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秦始皇陵

一. 진시황제와 그의 능묘 1. 황토 흙이 낳은 중국의 첫 번째 황제

마장골서생 2009. 2. 17. 18:38

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一. 진시황제(秦始皇帝)와 그의 능묘(陵墓)

 

1. 황토 흙이 낳은 중국의 첫 번째 황제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진정한 통일 봉건왕조는 진(秦)나라이다. 이 진나라가 존재했던 시간은 비록 짧디 짧은 15년(기원전 221 - 전 20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후 2천년 동안 중국 봉건사회의 정치적 기초를 다져주었고, 중국의 고대역사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낳았다. 진시황제가 바로 이 왕조의 첫 번째 황제이다.
진나라 사람들의 업적은 중국의 역사발전에 영향을 끼쳤으며 그 명성도 세계 각 지역으로 전해졌다. 현재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국을 China로 부르는 것은 아랍어 Cya․Sin, 라틴어 Thin․Thinae에서 변화하여 온 것으로 모두 “진(秦)”의 음역인데 바로 진나라 땅이라는 의미이다. 청대(淸代)의 학자 설복성(薛福成)은 《출사일기(出使日記)》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각 나라는 중국으로 불렀고, 영국은 중국을 차이이나(采依那), 프랑스는 씨나(細納)로, 이탈리아는 치나(期納)로 불렀다고 하는데, 모두 진(秦)의 음역이다. 이것은 진시황의 “위세가 특별했던(威震殊俗)” 결과라고 그는 말하였다. 사실 《구약(舊約)》중에 “보아라, 이들은 먼 곳에서 왔도다, 이들은 북방에서 왔도다, 서방에서 왔도다, 이들은 씨니국에서 왔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씨니(希尼)가 바로 진의 음역이다. 일찍이 기원전 4, 5세기 즉 진시황 이전 2, 300년에 서방의 국가들은 바로 진이라는 이 나라를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진나라의 기원과 발전을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기(史記)․진본기(秦本紀)》의 기록에 의하면, 진의 선조는 황제의 손자 전욱(顓頊)의 한 갈래라고 한다. 전욱은 중국 역사 전설 중 오제(五帝)의 한 임금인 고양씨(高陽氏)라고도 한다. 진나라 사람들의 조상을 여수(女修)라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제비 알을 삼킨 후에 대업(大業)이라고 하는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진나라 사람들이 아직 모계씨족사회에 처해 있었고 제비를 토템으로 삼았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대비(大費)라는 사람 때에 이르렀을 때가 바로 중국 전설 중의 순(舜)임금 때이다. 그는 순임금을 도와 날짐승과 길짐승을 길들였는데, 그 성과가 뛰어나자 순임금은 그에게 영(贏)이라는 성을 내렸다. 대비는 또 우(禹)와 함께 홍수를 다스린 적이 있다. 치수(治水)가 성공하여 순임금이 우를 칭찬하자 우는 “이것은 저 혼자서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대비의 협조가 있어서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비도 순임금의 상을 받았다. 하(夏)나라 말년에 이르러 대비의 현손인 비창(費昌)이 하나라 걸(桀)왕을 떠나 상(商)나라로 귀순하여 탕(湯)임금을 위해 수레를 몰았고, 그 후대는 대대로 은(殷)나라를 위하여 일하게 되었다. 주(周)왕조에 이르렀을 때 진(秦)나라의 후대 중 조보(造父)라고 하는 사람이 조상의 수레 모는 기술을 계승하여 주나라 목왕(穆王)의 수레를 몰았다. 