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3. 궁정의 풍파 누구 때문에 일어났나
봉건시대 제왕들의 혼인상황은 모두 일부다처(첩)제여서 자연스럽게 많은 자녀를 낳고 기르게 된다. 황은이 넓고 크고 친자가 먼저 혜택을 입는다고는 하나 결국은 차별 없이 똑같이 대해주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후비의 등급제도와 황자의 적서(嫡庶) 구분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등급의 고하, 신분의 차이, 예우의 후박으로 차등을 두는 이런 종법(宗法)으로는 황족자제들의 권좌에 대한 특히 제위에 대한 탐욕을 근본적으로 없앨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역대의 궁정에서는 계략과 음모가 난무하고 치열한 투쟁을 벌이며 형제끼리 서로 죽이고 군대를 동원하게 되는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러한 궁정 투쟁의 소용돌이는 거의 매번 후궁의 비빈들을 그 속으로 끄려들였다. 황제의 처첩으로 후비들은 내궁에 거주하며 호위호식하며 많은 사람들을 거느렸고, 지위는 높고 존귀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운명은 오히려 가장 불안하였다.
당명황 개원연간의 궁정풍파는 무혜비가 점차 황제의 총애를 받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첫 번째 비극의 주인공은 바로 당명황이 임금이 되었을 때 책봉된 황후 왕씨였다.
왕 황후는 동주(同州) 하규(下邽)[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위남(渭南) 동북쪽] 사람으로, 관료집안 출신이었다. 이융기가 임치(臨淄) 군왕(郡王)으로 있을 때 왕씨를 비로 맞아들였다. 이융기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위후(韋后)의 난을 평정했을 때 왕씨는 비밀리에 거사에 참가하였으니 두 사람은 환난을 함께 한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예종 경운(景雲) 원년(710) 6월, 이융기가 공으로 황태자로 책립되자 왕씨는 황태자비가 되었다. 2년 후, 이융기가 황제가 되자 왕씨는 황후가 되었다. 황후의 부친 왕인교(王仁皎)를 태복경(太僕卿)(종3품)에 임명하고, 동시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내렸으며 빈국공(邠國公)에 봉하였다. 황후의 오빠 왕수일(王守一)은 이융기를 따라 태평공주의 세력을 평정하여 천자를 옹립한 공으로 상련봉어(尙輦奉御)(종5품)에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종3품)、태상경동정원(太常卿同正員)으로 승진하였고, 진구공(晋國公)에 봉해졌으며 실봉은 500호였다.
그러나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은 왕 황후에게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그녀가 황후의 자리를 오랫동안 안정되게 지키는데 좋지 않았다. 이융기가 황태자였을 때 비 양씨에게 아들[즉 숙종(肅宗) 이형(李亨)]이 하나 있었는데, 왕 황후가 길렀다. 왕 황후는 이 황자를 친아들처럼 극진히 보살폈다.
개원 2년(714) 12월, 당명황이 태자를 책립할 때 장자 이종(李琮)[원명은 사직(嗣直)으로, 사냥을 하다가 맹수에게 얼굴을 다쳐 얼굴 모양이 변형되었다]과 왕 황후가 기른 셋째 이형은 선택되지 못하고, 둘째 이영(李瑛)[원명은 사겸(嗣謙)]이 태자로 책립되었다. 이영의 생모 조려비(趙麗妃)는 본래 기녀 출신으로 출중한 재주와 용모에 가무에도 뛰어나 이융기가 노주(潞州)[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장치(長治)]의 별가(別駕)에 재직하고 있을 때 맞아들였다. 조려비는 후에 이융기를 따라 경성으로 돌아와 10여 연간 큰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이영이 태자로 책립되었던 것이다. 조려비의 부친 조원례(趙元禮)、오빠 조상노(趙常奴)는 개원 초년에도 요직에 발탁되었다.
황태자 이종의 생모 유화비(劉華妃)에 관한 사적은 당대 사서에 지극히 간략하게 기록되어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셋째 이형의 생모 양씨는 총애를 받지 못하고 개원 17년(728)에 사망하였다. 태자 이영의 생모 조려비는 언제 사망하였는지 사서에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후궁 비빈 중에 왕 황후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무혜비였다.
무혜비는 여황 무측천의 당질 무유지(武攸止)의 딸로, 어려서 궁궐에 들어왔다. 이융기가 황제가 되었을 때 무씨는 이제 막 15살을 넘긴 나이였다. 그녀는 단아하고 아름다운 용모에 온순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갖추고 공손하고 얌전한 행실로 당명황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혈연관계로 봤을 때, 당명황과 무씨는 내외종 오빠와 여동생 사이였다. 당명황의 총애가 나날이 깊어짐에 따라 선량하고 사려 깊던 무혜비는 왕 황후에게 “은밀하게 갖은 모략을 품었다(陰懷傾奪之志).”
