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三. 진시황제릉의 부장갱 1 : 중앙관청
1. 악부(樂府)와 숙부(莤府)
악부는 황실의 축하 의식과 제사 때 음악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숙부는 황실에서 사용하는 술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축하 의식이든 제사이든 연주와 음주는 늘 함께 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이 조상에 제사를 올리는 것은 인류 초기의 조상숭배이자 친족관계에 있는 친척의 영혼에 대한 숭배이기도 하다. 이런 제사는 무척 성대하게 지냈고, 일제(日祭)와 월제(月祭) 그리고 시제(時祭)가 있다. 승상(丞相)은 또 분기마다 능원을 둘러보아야 했다. 제사 중에 음식과 술은 많아야 했기 때문에 음식을 주관하는 사관 관청과 술을 빚는 제주(製酒) 관청이 있었던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곳은 사당(廟)이거나 침전, 편전(便殿)이었다. 사당은 수도에 있었고, 침전과 편전은 능원 중에 있었다. 제사 때는 음악을 연주해야 했다. 고대의 정치가는 예와 음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공자(孔子)가 일생동안 분주하게 다니며 부르짖었던 것이 바로 예악(禮樂)이었다. 그들은 “예의와 음악 그리고 형벌과 정치는 추구하는 목적이 하나(禮樂刑政, 其極一也)”(《예기(禮記)․악기(樂記)》)라고 여겼다. 예의와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로 그것들은 법률과 정치처럼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진릉에도 똑같이 악부라는 관청을 두어 능에 제를 올릴 때 노래와 춤을 책임지게 했던 것이다.
전설에 기(夔)라는 사람으로부터 악률이 정해졌다고 한다. 진나라의 땅은 서북쪽에 위치하였고, 초기의 악기는 비교적 간단해서 거문고 비슷한 축(筑)을 치거나 술그릇 같은 부(缶瓦)를 두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진나라와 조(趙)나라가 면지(黽池)1)의 회담하는 자리에서 진소왕(秦昭王)은 술을 마시며 조나라 왕에게 거문고 연주를 청하였다. 아울러 사관(史官)에게 모월 모일에 진과 조가 면지에서 만났을 때 조왕이 진왕을 위해 거문고를 연주하였다고 기록하게 하였다. 인상여(藺相如)가 자신의 국왕이 모욕 당하는 것을 보고는 죽음을 각오하고 진왕에게 술그릇을 두드려 박자를 맞추도록 하고는 이 역시 기록하도록 하였다. 술그릇을 두드린다고 한 것은 질버치를 두드리는 것으로, 진나라 음악이 발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진시황은 고점리(高漸離)의 축 연주를 좋아했는데, 아마도 고점리에게 암살 당한 것 같다. 이후에 진나라는 강성해지자 동방 각 국의 음악이 점차 함양으로 전해졌고, 악기도 발전하여 쟁(箏)2), 동금(銅琹)3), 퉁소(簫), 호(箎)4), 비파(琵琶) 등이 있게 되었다. 묘당(廟堂)의 음악은 종(鍾)과 경(磬)을 빼놓을 수 없다. 봉상(鳳翔)의 진공(秦公) 1호 대묘(大墓) 중에 여러 매(枚)의 석경(石磬)이 있다. 종과 경이 있고 나서 음악 소리가 전아하고 경건해졌다. 전설에 진시황은 4매의 종을 주조했다고 하는데 무게가 12만 근으로 현재의 30여 톤과 맞먹었다. 이런 종들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좀 과장된 것 같다.