그의 기술은 아주 뛰어나서 여행을 즐겼던 주나라 목왕으로 하여금 전국을 주유하게 하였고, 목왕이 좋아하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조성(趙城)[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홍동현(洪洞縣) 북쪽과 곽현(霍縣)의 남쪽]에 봉해졌다. 그래서 조보의 한 갈래는 곧 성이 조씨(趙氏)가 되었다. 다른 한 갈래인 비자(非子)는 주나라 효왕(孝王)을 견(汧)과 위(渭)의 사이[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보계(寶鷄)와 농현(隴縣)의 사이]에서 말을 길렀다. 말의 번식이 매우 빨랐기 때문에 주나라 효왕은 곧 비자의 이복동생인 성(成)을 진(秦)[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 부근]에 봉하고 주나라 왕의 속국으로 삼았는데, 영씨(贏氏)의 혈연을 계승했다고 하여 진영(秦贏)이라고 칭하였다. 이후에 진의 세력은 점차 동쪽으로 옮겨갔다. 진나라 양공(襄公) 때(기원전 771년) 주나라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 의해 살해되자 주나라 평왕(平王)은 동쪽으로 옮겨갔다. 양공은 군대를 보내 호송하는 데에 공을 세운 덕택에 진은 비로소 제후(諸侯)에 열입된다. 진의 덕공(德公) 원년(기원전 677년)에 옹(雍)[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봉상현(鳳翔縣) 남쪽]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는 옹을 도읍으로 해서 근 300년 동안 20명의 봉군(封君)을 거치게 된다. 그 가운데 진나라 목공(穆公)은 진의 영토 개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진 목공(기원전 659 - 기원전 621년)은 이름이 임호(任好)로 치국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백리해(百里奚)․건숙(蹇叔) 등 재능 있는 사람을 기용하고, 대외적으로는 이웃나라와 관계를 잘 유지하는 데에 주의하였다. 진 목공 14년(기원전 646년)에 진(晉)나라는 가뭄이 들자 진(秦)나라에 식량을 빌리게 된다. 진나라의 대신 비표(丕豹)는 진(晉)의 위기를 틈타 진(晉)을 치자고 주장하였다. 목공은 “그들의 임금이 싫긴 하지만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라고 하고는 위하(渭河)를 따라 배로 많은 식량을 보내어 진(晉)나라의 재난을 구제해 주었다.
다른 한 이야기는 진 목공에게 훌륭한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섬서성(陝西省)의 기산(岐山) 아래에서 잃어버렸다. 기산의 백성들이 이 말을 잡아죽여 나누어 먹어버렸다. 같이 말고기를 먹은 백성들이 300여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당시에 “야인(野人)”이라고 해서 외곽지역에 거주하며 진나라의 혈통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관리들이 이들을 잡아다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진 목공은 “재능과 덕이 있는 사람들은 가축을 좋아한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말고기를 먹고 나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들었다”라고 말하고는 말고기를 먹은 백성들에게 술을 내리고는 그들 모두를 사면하였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진 목공이 원대한 이상과 정치적 포부를 지닌 사람임을 설명한다. 이 때문에 그가 집정했던 39년 동안 진나라는 “스무 개의 나라를 정복하고, 천리의 영토를 개척하여(益國二十, 開地千里)” 서쪽으로는 서융(西戎)을 멸하고 동부 세력은 황하(黃河)의 서안에까지 다다라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하나가 되었으니 진나라의 훗날을 위해 공고한 기초를 다진 셈이다. 이후 진나라의 각 군주는 다들 업적을 쌓았다. 중국 서부의 황토 지역에 빛나는 별 하나가 떠올라 최후로 중국의 대지를 비추었다.
