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언홍 지음 / 이상천 옮김 ≪중국고대의 환관≫, 울산대학교출판사, 2009.
二․황실의 노예---환관의 직책
환관(宦官)이나 엄인(閹人)은 중국이든 외국이든 대부분 황궁에 노역을 제공하였다. 노예사회든 봉건사회든 제후나 제왕은 모두 수많은 처첩을 거느렸던 사람들이었다. 춘추시기에 제후가 다른 나라의 여자를 정실부인(嫡夫人)으로 삼게되면 여자 측에서는 조카딸을 데리고 시집을 가야했고 이 여자들에게도 각자 조카딸이나 여동생이 있으면 따라왔다. 이렇게 실제로 한 번 장가가는데 아홉 명의 여자를 맞이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 아홉 명의 여자를 첩이라는 의미의 “잉(媵)”이라고 불렀다.《예기(禮記)․혼의(昏義)》에 근거하면 “옛날 천자의 후는 6궁․3부인․9빈․27세부․81어처를 두었다.(古者天子后立六宮、三夫人、九嬪、二十七世婦、八十一御妻.)”고 한다. 또《사기․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는 “후궁과 열녀가 만여 명(后宮列女萬餘人)”이었다고 하고, 진(秦) 혜문왕(惠文王) 때 왕후(王后)․부인(夫人)․미인(美人)․양인(良人)․팔자(八子)․칠자(七子)․장사(長使) 등이라고 부르는 이름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는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했는데, 무제(武帝)와 원제(元帝) 때는 첩여(婕妤)․소의(昭儀) 등의 관직호칭을 포함 14등급으로 나누었다. 정식으로 관직호칭을 얻은 사람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궁녀가 있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강도(江都)지역을 유람할 때면 “따르는 궁녀들이 항상 10만 명이나 되었다.(從幸宮掖, 常十萬人.)”.(《수서(隋書)․식화지(食貨志)》) 진(晉)나라 무제(武帝)의 액정(掖庭)1)에 거처하던 궁녀가 만 명에 가까웠으며 총애를 받은 궁녀도 적지 않았다. 황제는 어느 궁으로 가야 좋을 지를 몰라 항상 양이 끄는 수레에 올라 양이 가다 멈춘 곳에서 밤을 보냈다. 이렇게 되자 궁인(宮人)들은 대나무 잎을 문에 꽂고 소금물을 바닥에 뿌려서 양을 유인해 황제의 사랑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후 역대 왕조의 후궁들 수는 늘기만 하고 줄지는 않아서 다음과 같은 우스개 소리가 출현한 적도 있었다. 남북조(南北朝) 때 송(宋)나라 폐제(廢帝)의 누나인 산음(山陰)공주가 “면수(面首)2)”를 두었던 일로 폐제와 다투었다. “나와 폐하는 다 선제의 소생인데 폐하는 육궁에 만 명이나 두면서도 나는 어째서 부마 한 사람만 두어야 하죠? 이것은 정말 불공평합니다”라고 하고는 결국 30명의 면수를 두었다고 한다. 당(唐) 현종(玄宗) 때에 이르러서는 “시녀가 8천 명(先帝侍女八千人)”[두보(杜甫)의 시《공손대낭의 제자가 공연하는 검기무를 구경하고서(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이나 되었다. 명(明)나라가 망할 때 후궁(后宮)에 궁녀가 9,000명이나 남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젊은 여자들을 관리하고 시중 들 사람이 꼭 있어야 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제왕의 순수 혈통을 보장해야 하는 일이어서 후궁에 다른 남자가 있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어떤 일은 궁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엄인이 필요해진 것이다. 유명한 사상가 고염무(顧炎武)는 “후궁과 황비들이 많았는데, 환관들은 이 때문에 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後宮皇妃衆多, 宦官因此得勢.)”