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2. 생전의 영화를 지하로 가져가려 한 진시황제
세상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살아간다. 진시황도 점차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그 자신이 전국을 통일한 이후라고 하겠다.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획은 일변하여 공명심을 탐하게 되었고, 위대한 업적을 추구하던 것은 화려한 제왕의 기상을 과시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이런 심리들은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궁궐을 확장하고, 여산(驪山)의 능묘를 건조하는 등 끝없는 사치로 나타난다.
진시황이 궁전을 확장한 정황은《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함양 북쪽 벌판에 6국의 궁전을 모방하여 건축했다고 한다. 즉 하나의 나라를 격파할 때마다 그 나라의 궁전을 도면으로 그리게 한 후 수도인 함양에 똑같이 건설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국내에도 많은 궁전을 지어 관내에 300여 채, 관외에 400여 채나 되었다. 이러한 궁전들은 호화롭기 그지없고 그 기상 또한 대단하였다. 근년 들어 특히 1988년에 문화재를 전면적으로 조사하던 중 이런 건축물들은 함양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서쪽으로는 보계(寶鷄)․천양(千陽)에서 시작하여 건현(乾縣)․예천(禮泉)을 거쳐 함양을 지나 동쪽으로는 임동․위남(渭南) 일대에 이르기까지 진대(秦代)의 궁전건축 유적지가 발견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함양 진궁 유적지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그 일단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거대한 건축물로서 겹처마와 겹복도 등 크고 웅장하였다. 벽에는 대형 벽화가 있고 또 겹으로 된 벽과 따뜻한 복도 및 위생 설비가 두는 등 대단히 신경을 섰다. 위하 이남에 있었던 아방궁(阿房宮)은 세상에 더욱 잘 알려져 있다.《삼보황도(三輔黃圖)》라는 책의 기록에 의하면 아방궁의 전전(前殿)만도 동서로 500보(步), 남북으로 50장(丈), 상부에 만 명이 앉을 수 있었고, 하부에 5장 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당조(唐朝)의 시인 두목(杜牧)은《아방궁부(阿房宮賦)》에서 묘사하기를 아방궁은 “삼백여 리의 땅을 뒤덮고, 하늘의 해를 가린다(覆壓三百餘里, 隔離天日)”고 하였다. 지금의 서안시(西安市) 삼교진(三橋鎭) 남쪽 아방궁촌 부근에 전전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는 길이 1300미터, 넓이 400미터, 면적 60만 평방미터이다. 이로부터 그 당시의 웅대한 자태를 엿볼 수 있다. 이것도 진대의 건축은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다다랐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궁전은 진시황이 생전에 국가를 다스리고 즐거움을 누렸던 곳이다. 능묘는 바로 그의 “영혼”이 마지막으로 돌아간 곳이다. 고대의 예법에 따르면 제왕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능묘를 축조해야 한다. 그래서 영정은 진나라의 왕이 되자마자 여산에 자신의 능묘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진시황릉의 착공시간은 진왕 정 원년(기원전 246년)이라 해야 할 것이다.《사기》에 “시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여산을 뚫고 다스렸다”고 한다.
