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路難三首1)
인생 길 어려워라 3수
其一
제1수
金樽淸酒斗十千2), 황금 술잔 속의 미주도 만 냥이고,
玉盤珍羞直萬錢3). 옥쟁반의 귀한 안주도 만 량이라네.
停杯投筯不能食, 마실 수 없어 잔 놓고 젓가락 던지고서,
拔劍四顧心茫然.4) 칼 뽑아 사방 둘러보니 마음만 아득하네.
欲渡黃河冰塞川,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강을 막고,
將登太行雪滿山.5) 태항산을 오르려니 눈이 가득하구나.
閑來垂釣碧溪上, 한가로이 낚싯대 드리우려 물가로 왔건만,
忽復乘舟夢日邊6). 문득 배 타고 해를 향해 가듯 몽롱하누나.
行路難, 行路難, 인생 길 어려워라, 인생 길 어려워라,
多岐路7), 今安在8)? 갈래길 많다던데, 지금 어디에 있는고?
長風破浪會有時9), 큰바람 타고 파도 헤쳐갈 날 있으리니,
直掛雲帆濟滄海10). 그 때는 돛 높이 달고 창해를 건너리라!
其二
제2수
大道如靑天, 큰길은 하늘처럼 드넓어도,
我獨不得出.11) 나 홀로 나아갈 수 없구나.
羞逐長安社中兒12), 부끄럽게도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赤雞白狗賭梨栗13). 투계나 경견에 배나 밤을 걸었다네.
彈劍作歌奏苦聲14), 칼춤에 노래하며 괴로운 소리내고,
曳裾王門不稱情15). 옷자락 끌며 세도가 찾는 것도 싫다네.
淮陰市井笑韓信16), 회음 땅 시정잡배들 한신을 비웃었고,
漢朝公卿忌賈生17). 한나라의 공경들은 賈誼를 꺼렸다네.
君不見, 그대 보지 못했는가?
昔時燕家重郭隗18) 옛날 연왕이 곽외를 존중해,
擁篲折節無嫌猜19). 바닥 쓸며 몸 굽히길 꺼리지 않았다네.
劇辛、樂毅感恩分20), 극신과 악의도 그 은혜에 감격하여,
輸肝剖膽效英才21). 간과 쓸개 빼내어 재능을 바쳤다네.
昭王白骨縈蔓草. 연 소왕의 백골 잡초에 묻혔으니,
誰人更掃黃金臺22)! 누가 있어 다시 황금대를 소제할까?
行路難, 歸去來. 갈 길 험하도다, 나 그만 돌아가리라!
其三
제3수
有耳莫洗潁川水23), 귀가 있어도 영천의 냇물에 씻는 이 없고,
有口莫食首陽蕨24). 입이 있어도 수양산 고사리 먹는 이 없네.
含光混世貴無名25), 세상과 어울리며 무명을 귀히 여길 일이지,
何用孤高比雲月. 어찌해 고고함을 구름과 달에 비하려했나?
吾觀自古賢達人, 나는 보았다네 예부터 현인과 달인들이,
功成不退皆殞身: 공 이루고도 물러나지 못해 죽임에 처한 것을!
子胥旣棄吳江上26), 오자서는 이후 시신이 오강에 버려졌고,
屈原終投湘水濱27), 굴원은 끝내 상수에 투신자살하고 말았고,
陸機雄才豈自保28), 육기의 재주도 결코 자신을 지키지 못했고,
李斯稅駕苦不早29), 이사는 일찍 물러나지 못한 걸 애통해했고,
華亭鶴唳詎可聞30), 화정의 학 울음소리 어찌하면 다시 들을까?
上蔡蒼鷹何足道31). 상채문으로 매 사냥 나갈 날 다시 있을까?
君不見, 그대 보지 못했는가?
吳中張翰稱達生32), 오땅의 장한은 사리에 통달하여,
秋風忽憶江東行, 가을바람에 홀연히 강남으로 가려했던 일을,
且樂生前一杯酒33), 우선 살아서 술 한 잔이라도 즐겨야지,
何須身後千載名34). 죽고 나서 천년의 명성이 무슨 소용이랴!