그림 악부종(樂府鍾)
진릉 중의 악기로, 군대에서 사용하는 지휘용의 종과 북(鼓) 외에도 악부의 종이 발견되었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진릉의 악부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 설날에 고고학자들이 진릉의 봉토 서쪽 약 110m 되는 곳, 즉 사관 유적 이북에서 진대의 악부종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 종은 청동으로 주조되었는데, 걸고리[대비뉴(帶鼻鈕)]의 전체 높이[통고(通高)]가 13.3㎝, 두 고리 사이[양선간(兩銑間)]가 7.2㎝, 부딪는 곳[고간(鼓間]이 5.8㎝, 넓이[무광(舞廣)]가 6×4.8㎝이다. 종의 정부(鉦部)와 고부(鼓部)는 회오리 무늬를 상감(象嵌)하였고, 전간(篆間) 및 종대(鍾帶)는 흐르는 구름무늬를 상감했는데, 무늬가 정교하고 뚜렷하며 호화롭고 우아하다. 종의 내벽에 조음대(調音帶)가 네 가닥이 있다. 음악가가 측정한 결과 그 음은 C조이다.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문물 진품이다. 그것은 아주 정교하게 제작된 것으로 당시에 이미 고도로 발전한 야금(冶金)공예를 충분히 구현하고 있다. 한층 중요한 것은 종뉴(鍾鈕)의 한 측면에 소전자체(小篆字體)로 “악부”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수수께끼를 풀어 준다. 악부는 진대의 음악 관청으로 소부(少府) 관할에 속하였고, 악부령(樂府令)과 승(丞)이 있었다. 후인들은 실물 증거가 없어 항상 악부는 한대(漢代)에 발생한 것이 가장 이른 것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한서(漢書)․예악지(禮樂志)》에 한나라 무제(武帝) 때 “악부를 세워 시가를 채집하여 밤마다 암송하였다(乃立樂府, 採詩夜誦)”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부종(樂府鍾)의 출토는 악부의 최초 건립이 진대(秦代)라는 것을 실물로 처음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발견이다. 그것의 노래 가락은 또 현대 음악가들의 실측을 거쳤는데, 이는 중국고대음악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악부종으로부터 진릉 봉토 서북 방향에 진나라 함양 도성을 모방하여 악부 관청을 두었으며, 각종 제사용의 예악은 물론 한 무리의 악인(樂人)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삿날이 되면 악인들은 예악과 종 그리고 경을 함께 울리며 연주하고, 백관들이 함께 제를 지내는 성황을 이루었다. 통치자는 제사에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와 춤으로 태평성대를 바라지만 수많은 백성들은 죽음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가무는 그 시간이 2년 남짓에 불과 했다. 항우(項羽)가 여산에 이르자마자 옛날에 가무로 지샜던 땅을 불질러 태워버렸고 그 잿더미에 악부종은 묻혀버렸다.
악부종이 출토된 후 학술계는 흥분하였다. 음악가들은 2천여 년이나 흐른 악부종의 일성을 울렸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마지막 일성이 되어버렸다. 이후에도 그것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또 나타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지금은 섬서성 박물관 진한(秦漢)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다. 1986년 10월은 그것이 출토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도둑이 그것을 훔쳐 가버렸다. 12년 동안 온갖 사연을 거치면서 홍콩으로 팔려간 이 보물은 드디어 홍콩에서 그 모습을 출현하였다. 의식 있는 한 홍콩 상인이 무상으로 이를 섬서성에 기증했고, 지금 그것은 새로 지은 섬서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악부와 병존하는 것이 바로 숙부이다. 술은 인민들의 생활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일 뿐 아니라 그 역사도 아주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속담에 “술이 없으면 예가 아니다(無酒不成禮)”라고 하였다. 옛사람들은 “먼 곳에서 와 모였을 때, 술 없이는 될 것이 없다(百里之會, 無酒不成)”《한서․식화지(食貨志)》고 여겼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 중에도 술그릇이 발견되었고, 상(商)과 주(周)나라 때의 문헌에도 술에 관한 기록들이 많다. 고대의 《상서(尙書)》라는 책에〈주고(酒誥)〉편이 있는데,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이 술에 탐닉하여 궁중에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자 신하들도 이를 모방하였고, “백성들도 스스로 술을 만들게 되면서, 온갖 추문들이 위에까지 들려올 지경(庶群自酒, 腥聞在上)”에 이르렀다. 술은 생활 용품일 뿐 아니라 경사스런 의식 혹은 장례 의식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물품이 될 만큼 아주 중요하다.