여산(驪山)은 종남산(終南山)의 지맥(支脈)으로 서안시 동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그 주봉이 섬서성 임동 남문 밖에 있기 때문에 임동산(臨潼山)이라고도 한다. 여산의 산세는 높고 수목이 우거져 대단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여산이라고도 불렀다. 전설 중 돌을 불려 하늘을 메웠다고 하는 여와(女媧)가 바로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여산에 여와를 기념하는 노모전(老母殿)이 있다. 중국의 조상은 5, 6천년 전부터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이곳에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유적인 강채(姜寨) 유적이 있다. 이후 역대로 이곳에 모두 호화로운 건축물을 세웠다. 은(殷)․주(周) 때 이곳은 여융국(麗戎國)이었으며 유적도 남아 있다. 진나라 사람들의 조상인 신후(申侯)가 주나라 효왕(孝王)에게 과거에 자신의 조상이 여산의 딸, 즉 여산에게 장가를 든 이런 혈연관계 때문에 주나라에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유왕(幽王)은 포사(褒姒)를 총애한 나머지 여산에 봉화를 올려 제후(諸侯)들을 희롱하고, 이 일로 포사의 웃음을 사는 등 망국에 이르게 한 이야기도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지금도 산 위에는 봉화대가 남아서 아직도 이 사건의 역사적 증언을 하고 있다. 당대의 화청궁(華淸宮)도 바로 여산 주봉의 이북에 있다. 당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프고 한스런 이야기들도 여기에서 나왔다. 세상을 놀라게 한 “쌍십이사변(雙十二事變)”[즉 “서안사변(西安事變)”]도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이미 고인이 된 곽말약(郭沫若)이 한 수의 시에 “여산은 구름과 숲이 우거져 창창한데, 주진과 한당이 모두 이곳에서 수명을 다했네(驪山雲樹鬱蒼蒼, 歷盡周秦與漢唐)”라고 묘사하여 그곳을 스쳐간 인간세상의 상전벽해를 개괄한 적이 있다.
여산과 생전의 진시황은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여산 북록(北麓)에 온천이 있는데, 지면으로 흘러나오는 온천수의 온도가 43℃이고, 석회․탄산망간․탄산나트륨․유산나트륨․염화나트륨․이산화알루미늄 및 유기물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피부병과 류머티즘을 치료할 수 있었다. 주나라의 유왕은 이곳에 여궁(驪宮)을 세운 적이 있다. 진시황 때는 이곳에 여산탕(驪山湯)을 지었다. 전설에 진시황은 이곳에서 아름다운 신녀(神女)를 만났는데, 못된 생각이 들어 이 신녀를 조롱하자 신녀는 노하여 그의 얼굴에다 침을 뱉었다고 한다. 그러자 진시황은 온몸에 악창이 생겨났고 오랫동안 치료했으나 낫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곧 신녀에게 가서 죄를 빌었고, 신녀는 그에게 온천을 내려 얼굴을 씻도록 하자 종기가 그제야 없어졌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얘기이긴 하나 과학적 이치가 있는 것으로 아주 일찍부터 사람들은 온천을 이용해 병을 치료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진시황이 죽자 바로 이 부근에 매장하였다. 역도원(酈道元)은《수경주(水經注)》에서 이르기를 여산은 산의 남쪽에서는 옥이 나고, 북쪽에서는 황금이 나는 아름다운 곳인데, 진시황이 이 아름다운 이름을 좋아했기 때문에 능묘를 이곳에 잡았던 것이라고 하였다. 고대 풍수가들의 관점, 즉 속어에서 말하는 풍수를 본다는 관점에서 보면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다.《대한원능비장경(大漢原陵秘葬經)》이라는 이 책은 풍수를 전문적으로 언급한 책으로 금(金)․원(元) 시기에 고대 풍수의 경험을 총괄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 안에 “무덤을 잘 쓰려면 반드시 들어오는 산과 나가는 물길에 근거해야 한다. 터를 골라 풀을 베어내고 묘와 혈은 높고 깊어야 한다(立冢安墳, 須藉來山去水. 擇地斬草, 冢穴高深.)”고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서 무덤을 만들 곳은 산을 배경으로 물을 가까이하며, 봉분은 높은 곳에 쓰며 묘혈은 깊게 판다는 것이다. 이렇게 산이 둘러쳐져 있고 물이 풍부하면 틀림없이 기운이 있을 것이고 기운이 있으면 흥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무덤이 높은 곳에 있고 앞이 탁 트인 곳이면 시원한 명당인 것이다. 