진나라가 옹땅에 도읍을 정했을 시기는 중국 역사상의 중요한 단계였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이미 옹성진공능원(雍城秦公陵園)은 대묘(大墓) 18좌(座)와 거마갱(車馬坑) 21개가 있다고 밝혀내었다. 무덤 위에 원래는 대형 건축물이 있었고 봉토더미는 없었다. 또 옹땅에 있었던 궁전인 대정궁(大鄭宮)과 기년궁(蘄年宮)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중요한 문화재가 많이 출토되었다. 당(唐)나라 때 도합 10면의 석고문(石鼓文)이 발견되었는데, 진나라 때의 수렵을 내용으로 하는 대전문(大篆文)이 새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천여 년의 토론을 거쳐 마침내 이것이 진나라 양공(襄公) 이후 진나라 헌공(獻公)까지의 문화재라고 결론지었다. 석고문은 현재 북경의 고궁에 존재하는데, 고대 때 석재를 이용해 사건을 기록한 최초의 문자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에 다년간의 발굴을 거쳐 1986년에 진공(秦公) 1호 대묘의 관곽(棺槨)을 열었는데, 곽실(槨室)면적이 90여 평방미터였으며 그 속에서 수천 점의 문화재를 출토하였다. 출토한 석경(石磬)에 “天子郾喜, 龔?是嗣; 高陽有靈, 四方以鼎”이라는 진나라의 대전문이 새겨져 있었다. 공(龔)과 환(?)은 각각 진의 공공(共公)(기원전 608 - 기원전 604년)과 진의 환공(桓公)(기원전 603 - 기원전 557년)을 가리키며, 고양(高陽)은 바로 고양씨(高陽氏), 즉 전욱(顓頊)이다. 의미는 “주(周)나라 천자의 영명함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은 편안하였으며, 공공과 환공이 진공(秦公)의 큰 지위를 이었다. 고양씨는 위엄이 넘쳐 사방이 다 복종하였다”이다. 진나라 사람들은 황제(黃帝)의 자손인 고양씨의 후대임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옹땅에 있었던 시기의 정치적 형세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 헌공 2년(기원전 383년)에 진나라 사람들은 역양[櫟陽;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 북쪽]으로 천도하였다. 진 효공(孝公) 때 전국시기에 변법(變法)으로 강력해진 각 국의 형세에 따라 그는 상앙(商鞅)을 임용하여 변법을 실행에 옮겼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상앙변법(商鞅變法)”이다. 변법을 통해서 진나라는 노예들의 주인 구실을 하는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면서 생산력을 효과적으로 높여 생산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진나라의 국세가 강성해지면서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가 되었다.
진 효공 12년(기원전 350년)에 진나라는 함양(咸陽;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20리)으로 천도하였다. 함양은 위하(渭河)의 중류에 처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지세가 평탄한데다 땅도 기름지고 물산도 풍부하였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함양을 근거지로 하여 통일 대국의 준비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130여 년 동안 6대 군주를 거치면서 6국을 통일할 임무를 “육대의 여세를 이은(續六世之餘烈)” 진시황이 완성한다.
진시황의 부친의 이름은 자초(子楚)인데 장양왕(莊襄王)이 바로 그 사람이다. 자초가 조(趙)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여불위(呂不韋)를 만났다. 여불위는 조나라의 큰 상인이었는데, 그는 자초가 앞으로 진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고 진나라 또한 강국이라 아마도 천하를 통일할 것이라고 여겼으며, 자초는 “진기한 재물(奇貨)”이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진기한 재물은 쌓아둘 만 하다(奇貨可居)”는 생각을 품고서 자초와 인연을 맺고 노래와 춤에 뛰어나고 아름다운 자신의 애첩 하나를 자초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훗날 이 애첩은 조나라의 한단(邯鄲)에서 아이 하나를 낳고는 이름을 정(政)이라고 지었다. 진나라와 조나라는 같은 조상인데다 똑같이 황제의 후대였기 때문에 성을 조씨로 하여 조정(趙政)이라고 불렀다. 또 진나라는 성이 영(嬴)이었기 때문에 영정(嬴政)이라고도 불렀다. 진나라 장양왕 3년(기원전 247년)에 장양왕 자초가 세상을 떠났다. 이 해에 영정은 겨우 13살로서 진나라의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국가의 대사는 모두 태후와 대신들이 주재하였다. 이 때 진나라의 영토는 이미 섬서(陝西)를 넘어 사천(四川)․호북(湖北)․산서(山西)․하남(河南) 및 내몽고(內蒙古) 일대로 확대되었다. 여불위는 상국(相國)[혹은 상방(相邦)이라고 칭함]이었다. 