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1)
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전송하며
故人西辭黃鶴樓2), 옛 친구가 서편의 황학루에서 나와 작별하고,
烟花三月下揚州3). 꽃이 만발하는 삼월에 양주 땅으로 내려가네.
孤帆遠影碧盡4), 외로운 돛단배 멀리 허공에 비치다 사라지니,
惟見長江天際流5). 보이는 건 하늘가로 흐르는 장강의 물뿐이네.
1)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이 絶句의 送別詩는 대략 開元 20년(732)전후인 32살 즈음에 쓴 것으로, 이백이 鄂州(지금의 武昌)의 황학루에서 장강의 동쪽을 따라 廣陵(지금의 揚州)로 내려가는 시인 맹호연을 전송하며 지은 것이다. 이백이 맹호연과 교유한 것은 그가 막 四川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야말로 젊고 패기가 넘칠 때였다. 이백보다 10여 세가 많은 맹호연은 이때 이미 詩名을 천하에 떨치고 있었다. 之: ‘가다’라는 뜻으로 ‘去’나 ‘往’과 통한다. 广陵: 지금의 江蘇省 揚州를 가리킨다.
2)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故人: 오래 사귄 친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孟浩然을 가리킨다. 西辭: ‘辭’는 ‘고별하다’라는 뜻으로, ‘西辭’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 구는 시인이 황학루에서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것을 읊은 것이다. 黃鶴樓: 옛터는 지금의 湖北 武昌 黃鵠磯에 있는데, 蛇山을 뒤로하고 長江을 굽어보고 있었다고 한다. 湖南의 岳陽樓․江西의 滕王閣과 더불어 “江南三大名樓”로 병칭되었다. 황학루는 삼국시대 오나라 黃武 2年(223)에 군사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하는데, 孫權이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번창시키려는(以武治國而昌)” 포부를 실현하였다(“武昌”이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성을 쌓아 방어를 하고 누대를 세워 관망하도록 하였다. 당대에 이르러 그 군사적 성격은 점차 유명한 명승지로 변화하였다. 역대로 수많은 문인묵객들이 이곳을 유람하며 인구에 회자되는 시편들을 남겼다. 특히 당대의 시인 崔顥가 남긴《황학루》라는 시가 천고의 절창이 되면서 이 누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누대는 1700여 년 동안 건축과 훼손을 거듭하다 마지막으로 淸 光緖 10년(1884)에 화재로 불타 사라졌다.
3) 烟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烟花: 아름다운 봄의 경치를 일컫는다. 下: 물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이 구의 의미는 ‘봄빛으로 눈부신 3월에 오랜 친구가 배를 타고 곧장 양주로 간다’이다.
4) 孤帆遠影碧盡(고범원영벽진): 孤帆: 외롭게 홀로 가는 돛단배. 碧空: 쾌청한 하늘. 盡: 시야에서 사라지다. 이 구는 홀로 떠가는 돛단배가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 흡사 쾌청한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는 의미이다.
5) 惟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唯: 단지, 다만, ~만, ~뿐. 天際: 하늘 가. 이 구는 도도한 장강의 물길이 하늘가로 흘러가는 것만 보인다는 의미이다.