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秦始皇陵

二. 진시황제의 능묘 1. 화려한 능원 건축

마장골서생 2009. 10. 13. 10:28

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二. 진시황제의 능묘


1. 화려한 능원 건축


진시황 37년(기원전 210년)에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 동쪽 13리쯤 되는 여산의 자락에서 성대한 장례를 거행하였다. 문무백관은 상복을 입고 있고, 수레와 기병이 열 지어 있으며, 애도의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진시황의 영구가 묘의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백성들은 길가에 꿇어 앉아있다. 여산 아래 높다란 궁전 건물들의 금빛 벽들은 화려하게 번쩍이고, 드넓은 성벽 및 문이 네 곳이나 되는 대궐과 사각형 모양의 누각들은 웅장하며, 솟아오른 봉토 안에는 얼마나 값진 보물들을 묻었는지 그야말로 새로 만든 도시 같았다! 이것이 바로 진시황릉이 건설되는 초기의 모습이다. 역대 제왕들의 후장 풍조는 이때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진(晉)나라 때 색림(索琳)이라는 대신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한조(漢朝)의 천자는 즉위한 지 1년 후에 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천하의 공물과 세금을 삼 등분하여 하나는 종묘(宗廟)에 공급하고, 또 다른 하나는 빈객(賓客)들에게 공급하며, 마지막 하나는 능을 건축하는데 충족시켰다. 한나라의 무제(武帝)는 장수했기 때문에 능을 건설하는 시간도 길었는데, 그가 죽었을 때 능을 건설할 시점에 심었던 나무의 줄기가 이미 굵어졌다. 묘안에 매장한 물건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집어넣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적미군(赤眉軍)이 한 무제의 무릉(茂陵)을 파헤쳐 능 안의 진귀한 보물들을 가져간 적이 있지만 반도 가져가지 못했고, 지금도 대량의 비단과 주옥들이 남아있다. 이것은 진시황릉의 상황과 같은데, 진시황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거대하고 화려한 능원을 건설하려고 했을까? 이것은 고대의 장례로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고대의 장례는 생산력의 발전과 문화의 진보에 따라 점차 성대해지기 시작하였다. 《주역(周易)》․《회남자(淮南子)》등의 책에 기록하기를 옛날에는 사람을 매장할 때 옷차림은 아주 간단하였고, 야외에 묻었지만 봉분은 없었으며, 매장한 곳에는 나무도 심지 않았고, 어떤 기념물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黃帝) 때에야 비로소 죽은 자를 질그릇으로 만든 관속에 담아 묻었고, 은상(殷商) 때는 관의 밖에 곽(槨)을 덧씌웠으며, 주(周) 때는 묘안에 그림을 그렸지만 모두 봉분을 하지 않았으며, 묘는 평평했다고 한다. 춘추(春秋)말기에 이르러 공자(孔子)가 부모의 묘 위에 4척(尺) 높이의 흙 언덕을 쌓았다. 그는 자신이 사방으로 다니기 때문에 돌아왔을 때 부모의 묘지를 찾지 못할까봐서 이런 표지를 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후대로 갈수록 봉토가 커져서 어떤 경우는 산과 같았고, 묘 위에 많은 나무를 심어 숲과 같았다. 제왕들은 능묘를 도시처럼 거대하게 만들고 구분하는 등급을 사용하여 제왕의 존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데에 더욱 신경을 썼다. “죽은 자를 섬기는 것은 산 자를 섬기는 것과 같이하는 것이 예(事死如事生, 禮也)[《좌전(左傳)․애공(哀公)15년》]”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를 받드는 것은 산 자를 대하듯 해야 예의제도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능묘제도는 정치제도의 범주에 들어가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행위가 되었다.