고 지적하였다. 군권(君權)이 강화되면서 군왕의 생활은 사치스럽고 음란해졌으며, 환관들도 그 수가 많아질수록 권세도 커져 명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는 10여만 명이나 되었다. 나중에는 친왕(親王)이나 부마(駙馬) 등 제왕의 친척들도 환관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환관은 도대체 무슨 일을 했을까? 이것은 일상적인 일과 “특별한(非常)” 일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먼저 이들의 일상적인 일을 살펴보자.《주례(周禮)》에 “엄인은 왕궁의 중문을 관장하고 지키는 것(閹人掌守王宮中門之禁)”과 “시인은 왕궁의 내인 및 궁녀의 계율과 명령을 관장하는 것(寺人掌王宮之內人及女宮之戒命)”이라고 하였다.《월령(月令)》에 보면 “음력 11월에 환관의 우두머리인 엄윤에게 문을 여닫는 것을 살피게 하고, 궁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지 신중을 기하도록 하였다.(仲冬, 令閹尹審門閭, 謹房屋.)”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환자(宦者)의 책임은 단지 출입문이나 지키는 것이었고, “총재(冢宰;후세의 재상)”의 관할 속에 있었다.《문선(文選)․범엽(范曄)<환자전기(宦者傳記)>》이선(李善)의 주석에 “환이라는 것은 기른다는 뜻이다; 엄인을 길러 그들로 하여금 궁인들을 시중들게 했는데, 이들이 바로 소신이다.(宦者, 養也; 養閹人使其看宮人, 此是小臣.)”라고 하였다. 전국(全國) 시기에는 환자령(宦者令)을 두었고, 진(秦)나라 때는 소부(少府)를 두고서 속관(屬官)으로 중서알자령(中書謁者令)과 승(丞)이 있었으며, 또 장행(將行)과 위위(衛尉)가 있었다. 한(漢)나라 때는 장행을 대장추(大長秋)로 고쳤으며, 모두 내궁(內宮)의 일을 관장하였다. 서한(西漢) 말 성제(成帝) 때 태복(太僕) 1명을 더 두어 태후의 거마를 관장하게 했기 때문에 황태후경(皇太后卿)이라 통칭하였다. 이후로 태후궁의 이름을 관호(官號)로 삼았는데, 장신소부(長信少府)나 장락소부(長樂少府)가 바로 그것이다.
후한(後漢) 때는 대장추를 설치하고 중궁(中宮)의 명을 선포하는 책임을 졌다. 중궁복(中宮僕) 1명은 수레 몰이를 책임졌고, 중궁알자령(中宮謁者令) 1명과 중궁알자(中宮謁者) 3명은 통보와 연락을 책임졌으며, 중궁상서(中宮尙書) 5명은 문서를 주관하였고, 중궁영항령(中宮永巷令) 1명은 궁인(宮人)을 주관하였다.
처음에는 진(秦)나라 역시 중상시관(中常侍官)를 두었는데, 모두 “은이나 옥 혹은 담비의 꼬리로 장식한 관을 쓰고 궁중에서 봉직하는 환관이다.(銀璫左貂給事殿省.)” 한(漢)나라는 제도상으로 중상시(中常侍)․시중(侍中)․황문시랑(黃門侍郞)을 두었는데, 편지와 상소문을 전달하고 발표하는 데에 이용하였다. 영평(永平) 연간(58~75)에 처음으로 중상시(中常侍) 4명과 소황문(小黃門) 10명의 정원을 규정하였다. 명제(明帝) 이후로 정원이 얼마간 증가하자 “금당우초(金璫右貂)”3)라고 불리는 환관으로 바꾸었다. 등태후(鄧太后)는 황후의 신분으로 섭정을 했지만 공경(公卿)들을 가까이 할 수 없어 “전적으로 엄인을 이용해서 두 궁 사이에 명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悉用閹人, 通命兩宮.)”.《한서(漢書)․형법지(刑法志)》에 “궁형을 받은 자는 궁궐 안을 지키게 한다(宮者使守內)”라고 하였다. 안사고(顔師古)는 “궁은 음형으로 남자는 생식기를 잘라내었고, 여자는 난소를 제거하는 것이다.(宮, 淫刑也, 男子割腐, 婦人幽閉.)”라고 하였고, 또 “사람의 길을 끊었으니 일을 시키기에 편리하였다.(人道旣絶, 于事便也.)”라고 하였다. 환관이 초기에는 주로 후궁에서 일하는 데에 이용되다가 명제(明帝) 이후로 “공경들이 직무를 함께 담당하면서(兼領卿署之職)” 후궁의 직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수(隋)나라는 내시성(內侍省)을 두어 내시(內侍)와 내상시(內常侍) 등의 관직을 이끌게 하였다. 