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商千/權容浩/姜秉哲,<中國古代의 雜技>,울산대 출판사,2009예정.
2. 사(射)․어(御)
고대 중국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왕과 제후는 영토를 지키고 개척하기 위해 문무를 겸비한 인재들을 필요로 하였으며, 교육할 때는 문무를 똑같이 중시하였다.《주례(周禮)․지관사도(地官司徒)․보씨(保氏)》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보씨는 왕이 잘못한 점을 간하고 국자감의 학생을 선왕의 도로써 양성하는 일을 관장하였는데, 육예로써 가르쳤다. 첫째가 오례, 둘째가 육악, 셋째가 오사, 넷째가 오어, 다섯째가 육서, 여섯째가 구수이다(保氏掌諫王惡而養國子以道,乃敎之六藝:一曰五禮,二曰六樂,三曰五射,四曰五馭,五曰六書,六曰九數.).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육예(六藝)라고 하는데, 이중 활을 쏘는 사와 수레를 모는 어는 국가를 지킬 수 있는 무술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그 취지를 두고 있다. 후에 과거시험에서 무과(武科)를 두어 인재를 선발할 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과목이 있었던 것은 바로 고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공자는 일생동안 “괴상하며․폭력적이며․문란하며․신비한(怪力亂神)” 것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무예를 중시하여 제자들에게 육예를 수련하고, 활쏘기와 수레를 모는 기술을 익히도록 하였다.《열자․설부(說符)》에는 “공자의 힘은 수도 성문의 빗장을 들어 올릴 수 있었지만 힘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孔子之勁, 能拓國門之關, 而不肯以力聞.)”라고 하고 있어, 그의 몸은 건강하고 힘이 세며 부친 숙양흘(叔梁紇)에게서 볼 수 있었던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는 유협의 기질로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맨발로 강을 건넜던(搏虎馮河)” 용사였다. 공자가 제후국을 주유할 때 자로는 줄곧 공자를 곁에서 호위하면서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였다. 이로부터 중국 고대의 위대한 교육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고상하거나 닭 한 마리도 잡을 힘도 없는 나약한 서생이 아닌 상무정신을 갖추고 무예를 중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射)는 상고시대 수렵활동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목적은 사냥감을 얻어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거나 야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라 때부터 활쏘기는 전쟁에서 중요한 무기 중의 하나가 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대우(大禹) 때 자동(紫銅)1)으로 만든 화살촉을 발명했는데, 살상력에 있어서 상고시기의 돌촉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활과 화살의 개량으로 사격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하․상에서 선진 시기까지 모든 나라의 왕과 제후들은 무사를 양성할 때 활쏘기 훈련을 아주 중시하여 중요한 군사훈련 항목으로 삼았다. 전설에 달에 사는 항아(嫦娥)의 남편인 후예(后羿)가 바로 신궁(神弓)이었다고 한다.《천문(天問)》․《산해경(山海經)》․《회남자(淮南子)》등의 기록에 의하면 요(堯) 임금 때 하늘에 “10개의 해가 동시에 떠올라 곡식이 불타고 초목이 시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었는데(十日倂出, 焦禾稼, 殺草木, 而民無所食)”, 후예(后羿)가 “동궁(彤弓)2)과 소증(素矰)3)”을 들어 “9개의 해를 쏘아 떨어뜨렸다(射九日)”고 한다. 여기서 예는 최초로 “화살을 활에 올려 쏘는(合弓矢而敎之射.)” 훈련방법을 제시하였다. 하․상나라 때 활쏘기를 가르치는 기관을 “서(序)”라고 하였다.《맹자(孟子)․등문공상(滕文公上)》에는 “서라는 것은 활을 쏘는 것이다(序者, 射也.)”라고 하였다. 이것은 군사훈련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학생을 교육하는 과목의 하나였다.《한비자(韓非子)․내저설상(內儲說上)》에 따르면, 전국시대 초기 위문후(魏文侯)의 책사(策士)인 이리(李悝)가《습사령(習射令)》을 지어 그가 관할하는 지역의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익히도록 권장하여 진(秦)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영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한 사람 반고(班固)의《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는《봉문사법(逢門射法)》․《음통성사법(陰通成射法)》․《위씨사법(魏氏射法)》․《망원련노사법구(望遠連弩射法具)》․《포저자익법(蒲苴子弋法)》등과 원(元)나라 사람 탈탈(脫脫)․아로도(阿魯圖)의《송사(宋史)․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는《사경(射經)》․《신사결(神射訣)》․《궁결(弓訣》등은 활을 쏘는 기술을 전문적으로 서술했다고 하는데, 대부분이 실전되고 말았다.
