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一. 양씨 집안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다
1. 양씨 집안의 딸이 어른이 되다
전기 같은 운명으로 역사에 오른 절세가인 양옥환은 7품(七品) 관리의 딸이었다. 그녀는 개원 7년(719) 6월 1일, 검남도(劍南道) 촉주(蜀州)[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숭경(崇慶)]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양현염(楊玄琰)은 촉주부(蜀州府) 관청에서 호구、장부、혼인、전답、잡역、도로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사호(司戶)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고, 그녀의 모친은 이씨 집안이었다.
양옥환은 역대로 하늘이 내려준땅이라는 의미의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유명한 사천(四川) 분지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은 기후가 온난하고 습윤하여 일 년 내내 식물들이 푸르고, 토지는 비옥하며 수로는 거미줄 같이 연결되어 있어 농민들이 먹고사는데 좋은 자연적 조건을 제공하였다. 촉 땅에서 나는 여지(荔枝)는 양옥환이 가장 좋아했던 과일이었다.
양옥환은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 위로 언니 셋과 오빠 하나가 있었다. 민간에서는 지금까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양옥환이 출생할 때 탯줄에 옥처럼 밝고 흰 자국이 있어, 이를 본 부모가 놀라 기이하게 여겨 “옥환(玉環)”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양옥환은 촉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려서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였기 때문에 성격이 활달하고 자유로웠다.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된 후에는 연못가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실족하여 연못에 빠진 적이 있었다. 후에 그녀가 궁궐에 들어가 귀비로 책봉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연못을 “낙비지(落妃池)”라고 불렀다.
양옥환이 10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가 차례로 병사하였다. 촉주에서 함께 자란 오빠와 언니는 이때 결혼을 하거나 시집을 갔고 모두 그리 부유하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가련하게도 나이 어린 옥환은 있을 곳이 없어 천리 멀리 떨어진 하남부(河南府)[하남성(河南省) 낙양]에 재직하고 있던 숙부 양현교(楊玄교)의 집에 왔다. 부모의 병사는 천진난만하고 아무런 걱정이 없던 양옥환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녀가 낙양의 숙부 집에 온 것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낙양은 수、당대의 동도(東都)로, 서경(西京) 장안에 뒤지지 않은 정도로 번화하고 부유했다. 수양제(隋煬帝)가 대운하를 개통한 후 낙양은 강회(江淮)、하북(河北)과 산동 지역 세금수입의 주요 집산지가 되었다. 성을 전체를 관통하는 낙수(洛水)에는 늘 수많은 배들로 가득 찼다. 이러한 점 때문에 낙양은 공업과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낙수 북쪽의 북시(北市) 일대는 낙양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낙수의 남쪽에는 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있었다. 이 세 곳의 시장에는 수많은 점포와 노점들이 있었으며, 매일 수레와 말이 지나다니는 소리로 요란하였고 사람들로 붐벼 대단히 떠들썩하였다. 여황제 측천무후는 일찍이 낙양에 장기간 거주한 적이 있었다. 당명황은 재위 중에 낙양에 다섯 차례 행차하여 짧게는 1년 정도, 길게는 3년 동안 머물렀다.
저 먼 촉주라는 작은 성에서 처음으로 낙양에 온 양옥환은 나이가 아직 어렸다. 대도시의 웅장함하고 거대함과 무성하게 핀 꽃과 같은 번성하고 화려함은 그녀를 매료시켰고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양옥환은 숙부 집에서 글을 배우고 시문을 읽었으며 규방의 아녀자들이 하는 것을 익혔고 위 어른과 조상을 모시며 손님을 맞이하는 예절교육을 받았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감에 따라 어린 티를 점차 벗어났다. 양옥환이 아리따운 소녀가 되었을 때 가슴속에는 이성에 대한 감정도 자라고 있었다. 그녀 같은 일반 관리집안의 딸은 장래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재능과 인물을 갖추고 있는 낭군에게 시집가서 그가 벼슬을 하여 순조롭게 출세하고 자신도 지체 높은 부인이 되어 노비를 두고 부귀하고 풍요로운 귀부인의 생활을 하길 바랬다.