수 양제(煬帝)는 또 내시성을 장추감(長秋監)으로 고쳐 영(令) 1명․소령(少令) 2명․승(丞) 2명을 두고 환자(宦者)를 이용하여 액정(掖庭)․궁위(宮闈)․해관(奚官)의 세 관청을 거느리게 했는데, 이때 또 시인을 추천 임용하여 궁정 내부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당대(唐代) 무덕(武德) 초년(618)에는 장추감을 내시성으로 바꾸고 모두 환관을 이용하였다. 내시와 내상시는 “궁궐 안의 시봉과 명령의 선포를 관장하는(監掌內侍奉、宣制令)” 책임을 졌다. 아래에 액정(掖庭)․궁위(宮闈)․해관(奚官)․내복(內僕)․내부(內府)․내방(內坊)이라는 6국(局)을 두었다. 내시성에 내상시 6명을 두어 성(省)의 일을 처리하였다. 내급사(內給事) 10명이 성의 업무, 즉 내시성의 업무를 분담하였다. 예컨대 원단(元旦)과 동지(冬至)에 백관들이 아침에 황후에게 하례할 때, 내급사가 길을 안내하거나 조서를 읽는다든지, 또 궁인들의 의복 비용을 품계에 따라 산정한 다음 중서성(中書省)으로 보내는 일이다. 내알자감(內謁者監) 10명을 두어 의법(儀法)4)과 선주(宣奏)5) 등의 일을 맡겼는데, 대부들의 부인들이 황제에게 아뢸 일이 있을 때, 입조하여 황제를 배알하도록 안내하는 일을 책임졌다. 후에 내알자감(內謁者監)을 폐지하고 내전인(內典引) 18명을 두게 되면서 진정으로 “이름이 그 직무와 일치하게 되었다(名符其職)”. 내시백(內侍伯) 6명은 궁내의 불법적인 일을 규찰하는 책임을 졌다. 시인 6명은 황후를 호종하며 출입하였다.
아래에 6국(局)을 두었는데 그 직무는 다음과 같다. 액정국(掖庭局)은 궁인의 명부(名籍)․장부(簿賬)․여공(女工)을 책임졌고, 궁위국(宮闈局)은 후궁의 출입문과 물품의 출입 그리고 황후를 호종할 때 부채를 드는 일 등을 관장하였으며, 해관국(奚官局)은 궁인들의 생노병사의 일을 책임졌고, 내복국(內僕局)은 궁중의 수레를 관리하며 황후의 출입을 책임졌으며, 내부국(內府局)은 궁중의 창고 및 필요한 등촉․목욕탕․장막설비 등을 책임졌다.
당(唐) 태종(太宗)이 정한 제도를 보면 내시성에 3품관을 두지 못하도록 하여 영순(永淳) 연간(682~683)까지 50여 년 동안 환관은 궁문을 지키거나 음식과 의복을 시중드는 업무만을 관리하였다. 중종(中宗) 때 환관 3,000명 가운데 7품 이상을 받은 사람이 1,000여 명이었다. 현종(玄宗)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연간(713~755)에 장안대내(長安大內)․대명궁(大明宮)과 흥경궁(興慶宮)․황자십택원(皇子十宅院), 황손백손원(皇孫百孫院)․동도(東都)의 대내궁(大內宮)와 상양궁(上陽宮)에 궁녀가 4만 명․7품 이상의 환관 3,000여 명․3품에서 5품까지의 환관 1,000여 명을 두었다.(《구당서(舊唐書)․환관전(宦官傳)》)
명대(明代)는 환관들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때 환관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각 사(司)로 하여금 그 직무를 맡게 하고 내시성을 없앴다. 9감(九監)․2고(二庫)․6국(六局)을 설치하였다. 나중에 24아문(衙門)으로 발전했는데, 12감(監) 8국(局) 4사(司)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의 직책은 다음과 같다.
사례감(司禮監)은 24아문의 으뜸으로 권한이 막강했다. 사례태감(司禮太監)을 사람들은 “재상의 이름은 없지만 재상의 실권을 가지고 있다(無宰相之名有宰相之實)”고 하였다. 대소 신료들의 상소문에 대한 회답과 황제의 명령과 성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관장하는 동시에 동광(東廣)․남경수비(南京守備)․내서당(內書堂)이라는 3개 주요기관을 통솔하였다.
내궁감(內宮監)은 궁실․창고․능묘의 축조를 관장하는 동시에 동양(銅鍚)6)․장렴(粧奩)7) 같은 기물을 구매하였다.
어용감(御用監)은 황제가 사용하는 병풍․침대․제반 목기 및 각양각색의 진기한 보물 등의 구매를 책임졌다.