그는 대신들과 적극적으로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합병할 준비를 하였다. 진왕정(秦王政) 9년(기원전 238년) 영정이 22세가 되면서 국가의 대사를 주재하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그는 군사를 보내어 장신후(長信侯) 노애(嫪毐)의 반란 활동을 진압하였다. 다음해에 그는 또 여불위의 상방 직무를 폐하고 사천으로 좌천시키자 여불위는 나중에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진왕정 11년(기원전 236년)부터 시작해서 진나라는 동방의 각 나라와 통일전쟁을 전개하였다. 15년을 거치면서 진왕정 26년(기원전 221년)에 제(齊)나라를 멸하고 6국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진나라의 영토는 동남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조(洮)땅에까지 다다랐으며, 북쪽으로는 음산(陰山)과 요동(遼東)일대에까지 미쳤다. 이 때 영정의 나이 겨우 39세였다. 6국을 통일한 이후에 진왕 정은 시황제(始皇帝)라고 자칭하였다. 이 이후로 중국의 역대 군주는 황제로 칭하였다. 영정이 시황제로 칭한 것은 그 뜻이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고 자신의 후세는 2세․3세로 칭하며 만 세까지 끝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통일 봉건제국을 지킬 일련의 조치를 추진하였다. 그는 은(殷)․주(周) 이래의 분봉제(分封制)를 없애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여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 현(縣)을 설치하고, 현 아래에 향(鄕)․정(亭)․리(里)를 두어 군--현--향--정--리의 정권체제를 만들었다. 중앙에는 3공(公)과 9경(卿)을 두어 황제를 도와 국가의 대사를 처리하였다. 이렇게 중앙에서 지방까지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 집중되어 중앙집권제의 군주통치가 크게 강화되었다. 중앙에서 도량형 표준기(標準器)를 반포하여 전국의 도량형 제도를 통일하였다. 또 수레바퀴의 폭을 6척(尺)으로 하고, 진나라의 소전(小篆)을 전국에 통용하는 문자로 삼도록 규정했는데, 바로 “수레는 바퀴를 같게 하고(車同軌)”․“글자는 문자를 같게 한다(書同文)”는 것이었다. 이 일련의 조치가 전국의 정치․경제․군사․문화 사상을 고도의 통일에 이르도록 하였다. 사상과 문화를 통일하기 위하여 그는 전국에서 “책을 불사르고 유학자를 구덩이에 묻어버리는 (焚書坑儒)” 행동으로 진나라 정치에 불리한 유가의 저작 및 각 국의 역사책을 불태워 없애고, 함양의 위하(渭河) 가에서 한 번에 400여 명의 유생들을 죽였으며, 여산(驪山) 자락 아래의 홍경보(洪慶堡)에서 700여 명의 유생들을 생매장하였다. 섬서 임동현 한욕향(韓峪鄕) 홍경보를 한(漢)나라 때는 민유향(愍儒鄕)이라고 불렀고, 당(唐)나라 때는 정유향(旌儒鄕)이라고 했으며, 청(淸)나라 때는 멸문보(滅文堡)라고 일컬었는데, 바로 유생들을 구덩이에 묻은 곳이다. 한나라에서 청나라까지 이곳에서 한나라 및 한나라 이후의 벽돌과 기와(磚瓦)․구리 그릇(銅器) 및 돌 조각 문인상(文人像)을 발견하였다. 정무에 대해 시황제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는 매일 각 지역에서 보내 온 문서(그 당시는 대나무 쪽에 새겼음) 120근을 봐야했는데 이 숫자에 이르지 않으면 쉬지 못하고 늘 밤늦게까지 보았다. 그는 또 전국에 황제가 거동할 전용도로 및 함양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직선도로를 건설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전후로 다섯 차례나 수레를 타고 전용도로를 따라 순행하였다. 순행 도중 그는 봉산(峰山)․태산(泰山)․낭야(琅琊)․지부(芝罘)․회계(會稽) 등 지역의 돌에 공을 새겨 통일을 선양하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진나라의 법을 준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북방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그는 대장군 몽념(蒙恬)을 시켜 북쪽의 흉노(匈奴)를 방어하게 하고 아울러 전국시기에 각 국이 수축했던 장성(長城)을 연결시켰다. 서쪽으로는 감숙(甘肅) 민현(岷縣)까지, 동쪽으로는 요동(遼東)까지 도합 1만여 리에 이르는데, 이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한다. 이것은 중국 고대의 백성들이 건축한 위대한 공정이자 세계적인 기적의 하나이기도 하다. 남방에서 진시황은 군대를 보내 5령(嶺)을 지키고, 영거([靈渠)를 뚫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통일된 국가에 정도는 다르지만 적극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그래서 명대(明代)의 사상가 이지(李贄)는 진시황을 일컬어 “천고의 하나뿐인 황제(千古一帝)”라고 하였고, 사상가들 또한 중국 2천년 동안 봉건사회의 정치는 모두 진정(秦政)이라고 지적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