 

진시황릉비(秦始皇陵碑)

 

진시황이 전국시대(戰國時代) 이래의 후장풍습을 계승하여 그것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고 체계화시켰기 때문에 진시황릉의 규모와 배치는 이후 제왕들 능묘의 원본이 되었다. 진시황릉(진릉으로 약칭)의 능원 범위는 엄청났다고 하는데, 탐측 결과에 의하면 56.25 ㎢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특별히 여읍(麗邑)을 두었던 것이다. 제왕의 능원에 읍(邑)을 두는 것 역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진릉이 건축되기 이전에도 설계도와 설계방침이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이사가 말했던 능을 건축할 때 “조목별로 정한 규정에 의해 뚫는다(鑿以章程)”의 “장정(章程)”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 설계도와 설계방안은 두 부를 만들어, 한 부는 진의 함양궁(咸陽宮)에 두었고, 다른 한 부는 진릉의 지하 궁전에 두었다.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역사기록과 고고학적 탐사로부터 이미 그것의 기본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진릉의 건축은 지면건축과 지하건축으로 나뉜다. 먼저 그것의 지면건축부터 살펴보자.

진릉의 건축은 확실히 도성(都城)과 같았다. 높은 봉토의 바깥 둘레에 흙을 다져서 안팎으로 두 겹의 성벽을 쌓아 남북향의 장방형으로 나타난다. 내성의 성벽은 길이가 1355m, 넓이가 580m, 둘레가 3870m이다. 외성의 성벽은 길이는 2165m, 넓이가 940m, 둘레가 6210m이다. 이 숫자는 명(明)나라 사람 도목(都穆)이 말한 내외성의 둘레 보다 조금 더 길다. 도목은 내성의 둘레는 5리, 외성의 둘레는 12리라고 하였다. 내성 북쪽에 두 개의 문이 있고 그 나머지 남․동․서 및 외성의 사방에 현재는 단 한 개의 문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성벽의 기단 넓이는 8m이지만 높이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角樓)를 지었다. 문마다 앞에 궐루(闕樓)가 있었다. 명나라의 도목은 진시황릉 내외성 성문의 유적지를 본적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남쪽에서 진릉을 오를 때 두 개의 작은 구릉을 봤는데 이것이 내성의 남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진릉 내외성벽의 유적지는 현재도 절벽 쪽에서 평평하게 다져진 황토층을 볼 수 있다. 20세기 6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진릉 부근의 악가구촌(岳家溝村)․하진촌(下陳村)에서 2m가 넘는 높이의 단속적인 성벽의 남은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봉토가 내성의 남반부에 높이 솟아 있는데, 봉토의 아래쪽이 바로 지하궁이다. 지하궁 성벽은 남북의 길이가 460m, 동서의 넓이가 392m, 성벽의 높이가 4m이고 두께도 4m나 된다. 최근 몇 년 동안 고고학자들이 지하궁으로부터 지상으로 통하는 길을 봉토의 동․북․서 몇 개 방위에서 발견하였다. 궁의 벽은 굽지 않은 흙벽돌로 쌓아 만들었다.

봉토의 북쪽은 진릉의 침전(寢殿) 건축물이다. 묘의 한 쪽에 침전을 짓는 것도 진시황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역대 제왕들도 능 옆에 침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침전을 고서에서는 침(寢)이라고도 하였다. 동한(東漢) 때의 채옹(蔡邕)은《독단(獨斷)》이라는 책에서 고대의 제왕들은 모두 읍(邑)에 사당인 묘(廟)와 침전인 침(寢)의 건축물을 두었다고 하였다. 사당에는 조상의 신위를 안치하였고, 침전 안에는 의관, 궤장 및 일상생활 용품을 두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제사용이었던 것이다. 진나라 이전에는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중요한 기념일에 군왕이 대신들을 이끌고 사당에서 제사를 올렸다. 진시황은 자신의 묘 곁에 침전을 세우고 의관 및 생활용품을 안치하게 되면서 묘제(墓祭)가 시작되었다. 진릉의 침전은 봉토 북쪽 약 150m되는 곳이다. 1976-1977년, 이곳 사방에서 건축물 유적지를 발견하였다. 이 유적지들은 동서가 서로 연이어져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크고 화려한 건축물로써 2호 건축물 유적지의 주요 부분만도 면적이 64㎡나 되었다. 성벽은 토대를 다져 매우 견고한 데다 백분을 발라 매끄럽고 평평하게 만들었다. 지면은 평평하고 매끄럽게 토대를 다져 쌓았다. 집밖의 노면은 돌을 깔아 닦았다. 문을 들어서면 돌계단이 있고, 실내에는 또 복도가 있는데 다른 방으로 통하였다. 집의 도리(檁)1)는 직경이 20여m나 되었다. 집 꼭대기는 평기와(板瓦)로 깔고 쪽기와(簡瓦)로 평기와에 덮었으며, 서까래 끝에는 꽃무늬로 된 마구리 기와(瓦當)가 붙어있다. 와당은 바로 쪽기와와 앞의 원형 혹은 반원형의 덮개로써 서까래 끝을 덮는 데에 사용하여 서까래 끝이 비바람에 침식되는 것을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건축물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이런 와당 중에 기문대와당(夔紋大瓦當)2)을 발견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와당의 왕(瓦當王)”으로 부른다. 그것의 직경은 61㎝에 달했고, 도리의 끝을 덮는 것으로 침식을 막는다는 뜻의 “차후(遮朽)”라고 불렀으며, 도리가 상당히 굵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출토물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런 건축물들이 당시에 분명 대단히 웅장했고 장식도 화려했음을 상상하게 한다. 이곳에서 남향이 바로 능묘 중 궁정에서 수레를 타는 곳, 즉 궁중의 거마방(車馬坊)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청동 수레와 마차(銅車馬)가 출토된 적이 있다.