사설감(司設監)은 노부(鹵簿)8)․의장(儀仗)9)․유막(帷幕)10) 등을 관장하였다.
어마감(御馬監)은 황실의 말들을 관장하였다.
신궁감(神宮監)은 역대 황제들의 신위를 모신 태묘(太廟) 및 각 사당의 청소와 등불 등을 관장하였다.
상선감(尙膳監)은 어선(御膳)11)․잔치 및 궁내의 식용을 관장하였다.
상보감(尙寶監)은 옥새․칙부(敕簿)12)․장군의 인신(印信)13) 등을 관장하였다.
인수감(印授監)은 고금의 통집고(通集庫)14)․철권(鐵券)15)․첩황(貼黃)16)․인신(印信)․신부(信符)17)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직전감(直殿監)은 각 궁전(殿), 복도(廊), 뜰(庭)의 청소를 관장하였다.
상의감(尙衣監)은 황제의 의복․모자․신발을 관장하였다.
도지감(都知監)은 초기에는 각 감(監)의 행이(行移)18)․관지(關知)19)․감합(勘合)20)을 관장하다가 나중에는 전문적으로 어가(御駕)21)를 따라 길을 안내하고 깨끗이 청소하는 책임을 졌다.
이 12감(監)에는 모두 정4품관인 장인태감을 두어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 아래에 종4품인 좌우소감(左右少監) 각 1명, 정5품인 좌우감승(左右監丞) 각 1명, 정6품인 전부(典簿) 1명, 정원이 없었던 종6품인 장수(長隨)와 봉어(奉御)를 둘 수 있었다.
4사(四司)는 석신사(惜薪司), 보초사(寶鈔司), 종고사(鐘鼓司), 혼당사(混堂司)이다. 석신사는 궁궐에서 사용할 숯과 땔감을 관장하였고, 종고사는 종고(鐘鼓)는 물론 내악(內樂)․전기(傳奇)․과금(過錦)과 같은 여러 잡희(雜戱)를 책임졌으며, 혼당사는 목욕하는 일을 맡았고, 보초사는 표면이 거칠거나 매끄러운 종이를 제작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팔국(八局)도 각각 전문적인 직무를 맡았다.
병장국(兵仗局)은 병기와 화약 같은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책임졌다.
은작국(銀作局)은 금이나 은으로 기물이나 장식물을 제조하는 일을 책임졌다.
완의국(浣衣局)은 나이 들어 궁궐에서 물러난 사람을 위한 곳으로, 황실의 기밀누설을 방지하고자 이 국(局)은 궁궐 안이 아닌 덕승문(德勝門) 밖에 두었다.
건모국(巾帽局)은 부마(駙馬)의 신발․관 및 번국(藩國)의 깃발․모자․신발 그리고 궁중에서 사용되는 모자와 신발을 관장하였다.
침공국(針工局)은 궁중 의복의 제조를 감시하는 책임을 졌다.
내직염국(內織染局)은 어용 및 궁궐 안에서 필요한 비단의 염색과 제조를 책임졌다.
주초면국(酒醋面局)은 궁중에서 식용으로 하는 술․식초․설탕․간장․밀가루 등등을 관할하였다.
사원국(司苑局)은 궁중에서 음식재료로 사용할 채소와 과일 등을 관장하였다.
사(司)마다 사정(司正)과 사부(司副)를 두었고, 국(局)마다 대사(大使)와 좌우부사(左右副使)22)를 두었다. 감(監)과 국(局)의 환관 수는 수시로 늘릴 수 있었다. 유관 자료에 의하면, 명 효종(孝宗) 때 “모든 감과 국은 관인을 관장하며 함께 일했는데, 많을 때는 3, 40명에 달하였으며(諸監、局掌印合事多至三四十人)”, 무종(武宗) 때에 이르러서는 “백 수십 명(百數十人)”으로 늘었다고 한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환관 중에 직권을 가진 자를 비롯해 크고 작은 권한을 가진 환관이 수없이 많았다는 점이다.
24아문 외에도 환관은 또 내부공용고(內府供用庫)․사약고(司鑰庫)․내승운고(內承運庫) 등 각 고방(庫房) 및 어주방(御酒房)․어차방(御茶房)․어약방(御葯房)․첨식방(甛食房) 등 각 부문을 관할하여 궁궐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였다. 이밖에도 제(帝)․후(后)․태후(太后)․비빈(妃嬪)의 신변에는 이들을 위해 일하는 태감이 있었고, 궁궐의 각 문(門)과 전(殿)에도 파수․청소․관리 등을 맡은 태감이 있었다.
