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商千/權容浩/姜秉哲,<中國古代의 雜技>,울산대 출판사,2009예정.
제1장 선진(先秦) 잡기의 발생
인류는 생존과 투쟁을 위하여 반드시 각종의 노동활동에 종사해야만 한다. 노동은 인류의 모든 물질적 자산과 정신적인 자산은 물론 각종 예술을 만들어냈는데, 그 중에는 잡기예술도 포함된다. 고대사회의 인류는 채집․생산․어로․수렵활동 중에 달리고 뛰고 던지고 기어오르고 물을 건너고 치고 받는 등 생존에 필수적인 기능들을 돌 던지기․활쏘기․힘 겨루기․치고 받기 및 일부 기교적 성격을 강조하는 유희나 오락으로 점차 발전시켰는데, 그 중에 일부 내용은 잡기 예술의 원형을 띠고 있다. 인류는 사회생산․생활과 투쟁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하여 잡기예술을 만들어 발전시켜 왔다.
1. 각력(角力)․각저(角抵)․거정(擧鼎)
힘을 겨루는 각력․각저 등이 출현하게 된 것은 오락적 목적 외에도 몸을 지키고 전투를 하기 위해서였다. 고대사회 인류는 생존을 위해 나무 막대기와 돌멩이 같은 간단한 무기를 들고 야수의 습격에 대비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맨손으로 치고 싸우는 방법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를테면 주먹과 발을 이용해 치고 때리거나 내리치고 끌어안거나 누르고 밀거나 할퀴는 등의 수단으로 자신을 보호하였다. 이 과정에서 점차 각력․각저․거정 등의 활동이 생겨났다. 이러한 활동이 유행하게 된 것은 선진시대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전국시대의 병법가 오기(吳起; ?∼기원전 381)는《오자(吳子)․요적(料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대에는 반드시 용맹한 병사가 있기 마련이다. 솥을 가볍게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세고, 군마가 달리듯 발이 빠르며, 적군의 깃발을 탈취하고 장군을 베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이 같은 사람들은 선발하여 각별하게 대하고, 아끼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一軍之中, 必有虎賁之士, 力輕扛鼎, 足輕戎馬, 搴旗取將, 必有能者. 若此之等, 選用別之, 愛而貴之.)
춘추시기부터 전국시기까지 전쟁 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전차를 이용한 전쟁에서 보병 위주의 전쟁으로 점차 변하였다. 조(趙)나라 무령왕(武灵王)이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하에 시기를 놓치지 않고 결단을 내려 “호복기사(胡服騎射)1)”를 주장하여, 각 국 군주들의 찬성과 호응을 얻어내었다. 보병 위주의 전쟁 이후에 말을 타고 활을 쏘는 활동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군대”에는 “솥을 가볍게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세고, 군마가 달리듯 발이 빠른” 용맹한 병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선봉에 서서 “적군의 깃발을 탈취하고 장군을 베어” 적군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공자(孔子)의 부친 숙양흘(叔梁紇)이 바로 이런 용맹한 장사였다.《좌전(左傳)․양공10년(襄公十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 번은 제후들의 군대가 핍양(偪陽)을 칠 때, 핍양의 장사가 성문을 활짝 열어 제후들의 군사를 성안으로 유인한 후 현문(懸門)2)을 내려 성안으로 들어온 장사들을 성내에서 몰살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숙양흘이 두 손으로 “성문을 올려(抉之)” 함정에 빠진 장사들을 구출한 후 “현문”을 내리고 철수하였다. 이 전쟁에서 노(魯)나라의 용사 적사미(狄虒彌)는 왼손으로 갑옷을 덮어씌운 큰 수레바퀴를 들어 방패로 삼고, 오른손으로 큰 창을 흔들며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적을 수없이 죽였다. 선진시기 노나라의 변장(卞莊)과 제(齊)나라의 맹분(孟賁) 역시 유명한 용사였다. 변장은 꾀를 내어 범 두 마리를 죽였는데, 그의 용력이 제후들 사이에 알려지자 제후(齊侯)들이 군대를 일으켜 노나라를 치려고 하지 않았다(《사기(史記)․진진열전(陳軫列傳)》)3). 맹분은 “강물을 건널 때는 교룡도 피하지 않았고, 땅에서는 외뿔소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水行不避蛟龍, 陸行不避兕虎)”(《시자(尸子)》)4). 