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秦始皇陵

二. 진시황제의 능묘 2. 호화로운 지하 궁전

마장골서생 2009. 10. 13. 10:31

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2. 호화로운 지하 궁전


만약에 진시황릉의 지상 건축물이 화려하고 웅장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의 지하 건축물은 바로 호화로운 자태에 위엄이 넘치는 장관이다. 2천여 년이 흘러 지상의 이런 건축물들은 출토된 문물과 유적을 통해서 당시의 웅장한 자태를 상상할 뿐이지만 지하 건축과 매장은 땅속에 보호되어 있었던 관계로 과거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진릉 지하 건축과 매장 상황을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집필할 때 다음과 같이 시사한 적이 있다.


진시황은 즉위하면서 여산에 묘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천하를 통일하고 난 뒤에 천하의 노예 70여 만 명을 보내어 샘물 세 개를 뚫고 동판을 깐 다음 관곽을 놓았다. 별궁과 백관들, 기이한 그릇에 귀한 보배들을 무덤 안으로 옮겨 가득 채웠다. 장인을 시켜 기관과 쇠뇌를 만들어 가까이 다가오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되도록 하였다. 수은으로 온갖 냇물과 강물 그리고 큰 바다까지 만들어 기관 내에서 서로 흐르도록 하였다. 위로는 천문을 갖추고 아래로는 지리를 완비시켰다. 인어의 기름을 짜내어 등촉을 만들었는데,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始皇初卽位, 穿治驪山. 及幷天下, 天下徒送詣七十余萬人, 穿三泉, 下銅而致槨. 宮觀百官, 奇器珍怪, 徙藏滿之. 令匠作機弩矢, 有所穿近者輒射之. 以水銀爲百川江河大海, 機相灌輸. 上具天文, 下具地理. 以人魚膏爲燭, 度不變者久之.)


고대의 다른 문헌, 즉《한서(漢書)․유향(劉向)전》․《수경(水經)․위수주(渭水注)》․《삼진기(三秦記)》․《삼보고사(三輔故事)》등과 같은 것도 진릉의 지하 건축과 매장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사기》의 내용과 대체로 비슷하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진릉의 지하 건축에 함양의 궁전과 같은 도성의 별궁 및 백관의 자리순서가 있다. 관을 두는 묘실(墓室) 위쪽은 명주를 일월성신으로 삼고, 아래쪽은 수은을 강과 호수 그리고 바다로 삼았다. 매장 된 것에는 많은 진기한 동물 및 물품이 있고, 그 중에 금박으로 만든 누에 30마리가 있고, 금과 은으로 만든 오리와 기러기가 있다. 묘를 도굴하는 사람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술자들을 시켜 기관 안쪽에서 쏘아지는 화살을 문 입구에 만들게 했는데, 도굴범이 접근하면 바로 발사되도록 하였다. 묘안의 매장된 것 중에 금 기러기가 묘실에서 나와 남쪽으로 날아갔다고 전해진다. 삼국시대 오(吳)나라 보정(寶鼎) 원년(266년)에 장선(張善)이라는 사람이 일남(日南)[지금의 월남(越南) 광치성(廣治省) 광치하(廣治河)와 감로하(甘露河)가 합류하는 곳)에서 태수(太守)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금 기러기를 가져와 그에게 바쳤다. 장선은 금 기러기의 몸에 새겨진 글자에 근거하여 진시황릉 안의 부장품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것은 비록 전설상의 이야기이기는 하나 진릉 안의 문물이 밖으로 유출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심지어 아주 먼 운남(雲南)의 이남에까지 흘러갔다. 금 기러기의 제작은 정교해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날기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 전설상의 얘기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춘추시대 때 유명한 공장이었던 노반(魯班)이라는 사람이 나무 기러기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하늘을 날아 곧장 송(宋)나라의 성에까지 날아 갈 수 있었다고 한 때문이다. 몇 백년 후에 진나라의 기술자가 날 수 있는 금 기러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하는 이것은 믿을 만 하다. 민간의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은 능이 있는 구역에 또 지하에 시장(地市)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지하 시장이란 살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이들과 장사하는 것을 말한다. 진릉은 마치 하나의 지하 도시와도 같아서 정부기구는 물론 경제방면의 무역 같은 것을 하는 부문도 있었다.