이런 환관들의 일상적이고도 일반적인 일은 황제와 그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책임을 지는 것으로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에 이르기까지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부의(溥儀)는《나의 젊은 시절(我的前半生)》이라는 글에서 “나의 유년생활에 태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내가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잠을 자는 것에도 시중을 들었고, 나와 함께 놀아주기도 하였으며, 공부하는 것을 시중들기도 하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간혹 내게서 상을 받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였다. ……(講我的幼年生活, 就不能少了太監. 他們服侍我吃飯、穿衣和睡覺, 陪我游戱, 伺候我上學, 給我講故事, 受我的賞也挨我的打. ……)”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자신이 어화원(御花園)에서 놀았던 장면을 아주 생생하게 언급하였다. 수십 명의 태감들이 수행했는데, 제일 앞쪽은 경사방(敬事房)의 태감으로 “츠이츠(吃一吃)”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있었는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빨리 비켜서라는 경고로 황제가 납신다는 뜻이었다. 뒤쪽은 두 명의 총관(總管)태감이 따르는데, 황제가 가마를 타면 바로 가마를 메고 가고 황제가 걸으면 부축해서 걷는다. 더 뒤에는 큰 양산을 든 태감 및 각종의 물건을 든 태감들이 따른다. 이를테면 수시로 앉을 수 있는 접이용 의자․간식과 차․각종의 구급약품․심지어 대소변기까지 모두 휴대했던 것이다. 또 청대의 대환관이었던 이연영(李蓮英)의 경우 처음에는 자희(慈禧)태후에게 머리카락을 빗겨주는 소태감(小太監)이었지만, 자희(慈禧)가 새로운 스타일의 쪽머리를 하고 싶어하자 이연영은 바로 기원(妓院)으로 달려가 머리 빗는 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후에 이로써 자희의 총애를 받게 된다. 자희가 잠자리에 들면 압풍(押風)이라고 부르는 두 명의 태감 수령이 침상 앞에 시좌(侍坐)하고, 좌경(左更)이라고 부르는 소태감(小太監) 백여 명이 복도에 시립(侍立)하는데, 날이 새고 나서야 해산하였다.
후에 일부 왕공대신들의 집에서도 환관을 쓰기 시작하였다.《청패류초》의 기록에 따르면, 가경(嘉慶) 연간에 개인 저택에서 쓰는 태감에 대해 친왕(親王)은 7품의 태감 수령 1명과 태감 40명을, 군왕(郡王)은 8품의 수령 1명과 태감 30명을, 패륵(貝勒)23)은 20명, 패자(貝子)24)는 10명을 허락하고……1품 이상의 문무(文武)대신들은 4명을 두어도 된다고 규정하였다. 1994년까지만 해도 건재했던 태감 손요정(孫耀庭)25)이 막 북경에 왔을 때 바로 재도(載濤; 1888~1970)의 패륵부(貝勒府)에서 태감을 지냈는데, 당시가 이미 민국(民國) 5년(1916)이었다.
이상에서 환관의 일반적이면서도 정상적인 직무와 환관의 세력이 창궐했던 당나라와 명나라 때 환관의 중임은 물론 몇몇 특수한 직무를 설명하였다.
당대 후기에 번진(藩鎭)이 할거하자 조정은 환관을 감군(監軍)으로 삼아 각 진(鎭)에 토벌대를 파병하면서 군대의 지휘관과 대등한 지위를 가지도록 하였다. 출정하는 장수를 감시하기 위하여 당나라는 또 관군용사(觀軍容使)를 두고 환관으로 채웠는데, 대종(代宗) 때의 어조은(魚朝恩)이나 희종(僖宗) 때의 전령자(田令孜)가 바로 그와 같은 자들이다. 당 덕종(德宗) 정원연간(貞元; 785~805)에는 금군(禁軍)인 신책군(神策軍)을 좌우 두 편으로 나누고 환관 두문장(竇文場)과 왕희천(王希遷)으로 하여금 각각 통솔하게 했는데, 이때부터 환관이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 제도로 정착되었다. 당 덕종(德宗) 때는 궁궐 안의 시장인 궁시(宮市)를 두고 궁시사(宮市使)라는 벼슬에 환관을 임명하여 민간의 물자를 사들이도록 했는데 실제로는 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대에 이르러 환관의 권력은 절정에 달한다. 먼저 환관이 책임지는 동창(東廠)․서창(西廠)과 내행창(內行廠)을 설치하고는 관부(官府)나 민간에 대해 조사체포와 형벌투옥을 자행하였다. 명대의 환관은 재정에 간섭하였고 황실토지를 관리하는 것은 물론 창고의 경리까지 맡았으며, 건축․보석채굴․무역선․방직․주조 등에 대해서도 감독권을 가졌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명대의 환관을 언급할 때 상세하게 논의하겠다.