이것은 비록 고대인들의 미신적인 생각이라고는 하나 환경학적으로 보아도 과학적이다. 진시황의 능묘는 임동현 동쪽과 여산 북쪽에 있다. 여산은 이곳에서 에워싸 품고있는 기세를 형성하고 있는데, 능묘가 바로 이 뭇 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에 있다. 진릉(秦陵)은 오른쪽으로는 푸른 여산에 기대어 있고, 왼쪽은 띠처럼 위수(渭水)가 흐르며, 앞쪽은 광활한 들판에 푸른 숲이 우거지고 풍성한 곡식이 익어가며 구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훌륭한 환경 속에 있다. 그밖에 진시황이 능묘의 터를 이곳에 정한 것은 지리적인 환경의 우월한 점 외에도 다른 원인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이곳이 진나라 왕공의 능묘 구역이라는 것이다. 진나라의 수도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정치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진나라 왕공들의 능묘구역도 서에서 동으로 옮기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가족의 장지(葬地)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일반적으로 수도 부근에다 두었다. 진나라가 옹(雍) 땅에 수도를 정했을 때 진공(秦公)의 묘는 다 옹 땅에다 만들었다. 1986년에 관곽(棺槨)을 개방한 진공 1호 대묘가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이다. 진의 수도가 옹에서 동천한 이후 진의 왕공 및 족인(族人)의 묘지도 이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함양에서 동쪽으로 곧장 여산 일대까지가 진나라 수도 함양에 만든 진왕의 능묘 매장지이다. 함양에는 진 문왕(文王)․진 무왕(武王)의 능이 있다. 여산이 바로 진나라 후기의 왕릉 구역이었다. 선태후(宣太后)․도태자(悼太子)․효문왕(孝文王)․소양왕(昭襄王)․장양왕(莊襄王)․제태후(帝太后) 등이 바로 여기에 묻혔다. 진나라는 이곳에 지양읍(芷陽邑)을 설치하였다. 지양읍의 위치는 대략 섬서 임동현 한욕향(韓峪鄕)의 지요(地窯) 및 유왕촌(油王村) 부근이다. 서안 동쪽 교외의 파하(灞河)는 동쪽으로 여산까지 모두 지양 관할에 속하였다. 근래에 지양 부근에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몇 좌의 대형 진나라 묘를 발견했는데 바로 이런 상황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진시황은 바로 이 동향의 진나라 왕릉 구역을 따라 스스로 능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의 능묘 서쪽 20리쯤에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아버지 진나라 장양왕의 능묘이다.
진시황 능묘의 거대한 규모와 시설은 모두 후대 제왕들의 능묘 건축에 선례가 되었다. 높고 거대한 능총(陵冢)은 진시황에게서 시작되었다. 무덤 위의 봉분은 춘추시대 말기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진시황의 능처럼 이렇게 거대한 것은 없었다. 이후 한(漢)․당(唐) 각 왕조의 제왕들도 분분히 모방하였다. 능원(陵園)에 도시(邑)를 건설하는 것도 진시황에게서 시작되었다. 진시황 능의 원명은 여산인데, 여산원(麗山園)이라고도 하였다. 진나라는 이곳에 여읍(麗邑)을 두었는데, 범위가 동서남북으로 7.5㎞였고, 여읍에는 관리하는 장관을 두었다. 묘의 곁에 침전(寢殿)을 두는 것도 진나라의 능이 그 선하를 연 것이다.
능의 터를 고른 후 계획에 따라 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능을 수축하는 책임자는 당시의 재상이었다. 그래서 여불위․창평군(昌平君)․외상(隗狀)․왕관(王綰)․이사(李斯)가 모두 이 공정을 담당한 적이 있었는데, 소부(少府)가 구체적으로 책임을 졌다. 능묘는 진왕 정(政) 원년(기원전 246년)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 대규모의 백성들을 징집하여 능을 수축했는데, 가장 많을 때는 그 수가 72만 명에 달하였다. 능 위의 높은 봉토는 진릉(秦陵)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진 어지촌(魚池村)으로부터 운반해왔다. 여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능묘에 부딪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능의 남쪽에 물막이 둑을 건설하였다. 능을 수축할 때 사용한 석재는 위하(渭河) 이북의 산 위에서 파내 온 것이다. 당시에 민가 한 수가 있다.