이런 수준에 이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뛰어난 무술뿐만 아니라 강인한 신체와 초인적인 힘을 갖추어야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각 국의 군주는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많은 용사들을 모아야 했는데, 그중 일부 군주는 그 자신이 용사이기도 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의《사기․은본기(史記․殷本紀)》에는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재능과 힘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 맨손으로 맹수를 잡았다.(材力過人, 手格猛獸)”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唐)나라 사람 장수절(張守節)은《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제왕세기(帝王世紀)》를 인용하여 은나라의 주왕은 “소 아홉 마리를 거꾸로 끌었으며, 대들보를 들고 기둥을 바꿨다(倒曳九牛, 撫梁易柱)”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한(東漢) 사람 왕충(王充; 27년~약 97년)은《논형(論衡)․어증편(語增篇)》에서 은나라의 주왕은 “철근을 꼬아 끈으로 만들고, 맨손으로 쇠갈고리를 폈다(索鐵伸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힘이 천하장사였던 모양이다. 주왕의 부하인 비렴(飛廉)과 악래(惡來) 역시 “무소와 외뿔소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힘이 세었고, 곰과 범을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용맹했다(力角犀兕, 勇搏熊虎)”《열자(列子)․중니편(仲尼篇)》에는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두 손으로 “무소와 외뿔소의 가죽을 찢고, 소 아홉 마리의 꼬리를 잡고 끌었다(裂犀兕之革, 曳九牛之尾.)”라고 기록하고 있다.
솥을 드는 거정은 고대 힘을 기르고 겨루는 중요한 방식으로, 근대 잡기 중의 큰칼 들기․강한 활 당기기 및 현대 스포츠의 역도와도 유사하다.《사기․진본기(秦本紀)》에는 진나라의 무왕(武王)이 신하들과 힘 겨루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번은 무왕이 역사 맹설(孟說)과 솥 들기 시합을 하다 정강이뼈가 부러져 죽고 말았다. 맹설은 이 일로 추궁을 받아 일가족이 몰살당하였다. 이로 볼 때, 이 경기는 상당히 격렬하고 위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획(烏獲)은 전국시기에 유명했던 역사로, 임비(任鄙)․맹설과 함께 진나라 무왕의 총애를 받았다. 맹가(孟軻)는 그가 3,000근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고 했다. 하육(夏育)은 위(衛)나라 사람으로, 맹분․오획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는 30,000근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후에 전박(田博)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오획과 하육은 선진 때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이들과 관련된 전설이 많다. 후에 잡기 중에《오획강정(烏獲扛鼎)》․《하육강정(夏育扛鼎)》등과 같은 힘을 겨루는 잡기의 하나로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대에 힘 기술을 펼치는 예인들은 오획과 하육을 창시자로 받들었다.
각저 역시 고대에 힘을 겨루는 종목의 하나였지만 이것은 힘으로만 하지 않고 잡고 쓰러뜨리는 기술인 솔교(摔跤)․낚아채는 기술인 금나(擒拿)․주먹기술인 권술(拳術)․손 기술인 수박(手搏)을 종합한 무술이었다. 이것은 전쟁 때 적진에서 작전을 펼치거나 군대가 육박전을 벌일 때 필요한 기술이어서 줄곧 군사훈련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후의 권술․금나․맨손으로 칼날을 받는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과 약간 늦게 일본에서 유행한 공수도(空手道)․유술(柔術)은 모두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이런 격렬한 격투를 과장된 연출에 가미하여 상무정신을 구현하고, 아울러 오락수단으로 삼게된다. 이것이 선진시기의 각저희(角抵戲)를 생겨나게 한다. 중국의 각 민족은 상고시기에는 토템숭배를 중시하였다. 그중 용에 대한 숭배가 가장 보편적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용은 신성한 짐승으로, 하늘을 날고 물에 들어갈 수 있어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용의 머리에는 예리한 뿔이 있어 사람을 들이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禹) 임금이 치수(治水) 사업을 벌였다는 전설에 “응룡(應龍)”(《습유기(拾遺記)》에는 “黃龍”으로 되어 있음)이 뿔로 산을 가르고, 꼬리를 끌어 땅과 길을 만들었다는 신화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각저희 중에 머리를 서로 맞대는 동작은 바로 상고시기 토템 중의 용에 대한 모방과 숭배이다.
