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머리말: 무혜비(武惠妃)의 사망 후 황제의 반려자는 누가 될까
대당(大唐) 개원(開元) 25년(737) 12월 7일. 수도 장안(長安) 흥경궁(興慶宮).
이날은 춥고도 슬픈 날이다. 53세의 당명황(唐明皇) 이융기(李隆基)1)는 큰 슬픔과 애통함에 빠져있었다. 황궁 전체가 한 달 동안이나 이어진 근심 걱정으로 옛날의 흥겨웠던 분위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날 무혜비(武惠妃)의 갑작스런 병사로 이 슬프고 침통한 분위기는 사람을 질식시킬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부터 누가 당명황의 생활을 차지하고 있던 이 인자하고 현명한 총비(寵妃)를 대신하여 당명황의 허전한 마음을 메워줄 수 있을까?
20년 동안 후궁에서 은혜와 총애를 받는 동안, 바른 행실로 은근하게 군주를 모시면서 아이들의 교육에도 뛰어났던 무혜비는 당명황에게 아들 넷과 딸 셋을 낳아주었다. 그러나 먼저 태어난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은 강보(襁褓)에서 키우기도 전에 사망해 당명황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셋째 아들이 태어난 후 당명황은 뜻밖의 일이 다시 일어날까 걱정되어 궁중에서 키우지 못하고 큰형 영왕(寧王) 이헌(李憲)에게 맡겨 양육하였다. 영왕의 비 원씨(元氏)는 자신의 젖을 직접 먹여 가며 근 10년 동안 애지중지하며 이 황태자를 길러 궁중으로 다시 보내주었다. 이 사람이 바로 당명황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원명은 이청(李淸)이며, 후에 이모(李瑁)로 개명한다]이다. 아들은 어머니 때문에 귀하게 된다고 했던가. 모친이 부황의 총애를 독차지했기 때문에 수왕 역시 다른 황태자보다 더 큰 총애를 받았다. 지금 모친의 병사로 수왕에게 남겨진 것은 마음을 에이는 슬픔과 그리움뿐이었다. 지금부터 부황은 그를 더욱 총애하겠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나날이 냉담해질 것이다.
당명황과 수왕은 무혜비의 사망을 똑같이 슬퍼했지만 두 사람은 다른 슬픔을 느꼈다. 당명황은 자식을 낳고 기르는 무혜비의 능력을 그리워한 것도 아니고, 밤에 임금의 침소를 지켜줄 사람이 없음을 애석해한 것도 아니었다. 후궁의 무수한 비빈들은 이미 그에게 수 십 명의 황태자와 공주를 낳고 길러주었다. 후궁에는 무수한 아리따운 여인들이 있어 황제에게는 밤을 영원히 즐길 반려자가 부족하지 않았다. 지난 20 여 연간, 호탕하면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당명황은 무혜비에게 많은 것을 쏟았다. 깊고 긴 헤어나기 어려운 이러한 감정을 어떻게 하루 밤에 충실하게 메울 수 있겠으며 또 정 많고 욕심 많은 당명황을 어떻게 의기소침해하고 침울하지 않게 할 수 있었겠는가?
무혜비가 병사한 후 근 3년 동안, 후궁 안에는 무수한 비빈 궁녀들이 있었음에도 누구도 당명황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 궁중의 비빈들은 항상 당명황의 저녁 잠자리 시중을 누가 들것인지를 내기하였다. 당명황의 기분이 좋아지면 궁중에서는 연회를 열었다. 비빈들에게 머리에 생화를 꽂게 한 다음 잡아 온 나비를 풀어놓는데, 나비가 앉은 사람에게 당명황은 그날 밤 은총을 내렸다.《장한가전(長恨歌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혜비가 사망한 후 후궁의 여자들 중에 누구도 당명황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매년 겨울과 봄에 여산(驪山) 화청궁(華淸宮)에 행차할 때, 내외 명부(命婦)의 여인들은 비단으로 수놓은 의상을 하고 보석과 꽃 장식을 달고 어가를 따라 온천으로 갔다. 날씨는 따뜻하고 봄바람이 부는 가운데, 뭇 여성들은 빼곡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당명황은 마음이 설레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온통 진한 화장을 한 사람들 뿐이었다. 이로 보면, 무혜비의 사망 후 당명황의 허전함과 고독감이 아주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당명황이 화청궁에서 어연(御宴)을 베푸는 것을 그린 벽화
깊은 슬픔과 애도 속에 당명황은 무혜비에게 “정순황후(貞順皇后)”를 추증하고, 황후의 예로 경릉(敬陵)[지금 섬서(陝西) 서안시(西安市) 동쪽]에 안장하고 장안성에 있는 호천관(昊天觀)의 남쪽에 사당을 세워 그녀의 혼령에 제를 올렸다. 당명황은 일생동안 후궁 중에 왕씨(王氏)만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한 적이 있었다. 무혜비는 생전에 황후로 책봉되지 못하였지만 그녀가 사망한 후로 당명황은 다시 황후를 책봉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개원 28년(740)이 되었다. 정월 2일 당명황은《수왕의 비를 도사로 수계하는 조칙(度壽王妃爲道士勅)》을 반포하였다.