1)《行路難》은 樂府舊題이다. 원래는 古樂府 歌辭에 속했는데, 古辭는 이미 없어졌다. 六朝 이후로 많은 문인들이 모방하여 창작했는데, 내용은 주로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인생무상에 대한 탄식을 묘사한 것들이다. 이백은 천보 3년(744) 44세 되던 이후에 조정을 떠나면서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백은 장안으로 불려와 한림에 공봉하게 되지만 어용문인에 안주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오만하리 만치 호방한 개성은 權貴들에게 용납되지 않았고, 현종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백은 결국 궁정을 떠나서 자신이 중용되지 못하고 배척된 처지를 시로 읊어 분개한 마음을 표출하였다. 이 시가 바로 행로의 어려움을 세상살이의 고난에다 비유하여 내심의 울분을 토로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울분 가운데 또한 자신의 포부와 의지를 견지하고 있다.
2) 金樽淸酒斗十千(김준청주두십천): 淸酒: 濁酒에 대한 상대적인 말로 美酒를 가리킨다.《文苑英華》에는 美酒로 되어 있다. 斗十千: 한 말의 술값이 十錢이니 千으을 곱하면 바로 萬錢에 해당하는 돈이 되는데 아주 귀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3) 玉盤珍羞直萬錢(옥반진수직만전): 珍羞: 진귀한 요리이다. ‘羞’는 음식이라는 의미의 “饈(수)”자와 통한다. ‘直’은 값이라는 의미의 “値(치)”와 통한다.
4) 停杯投筯不能食, 拔劍四顧心茫然(정배투저부능식, 발검사고심망연): 鮑照《행로난을 모방하여(擬行路難)》이라는 시를 보면, “밥상을 마주하고도 먹을 수 없어, 검을 빼어들고 기둥을 치며 긴 탄식을 했네.(對案不能食, 拔劍擊柱長歎息.)”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를 모방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投筯: ‘젓가락을 던진다’는 뜻으로 안주를 먹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5) 欲渡黃河冰塞川, 將登太行雪滿山(욕도황하빙색천, 장등태행설만산): 鮑照의《(춤추는 학을 노래함(舞鶴賦)》이라는 시에 “얼음이 긴 강을 막고, 눈이 뭇산에 가득하네.(冰塞長河, 雪滿群山.)”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를 모방한 것이라고 하겠다.
6) 忽復乘舟夢日邊(홀복승주몽일변): 夢日邊(몽일변): 해에 가까이 가는 꿈을 꾸었다는 뜻인데, 조정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宋書․符瑞志上》의 “伊尹이 탕임금의 명을 받으려 할 때, 꿈에 배를 타고 해와 달의 곁을 지나갔다.(伊摯將應湯命, 夢乘船過日月之旁.)”라는 구절의 의미를 모방했다고 하겠다.
7) 多岐路(다기로): 갈림길, 즉 출로가 많다는 뜻이다. 駱賓王《從軍中行路難》: “갈 길 어려워라, 갈 길 어려워라, 갈림길이 몇 천 갈래인지.(行路難, 行路難, 岐路幾千端.)” 이 구는 장안으로 가는 길이 많다는 뜻인데, 조정에 중용될 길이 많다는 것을 가리킨다.
8) 今安在(금안재): “지금의 그 많은 출로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미이다. 즉 이백은 장안으로 중용되어 갈 길이 많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선택할 길을 찾을 수 없다고 독백하고 있다.
9) 長風破浪會有時(장풍파랑회유시): 長風破浪: 宗慤(종각)의 일을 인용한 것이다.《宋書․宗慤傳》: “숙부 종병은 고상하여 벼슬하지 않았는데, 종각이 어렸을 때 종병이 그의 포부를 묻자 종각은 ‘큰바람 타고 만리에 이는 파도를 헤쳐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叔父炳高尙不仕, 慤少年時, 炳問其志, 慤曰: ‘原乘長風破萬里浪’)” 이 구가 바로 이백 자신도 뜻을 펼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10) 直掛雲帆濟滄海(직괘운범제창해): 이 구에서 이백은 언제인가는 돛을 높이 달고 푸른 대해를 헤쳐나가 듯이 중용될 것이라는 희망을 표출하였다.
