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敏 張文立 共著 / 이상천 역, <진시황제릉>, 학고방출판사, 2007.
본 역서는 이미 출판이 이루어진 책이다. 많은 독자들에게 온라인 상에서도 공유하고픈 마음에 그 일부를 소개하고자 하는 것인 만큼 독자들의 성원과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마장골에서 역자 삼가 씀.
진시황제릉
張敏 張文立 共著
李商千 譯
서문
역사 문화와 여행의 관계는 최근 몇 년 새 갈수록 많은 사람에 의해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독자들 앞에 바치는 이 방대한 규모의《섬서성 여행역사문화 총서(陜西旅游歷史文化叢書)》가 바로 이런 추세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하겠다.
여행은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한 중요한 부분이다. 여행할 때 다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은 물론 더욱 풍부한 인문학적 분위기를 느껴보기를 기대한다. 역사와 문화로써 여행의 묘미를 풍부하게 하고, 여행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오래 전부터 이미 전통이 되었다.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성(韓城)이 고향이었던 사마천(司馬遷)은 나이 20세 때 “남방의 양자강과 회수(淮水) 유역을 여행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가 우임금과 인연이 있는 동굴을 탐사하고, 구의산(九疑山)을 조사하고, 원수(沅水)와 상수(湘水)를 배로 여행하였다. 그곳에서 북상하여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齊)와 노(魯)나라의 서울에서 학업을 닦고, 공자의 유풍을 자세히 살피고, 추현(鄒縣)과 역산(嶧山)에서 향사(鄕射)를 행하였다. 파현(鄱縣)과 설현(薛縣) 그리고 팽성현(彭城縣)에서 심한 곤욕을 겪은 뒤, 양(梁; 河南省 開封 일대)과 초(楚; 하남성 남부) 지방을 거쳐서 장안으로 돌아왔다(南游江․淮, 上會稽, 探禹穴, 窺九疑, 浮于沅․湘, 北涉汶․泗, 講業齊魯之都, 觀孔子之遺風, 鄕射鄒․嶧, 厄困鄱․薛․彭城, 過梁․楚以歸)”.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그는 넓은 시야와 가슴을 가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불후의 명작인《사기(史記)》를 쓸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항상 만리 길을 돌아보는 것과 만 권의 책을 읽는 것을 병칭한 것은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언급함에 있어 눈길을 섬서성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위성 TV의 특집프로그램에서 어떤 학자는 형상적으로 비유하여 섬서성은 “중국의 중심(中國的芯片)”이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만약 전통 역사와 문화의 각도에서 보면 섬서성은 차라리 방대한 용량을 가진 “하드웨어(硬盤)”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엄청나게 많다. 섬서성 특히 그 핵심인 관중(關中) 지역은, 넓게는 중원(中原)문화권에 속해서 중국문명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20여 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다행스럽게도 섬서성 고고학회가 편찬한《섬서성의 고고학적 중대발견(1949-1984)》이라는 책에 서문을 지었는데, 그곳에 “섬서성은 중국고대문명 발원지의 하나이며,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몇 개의 왕조, 즉 서주(西周)․진(秦)․전한(前漢)과 당(唐)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때문에 고적문물이 풍부하며, 성의 경내를 답사해보면 크고 작은 성읍 그리고 산 하나 물 하나 할 것 없이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언급했는데, 지금 나는 이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아울러 몇 가지 확대하려고 한다.
섬서성은 중국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유구한 중국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일으켰다. 정착한 농업문명만으로 가정해 본다면, 주(周)․진(秦)․한(漢)․당(唐)이 섬서성에 도읍을 정한 것은 서쪽 모퉁이로 치우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중국은 예부터 많은 지역․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땅으로, 다양하고 찬란한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북방․서북․서남에 중원과는 풍속과 관습이 다른 민족이 많이 살고 있다. 그래서 섬서성 지역은 서로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요충지가 되었던 것이다. 13개 왕조가 도읍을 모두 섬서성에 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대에 중국과 외국이 서로 교통했던 역사에서 보면 섬서성은 아주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 2천여 년 전의 진 왕조는 폭이 드넓었던 도로와 천자나 귀인이 거동하는 치도(馳道)를 이미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관통하는 도로망을 형성하였다. 한당(漢唐) 때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비단길”이 바로 장안(長安)을 기점으로 한 것인데, 외국에서 오는 상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당대(唐代)에 일본의 공해(空海)라는 사람이 이곳에 와서 중국문화를 배운 뒤 돌아가 일본의 카타카나(片假名)를 만들어 내었고, 감진(鑒眞)이라는 사람도 여기에서 출발하여 일곱 차례나 동해를 건너며 마침내 중국문명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본시인이 지은 유명한 하이꾸(俳句 ; 17자를 1수로 하는 일본의 짧은 시)에 “성당(盛唐)시기에는 밤중에도 장안 시내를 나다닐 수 있었네”라고 하여 깊은 정감으로 그 당시의 풍경을 회상하였다.