왕 황후는 무씨가 하루가 다르게 극진한 총애를 받고 또 황태자는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망과 분노를 품고 수시로 당명황의 면전에서 온갖 불만들을 토로하여 무씨를 폄하하고 공격하였다. 결과적으로 당명황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개원 10년(722) 8월, 당명황은 비서감(秘書監) 강교(姜皎)와 상의하여 “자식이 없다는(無子)” 이유로 왕 황후를 폐하려고 하였다. 뜻밖에도 강교가 이 비밀모의를 누설하는 바람에 당명황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당명황은 화가 난 나머지 강교의 관직을 낮추고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다. 강교는 후에 유배되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강교가 유배되는 도중에 사망하자 왕 황후는 더욱 걱정되고 불안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평소 다른 비빈과 궁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빌어 그녀를 천길 나락으로 빠뜨리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황후의 오빠 왕수일은 여동생인 황후가 흔들리게 된 원인을 알고 비밀리에 방사들을 불러 무술(巫術)을 행하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으며 또 승려 명오(明悟)를 불러 여동생을 위해 하늘에 제를 올리고 나무 부적을 만들어 차도록 해서 아이가 생기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사술을 믿고 귀신을 믿는 이런 태도는 고대 황가에서 금기시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개원 12년(724) 7월, 일이 발각되자 당명황은 대노하며 왕 황후를 서인(庶人)(평민)으로 폐하도록 명을 내렸다. 왕수일은 담주(潭州)[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별가로 폄적 당해 가던 도중에 사약을 받았다. 이 해 10월, 폐후(廢后) 왕씨는 냉궁(冷宮)에서 우울해하고 비분해 하다 사망하였다.
왕 황후가 사망하고 오래지 않아 당명황은 무혜비를 황후로 세우려고 하였다. 뜻밖에도 조정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첫째 이유는 무씨(측천)가 이당 종실을 무너뜨려 당을 [무(武)]주(周)로 바꾸는 전철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태자가 무혜비 소생이 아니며 무혜비에게는 이미 양육하고 있는 아들이 있어 만약 그가 황위를 잇는다면 태자를 위협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대에는 황후가 공개적으로 국정에 참가할 수 있는 특권적인 지위를 이용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명황은 이 문제로 정국이 요동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신들의 중론을 받아들여 결국 이 일을 잠깐 미뤄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무혜비는 여전히 총애를 독차지하였고, 이후 10여 연간 궁중에서 그녀의 지위와 예우는 황후와 같았다.
게다가 무혜비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려는 자신의 염원이 일시에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분을 삼키고 미래를 생각하며 조정의 신하 중에 힘이 되어줄 후원자를 찾았다. 조정에는 여기저기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적인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 이림보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황족출신이었지만 인품과 재주가 보잘 것 없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질시했을 뿐만 아니라 아첨을 잘하고 교활하여 웃음 속에는 항상 칼을 품고 있었다.《구당서》에는 이림보를 맹수처럼 위험하고도 악랄한 사람으로 평하고 있다.
이림보는 황가종실자손의 신분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벼슬하였다. 개원 14년(724)에 그는 이미 시랑(侍郞)(정4품)이라는 관직을 맡았다. 하루빨리 신하로써 최고의 자리인 재상에 오르기 위해 이림보는 뇌물로 관계를 맺은 궁중의 환관들과 결탁하여 당명황 주변의 움직임을 탐문하였다. 마침 무혜비가 후궁 중에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어서 그의 아들 수왕 이모、성왕(盛王) 이기(李琦)도 모친의 후광을 입고 당명황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수왕은 “모든 아들 중에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寵冠諸子).” 황태자로 책립된 지 이미 10여 년이 된 이영은 나날이 소외되어갔다.