11) 大道如靑天, 我獨不得出(대도여청천, 아독부득출): 出仕할 길은 푸른 하늘만큼이나 넓다고 하지만 내게만 출로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12) 羞逐長安社中兒(수축장안사중아): 社中兒: 市井의 젊은이들. ‘社’는 고대에 25家를 社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市井의 골목을 일컫는다. 이 구의 뜻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것이 부끄럽다이다.
13) 赤雞白狗賭梨栗(적계백구도리율): 赤雞白狗: 여기서는 鬪鷄와 競犬 같은 유희를 가리킨다. 당 현종은 투계를 좋아하여 궁중에 닭장을 설치하였다. 이 때문에 장안의 권세가들 중에 투계나 경견의 풍조가 성행하였다. 이백은 조정의 소인배들을 시정에서 투계나 하는 잡배들에 비유하였다. 賭梨栗: 배나 밤 같은 과일을 노름돈으로 삼다.
14) 彈劍作歌奏苦聲(탄검작가주고성): 彈劍作歌: 풍환(馮驩)의 일을 인용하였다. 전국시대 때의 유명한 책사 풍훤은 齊나라 孟嘗君의 식객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맹상군의 푸대접을 받았다. 그는 세 차례나 칼춤을 추며 “장검아 돌아갈까 보다(長劍歸來乎)”라는 노래를 불렀다.《史記․孟嘗君列傳》에 보인다.
15) 曳裾王門不稱情(예거왕문부칭정): 曳裾王門: 옷자락을 끌며 권세가들의 집을 드나들다.
16) 淮陰市井笑韓信(회음시정소한신): 회음 땅에 사는 시정의 백정이 한신을 비웃었다.《史記․淮陰侯列傳》: “회음 땅에서 도축업자 중에 한신을 없신여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네놈은 몸집도 크고 도검을 차고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만 속마음은 겁쟁이일 뿐이야!’라고 말하였다. 여러 명이 그를 모욕하며 말하였다. ‘이봐, 한신! 죽고 싶거든 나를 칼로 찔러라!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라!’ 그래서 한신은 그를 한참 쳐다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나왔다. 온 저자의 사람들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淮陰屠中少年有侮信者, 曰: ‘若雖長大, 好帶刀劍, 中情怯耳.’ 衆辱之曰: ‘信能死, 刺我; 不能死, 出我胯下.’ 於是信孰視之, 俯出胯下, 蒲伏. 一市人皆笑信, 以爲怯.)”
17) 漢朝公卿忌賈生(한조공경기가생): 賈誼는 조정에서 漢 文帝의 눈에 들었지만 후에 세도가들의 시기를 받아 배척을 당한다.《史記․屈原賈生列傳》에 자세하다.
18) 昔時燕家重郭隗(석시연가중곽외): 전국시대 때 燕나라 昭王은 齊에 복수하고자 어진 선비들을 불러모으면서 곽외에게 계책을 물었다. 곽외가 말하기를 “현자들을 모으시고 싶다면 먼저 소신에게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소신을 현자로 중시하신다면 소신보다 현명한 인재들이 대왕을 찾아 몰려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왕은 그를 위해 궁실을 짓고는 ‘金臺’라 하고 堂號를 “尊賢堂”이라 하였다. 그리고 곽외를 스승으로 존중하였다. 그러자 樂毅․鄒衍․劇辛 및 유수의 재사들이 연나라로 몰려들었고, 연나라는 곧 강성해지기 시작하였다.《戰國策․燕策》에 자세하다.
