그녀는 당명황의 속마음을 잘 헤아렸기 때문에 거동하거나 말할 때마다 당명황의 뜻을 따라 그를 기쁘게 할 수 있었다. 사서에는 양태진을 “재기가 있고, 애교를 잘 부렸다. 상대방의 뜻을 잘 헤아리고 비위를 잘 맞추었는데,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있었다(才智明慧, 善巧便佞, 先意希旨, 有不可形容者)”라고 말하고 있다.

개원 29년(741) 정월, 당명황은 또 여산으로 행차하여 8일 동안 머물렀다. 경성으로 돌아온 후, 당명황은 현원황제(玄元皇帝)(즉 노자)의 혼령이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 현원황제가 그에게 “경성 서남쪽 100 여 리에 나의 상이 있소, 그대는 사람을 보내 찾아보시오, 나는 흥경궁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오.”라고 말했다. 당명황이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과연 주질현(盩厔縣)[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주지(周至)] 누관산(樓觀山)에서 노자의 옥상(玉像)을 발견하고 공경하게 모셔와 흥경궁에 안치하였다. 5월, 당명황은 또 화공에게 명하여 많은 노자상을 그리게 하여 각 주로 보내 개원관(開元觀)[즉 노자묘(老子廟)]에서 모시게 하였다. 당명황의 이런 행동은 그가 이룩한 태평성세에 천지신명이 돕는다는 신비스러운 색채를 씌우면서 양태진을 입궁토록 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이 중에는 그가 천지신명에게 기도하여 국운이 영원히 융성하도록 바라는 미신적 사상도 있고, 신하와 백성들의 비난을 막기 위한 고육책도 포함되어 있다.


<그림> 화청궁 안의 온갖 꽃들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