 

 진시황릉의 전경(秦始皇陵全貌)

 

진릉에는 또 사관(飤官)을 두었다. 사(飤)는 먹인다는 의미의 사(飼)라는 글자로서 사관은 무덤 주인의 음식을 관장하는 관원이다. 옛 사람들은 “귀신도 먹을 것을 구한다(鬼猶求食)”[《좌전(左傳)․선공(宣公)4년》]고 여겼다. 사람은 죽은 후에 귀신이 되지만 여전히 밥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진한(秦漢)의 제왕들은 궁중에 사관을 두는 것 외에도 능묘에 사관을 두었다. 진릉의 사관 관서(官署)는 봉토의 서북방향 가까이 내성과 외성 사이에 위치한다. 1981년에 이곳에서 사관 유적지의 일부분을 발굴하여 확인했는데, 면적이 2,000여㎡나 된다. 이곳에서 토대를 다진 매끈한 지면, 백분을 칠한 벽, 높고 가지런한 겹처마 지붕 및 거대한 저장실, 정교한 우물 둔덕과 우물이 있고, 또 규모가 거대하고 배치가 완벽한 하수구가 있다. 여기에서 대형 옹기, 시루, 동이, 항아리 등을 출토하였다. 다섯 개의 항아리 뚜껑 상면에 “여산사관(麗山飤官)”과 “여산사관좌(麗山飤官左)” 등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진나라는 황제의 능을 “산(山)”이라고 불렀다. “여산”은 진나라 때 진시황릉에 대한 호칭이었고, 사관 관서에는 좌우사관령(左右飤官令)을 두었으며, 사관령(飤官令)은 사관 관서의 장관이었다. 항아리 뚜껑 위의 문자가 바로 이 건축물들이 진릉 사관의 관서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사관이 비록 600석(石)의 소관(小官)이기는 했으나 황제의 음식을 시봉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능 위에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황제를 대하는 것처럼 매일 음식물을 바쳤다. 사관의 관서는 대략 명청(明淸)시대의 “어선방(御膳房)”에 해당하였다.

진릉 능원에서는 현재 한․당(漢․唐) 등 조대(朝代) 제왕들의 능묘 위에 있는 그런 대형 석각(石刻) 같은 것들을 볼 수 없다. 당시에는 있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당나라 때의 문인 봉연(封演)은 자신의 저작에서 “진한 이후로 제왕의 능 앞에 돌로 만든 기린, 벽사, 코끼리, 말이 있었다(秦漢以後, 帝王陵前有石麒麟, 石辟邪, 石象, 石馬)”고 하였다. 세월이 오래 되어 진한시대의 무덤 위 석각은 현재 잘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진대(晉代)의 갈홍(葛洪)은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한나라 때의 오작궁(五柞宮) 서쪽에 청오관(靑梧觀)이 있고, 관(觀) 앞에 세 그루의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나무 아래에 높이 1장 3척이나 되는 돌기린이 두 존 있었다고 하였다. 그것의 흉부에 한 줄의 글자가 새겨져있는데 이것이 진시황릉의 물건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나라 때에 이런 석각들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졌음을 설명한다. 이런 석각본들은 외성 성벽의 문밖이나 동도(東都)로 가는 길에 놓였어야 했다.