19) 擁篲折節無嫌猜(옹수절절무혐시): 《史記․孟子荀卿列傳》: 鄒衍(추연)이 “연나라에 가니 소왕이 빗자루를 잡고 앞에서 인도하였다.(如燕, 昭王擁篲先驅.)” 折節: 팔다리를 굽히다. 즉 몸을 굽혀 경의를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無嫌猜: 피차가 신임한다는 뜻이다.
20) 劇辛、樂毅感恩分(극신、악의감은분): 劇辛: 전국시대 趙나라 사람으로 연나라에 귀의하여 책사가 되었다. 樂毅: 전국시대 때 魏나라 사람이었는데, 연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연왕이 그를 예로 대해주자 연왕에 귀의하여 신하가 되었다. 소왕은 그를 上將軍으로 삼아 齊나라를 정벌하여 70여 성을 함락시켰다.《사기․악의열전》에 자세하다. 주18 참조. 恩分: 은혜, 정리, 인정.
21) 輸肝剖膽效英才(수간부담효영재): 輸肝剖膽: 간을 갈라내고 쓸개를 보여준다는 ‘披肝瀝膽’과 같은데,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效英才: 뛰어난 재능과 지혜로 있는 힘을 다 바친다라는 뜻이다.
22) 誰人更掃黃金臺(수인경소황금대): 黃金臺: 李善 注 鮑照《放歌行》引《上谷郡圖經》에 “황금대는 역수의 동남쪽 18리 쯤 되는 곳에 있었는데, 연 소왕은 천금을 누대 위에 두고서 천하의 인재들을 끌어들였다.(黃金臺, 易水東南十八里, 燕昭王置千金於臺上, 以延天下之士.)”(李善注《文選》권18)
23) 有耳莫洗潁川水(유이막세영천수): 堯임금 때 은자 許由가 요임금이 자신에게 나와 벼슬을 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바로 潁水(지금의 河南省 동부 및 安徽省 서북부)가로 달려가 귀를 씻어 고결함을 나타내었다. 晉 황보밀(皇甫謐)《高士傳》권상: “요가 천하를 허유에게 선양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중악 영수의 남쪽 기산 아래에 숨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요가 또 구주의 장으로 부르자 허유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영천 가에서 귀를 씻었다.(堯讓天下於許由, ……由於是遁耕於中嶽潁水之陽, 箕山之下. ……堯又召爲九州長, 由不欲聞之, 洗耳於潁川濱.)” 潁水: 지금의 하남 登封縣 경내에 있다.
24) 有口莫食首陽蕨(유구막식수양궐): 商末 孤竹國 임금의 아들 伯夷와 叔齊는 상나라가 망한 후 周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며 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죽었다.《史記․伯夷列傳》: “무왕이 은의 혼란을 평정하자 천하는 주를 종주로 삼았다. 하지만 벡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러워하여 의롭게도 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어먹다 굶어 죽었다.(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叔齊耻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 及餓且死.)” 蕨: 고사리의 일종.
25) 含光混世貴無名(함광혼세귀무명): 含光混世: 재주를 드러내지 말고 시세나 세속에 따라 적당한 행동을 취하라는 의미이다.《高士傳》권상에 허유가 요의 말을 듣고 친구 巢父(소보)에게 달려가 알리자 소보가 그를 비평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모습과 재주를 숨기지 않았는가?(如何不隱汝形, 藏汝光?)”라고 하였다. 이 구는 다음의 한 구와 더불어 앞의 두 구에서 말한 허유와 백이숙제를 비판한 것이다.
26) 子胥旣棄吳江上(자서기기오강상): 子胥: 춘추시대 때 吳나라의 대신 伍員으로 字가 子胥이다. 정치적 주장이 오왕 夫差와 맞지 않은 데다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부차가 격노하여 검을 내려 자살하도록 하였다. 죽은 후에 그 시신은 가죽부대에 담겨 강물에 던져졌다.《吳越春秋》권5《夫差內傳》: “오왕은 오자서의 원한을 듣고는 바로 사람을 시켜 촉루검을 내렸다. 오자서는 ……마침내 자결하였다. 오왕은 즉시 오자서의 시신을 가져다 술을 담는 가죽부대에 담아 강물에 던져버렸다.(吳王聞子胥之怨恨也, 乃使人賜屬鏤之劍, 子胥……遂伏劍而死. 吳王乃取子胥尸, 盛以鴟夷之器, 投之於江中.)”《國語․吳語》에도 보인다. 旣: 얼마 안 있어, 그 후에.