運石甘泉口 감천산 입구에서 돌 나르는데,
(운석감천구)
渭水爲不流 위수가 흘러들지 못할 정도라네.
(위수위불류)
千人唱 천인이 선창하니,
(천인창)
萬人謳 만인이 후렴 하네.
(만인구)
金(今)陵餘石大如?(土屋) 지금 무덤에 남은 돌 크기가 집채만하네.
금(금)릉여석대여우(토옥)
감천산(甘泉山)은 섬서성 순화현(淳化縣)에 있다. 진릉을 만든 석재는 바로 그곳에서 운반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돌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위하의 흐르는 물이 다 끊어질 정도였다. 수많은 인부들이 돌을 나를 때 앞쪽 사람들이 매김 소리를 내면 뒤쪽에서 호응하는 소리를 냈는데, 천지를 진동시키는 위수의 돌 운반 매김 소리가 되었다. 이 얼마나 슬픈 노동현장인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한 사람의 뒷일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다. “금릉여석대여우(金陵餘石大如?)”가 바로 아직 남아있는 돌 한 덩이 크기가 집채 만 함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진릉의 동남쪽 2리에 한 덩이 큰돌이 있었는데, 생김새가 큰 거북이 같고 높이가 1장 8척에 둘레가 18보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진릉을 만들 때 이곳으로 옮겨와 다시는 운반해 갈 수 없어 남겨진 것인데, 후대에 그것을 한석(佷石)이라고 불렀다. 한(佷)은 잔인하다는 의미로 한(狠)이라고도 썼다. 당대(唐代)의 황보식(皇甫湜)도 특별하게《한석명(佷石銘)》이라는 문장을 한 편 지었다. 원(元)나라에 이르러 파하(灞河)의 다리를 보수할 때, 석공이 이 “한석”을 쪼개어 다리를 보수하였다.
진릉이 수축된 기간은 3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진시황 37년(기원 전 210년), 즉 진시황이 50세가 되었을 때 이사(李斯)가 보고하였다. 신이 72만 명을 이끌고 여산을 수축하고 있는데, 이미 불조차도 붙일 수 없을 만큼 깊이 파서 뚫을 때 쿵쿵하는 소리만 들리니 지하의 바닥까지 다다른 것 같아 더 이상 파내려 갈 수 없습니다. 진시황은 듣고 나서 명령하기를 다시 “옆으로 300장을 파라(旁行三百丈乃止)”고 하였다. 진시황은 자신의 능묘 수축에 큰 관심을 가졌고 거대하게 만들도록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진릉의 서남쪽 조배호촌(趙背戶村) 남쪽에 면적이 8,100여 평방미터가 되는 곳에 백골이 쌓인 묘지가 있는데, 114기를 초보적으로 조사하여 그 중 42기를 정리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릉을 만든 사람들의 묘지이다. 이곳에 진릉을 만들다 죽은 이들의 시체가 빽빽하게 열 지어 누워있다. 어떤 시체들은 발버둥치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살해된 후 매장된 것이 분명하다. 진릉 북부에 정장(鄭莊)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진릉을 만들 때의 석재 가공지로서 면적이 수 백 묘(畝; 6.667아르)나 된다.