당과 송을 이어 명나라 때도 환관이 감군이 되어 경성의 군대를 지휘 감찰하였다. 영종(英宗)이 복위한 후 태감 조길상(曹吉祥)을 수도권을 지키는 군대인 오군영(五軍營)․삼천영(三千營)․신기영(神機營)의 총독에 임명하였다. 헌종(憲宗) 때는 환관을 직접 병영에 파견했는데, 이를 “감신창(監神槍)”이라고 불렀다.
환관은 수도권의 군대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파견되어 군대를 주둔시키고 수비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무종(武宗) 때에는 환관들을 선발하여 내조(內操) 혹은 정군(淨軍)이라고 하는 군대를 편성했는데, 황실의 충직한 수하가 되었다.
어떤 환관은 심지어 사신의 신분으로 외국에 파견되기까지 하였다. 왕종(王琮)을 진석왕(眞腊王)에 봉해 파견했던 일이나 마빈(馬彬)을 자바(爪哇) 등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던 일 등이 그 예라고 하겠다. 어떤 이는 명대의 환관을 “마치 수은이 땅바닥으로 스며들 듯 들어가지 않은 구멍이 없었다(如水銀泄地, 無孔不入)”고 하였다.
1) 비빈과 궁녀들이 거처하던 정전 옆의 궁전--옮긴이.
2) 귀부인들이 노리개로 삼는 미남--옮긴이.
3) 당(璫)이라는 옥은 진한(秦漢) 환관들 중에 무직(武職)을 맡은 자들의 관식(冠飾)으로서, 후대에는 “당”을
환관의 대칭(代稱)으로 삼기도 하였다. 담비(貂)나 담비꼬리(貂尾)는 중상시(中常侍) 관(冠)위의 장식물이다.후대에 “초당(貂璫)”을 환관의 대칭(代稱)으로 삼기도 하였다.
4) 예의와 법--옮긴이.
5) 상주문을 읽는 것--옮긴이.
6) 말이나 방패를 장식하는 구리--옮긴이.
7) 화장대--옮긴이.
8) 황제의 행차--옮긴이.
9) 황제가 외출 때 쓰는 깃발․부채․양산․무기 따위--옮긴이.
10) 막사를 만들 때 쓰는 장막--옮긴이.
11) 황제의 음식--옮긴이.
12) 황제의 명령을 적어놓은 장부--옮긴이.
13) 관인(官印)이나 공인(公印) 등의 총칭--옮긴이.
14) 문서보관창고--옮긴이.
15) 임금이 공신에게 주던 쇠로 만든 패--옮긴이.
16) 상소문의 미진한 부분을 황지를 끝에 첨부하여 부연하는 것--옮긴이.
17) 통행증--옮긴이.
18) 동급 관서간의 공문왕래--옮긴이.
19) 통지--옮긴이.
20) 신분증명서--옮긴이.
21) 황제의 수레--옮긴이.
22) 이상의 자료는 모두 명(明)․유약우(劉若愚)의 《음주 속에 품은 뜻(酌中志)》권16에서 취하였다.
23) 청나라 종실 및 몽고 외변에 수여된 작위의 명칭--옮긴이.
24) 패륵 아래의 작위--옮긴이.
'中文史哲 > 中國宦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고대의 환관 四․환관의 혼인과 가정 (0) | 2009.10.13 |
---|---|
중국고대의 환관 三․환관의 생활과 심리상태 (0) | 2009.09.07 |
중국고대의 환관 一․인간의 참극---환관의 기원 (0) | 2009.09.01 |
중국고대의 환관-저자 프롤로그 (0) | 2009.09.01 |
중국고대의 환관-프롤로그/목록/일러두기 (0) | 2009.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