이림보는 무혜비의 의도를 간파하고 환관을 통해 비밀리에 그녀에게 아첨을 하고 빌붙으며, 수왕이 태자가 되는데 힘을 다하겠다고 하였다. 도움이 절실했던 무혜비는 자연히 이림보의 마음에 감격하였고 수시로 당명황의 면전에서 그를 대신해 허풍을 떨고 치켜 세워주었다. 이렇게 이림보는 점차 당명황의 총애와 신임을 얻어 한 단계 한 단계씩 승진하여 개원 23년(735)에 재상이 되어 조정의 사무를 상의하고 결정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대당(大唐)의 위풍당당한 사자
개원 24년(736), 황태자 이영은 30세가 다 되었다. 당시의 또 다른 황자인 다섯째 악왕(鄂王) 이요(李요)와 여덟째 광왕(光王) 이거(李琚)는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 당명황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거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데 아주 뛰어났다. 그 두 사람의 생모 황보덕의(皇甫德儀)와 유재인(劉才人)은 모두 출중한 미모로 당명황의 총애를 받았다. 이요와 이거는 내궁에 거주하여 서로 아주 가까웠다. 그러나 무혜비가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태자와 악왕、광왕 그리고 그들의 생모는 모두 당명황에게서 멀어졌고 냉대를 받았다. 모친은 총애를 잃고 자신들도 냉대를 받자 이요와 이거는 마음이 심란하여 함께 있을 때 원망 어린 말을 몇 마디 하였다. 이 해 11월, 처지가 같은 태자 이영、이요와 이거는 궁중에서 만나 “모친이 총애를 잃은 것 때문에 원망 어린 말을 하였다(皆因母失愛而有怨言).”
뜻밖에도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무혜비의 사위이자 함의공주(咸宜公主)의 부마인 양회(楊洄)가 이 일을 알고 곧장 무혜비에게 밀고하였다. 원래 양회는 벌써부터 무혜비의 지시를 받고 은밀히 태자 쪽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무혜비는 이 밀보를 전해듣고 즉각 당명황에게 울며 하소연하였다. “태자가 암암리에 도당들과 결탁하여 저와 열 여덟째(즉 수왕)를 해치려고 하나이다. 그들은 또 대담하게도 폐하를 함부로 탓했나이다.” 당명황은 들은 후 자초지종을 따지지도 않고 격노하며 명을 내려 즉각 재상을 입궁토록 하여 태자、악왕과 광왕을 폐하는 일을 상의하였다.
이때 재상으로 있던 사람으로는 이림보 외에 장구령(張九齡)과 배요경(裵耀卿)이 있었다. 장구령은 심지가 곧은 관리로, 그는 당명황이 무혜비를 편애하여 무고한 태자와 악왕、광왕에게 죄를 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직언을 하였다: “태자와 두 왕자께서 성인이 되시도록 무슨 큰 잘못을 하신 적이 있다고 듣지 못했나이다. 폐하께서는 어찌 하루 사이에 근거 없는 소문을 믿으시고 역정을 내신 나머지 그들을 함께 폐하려 하십니까? 하물며 태자는 국가의 미래이오니 함부로 흔들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당명황은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반박할 길이 없어 잠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조회가 끝난 후 무혜비는 비밀리에 하인 우귀아(牛貴兒)를 보내 장구령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장구령은 동요되지 않고 우귀아를 호되게 야단쳐 쫓아버리고 곧 바로 당명황에게 이 일을 아뢰었다. 당명황은 장구령의 충심에 감동하였다. 장구령이 재상에서 파면되기 전까지 태자를 폐하지 않았다.
태자를 폐하는 문제를 상의할 때 이림보는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그의 지위는 중서령(中書令)(정3품)인 장구령의 아래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의견을 내서 충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나온 후 이림보는 당명황의 심복이자 환관의 우두머리인 고력사를 찾아가 당명황에게 그의 의견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태자를 폐하는 것은 황상의 일이 온데 어찌 신하들에게 묻나이까.”
이 풍파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명황은 장구령과 배요경을 잇따라 재상에서 파면시켜 물러나도록 하였다. 이림보가 중서령에 오르면서 대권을 장악하였다. 개원 25년(737) 4월, 부마 양회가 다시 태자가 악왕、광왕 그리고 태자비의 오빠 설수(薛銹)와 함께 “은밀히 반역을 도모했다(潛構異謀)”라고 무고하였다. 당명황은 다시 재상들을 불러 상의했는데, 이때 이림보는 발언을 하였다. 그는 여전히 반년 전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이것은 폐하의 일이오니, 저희 신하들은 참여하지 않은 것이 마땅하옵니다.” 바로 이 말이 결정적으로 당명황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4월 23일 환관을 보내 궁중에 조서를 내렸다: 태자 이영、악왕 이요、광왕 이거를 서인(평민)으로 폐하고, 태자비의 오빠 설수를 영남으로 유배를 보낸다. 곧이어 당명황은 또 사람을 보내 경성 동쪽의 역참에서 세 아들에게 사약을 내렸고, 설수는 남전역(藍田驛)에서 사약을 받았다. 수 십 명에 달하는 세 황자의 비 집안과 외삼촌 집안 사람들이 연루되어 관직이 강등되고 유배를 당했다. 당명황은 총비와 간사한 재상의 이간과 지지로 하루만에 세 명의 친아들에게 사약을 내렸으니 그 어리석고 난폭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조정의 문무대신들과 장안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이영 형제의 억울한 죽음을 깊이 애도하였다.