27) 屈原終投湘水濱(굴원종투상수빈): 屈原은 전국시대 때 楚나라의 大夫였는데, 만년에 강남으로 쫓겨났다. 湘水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리다 결국 돌을 안고 汨羅江(멱라강)에 투신자살하였다.《史記․屈原賈生列傳》에 자세하다.
28) 陸機雄才豈自保(육기웅재개자보): 西晉시대 때의 문학가 육기는 將軍․河北大都督에 임명되었는데, 후에 참소를 받아 군중에서 成都王 司馬穎에 의해 처형되었다. 처형되기 전에 “화정의 학 울음소리 다시 들을 날 있을까?(華亭鶴唳, 豈可復聞乎?)”라고 읊조렸다고 한다.《晉書․陸機傳》에 자세하다. 豈: ‘幷不’나 ‘幷非’의 뜻으로 결코 …하지 않다, 결코 …이 아니다.
29) 李斯稅駕苦不早(이사세가고부조): 李斯는 전국시대 秦의 謀臣이었는데, 진이 중국을 통일 한 후에 丞相이 되었다. 秦始皇 사후에 환관 趙高에 의해 모반죄의 모함을 뒤집어쓰고 咸陽에서 腰斬되었다. 稅駕: 휴식하다, 쉬다. 여기서는 ‘물러나다’의 의미로 쓰였다. 苦: 애통하다는 의미의 ‘悲哀’나 ‘凄楚’와 통한다.
30) 華亭鶴唳詎可聞(화정학려거가문): 주28 참고.
31) 上蔡蒼鷹何足道(상채창응하족도): 李斯는 上蔡(지금의 하남성 상채현 서쪽) 사람이다. 그래서 자칭 “상채의 평민(上蔡布衣)”이라고 하였다. 이사는 젊었을 때 고향에서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을 했었다.《太平御覽》권926: “《사기》에 이르기를 ‘이사가 형에 처해지기 전에 누런 개를 이끌고 새매를 팔에 앉히고서 상채문을 나서 사냥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史記》曰: 李斯臨刑, 思牽黃犬, 臂蒼鷹, 出上蔡門, 不可得矣!)” 현존하는《史記》에는 “臂蒼鷹”이라는 세 긎ㄹ자가 없다. 何足道: 표면적인 뜻은 ‘어찌 말하기 족할까’ 즉 ‘말할 만한 가치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그런 날이 다시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로 새겼다.
32) 吳中張翰稱達生(오중장한칭달생): 張翰은 西晉 때 吳(지금의 江蘇省 蘇州市)땅 사람으로 齊王 司馬冏(사마경)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大司馬東曹掾에 임명되었다. 후에 가울 바람 일 때 오땅의 菰菜(부추)․蒓羹(순채국)과 鱸魚(농어)회의 맛이 생각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안 있어 제왕이 패하게 되지만 그는 화를 면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송했는데, 그는 얽매이지 않는 삶을 즐기며 “내가 죽은 후 나는 명성이야, 지금의 한 잔 술만도 못하지.(使我有身後名, 不如卽時一杯酒.)”《晉書․張翰傳》에 자세하다. 이하 세 구 역시 장한의 일생을 빌어 이백 자신도 그리할 것이라는 달관의 태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達生: ‘사리에 통달하다’, ‘세상사의 구속을 받지 않다’.
33) 且樂生前一杯酒(차낙생전일배주): 且: 잠시, 우선.
34) 何須身後千載名(하수신후천재명): 何須: ‘何必’과 같다. 구태여 …할 필요가 있는가,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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