그러나 양옥환의 가족은 당시 지위가 높지 않았다. 숙부가 재직하고 있는 사조참군(士曹參軍)은 생전의 부친처럼 7품 관원에 속했다. 그러나 양씨 집안의 먼 조상은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양옥환의 고조 양왕(楊汪) 세대는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수서(隋書)》에 수록되어 있는 양왕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홍농(弘農) 화음(華陰) 사람”으로, 증조 때 하동(河東)으로 이주하였고 대대로 포주(蒲州) 영악(永樂)[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영제(永濟)]에 거주하였다. 양왕은 수나라 때 상서좌승(尙書左丞)(4품)、양군통수(梁郡通守) 등의 관직을 지냈다. 수나라 말기에 천하가 혼란에 빠지고, 수양제가 강도(江都)[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에서 사망하자 양왕은 낙양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왕세충(王世充)에게 몸을 맡겼다. 당나라 초기,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자 왕세충은 전쟁에 패해 투항하였고, 당나라 조정은 양왕에게 “흉악한 무리(凶黨)”라는 죄명을 씌워 사형시켜버렸다. 양왕이 살해된 후 양씨 가족의 지위는 몰락했고, 양옥환의 부친 세대에 오면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다.
이씨의 당나라는 건국초기 조정에서 관면(冠冕)[관직의 등급과 작위 및 봉록]을 중히 여겨 크게 출세한 고관들은 대부분 이연(李淵) 부자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천하를 평정한 공훈들이었다. 예를 들어, 무측천의 부친 무사확(武士彠)은 원래 목재 장사로 부를 쌓은 상인이었으나 후에 이연에게 기탁한 사람으로, 태원(太原)에서 거병(擧兵)할 때의 원종공신(元從功臣)이었다. 그는 공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제수 받았고, 태원군공(太原郡公)에 봉해졌으며, 후에 공부상서(工部尙書)(정3품)에 오르며 응국공(應國公)에 봉해진 새로운 나라의 엄연한 신흥귀족이었다.
비록 명망 있는 가문은 아니었지만 양옥환은 숙부 집에서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관부의 봉록과 조정에서 내린 전답에서의 수입으로 전 가족들이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먼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고귀한 기질을 이어받은 것인지 촉 땅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덕을 입은 것인지 소녀 양옥환은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태어났다. 몸매는 풍만하였고, 머리카락은 진한 검은 색을 띄었으며, 피부는 희었는데 특히 아름답고 요염한 얼굴에는 젊은 활기가 넘쳐흘렀으며, 초롱초롱한 눈은 몽환 같이 물결처럼 빛나고 있었고, 쾌활하고 발랄한 행동거지는 촉 땅의 풍토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숙부를 기쁘게 한 것은 옥환이 총명을 타고나서 어려서 음악과 춤을 좋아하고 더군다나 남다른 감각이 있었던 것이었다. 모든 관리의 딸들이 이러한 우아한 재능과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양옥환은 10대 소녀가 되어 사람들의 눈을 어리게 하는 호소력 있는 웃는 모습과 용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미래운명을 잡지 못했다. 소녀의 환상과 이상은 심신이 성숙해짐에 따라 점점 현실의 힘에 의해 끌려 들어갔다. 동도 낙양에는 황가의 웅장한 궁전들과 왕공들의 넓고 큰 호화저택이 들어서 있었다. 고관대작들의 화려한 수레와 말, 화려한 복장을 한 하인들 그리고 처첩과 딸들의 사치스럽고 화려함은 권세의 영광과 부귀한 풍채를 빛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소녀 양옥환이 뿌리치기 힘든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세계 역시 나의 것이어야 해.”라고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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