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秦始皇陵

2. 음식을 바치던 사관(飤官)

마장골서생 2009. 11. 9. 13:35

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2. 음식을 바치던 사관(飤官)


진시황이 위풍 당당한 일세의 영웅이었다고는 하나 그 역시 결국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갔다.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밥 먹는 것”을 그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였던지 심지어 죽은 후에도 밥 먹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바로《좌전(左傳)》이라는 책에서 “귀신도 밥 먹기를 바란다(鬼猶求食)”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능묘 축조 구도 속에 자신이 죽고 난 후 영혼이 먹을 밥 문제를 중요한 위치에 두었다. 이것이 바로 진시황이 사관 관서를 건축한 이유이다.

진릉의 사관 관서는 능의 서쪽 지역 내외성의 사이에 건축되었다. 1982년에 진릉 서북부의 어떤 사람이 대량으로 흙을 파내다 사관 건축의 유지를 발견하였다. 그 해 및 이듬해 봄과 여름 사이에 이 유적지를 전면적으로 조사하였다. 조사 발굴한 면적은 대략 2,000㎡였다. 조사과정에서 이것이 진대의 건축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반이 20여 층의 달구질을 거쳐 쌓여진 것으로 보아 건물은 거대했을 것인데, 그곳에서 발견된 대량의 평기와 및 반원통형 기와가 이를 증명한다. 집 주위에는 흙으로 쌓은 것과 기와로 포장한 노면이 있다. 또 진대의 우물과 수챗구멍도 있다. 우물에는 벽돌을 깐 우물둔덕이 있는데, 우물 벽은 16미터나 되는 대형의 우물 테로 쌓여져 있다. 수챗구멍에는 우물 테 같은 것은 없지만 우물 벽 주위에는 우물을 팔 때의 발자국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문물로는 동 말발굽(銅馬蹄)․쇠사슬과 동 화살촉(鐵鏈銅鏃)․동 등잔받침대(銅燈臺)․동 저울(銅權)․철검(鐵劍) 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건축물일까? 우리는 4개의 항아리 뚜껑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그 뚜껑에 “여산사관(麗山飤官)”․“여산사관우(麗山飤官右)”라는 진나라의 전각문(篆刻文)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그제야 이것이 바로 진릉의 사관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飤)라는 글자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飼)자와 같다. 사관(飤官)이라는 글자는《한서(漢書)》에 식관(食官)이라고 되어있다. 식(食)이라는 글자를 여기에서는 Shí 로 읽는다. 그래서 사(飤)․식(食)․사(飼) 세 글자는 용법상 동음동의어이다. 사관이라는 것은 진대는 중앙에서 첨사(詹事)에게 귀속시켜 관리하던 것으로 황제 및 궁정에 음식을 공급하던 관원이었으며 사관령(飤官令)․육백석(六百石)이라는 하급관원이 있었다. 영(令) 아래에 좌․우승(丞)이 있어 사관령을 도와 관련된 사무를 관리하였다. 진시황제릉을 진대에는 “여산(麗山)”이라고 했고, 능원을 “여산원(麗山園)”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진릉의 사관을 “여산사관(麗山飤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전체 발굴과정에서 보면 이것은 정말로 거대한 건축물이다. 지반은 흙을 다져 숫돌처럼 평평하게 하였고, 담은 흙을 다져 쌓아 올렸으며, 담벼락은 분홍색의 미장을 하였다. 옥상은 평기와와 반원통형 기와로 덮었고, 용마루는 용마루 기와로 이었다. 푸른 빛깔을 띠는 문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역시 넓이가 30㎝, 두께가 40㎝, 길이가 50㎝나 되는데, 이것은 응회암을 조각하여 만든 것이다. 또 한 곳의 집은 지반이 궁형으로 되어 있고 모두 바닥용 벽돌을 깔았으며 밑 부분은 수챗구멍으로 통하게 해 놓았는데, 뭔가를 씻던 장소인 것 같다. 다른 한 곳의 거대한 건축물은 지면에 나무를 쌓아 구유를 만들고 위에 목판을 덮었는데, 보기에도 식품 같은 것을 저장했던 건축물 같다. 나머지 장소에는 대야․단지․항아리가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대야․소반․단지 등의 취사도구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며, 또 도기 같은 것도 있는데, 밑 부분과 가장자리에 직경 1㎝의 둥근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먹거리를 쪘던 시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유적지가 대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나무는 모조리 숯과 잿더미로 변하였다. 약간의 기와 조각은 불에 타 부풀어올라 흡사 지금 우리가 먹는 빵처럼 가볍고 속이 비어 큰 덩어리조차도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니 그 당시에 화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항우(項羽)가 관중(關中) 땅으로 들어온 후 시황릉(始皇陵)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곳의 사관 관서도 이 정해진 액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하다. 우리가 이 유적을 조사할 때, 시황제가 거대한 무덤을 쌓고 그 속에 화려한 전각까지 세운 것을 보면 생전에 먹던 맛난 음식들을 모조리 지하세계로 가져가려고 할 정도로 탐욕스러웠구나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들곤 하였다. 사관은 매일 먹을 것을 바쳐야 했겠지만 시황제가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생전에 누리던 것에 대한 스스로의 위로와 심리적인 안정을 바랐던 것일 뿐이리라. 이러한 안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소진시켰을까? 항우의 횃불 하나에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하얗게 불타버리고 빈터만 남아버린 것을! 시황제의 혼백이 지하에 남아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