성인들께서 마음을 쓰고서야 세상의 진정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도다. 부녀자가 부지런히 도를 닦는 것은 예로 보기 드물었다. 수왕 모(瑁)의 비 양씨(楊氏)는 원래 품행이 단정하고 곧아 번왕(藩王)의 비가 되었다. 신분이 고귀했음에도 매번 몸을 바르게 하는데 정진하였다. 태후의 기일을 맞아 명복을 빔과 동시에 해탈하기를 바라노라. 고상한 뜻은 외면하기 어렵고, 부녀자의 도리를 크게 돈독하게 하였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여도사로 수계를 받음이 마땅하다(聖人用心, 方悟眞宰. 婦女勤道, 自昔罕聞, 壽王瑁妃楊氏, 素以端懿, 作嬪藩國, 雖居榮顯, 每在精修. 屬太后忌辰, 永懷追福, 以玆求度. 雅志難違, 用敦宏道之風, 特遂由衷之情, 宜度爲女道士).
조칙 중의 “태후”는 당명황의 생모 두씨(竇氏)를 말하며, “기일”은 정월 2일을 가리킨다. 장수(長壽) 2년(692), 이융기가 9살이 되던 해 두씨는 시어머니(여황 측천무후)에게 죄를 지어 동도(東都) 낙양(洛陽)의 내궁에서 비밀리에 살해되었고, 시신조차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융기의 부친, 즉 예종(睿宗)이 복위한 후 두씨에게 “소성황후(昭成皇后)”로 추증하고 동시에 혼을 불러 낙양성의 남쪽에 매장하였다. 이융기가 황제가 된 후 다시 어머니를 “황태후”로 칭하고 예종 교릉(橋陵)[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포성(蒲城) 경내]에 부장하고 신주를 장안의 태묘(太廟)로 옮겼다.
칙문 중의 “수왕(壽王) 모(瑁)의 비 양씨(楊氏)”가 바로 수왕 이모(李瑁)의 비 양옥환(楊玉環)이다. 당시 22세였던 양옥환은 수왕부(壽王府)에서 이미 4년 동안 왕비로서 부귀하고 영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양옥환은 이미 작고한 시어머니 무혜비처럼 여인으로써의 타고난 생육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점이 바로 그녀 자신이 부군 수왕에게 미안함을 느껴 도를 닦는데 정진하고자 했던 속마음이거나 황제인 시아버지가 그녀로 하여금 속세를 떠나 도를 닦도록 하는 조칙을 내린 원인이었다.
만일 역사가 진정으로 칙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도를 구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양옥환의 “진심”이었다면, 그녀가 이 칙명을 받았을 때 심적으로 큰 동요는 없었을 것이다. 양옥환과 나이가 같은 수왕은 이별하기 아쉬웠겠지만 천하의 지존인 부황의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양옥환이 떠난 후 마음에 두고 걱정한 자녀는 없었다. 신중한 성품을 타고난 수왕은 갑작스런 성지를 받고 내키지 않는 억울함을 마음에 두고 태연한 모습으로 양옥환을 부택(府宅)으로 보냈다. 칙명이 하달된 그 순간부터 그와 양옥환은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었다. 양옥환이 수왕부를 떠나자 그녀와 수왕 간의 4년 여 동안의 정들었던 사랑은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다. 수왕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긴 이별의 정은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았고, 온유하였지만 마음을 아프게 하여 그의 심사를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추수(秋水)에 물결이 일 듯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었다.
당현종이 추위를 피했던 행궁(行宮)인 화청궁(華淸宮)
양옥환은 출가하여 도문(道門)에 들어간 후 도호(道號)를 “태진(太眞)”이라 짓고, 장안성 동북부에 있는 대명궁(大明宮) 내에 자신을 위해 만든 “태진전(太眞殿)”에 거주하였다. 이 해 10월, 당명황의 어가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임동(臨潼) 여산(驪山)의 온천궁(溫泉宮)에 행차하였다. 당명황은 여산으로 가는 동시에 환관의 우두머리 고력사(高力士)는 명을 받들어 대명궁 태진전에 와서 양태진에게 조서를 낭독했다: 여산의 온천궁에서 목욕을 하도록 하라.
양태진은 고력사를 따라 온천궁에 와서 목욕을 하고 단장을 한 후 당명황을 알현하러 갔다. 황가(皇家)의 악공들이《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연주하는 가운데 56세의 당명황은 도복을 입고 황관을 쓴 빼어난 용모와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예전의 며느리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하며 매우 기뻐했다. 이날 밤, 양태진은 당명황과 함께 잠자리를 하였다. 치밀하게 준비된 이 여산의 만남은 양태진의 걱정스럽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과분한 총애를 받는 기쁨을 더했다. 당명황으로서는 다시 회춘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무혜비가 세상을 떠난 3년 동안의 공허함은 하룻밤 사이에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으니, 이것이 어찌 그의 정신을 진작시키고 즐겁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태진은 18일 동안 당명황을 곁에서 정중하게 모신 후 어가를 따라 경성으로 돌아와 당명황과 함께 남쪽 내의 흥경궁으로 들어와 거주하였다. 이로 양태진에게 있어 여도사는 이름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도복을 벗고 궁중의 비빈처럼 산뜻하고 아름다운 수놓은 비단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이렇게 되자 당명황의 눈에 그녀는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보물과 같았다. 궁중의 위아래가 그녀를 “낭자(娘子)”로 불렀다. 흥경궁에 들어온 지 일 년도 안 돼 양태진은 그녀의 원래 시어머니였던 무혜비처럼 황후의 예우를 받았다.
이로부터 양태진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왕비로서의 삶을 시작한 동시에 대당왕조의 흥망성쇠 속에 역사가들이 중시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 당명황(唐明皇: 685-762)의 이름은 이융기(李隆基)이며, 묘호(廟號)는 “현종(玄宗)”, 시호(諡號)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다. 당나라 후기에 “효명황제(孝明皇帝)”․“명황(明皇)”․“당명황(唐明皇)” 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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