진시황 37년(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은 다섯 번 째 동순(東巡)을 한다. 돌아올 때 사구(沙丘)[하북(河北) 광종(廣宗) 서북 대평대(大平臺)]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 당시만 해도 진릉의 공정은 다 끝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수송되어 돌아온 후 여산 능묘에 매장되었다. 진이세(秦二世)는 후궁들 가운데 아이를 낳지 못한 궁녀들은 모두 순장(殉葬)하도록 하고, 아울러 능을 만들었던 수많은 장인들을 생매장해 버렸다. 《한서(漢書)․유향전(劉向傳)》에 진시황 때 “많은 궁인들을 죽이고 생매장한 장인들이 수없이 많았다(多殺宮人, 生埋工匠, 計以萬數)”고 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이런 얘기가 있다. 당 대중(大中; 847-859년) 초년에 도태백(陶太白)․윤자허(尹子虛)가 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 부용봉(芙蓉峰)에 이르러 진나라 때 여산에서 복역했던 인부 및 진나라의 궁인 모녀(毛女)를 만났다. 인부는 엄숙한 고대 복장이었고, 모녀는 쪽 머리에 무늬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이 다하자 인부는 소나무 가지를 잘라 술병을 두드리며 모녀와 합창하였다.
誰知古是與今非, 옛 것은 옳고 지금 것 그른 줄 뉘 알았으리,
(수지고시여금비)
間躡靑霞繞翠微. 간간이 비취 빛 두른 파란 노을 밟는다네.
(간섭청하요취미)
蕭管秦樓應寂寂, 진나라 누각에서 피리 부니 공허하기만 하고,
(소관진루응적적)
彩雲空惹薜蘿衣. 채색 구름만 쓸쓸히 지나는 은자의 집이 되었네.
(채운공야벽라의)
모녀는 또 화산에서 노니는 사람(華山遊人)이라는 시를 선물했는데, 그 가운데 두 구는 “간혹 진나라 궁전의 일 물어보면, 그저 화산의 꽃 꺾으며 하늘만 바라보네(有時却問秦宮事, 笑捻山花望太虛)”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후인들이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기는 하나 매장되어버린 기술자와 궁녀들이 액운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동정적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순장된 사람이 만 명을 헤아린다고 하니 이것은 중국 역사상 제왕들의 장례 가운데 가장 많은 수 일 것이다. 진시황이 매장된 후에도 여전히 진릉의 건설은 계속되었다. 진이세 2년(기원전 208년)에 농민 봉기군이 희수(戲水; 섬서 임동현 동쪽)를 공격하였다. 당시에 진릉 공정을 책임졌던 소부(少府) 장한(章邯)은 능을 건설하는 인력을 무장시켜 농민군에 대항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다. 진릉의 공정은 그제야 허둥지둥 끝나게 되었다.
진시황릉은 전후 38년 동안 건설된 것으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능의 봉토만 해도 그 당시에 높이가 50장(丈)이었다고 한다. 진한(秦漢) 때의 1장은 대략 현재의 2.31m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그 능의 높이가 115.5 미터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2천여 년의 비바람과 인위적인 파괴를 거쳤지만, 현재 능 앞에 있는 비석의 바닥으로부터 실측을 해 보면 능의 높이는 47.6 ㎡나 된다. 능원(陵園)의 면적은 56.25 ㎢이다. 근년 들어 진릉 능원 안에서 병마용(兵馬俑)갱․동거마(銅車馬)갱․마굿간(馬廐)갱․희귀동물(珍獸)갱․순장묘(陪葬墓)․침전(寢殿)․사관유적지건축(飼官遺址建筑) 등의 유적지와 문물을 발굴하게 되자 순식간에 세상에 알려져 국내외의 호평을 받게 되었다.
진시황은 제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후장(厚葬)을 시행하여 자신이 생전에 누렸던 것에 따라 지하에 순장할 것을 설계하였다. 이것은 의외로 진대(秦代)에 이미 고도로 발달한 인류의 문명을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라고 하겠다. 전체 진시황릉은 진대 사람들의 피땀이자 지혜요 결정으로써 한 시대의 인류 문화를 반영하였다. 이러한 유적지와 출토된 문물은 우리들이 고대의 정치․경제․군사․문화․예술․과학기술과 민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실물 자료로 제공된다. 이러한 문물은 역사적 지식을 넓혀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적 영향과 정서를 함양해 줄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매일처럼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여행객들과 과학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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