진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서북쪽에 산 탓에 술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진 목공(穆公) 때 기산(岐山) 아래에 사는 야인이 목공의 말을 잡아먹었는데, 목공은 말을 잡아먹은 사람에게 맛 좋은 술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의 대형 의전 및 대외 접대에는 다 술이 있어야 했다. 중이(重耳)가 진나라에서 진(晉)나라로 돌아 올 때에도 술값을 가지고 갔다 하고, 진시황도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진2세 때 신하들이 선제(先帝)의 사당에 제사를 올릴 때는 소와 양 이외에도 주주(酎酒)를 바쳐야 한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주주라는 것은 여러 차례의 양조를 거쳐 향기가 비할 데 없이 진한 좋은 술이라고 한다. 이런 건의는 당연히 황제가 있는 곳에서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릉을 수축할 때 양조를 관리하는 관청은 자연스럽게 진릉 능원의 한쪽 지역을 차지하였다. 1986년 9월에 고고학자들이 진시황릉 북쪽의 오중촌(吳中村)에서 질그릇을 만들던 작업대를 발견했는데, 높이가 7.2㎝, 구경이 34㎝이며, 상부에 “한 말과 두 되가 되는 여산의 술을 빚는 관청(一斗二升麗山莤府)”이라는 3행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두이승(一斗二升)은 이 질그릇 작업대의 용량이다. 진대의 일두(一斗)는 대략 지금의 2,000㎖에 해당하니까 일두이승이면 대략 2,400㎖이다. 지금의 맥주 두 병보다 약간 많은 양에 해당한다. 고대의 음주는 말(斗)로써 계량했는데, 당대(唐代)의 이백도 “한 말 술에 백 편의 시를 지었다(斗酒詩百篇)”라고 하였다. 여산은 여산원(麗山園)의 약칭으로 진릉의 능원을 가리킨다.《사기》에는 진시황릉의 수축을 가지고 “여산을 뚫는다(穿治麗山)”라는 말로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진나라 때는 여산(麗山)이라고 했고, 한나라 때는 역산(酈山) 혹은 여산(驪山)이라고 했으며, 지금은 진릉(秦陵)이라고 한다. 숙(莤)은 띠(茅草)로 술을 찌꺼기가 없도록 걸러 맑고 향기롭게 하는 것으로, 지금 농촌에서 식초를 만드는 것과 같다. 숙부는 술을 만드는 관리기구로 장관은 숙부령(莤府令)이었다. 말하자면 제사에 쓰기 위해서 당시 진릉의 능원에 술을 만드는 기구를 두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 점을 따라 고찰해 본다면 이 제도는 진시황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선조가 도읍을 정한 옹(지금의 봉상) 땅의 진공(秦公) 능원에서 숙부의 구리 주전자(銅壺) 2개를 출토한 적이 있는데, 용량이 각각 3말쯤 되는 것들이었다. 실측했을 때 말(斗)의 용적은 1,967㎖가 된다. 이것은 진나라의 조상들이 일찍부터 능원에 제주(制酒) 기구를 설치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진릉에 제주기구는 물론 진릉 동거마의 안거(安車)에 납작한 장방형의 구리 주전자도 있었다. 높이가 16.1㎝이고, 넓이가 13㎝인데, 이것은 당연히 수레에 함께 탄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 사용하던 치이(鴟夷), 즉 술을 담는 도구이다. 이 치이라고 하는 것은 가죽으로 만든 술 부대이다.
제사는 물론 행진 중에도 술을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진시황의 음식 중에 술은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로부터 진대의 술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술 문화는 문자문화처럼 수많은 검수(黔首), 즉 백성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권력자들의 고급 소비품이었다. 왜냐하면 진나라가 통일 한 후에 사람들이 모여 술 마시는 것을 금지시켰고 그 법률도 상당히 엄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통치자들의 법률처럼 백성들에게는 금지시켰어도 관리들에게는 금지시키지 않았다. 관료들 특히 최고층의 관료들은 술을 즐기며 취하는 대로 행동해도 흠이 되지 않았다. 기분이 좋을 때면 천하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푼다는 의미에서 박주(薄酒) 몇 잔을 마시게 해주었다. “귀신이 먹을 것을 구하듯이(鬼猶求食)” 그들은 죽은 후에도 술을 마시고 싶어했기 때문에 숙부를 여산에 세웠던 것이다.
“주연은 사람들이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고, 음악은 임금의 덕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酒食者, 所以合歡也; 樂者, 所以象德也)”(《예기․악기》). 진릉의 악부, 숙부, 사관은 모두 이런 예법에 근거하여 세운 것으로, 소위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는 것이 예(事死如事生, 禮也)”[《좌전(左傳)》]였기 때문이다.
1) 현명(顯名)으로 하남성(河南省) 의양현(宜陽縣) 서쪽에 있다.
2) 거문고와 비슷한 13현의 악기이다.
3) 오동나무 같은 목재로 만든 5현 또는 7현의 거문고이다.
4) 죽관(竹管) 악기로 피리처럼 8개의 구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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