섬서성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깊고 두터운 역사의 기층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한조(漢朝) 때부터 부단히 문물이 발견되기 시작했는데, 장창(張敞)이 시신정(尸臣鼎)을 고증한 것이 바로 그 간의 가장 이른 미담이다. 근대에 이르러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어져 감상하기에도 눈이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남전인(藍田人) 화석, 반파(半坡)와 강채(姜寨)의 앙소(仰韶)문화 유적지, 정교하고 찬란한 서주(西周)의 청동기와 옥기, 웅장하고 기이한 진시황릉 병마용갱, 법문사(法門寺) 탑터의 부처 손가락 사리와 금은으로 된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릇, 아름답고 다양한 모습의 당삼채(唐三彩), 웅혼하고 장엄한 능묘의 석각,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진귀한 보물과 예술품들은 관람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고 감탄해 마지않게 하기에 충분하다. 여행과 역사문화의 결합으로 말하자면 섬서성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되기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섬서성의 역사 고고학 방면의 논문과 저작은 아주 풍성하지만 대부분 전문적인 저술에 속해서 일반 독자들, 특히 여행자들의 각도에서 착안된 작품은 많지 않다. 그래서 섬서성의 역사문화를 소개하는 전면적이면서도 계통적인 읽을거리가 절실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이육진(李毓秦) 선생이 국가의 “구오(九五)”중점 음악과 영상의 출판계획 항목인《황토문화의 뿌리를 찾아서(黃土文化尋根)》라는 대형 시리즈 편을 완성한 후에 이 백 권으로 된《섬서여행역사문화총서(陜西旅游歷史文化叢書)》를 계획하여 이 부족한 느낌을 채워주려 한다는 것이다.
이 총서는 유명한《백록원(白鹿原)》의 저자 진충실(陳忠實) 선생이 주편(主編)을 맡았다. 부주편(副主編)을 맡은 분은 서북대학(西北大學) 역사과에서 다년간 교편을 잡고있는 한양민(韓養民) 교수로서,《중국풍속총서(中國風俗叢書)》를 성공적으로 주관한 적이 있었다. 다른 한 분의 부주편 곽흥문(郭興文) 선생은 바로 신문사 자심(資深)의 편집인으로서, 풍부한 저작과 편집경험이 있다. 이렇게 훌륭한 주편 그룹의 추진 아래, 이 총서의 저자들도 모두 전문적인 소양을 지닌 학자들이어서 책의 품질을 보증하고 있다. 총서가 비록 전문 학자들이 집필한 것이기는 하나 대중들을 마주하기 위해서 탐색과 보급이 서로 결합되는 방식을 취하여 학술 연구적인 분위기의 어려운 필치를 피해 고사적 성격․흥미적 성격을 가미하여 더욱 읽을만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섬서성은 고고학적 문화재가 풍부한 성(省)으로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며, 국내외에서 주목하는 여행 지역이다. 《섬서여행역사문화총서》가 세상에 나오면 수많은 독자들과 관광사업에 매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학근(李學勤)
2003년 6월 29일
목 록
一. 진시황제와 그의 능묘
1. 황토 흙이 낳은 중국의 첫 번째 황제
2. 생전의 영화를 지하로 가져가려 한 진시황제
二. 진시황제의 능묘
1. 화려한 능원 건축
2. 호화로운 지하 궁전
三. 진시황제릉의 부장갱 1 : 중앙관청
1. 악부(樂府)와 숙부(莤府)
2. 음식을 바치던 사관(飤官)
3. 동물갱(珍獸坑)과 마구간갱(馬廐坑)
4. 재가 된 비늘 같은 석갑(石甲)
5. 문관용갱(文官俑坑)
四. 진시황제릉의 부장갱 2 : 위락시설
1. 백희용갱(百戱俑坑)
2. 격박놀이(擊博之戲)
3. 수상악무(水上樂舞)
五. 진시황제릉의 부장갱 3 : 순장묘
1. 순장된 왕족(宗室)과 대신(大臣)
2. 능묘를 건설한 사람들의 묘지
六. 진릉(秦陵)의 기타 건축
1. 오령(五嶺)과 어지(魚池)
2. 원사리사(園寺吏舍)
3. 능읍(陵邑) 건축
4. 독특한 지하갱도의 건축
七. 진시황제릉의 수수께끼
1. 진릉이 건설된 당시에 대형석각이 있었을까?
2. 진릉의 풍수
3. 진릉의 수은에 관한 수수께끼
4. 진릉의 지하궁은 어떤 모습일까? 언제 진릉을 발굴할까?
5. 진릉 군대의 총사령관은 어디로 사라졌나?
6. 진시황제릉은 도굴된 적이 있는가?
八. 진릉문물의 가치와 영향
1. 역사와 문화의 가치
2. 진대 과학기술의 실물전시
3. 강렬한 예술적 심미가치
4. 진귀한 관광자원
5. 진릉 문물의 연구상황
부록 : 진릉 문물 유적지의 발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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