《사기․이사열전(李斯列傳)》에는 진나라 2세 호해(胡亥)가 감천궁(甘泉宮)에서 “예인들이 각저를 할 수 있도록 누각을 지었다(作觳抵優俳之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秦)나라 이전에는 솔교 놀이를 “각저(觳觝)”라고 하였다. “각(觳)”은 거친 숨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하며, “저(觝)”는 서로 이마를 맞대거나․몸을 마주 부딪치거나․상대를 들어 올리거나․상대의 몸을 붙잡는 것을 가리켰는데, 팔을 휘두르거나 누르는 등의 격렬한 동작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초기의 각저는 “전력을 다해 십 합을 겨룬다(一力抗十回)”는 말로 미루어보아 종종 힘의 우위로 승부를 가렸으며 기술은 그 다음이었던 것 같다. 남조(南朝)시대 송(宋; 420~479)나라 사람 배인(裴駰: 372~451)은《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후한(後漢) 응소(應劭)의 말을 인용하여 “전국시기에 무술을 익히는 예가 점차 확대되자 놀이 삼아 서로 힘을 과시하는 데 사용했다(戰國之時, 稍增講武之禮, 以爲戲樂, 用相夸示.)”고 했는데, 후에 진나라에 이르러 “각저(角抵)”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문영(文穎)은 주석에서 진나라의 각저는 “두 사람씩 대적하여 힘을 겨루는(兩兩相當, 角力)” 것 외에도 “기(伎)․예(藝)․사(射)․어(御)”를 겨루었다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해 각저희는 두 사람씩 서로 맨손으로 격투하는 모습을 공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활쏘기․말타기․수레 몰기 등의 오락적인 내용도 포함하고 있어서 “각저”라는 말은 여러 가지 놀이의 대명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국어(國語)․진어제구(晋語第九)》중의 “소실주가 조간자의 거우(車右)가 되자 조간자의 신하인 우담이 힘이 장사라는 말을 듣고, 우담과 힘을 겨루어 보겠다고 청했다(少室周爲趙簡子之右, 聞牛談有力, 請與之戲.)”라는 구절의 옛날 주석(舊注)과 청나라 사람 유월(兪樾)의《아점록(兒苫彔)》에 근거하여 분석해보면 “희(戲)”자의 본의는 ‘힘을 겨루는 것(角力)’이다. 또《사기․공자세가(孔子世家)》중의 “배우와 광대들이 놀이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优倡侏儒爲戲而前)”라는 구절에도 “희”자는 가무(歌舞)와 잡예(雜藝)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각저희가 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잡기라고 하는 이상 고대의 전쟁을 반영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치우희(蚩尤戲)》가 생겨났다.《치우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치우의 각력과 잡예를 반영하거나 연출한 것이다. 치우는 중국 상고시대 신농씨(神農氏)가 이끄는 부락의 영웅적 인물로, 하북(河北) 탁록현(涿鹿縣)에 아직도 그의 묘가 있다. 치우는 신농씨의 부락 중 구려(九黎)의 추장이자 염제(炎帝; 신농씨의 후예)의 신하였다. 염제의 세력이 쇠미해지면서 중원은 점차 제후가 서로 호시탐탐 노리는 전란의 땅이 되었다. 