《사기․주본기(周本紀)》중의 양유기(養由基)와《열자․탕문(湯問)》중의 비위(飛衛)․기창(紀昌) 사제는 모두 선진시기의 신궁이었다. 서한 사람 유향(劉向; 기원전 79∼기원전 8)은《열녀전(列女傳)․진궁공처(晉弓工妻》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활을 쏘는 기술이란 왼손은 돌을 받치듯 힘이 들어가야 하고, 오른손은 나뭇가지를 잡듯 힘을 빼야 한다. 오른손으로 쏴도 왼손이 알지 못해야 한다. 이것이 활을 쏘는 기술이다.(射之道, 左手如拒石, 右手如附枝, 右手發之, 左手不知, 此蓋射之道也.)
동한 사람 원강(袁康)은《월절서(越絶書)》에서 “왼손은 태산을 받쳐 든 것처럼 해야 하고, 오른손은 갓난아기를 안은 것처럼 해야 한다.(左手如附泰山, 右手如抱嬰兒.)”라고 하였고, 동한 사람 조엽(趙曄)은《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 선진시기 신궁 진음(陳音)이 월나라 병사들에게 활을 쏘는 기술을 지도해준 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회는 서주 때부터 예제(禮制)를 실시하여 신분의 등급과 명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활쏘기에도 엄격한 예의 절차와 등급 규정을 두었다. 사례(射禮)는 등급에 따라 대사(大射)․빈사(賓射)․연사(燕射)․향사(鄕射) 4종 혹은 4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앞의 3종은 천자․제후와 대신간의 제례․접대․연회에 사용되었고, 향사만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후에 보편적인 놀이로 변했다.
어(御)는 원래 수레 모는 것을 의미했는데, 후에 기마술(騎馬術)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상․주 시대는 전쟁을 할 때 전차를 주력으로 삼았기 때문에 수레 모는 기술의 차이는 전쟁의 승부를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수레를 모는 기술은 군사훈련의 중요한 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도 빠뜨릴 수 없는 내용이 되었다. 조나라 무령왕이 “호복기사”를 제창한 후로 기병이 대량으로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전쟁에 활용하게 되면서 점차 전차를 대신하는 추세가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기마술을 중시하는 것은 필연적인 대세가 되었다. 당시 군대의 무거사(武車士)와 무기사(武騎士)는 수레를 몰고 말을 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활도 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활을 쏘고 수레를 모는 것을 기사(騎射)라고도 불렀다. 선진시기는 각 나라의 학교에서 귀족의 자제들에게 활쏘기와 수레 몰기를 교육하였다. 후에 전쟁의 규모가 확대되고 빈번하게 발생하자 활쏘기와 수레 몰기 기술은 점차 민간에까지 확대되어 백성들을 무장시켜 유사시에 대비하는 중요한 군사적 조치와 교육내용이 되었다.
동한 사람 정현(鄭玄; 127∼200)이 주석을 단《주례․지관사도․보씨》에는 “명화란(鳴和鸞)․축수곡(逐水曲)․과군표(過君表)․무교구(舞交衢)․축금좌(逐禽左)”라는 다섯 가지의 수레 모는 기술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오어(五馭)”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요구되었던 수레 몰기 기술이 아주 다양하였고 수준도 매우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수레를 모는 사람은 전쟁의 필요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큰길에서도 수레를 몰 수 있어야 했으며, 또 사냥터의 상황에 따라 굽은 길에서도 사냥감을 추적할 수 있어야 했다. 상나라 말기에서 주나라 초기에 살았던 여망(呂望; 즉 姜太公)이 지었다는《육도(六韜)․견도(犬韜)》에는 춘추전국시기 “무기사”의 기마술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기사를 뽑는 법은 나이는 40세 이하, 신장은 7척 5촌 이상이어야 하고, 건장하고 날쌔며, 동년배보다 뛰어나게 말을 타고 활을 당기며,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나아가고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또 해자를 넘고, 구릉을 오르며,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고, 큰 늪지대를 건너며, 강적을 향해 돌진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려야 한다. 이런 사람을 무기사라 하며, 후하게 대접해야 하였다(選騎士之法,取年四十已下,長七尺五寸已上,壯健捷疾,超絶倫等,能馳騎彀射,前後․左右周旋進退,越溝塹,登丘陵,冒險阻,絶大澤,馳强敵,亂大衆者,名曰武騎之士,不可不厚也.).
이 무기사들은 출중한 기마술로 험난하고 위험한 지형을 평지에서처럼 종횡무진 누볐을 뿐만 아니라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아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1) 자동(紫銅): 청동의 별칭--옮긴이.
2) 동궁(彤弓): 붉은 칠을 한 활--옮긴이.
3) 소증(素矰): 흰 칠을 한 주살--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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