이때의 무혜비는 마음속으로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하였다. 황제 부군의 은총과 재상의 지지로 그의 친아들 수왕이 황태자로 책봉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아들이 황태자가 되면 그녀가 그토록 갈망했던 황후의 자리 역시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황제 부군이 좋은 날을 골라 책명하기만 하면 그녀는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황후의 조복(朝服)--머리에는 금은주옥으로 만든 12개의 꽃 비녀를 꽂고, 짙은 청색 바탕에 오색 꿩 무늬가 수놓인 제복(祭服)을 입는데 그 안쪽에는 붉은 운룡(雲龍)이 들어간 깃의 휜 비단 홑옷이 받쳐주고, 청실로 짠 큰 띠와 가죽띠로 허리를 맨다. 허리띠 아래쪽에는 청색으로 수를 놓은 앞치마를 매 몸을 가려주는데, 양쪽에는 노란색 실로 짠 인끈 한 쌍과 백옥으로 만든 구슬 두 개가 걸려 있다. 청 버선을 신은 발로는 구름 빛깔을 띤 나무로 만든 뒤 굽이 높은 금장식 신발을 신는다--을 입고 만 백성 위에 군림하며 천하에 위엄을 나타내는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앉아 문무백관들의 하례와 칭송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무혜비는 영원히 이 날을 보지 못했다. 11월부터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폐태자 이영、악왕과 광왕의 혼이 그녀의 목숨을 거두러 오는 것에 놀라 두려워하다 병에 걸렸다. 당명황은 그녀와 여산에서 14일 동안 추위를 피했다. 온천의 뜨거운 물은 바람을 피하고 질병을 치료할 수 있었지만 양심상의 죄의식은 씻어낼 수 없었다. 경성으로 돌아온 후 당명황은 또 무사(巫師)를 불러 그녀를 위해 의식을 거행해 주었지만 여전히 효과가 없었다. 12월 7일 무혜비는 약 40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병사하였다. 뛰어난 계책을 세울 정도로 사람은 총명하였으나 장수할 운명이 아니었으니 결국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모친 무혜비가 병사함에 따라 수왕 이모가 황태자가 될 희망도 사라졌다. 먼저 이림보는 몇 차례나 수왕을 태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였지만 당명황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서 개원 26년(738) 6월, 당명황은 “장자를 추대하여 옹립한다(推長而立)”는 환관의 우두머리 고력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셋째 충왕(忠王) 이형(李亨)[즉 숙종(肅宗)]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삼서인(三庶仁)” 사건 후에 조정에는 무혜비를 견책하는 여론이 많았다. 무혜비가 사망한 후 당명황의 총애는 줄어들어 수왕의 지위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교활한 이림보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알고 더 이상 무혜비가 있을 때처럼 적극적으로 수왕을 지지하지 않았다. 천성이 총명하고 온순하며 예의가 바른 수왕은 모친의 사망을 애도하는 동시에 금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당대 역사기록에는 수왕과 양옥환이 이 궁정 풍파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고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수왕은 모친 무혜비와 달리 권력욕이 강하지 않았고 이해타산에도 뛰어나지 않았으며, 어릴 때부터 길러진 겸손하고 정중한 성격은 자신의 재기를 드러내 보이는 남아다운 강건한 성격이 부족했다. 이점은 그의 부황이 젊었을 때 야심만만하게 행동한 진취적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점이 바로 당명황이 준수하고 고상해서 좋은 인상을 주는 수왕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를 황위를 계승할 이상적인 인물로 보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수왕이 모친이 사망한 후 세 형들이 당한 것과 같은 참변을 피해 숙종、대종 시기에 편안한 일생을 보내고 천수를 다한 것도 그의 수양하는 성격과 근면하고 신중한 처세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왕 이형이 황태자로 책봉된 것은 이 궁정 풍파의 종식을 의미했다. 그러나 수왕과 양옥환의 조용한 생활에 모친에 대한 슬픔과 다가올 재앙을 막아야 하는 근심이 더해졌다. 양옥환은 더욱 더 조용하게 수왕을 받들었으며 물과 같은 온정으로 부군 마음속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었다.
무사용당삼채(武士俑唐三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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