진릉에서 동쪽으로 대략 70리 떨어진 곳, 즉 지금의 임동현 대왕진(大王鎭)의 동남쪽에 진나라 때의 대궐(大闕)이 잔존하고 있다. 지금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잔궐(殘闕)의 높이는 2미터가 조금 넘는다. 궐(闕)이라고 하는 것은 궁(宮)과 사당(廟) 혹은 무덤 밖에 세웠던 두 개의 큰 기둥을 말한다. 궐 위에 누각을 세웠기 때문에 궐루(闕樓)라고도 한다. 이곳의 궐은 진릉 동문의 궐이다. 궐문(闕門)을 들어서면 바로 진릉의 신도(神道)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진릉의 묘도(墓道) 정문은 동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서술한 봉토, 내성의 성벽, 침전, 사관의 관서 및 동문궐은 모두 진릉 지상 건축물 중 진릉 배치의 일부분에 속한다. 또 일부 건축물은 비록 진릉 배치 중의 일부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진릉을 수축할 때 공정상 필요 때문에 건설한 지상의 건축물로써 지금도 여전히 진대의 유물로 남았으며, 그것들은 진시황릉 구역 중 진대 문화의 중요 구성부분이기도 하다.

진릉 외성의 동남쪽 방향에 길이가 1,600여 미터나 되는 물막이 둑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령 유적(五嶺遺址)”이다. 진릉에 쓸 석재를 가공하던 장소는 진릉 외성 서북쪽 모퉁이 밖, 즉 지금의 임동구(臨潼區) 정가장(鄭家莊) 이남지역으로, 총면적이 약 75만 평방미터로서 지금의 1,100여 무(畝)에 해당한다. 이곳에 가옥 건축물의 유적 및 와당, 간와 등과 같은 건축 자재가 있고, 쇠로 만든 저울, 대패, 도끼, 낫과 같은 생산도구가 있으며, 또 흙을 구워 만든 동이, 항아리, 밥그릇과 돌로 만든 절구와 맷돌 등과 같은 생활용구가 있다. 더욱 사람의 이목을 끄는 것은 구리창, 쇠로 만든 칼(鐵鉗; 목에 차는 형벌도구)과 족쇄가 있다는 점이다. 한 족쇄에는 자물쇠도 달려있다. 출토된 이런 기구들은 이곳의 노동자들이 삼엄한 무장 경비병들의 감시 아래 힘든 노동에 시달렸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또 호화로운 진릉 능원이 당시 사람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라는 것을 설명해준다.

이런 점 외에도 진릉 주위에 적지 않은 진대의 가마터가 있는데, 이것은 벽돌과 기와를 굽던 것이다.

진릉의 주요 건축물 및 진릉을 수축하기 위해 만든 부속 건축물로 보면, 이곳은 2천여 년 전 많은 사람들이 황제 한 사람의 뒷일 때문에 분주하였다. 이곳을 진대에는 여읍(麗邑)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오로지 진릉 즉 “여산”을 위하여 설치한 하나의 읍(邑)이었다.


그림 설명


1. 병마용 갱(兵馬俑坑)                          8. 어지 유적(魚池遺址) 

2. 상초촌 순장묘(上焦村陪葬墓)                  9. 사관 유적(飤官遺址)

3. 상초촌 마굿간갱(上焦村馬廐坑)               10. 돌갑옷 갱(石鎧甲坑)

4. 동거마 갱(銅車馬坑)                          11. 백희용 갱(百戱俑坑)

5. 희귀동물 갱(珍獸坑)                          12. 문관용 갱(文官俑坑)

6. 능 수축 인부 묘지(修陵人墓地)                13. 물새 갱(水禽坑)

7. 석재 가공장(石料加功場)                      14. 물품저장 갱(府葬坑)


진릉의 부장갱(秦陵陪葬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