이때 헌원씨(軒轅氏) 부락의 추장인 황제(黃帝)가 이 기회를 틈타 세력을 확장하여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으로 각 노(路)의 제후들을 복종시키고 동시에 염제와 “판천(阪泉)이라는 들판”에서 중원의 패권을 두고 일전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염황(炎黃)의 전쟁이며, 염황 자손들의 유래가 된다. 결과는 염제가 패전하고 지휘권을 잃게 된다. 치우는 불복하고 떨쳐 일어나 항쟁하여, “탁록(������鹿)이라는 들판”에서 황제와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자신은 전사하고 만다. 그러나 그의 불굴의 투쟁정신과 용맹한 전투모습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대(漢代)의 위서(緯書)인《용어하도(龍魚河圖)》의 기록에 근거하면, 치우가 전사한 뒤에도 천하가 여전히 불안하자 황제는 결국 “치우의 형상을 그려 천하에 위엄을 보여주었다(畵蚩尤形象, 以威天下)”고 하는데, 그래서 치우는 중국 고대전설 중의 전신(戰神)이 되었다. 후대의 많은 문헌에서 치우의 모습을 극력 폄하하고 있지만 그의 영웅적 기질은 가려질 수 없었다.
그림1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 한나라 묘에서 출토된 화상석
(《중국잡기예술(中國雜技藝術)․화책(畵冊)》에 보임)
그림2 섬서성(陜西省) 장안(長安) 풍하(灃西) 주(周) 나라 묘에서 출토된 각저 활동을 표현한 투조동패(透彫銅牌) 그림
(《중국교술(中國跤術)》에 보임)
남조(南朝)의 양(梁)나라 사람 임방(任昉; 460~508)의《술이기(述異記)》에는 진한 시기의 전설에 치우는 “귀와 귀밑머리가 칼과 창 같고, 머리에는 뿔이 있다(耳鬢如劍戟, 頭有角)”라고 했으며, 또 그는 헌원씨(軒轅氏) 황제(黃帝)와 결투할 때 “뿔로 사람을 찔렀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아갈 수 없었다(以角抵人, 人不能向)”라고 했다. 이로부터 그의 동작을 모방한 “치우희”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찌르고 꽂는 무공과 전쟁장면의 연출이 바로 중국 고대 잡기의 시작이다. 섬서성 장안시 풍하(灃河) 일대 서주(西周) 묘에서 출토된 투조(透雕)5) 동패(銅牌)의 “각저도상(角抵圖像)”과 하남성(河南省) 정주시(鄭州市) 밀현(密縣)의 타호정(打虎亭)의 한나라 묘에서 출토된 “동한벽화각저도(東漢壁畵角抵圖)”를 통해 각저의 대략적인 상황을 알 수 있다. 산동성 임기(臨沂) 지구 금작산(金雀山)의 한나라 묘에서 출토된 견직물에 그려진 그림에서도 새로운 내용이 있다. 그림에는 건장한 무사 두 명이 대련을 하기 위해 소매를 걷고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옆에는 심판이나 감독 같은 사람이 팔짱을 끼고 서 있다.
그림3 산동성 임기 금작산 한묘에서 출토된 견직물 그림.
(《중국교술(中國跤術)》에 보임)
1) 《사기․흉노열전(史記․匈奴列傳)》: “조나라의 무령왕도 풍속을 바꿔, 북방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말을 타며 활 쏘는 것을 익혔다(趙武靈王亦變俗, 胡服習騎射.)”. 여기서는 북방의 흉노를 정벌하자는 뜻--옮긴이.
2) 현문(懸門): 지금의 갑문과 유사한 무거운 물건--옮긴이.
3) 《史記․陳軫列傳》: 원래는 《史記․張儀列傳》안에 언급된 陳軫의 내용을 말한다--옮긴이.
4) 唐․司馬貞《史記索隱》에 <尸子>가 말한 것이다--옮긴이.
5) 투조(透雕): 문양부분을 도려내어 도안을 나타내는 조각법-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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