 

침전의 유적지(寢殿遺址)

 

진 능묘의 꼭대기는 명주를 일월성신으로 삼았는데, 진나라가 통치하는 구역 안의 하늘을 상징한다. 중국의 고대 과학자들은 일월성신의 운행에 주의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항성(恒星)을 배경으로 하늘의 성상(星象)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대인들은 항상 천체현상을 인사와 결합시켜서, 하늘의 별들이 땅위 인간들의 화복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역대 제왕들의 능묘에는 예외 없이 성도(星圖)라고 하는 천체현상의 설명도가 있었다. 현재 고고학적으로 발견한 가장 이른 시기의 성도는 전국시대 초기의 고분인 호북성(湖北省) 수현(隨縣) 뇌고돈증후을(擂鼓墩曾侯乙) 묘 위의 성도이다. 연대가 좀 늦은 것으로는 낙양(洛陽)에 있는 서한(西漢)시대 묘 위에 그려진 성도와 서안 교대(交大)에 있는 서한시대 묘 위에 그려진 성도가 있다. 당나라 시대의 무덤 중에도 성도가 많다. 현재 진릉의 지하궁전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은 관계로 진릉 안에 있는 성도의 형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진릉의 지하궁전은 수은으로 강하(江河)와 바다를 만든 것은 진나라의 통치 구역이 광대한 지역이었음을 상징한다. 강은 장강(長江)이고, 하는 황하이며, 해는 진시황이 동순(東巡)할 때 갔던 동해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진대의 영토모형도이다. 옛 사람들은 자기 국가의 지도를 무척 중시했는데, 전국시대 때의 사상가 한비(韓非)는 본국의 지도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는 것으로, 지도가 유출되면 국가가 약화된다고 생각하였다. 형가(荊軻)라는 사람이 진왕(秦王)을 암살하려고 했을 때, 연(燕)나라의《독항지도(督亢地圖)》를 바친다는 것을 구실로 진왕 앞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임금은 늘 나라 안의 산천에 제사를 올려 가호를 빌었다. 진시황은 육국(六國)을 통일한 후에도 사방으로 순행하며 산천에 제사를 올렸다. 진나라의 영토모형을 무덤 안에 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호남(湖南)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도 《지형도(地形圖)》․《성읍도(城邑圖)》 및 《주군도(駐軍圖)》가 매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릉 중의 지도 모형이 훨씬 정교하다. 그것은 수은을 사용해서 장강과 황하를 만들었고, 기계 장치를 움직여 수은이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흐르게 하였다. 비록 진릉의 지하궁전이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능에 대량의 수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1981년과 1982년에 북경(北京)의 과학자들이 지구화학 중 수은의 량을 조사하는 측량기술을 진시황릉의 고고학적 연구에 응용하여, 진릉의 봉토 아래는 수은 함량의 평균치가 35ppb이고, 봉토 중심위치의 수은함량은 70-140ppb이며, 가장 많은 곳은 280ppb에 달하여 다른 부분보다 수은 함량 평균치의 8배나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진릉의 지하궁전에 수은으로 장강과 황하를 상징했다는 기록이 믿을 만 한 것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깊은 샘 아래 보이는 것이라곤, 금빛 관이 차가운 재 속에 묻혀있을 뿐(但見三泉下, 金棺葬寒灰)”이라고 한 이것은 이백(李白)의 시구(詩句)인데, 옛 사람들은 구리를 금이라고 하였다. 진시황의 동관(銅棺)이 봉토 아래 20여m 되는 곳에 묻혀 있다.

묘실 밖 봉토의 서쪽은 동거마(銅車馬)갱이고, 내성 서문 밖은 진수(珍獸; 진기한 동물)갱이며, 외성 동쪽에 마구(馬廏; 말과 마구간)갱과 순장(殉葬)묘 및 세계적으로 유명한 병마용(兵馬俑)갱이 있다.

진릉의 지상 건축, 지하 건축 및 매장에서 보면, 진시황릉의 건축은 지하 왕국을 구상한 것으로 전체 능 구역은 국가의 상징이고 봉토 및 내외성은 도성이다. 이 때문에 능원(陵園) 지역에 조정의 상징, 함양궁의 축소판, 진기한 날짐승과 길짐승을 사육하는 동산, 황실용 말을 사육하는 마구간, 황제의 음식을 공급하는 사관과 관청이 있게 되었고, 또 국가의 권력을 상징하는 군대도 있게 되었다. 이 거대한 건축군의 발견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중국과 외국의 인사들의 주의를 끌었다. 사람들은 스핑크스를 마주한 것처럼 그것의 진상을 탐구하고 있다.


1) 늠(檁): 형(桁)이라고도 하는데 기둥과 기둥 위에 둘러 얹히는 나무를 말한다.

2) 기문대와당(夔紋大瓦當): 고대 전설에 나오는 다리가 하나이며 용과 비슷한 동물의 일종인 기를 새긴 무늬 기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